지난 전시

2006 한·몽 현대미술교류전 - 땅. 길. 선

전시명: 2006 한·몽 현대미술교류전 - 땅. 길. 선

전시기간: 2006.10.21 - 2006.11.19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주최·주관: 모란미술관

후  원: 국무총리실 복권기금 위원회, 한국박물관협회, 몽골작가연맹, 남양주시

참여작가: 원인종, 김종구, 정재철, 신현중, 김근배, 안재홍, 김세일, 치메도르츠(Sh.Chimeddorj), 사롱사츠랄트(Ser.Sarantsatsralt), 엥흐자칼(Ts.Enkhjargal), 바트뭉크(Da.Batmunkh), 엥흐테반(O.Enkhtaivan), 후렐바타르(Ch.Khurebaatar)

전시내용:


몽골미술 -유목과 정착 그리고 새로운 도전


윤범모 (미술평론가)

  붉은 영웅이라는 뜻의 울란바타르, 바로 초원의 국가 몽골의 수도이다. 이 도시의 중심부에 수흐바타르 광장이 있다. 광장 한 가운데는 수흐바타르의 동상이 있다. 그는 지난 1921년 이 광장에서 중국으로부터 몽골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암살당한 혁명의 영웅. 몽골은 이내 소비에트의 사회주의로 합세한다. 그러니까 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사회주의 국가 된 것이다. 이 광장의 북쪽 끝자락에 거대한 규모의 공사가 진행중이다. 바로 몽골의 상징적 인물인 칭기스칸의 동상을 세우기 위한 공사이다. 그동안 사회주의 몽골에서 칭기스칸은 금기의 인물이었다. 뭐라고?몽골에서 칭기스칸을 삭제하면 무엇을 건지겠다고? 밀레니엄을 맞으며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선정된 칭기스칸을? 칭기스칸은 러시아를 점령, 그의 후예가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랜 왕조를 꾸려왔다. 러시아는 칭기스칸을 금기의 인물로 삼았다. 따라서 지난 사회주의 시기에 몽골에서 칭기스칸은 잠적되었다. 이제 소련도 무너지고 몽골은 자본주의 체제를 선택 새로운 국가로 재출발했다. 민족의 상징인 칭기스칸도 더불어 부활하고 있다. 

  울란바타르의 중심가 광장에 거대한 칭기스칸 동상을 세우는 것도 시대의 변화를 실감하게 한다. 이 동상은 몽골미술협회 볼드 회장의 작품이다. 나는 공사 현장에서 볼드회장의 안내로 이 작품을 살펴보았다. 거대한 건물의 완공을 위한 비게목 사이에서 동상의 외형은 이미 드러나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중앙의 칭기스칸은 5미터가 넘는 대작이고, 칭키스칸의 우측에는 그의 셋째 아들로 두 번째의 칸이 된 오고데이, 그리고 좌측에는 손자(칭키스칸의 막내 아들의 아들)인 쿠빌라이칸의 동상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3인 좌상 앞의 계단 양측에는 부하들로 기마상의 군인상은 완성된 상태였다. 몽골은 과거 세계를 제패했던 칭기스칸의 영광을 꿈꾸고 있다. 작가인 볼드회장에게 나는 질문을 했다. 칭기스칸이라면 생애의 상당부분을 말에서 보냈을텐데 어째서 동상을 기마상으로 하지 않고 의자에 앉은 좌상으로 했는가. 그의 대답, 기마상은 계속 이동중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어 국가의 안정을 염두에 두고 안정된 군왕의 모습으로 형상화했다. 사실 기마상과 좌상을 두고 국회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결국 오늘의 몽골은 안정 즉 좌상의 칭기스칸을 선택했다.

  칭기스칸은 누구인가. 세계의 정복자라는 인물, 정복의 뒤에 각종 문물과 문화를 교류하면서 세계의 지도를 좁게 만든 인물, 그가 바로 칭기스칸이다. 몽골군은 불과 25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로마군이 4백년간 정복한 것보다도 더 많은 곳을 정복했다. 그러니까 칭기스칸은 역사상 어떤 정복자보다 두 배 이상의 땅을 정복한 것이다. 그것은 태평양으로부터 지중해에 이르는 약 2천8백만 내지 3천1백만 제곱킬로미터에 해당한다. 오늘날의 지도에 의하면 ‘칭기스칸의 땅'에 30개의 나라가 분할되어 있으며 이곳에 30억 이상의 인구가 살고 있다. 그런데 이같이 광할한 땅을 정복한 칭기스칸의 몽골 인구는 불과 1백만명 정도로 군인조차 10만명 정도였다. 보통의 대형 집회에 모이는 정도의 병사로 세계를 하나로 묶었다는 사실은 실로 경이적이다. 몽골군은 커다란 러시아와 중국을 만들었고, 인도 그리고 고려까지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칭기스칸은 1227년 여름 탕구트 민족과 전쟁을 치르다가 ‘하늘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의 후손들은 몽골제국을 더욱 확대시켜 러시아, 터키, 페르시아,인도, 등의 나라를 통치하기도 하면서 20세기 초까지 7백년의 역사를 기록했다.([Genghis Khan and The Making the Modern World] by Jack Weatherford 참조)

  칭기스칸은 게르에서 태어나 게르에서 사망했다. 그는 철저하게 유목민의 후예였다. 그러니까 몽골의 전통적 생활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대정복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호화스런 궁정에서 최후를 맞이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가족과 부하들의 애도 속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이는 역사상의 대정복자였던 알렉산드로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나폴레옹의 최후와 비교되는 부분이기도하다. 특히 칭기스칸은 자신의 모습을 담은 조각상이나 초상화 한 점 허락하지 않았다. 그 흔한 기념비나 묘비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그의 무덤은 봉분조차 없이 평범한 들판으로 만들었고, 그 장소조차 대금구(大禁區)로 묶어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했다. 8백년 가량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 우리가 그의 무덤을 확실히 모르는 원인이기도 하다. 게다가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20세기의 중반은 칭기스칸 자체가 금기인물로 묶이는 바람에 몽골 사람에게 칭기스칸의 이미지는 공식적으로 부재했다. 그러던 것이 새로운 몽골국의 건설 이래 칭기스칸은 몽골에서 부활하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수도 울란바타르의 중심부 광장에 몽골민족의 상직적 존재인 칭기스칸의 대형 동상이 조성되고 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상은 바뀌고 있다. 더불어 몽골의 미술도 바뀌고 있다.

  

몽골미술의 역사적 전개

  중앙아시아의 대초원에서 전개된 몽골의 역사, 거기에는 유목민족의 문화가 주류를 이룬다. 유목의 특징은 한군데에 정착하지 않는다는 의미처럼 몽골의 미술작품은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 않다. 특히 사회주의 시절 처절할 정도로 문화 예술의 파괴를 겪었기 때문에 세계를 제패했던 민족의 위상과 달리 유존 미술작품은 풍요롭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의 미술 역사는 다채로웠고 그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왔다. 몽골미술은 대략 다섯 가지로 분류되고 있는 바, (1) 고대미술, (2) 초원제국 미술, (3) 몽골제국 미술, (4) 불교미술, (5) 몽골 근대미술이 그 내역이다.(〈Art of Mongolian Nomads> by Tsultem Uranchimeg 참조)

  (1) 고대미술= 이시기의 주요 내용은 바위그림이다. 이는 바위에 새긴 선각화와 붓으로 그린 채색화로 대별된다. 이들 암벽화는 고대 몽골인들의 세계관을, 특히 유목민으로서의 생활상을 반영한다. 때문에 암벽화의 주요 소재는 동물이며 그 가운데는 현존하지 않는 동물들도 포함되어 있다. 수렵장면 등에서 다양한 상징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유목미술의 주류를 이루면서 스키타이 등 주변과도 맥락을 함께한다. 호이트 첸헤르(Khoit- Tsenkher) 동굴벽화는 주목의 대상이다.

  (2) 초원미술= 기원전 3세기에 몽골 최초의 초원제국이 건설되었다. 훈족 또는 흉노족으로 불리는 이들은 기원후 1세기까지 존속했다. 훈족미술은 동물주제로 청동기시대까지 이어졌으며 그들은 헝겊을 꿰매 세련된 무늬의 아프리케를 만들었다. 돌궐제국시대에 만든 석인(石人)은 몽골 전지역에 펼쳐져 있으며 이는 무명의 병사를 의미하는 듯 기념비적으로 장대하게 서있다. 이 사이 실크로드가 개척되고 문자를 사용하면서 다양한 조형활동이 이루어졌다.

  (3) 몽골제국미술= 1206년 테무진(Temuujin)이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칸으로 등극 칭기스칸이 되었다. 몽골제국의 수도 카라코럼을 중심으로 불교사원이나 이슬람 모스크 등 갖가지의 건축물을 비롯 다양한 미술활동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중세 몽골의 미술은 불교미술에서 화려한 꽃을 피웠다.

  (4) 불교미술= 실크로드의 산물로서 몽골에서의 불교는 16세기에 화려한 꽃을 피운다. 알탄 칸(Altan Khaan)은 라마교로 개종한 후 불교를 몽골의 국교로 삼았다.

  그는 1557년 티베트의 고승 소드놈잠쵸(Sodnomjamtso)에게 달라이 라마의 칭호를 받았다. 1586년 몽골에서 최초의 라마교 사원이 건립되었는 바, 그것은 티베트와 중국의 건축양식을 띤 것이었다. 이어 20세기의 소비에트 바람이 불기 이전까지 몽골에서의 불교는 계속 흥성했고 더불어 불교미술도 괄목할 만한 발전상을 보였다. 몽골 중세의 걸출한 미술가는 자나바자르(Zanabazar, 1635-1723)이다. 그는 10대에 티베트로 유학, 몽골 최초의 활불(活佛) 혹은 보그드 제브전담바(Bogd Jebzundamba)의 환생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는 몽골인의 추앙을 받는 정치적 혹은 종교적 최고의 지도자였다. 다재다능한 그는 소욤보(soyombo)라는 문자를 만들었고, 러시아 문자를 채택한 오늘날 그의 글자 디자인은 국가의 상징으로 몽골 국기에 사용되고 있다. 자나바자르의 미술사상의 업적은 불교미술학교를 건립하고 또 스스로 불상이나 불화 같은 다수의 작품을 제작했다는 점이다. 그가 제작한 불상은 세련된 비례와 균형과 조화로서 탁월한 수준을 보여준다. 활불이 어떻게 일반 예술가처럼 수준 높은 불상을 제작할 수 있었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이다. 자나바자르는 몽골 미술을 한 차원 끌어 올렸을 정도로 몽골 미술에서 획기적인 분수령을 그은 주인공이다. 몽골 여행시 그의 이름을 딴 미술관에서 그의 불상 작품을 친견할 수 있음은 커다란 안복(眼福)이기도 하다.

  (5) 근대미술= 울란바타르는 19세기 몽골미술의 거점도시이다. 아무래도 이 시기의 대표작은 탕카(tangka)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탕카는 티베트 불화의 한 특징으로 전래되는 일종의 걸개그림이다. 엄격한 도상학과 치밀한 묘사 그리고 심오한 교리를 바탕으로 한 불교회화의 한 정수이기도 하다. 탕카는 예배의 대상이기 때문에 화가는 작품에 서명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오늘날 특이한 예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작가명을 알 수 없다. 몽골의 탕카는 아프리케로 제작된 것이 많으며 티베트의 경우와 같이 커다란 규모의 작품은 보기 어렵다. 아프리케 불화형식은 몽골회화의 독특한 영역으로 발전했다.

  근대기를 대표하는 작가는 샤라브(Sharav)이다. 그는 수도승으로 유모어 감각과 일상적 풍경의 묘사로 주목할 만한 작품을 남겼다. 풍속화에의 새로운 주목으로 그의 〈몽골의 하루〉와 같은 그림은 흥미롭다. 그는 판화공방을 마련하여 포스터와 판화 작업을 하기도 했다. 20세기의 미술은 새로운 사회 환경에 의거, 완전히 색다른 면모를 전개시켰다. 사회주의 사회는 젊은 화가들을 러시아로 유학하게 했고, 그들이 귀국하는 1950년대 이후부터 유럽미술을 기반으로 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몽골현대미술의 현황

  오늘의 몽골미술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을까. 몽골(현대)미술사 등 관련 도서가 부재한 형편에서 어느 정도 위험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몽골 국내외에서 최초로 개최된 것이라던 몽골근대회화전 도록(2002년 일본 순회 전시)을 참고하고자 한다.(〈The Development of Modern Mongolian Art) by Yuko Yamaki)

  1924년 몽골인민공화국으로 독립을 한 이래 몽골은 소비에트연방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국가로 70년의 세월을 보냈다. 사유재산의 부인과 일당 독재는 스탈린주의에 의한 어둠의 시대이기도 했다. 사원이 파괴되면서 미술품도 파괴되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회주의 시대의 미술은 인민혁명당에 의해 승인된 유일한 양식 즉 아카데미즘의 세계였다. 불교미술의 빈 자리에 소비에트를 창구로 한 서양회화가 차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1930년 울란바타르에서 소련 미술가의 전시가 개최되었고, 1939년에는 야간 미술학교가 개설되기도 했다. 몽골은 유화라는 새로운 매재로 서구식의 회화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림의 내용은 단조로웠고, 표현형식도 역시 단조로웠다.

  1968년 일군의 젊은 작가들은 대중 상대로 추상미술 작품을 발표했다. 하지만 전시장은 인민혁명당의 요구로 이내 폐쇄되는 탄압을 경험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몽골미술가협회의 지도자들은 당에 소환되어 ‘자본주의 미술’을 전시한 배경에 대하여 문초를 당해야 했다. 예술가의 자유스러운 표현과 작가활동은 제한을 받던 시절의 일화이다. 1970년대에는 소련 이외 동독이나 체코슬로바키아 같은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에서 유학하고 귀국하는 미술가들이 늘기 시작했다. 그만큼 표현형식의 다양화를 추구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1980년대에 몽골의 근대화가 진전되면서 미술활동에도 새로운 활력이 솟기 시작했다. 1989-90년 그룹 ‘푸른 말'은 기왕의 아카데미즘을 거부하고 '현대미술'을 선언했다. 그들은 사실적인 묘사에 의한 유미주의적 경향을 거부한 것이다.

  1988년부터 몽골에서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고, 1990년 복수정당제가 도입되었다. 1991년말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되고 다음 해 몽골은 신헌법을 성립 신생 몽골국으로 재탄생했다. 사회주의 70년의 쇄국정책은 무너지고 시장경제와 자유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동안 활동 정지상태에 묶였던 불교사원은 부흥하기 시작했고 역시 불교미술도 새롭게 꽃피기 시작했다. 더불어 몽골 민족의 영웅이면서 금기인물이었던 칭기스칸의 예찬이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몽골은 완전히 새로운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하지만 소련 붕괴에 따른 몽골 경제의 악화는 여지껏 국가가 우수작품을 매입하던 사회주의적 제도도 무너지게 했다. 경제난은 미술가에게 작품 재료의 공급에서부터 발표의 기회에 이르기까지 곤궁 속에서 헤매게 했다. 하지만 몽골작가들은 비록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다 해도 창작의 자유라는 커다란 선물을 얻은 셈이다. 현재 몽골은 자본주의 체제로 급속하게 편입하는 중이다.

  오늘의 몽골미술은 네 가지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전통적 몽골화, 아카데미즘 묘사의 회화, 모던 아트, 현대미술(퍼포먼스, 설치미술 포함) 등이다. 오늘의 몽골 작가는 작품의 제작, 전시, 판매 등에서 자유롭게 활동을 한다. 이렇듯 새로운 시대는 유목민 미술의 내안풍경에 점진적 변화를 유도하고 있다. 

  몽골의 2006년은 몽골국가 8백주년의 해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몽골미술가협회는 〈Great Mongolia〉라는 미술전을 마련했다. 그렇지 않아도 협회는 매년 대규모의 전시를 개최해 왔다. 이들 전시의 도록을 통하여, 그리고 미술관의 진열품을 통하여, 나는 오늘의 몽골미술을 보고 하나의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었다. 우선 몽골의 근현대 회화는 유화 중심이라는 점이다. 중국과 이웃해 있으면서도 중국식의 수묵화나 채색화를 보기 어렵다는 점은 참으로 특이할 정도이다. 유화의 경우도 대부분이 아카데미즘 형식의 사실적 묘사에 의한 풍경화와 유목생활의 풍속화이다. 이들 풍경을 통하여 목가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마치 일제 강점 아래 조선에서 유행했던 향토색론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농촌의 피폐했던 현실은 외면하고 농촌을 다만 낭만적 그리고 목가적으로만 표현하려고 한 당시의 분위기 말이다. 소비에트 유학 출신이 많은 몽골에서 오히려 레핀 식의 치열한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조차 보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자본주의식의 추상미술이 자리를 잡은 것도 아니다. 오늘의 몽골미술은 한마디로 과도기의 성향을 보이고 있는 듯하다. 무엇보다 작품이 지극히 단조로웠다. 인간 내면을 지향하건,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건, 보다 치열한 접근과 그것의 다양한 표현방식의 결여가 아쉽게하는 부분이다. 몽골의 현대미술은 이제 형성기를 이룩하고 있는 중이다.   

  울란바타르의 미술관으로 자나바자르미술관과 몽골국립근대미술관을 들 수 있다. 앞의 것은 1966년 개관, 고대부터 20세기 초까지의 미술품을 진열하고 있다. 개관 당시의 소장품은 약 3백점으로 시작했지만 현재는 1만2천점이 넘는다. 소장품 가운데 10%정도만 전시하고 있다. 이 미술관은 몽골 중요문화재 139점 가운데 42점을 소장하고 있다. 1995년 자나바자르 탄생 360주년을 기념하여 국립미술관에서 자나바자르미술관으로 개칭했다. 실제로 자나바자르의 뛰어난 불상작품을 이곳에 관람할 수 있기도 하다. 몽골국립근대미술관은 1989년 개관하여 4천점 이상의 몽골 근대미술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이 미술관에서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몽골 작품을 체계적으로 관람할 수 있다. 울란바타르에서 특기사항은 바로 몽골미술가협회이다(UMA, Union of Mongolian Artists). 1942년에 설립된 이 협회는 몽골 최대의 비영리 미술가 단체이다. 각 장르에 걸쳐 현재의 회원은 6백 명 가량이다. 이 협회는 울란바타르 중심가에 거대한 빌딩을 소유, 임대수입이 적지 않으며, 자체내 전시장도 가지고 있다. 여기서 갖가지의 전시회를 개최하고 매년 회원전도 개최한다. 특히 이 협회는 별도의 아파트 식의 아틀리에 빌딩을 운영하고 있다. 50명의 작가가 무상으로 작업실을 배정 받아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필자가 이 빌딩을 방문하여 몇몇 작가와 대담을 나눈 바, 그들의 창작에의 열정은 주목할 만 했다. 생각보다 시야가 넓었으며 가까운 시기에 비중 있는 작품들을 생산하리라는 예감을 갖게 했다. 현재 UMA의 볼드회장은 모스크바 유학생 출신으로 조소작가이다. 

  한 가지 더 첨언할 내용이 있다. 바로 몽골불교미술대학이다. 이 대학은 몽골 최대의 사원인 간단사의 경내에 있다. 학장은 라마 프레바트이다. 그는 인도 유학 이후 귀국하여 대학을 설립하고 후진 양성과 더불어 불화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나는 프레바트학장과 대담하는 자리를 통하여 몽골 불교미술의 현황에 대하여 살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현재 그의 프로젝트는 불교미술대학의 확장 이전공사이고, [대몽골 전통미술전집]의 간행이다. 불화의 경우 티베트 형식을 기초로 하여 몽골의 민족양식을 가미하는 것, 그리고 무너졌던 전통불화를 체계적으로 계승하고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려는 목적이 뚜렷이 보였다. 불교미술대학의 부학장은 홍대 출신인 김선정씨이다. 그는 라마 프레바트와 함께 몽골 불교미술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탄압의 악몽을 딛고 이제 몽골의 불교미술도 회복하고 있는 중이다.

   

유목 그리고 땅과 길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돌궐족의 명장 톤유쿠크의 비문)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이동의 역사이다. 노마드, 이는 인간의 본래 진면목이다.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에 의하면, '코르고다크’라는 몽골어의 동사는 ‘계속해서 한 장소에 거주하다'라는 뜻으로, 몽골인들이 가장 경멸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란다. 역시 유목민의 후예다운 표현이다. 오늘도 자의에서건, 타의에서건 자리를 옮기는 사람이 많다. 오늘날에도 5억 명 이상은 일이나 정치와 관련된 노마드이다. 60억의 인구 가운데 3억은 아직도 원시부족에 해당한다. 수 천만 명이 노마드이다. 이들 가운데 5분의 4 이상이 빈곤층이다. 아직도 매년 9천만 명 이상이 새로운 곳에 가 있고, 약 1천만 명은 자기 나라를 떠나고 있다. 50년 후면 10억 명 이상이 조국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 노마드는 끝나지 않고 있다. 성경에 표현된 최초의 인간관계는 유목과 정착의 대립이다. 최초의 아이들 즉 카인과 아벨 형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아벨은 양들에게 풀을 먹이고, 카인은 땅을 경작했다. 바로 노마드와 정착민의 관계이다. 아벨은 목자이고 카인은 농부였다. 신은 목자의 제물을 받아들이고 농부의 제물은 거부했다. 카인은 아벨을 죽인다. 이 대목에서 자크 아탈리는 이렇게 결론을 낸다. “인간의 역사는 이 비극적인 서곡을 잊게 된다. 정착민이 쓴 인간의 역사는 노마드, 특히 신을 발견하고 유랑생활을 하여 박해당한 소수민족을 비방하는 데 주력하게 된다. 그리고 그 민족의 아들들중 하나이자 빛의 노마드인 랍비 여호수아를." ([호모 노마드-유목하는 인간] 참조)

  이번 모란미술관 주최 한/몽골 현대미술 교류전은 시사하는바 적지 않다. 모란미술관은 이미 2002년에 〈유목민의 서사시〉라는 몽골미술 전시를 개최한 바 있다. 이번 전시의 소주제는 땅, 길, 선(線)이다. 땅은 유목과 정착을 수용하면서 길을 만들게 한다. 길은 바로 선이다. 언젠가 서울에서 도시는 선이다. 라는 표어가 유행했던 적이 있다. 선은 도시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유목의 초원에서도 선은 살아날있다. 땅이 있으면 길이 생기고 그것은 또 선이기도 하다. 하기야 세월은 변해 몽골에서도 점차 유목 대신 정착민의 숫자가 느는 추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목과 정착이라는 의미는 새롭다. 이번 전시는 몽골의 화가와 한국의 조소작가의 결합으로 땅과 길의 의미를 재확인하는 마당이 될 것이다. 바로 유목과 정착 문화의 비교를 한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는 행사이기도 하다. 한국과 몽골은 근대기를 맞이하면서 굴곡과 어둠의 세월을 체험한 바 있다. 오늘의 양국은 매우 활발한 교류를 시도하고 있다. 울란바타르에서 사업을 하는 한국인만 해도 2-3천명을 헤아리게 하고 한국에서 활동하는 몽골인만 해도 3만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몽골은 바뀌고 있는 중이다. 짧은 기간동안 벌써 이렇듯 양국의 인적 교류는 활성화되어 있다.

  애초 몽골리안으로, 몽골반점을 공유하지만, 두 나라의 역사는 한때 격리의 역사로 남게도 했다. 하지만 유목의 역사는 고여 있지만 않는다. 유목은 초원에 펼쳐지는 생동감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노마드는 초원 위에서만 성립되지 않는다. 노마드 정신은 영원한 고향을 희구하는 인간의 한 표상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새로운 미술과 문화가 꽃을 피우기도 한다.



*참고문헌

[Mongolia: Museum Highlights], Cultural Preservation for Mongolia, Ulaanbaatar-San Francisco, 2005

N. Tsultem, [Development of the Mongolian National Style Painting 'Mongol Zurag' in Briefl. State

Publishing House, Ulan-Bator, 1986

[Undur Geghen Zanabazar], The Mongolian National Commission for UNESCO, 1995

[Treasures of Mongolian Art], 'Asian Art' Antique Gallery, Ulaanbaatar, 2005

[Green Horse], Mongolion Green Horse Modern Art Society, 2002

[The Best Artworks 2005], Union of Mongolian Artists, 2005

[Great Mongolia -Exhibition of the Artworks of Fine Art], Union of Mongolian Artists, 2006

[Modern Paintings of Mongolia : Its Origin up to Today], Fukuoka Asian Art Museum(etc), 2002

Jack Weatherford, [Genghis Khan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2004

[유목민의 서사시], 모란미술관,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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