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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전시

모란을 거쳐 간 사람들

전시명: 모란을 거쳐 간 사람들

전시기간: 2005.10.22 - 2005.11.30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김종구, 임영선, 최태훈, 김황록, 성동훈, 이영섭, 이수홍, 이종빈, 이희중, 강용면, 김주현, 양태근, 노주환, 유현미, 이원경

전시내용:


다시 조각의 가치에 대해 묻는다.


최태만 미술평론가, 국민대 교수


  1991년 모란미술관의 큐레이터로서 '한국 형상조각의 모색과 전망'을 기획할 때 가장 주안점을 두었던 것은 예술의 소통이었지만 그것 못지않게 조각은 과연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닌 것이며 그것의 장르적 독자성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었다. 미술관을 둘러싼 환경적 조건,조각미술관으로서의 정체성 확립, 당시 조각의 흐름 등을 고려하며 만든 전시였지만 당시 나는 의욕에 차있었고, 전시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으로 일을 꾸며나갔다. 그리고 15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났다. 이제 나는 보다 겸손한 자세로 젊은 시절 제기했던 질문들이 아직 유효한지에 대해 반성하는 시점에 서 있다. 그때 내가 가졌던 생각이 비단 혼자만의 고민은 아니었으므로 뜻을 같이 했던 작가들을 다시 불러 십오 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작업과 비교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변하기 마련이며 또한 그래야 한다. 부정의 정신은 아방가르드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변증법의 기본이기도 하다. 십오 년 전에 제기했던 질문이 여전히 유효한가하는 자기반성은 단순히 과거를 회고하고 그것에 대한 궁색한 변명의 빌미나 찾으려는 시도는 분명 아니다. 지난 십오 년간 많은 것이 변했다. 그런 만큼 십오 년 전에 뜻을 같이 했던 작가들도 많은 변화를 거쳤다. 그렇다고 그들이 시대의 변화에 마냥 떠밀려가며 수동적으로 변한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떤 점에서 보면 작가들이 더 예민하게 시대와 사회, 예술의 조건, 그리고 자기세계의 변화의 필요성에 대한 깊은 고민을 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나로서는 그러한 극심한 '내부로부터의 혁명'을 거친 작가가 과연 누군지, 그리고 그 결과가 오늘날 어떤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지 밝혀보고 싶은 심정이다.

  당장은 '한국 형상조각의 모색과 전망'에 참여했던 작가 중에서 내가 맡은 세 명의 작가를 찾고 싶었지만 그 생각을 접고 지난 십오 년간 모란미술관에서 작품을 발표한 작가 중에서 자기 내부로부터의 변화를 추구하면서도 조각의 가치를 천착해온 작가를 추천하는 것이 보다 의미가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임영선, 김종구, 최태훈을 선정하였다. 먼저 전형적인 리얼리즘 경향의 인체군상으로 '한국 형상조각의 모색과 전망'에 참여하였던 임영선은 과도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형상의 위력에 호소하는 경향으로부터 인간의 존재, 삶과 죽음, 유전공학의 발달에 따른 변종의 생명체와 그 숙주가 된 인간, 인간의 비극과 몰락,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할 생명의 존엄성,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폭력성 등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며 독특하면서도 드라마틱하지만 나름대로 신념에 찬 작업으로 자기변화를 거듭해 온 작가이다. 어떤 경우 그 신념이 너무 지나쳐 작업이 보는 사람의 심리를 압도하는 측면이 있으나 특유의 저돌성으로 자기세계를 일궈온 그의 작업을 지켜본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임영선의 저돌성과 비교하자면 김종구의 집요함은 거의 편집적이라고 할만하다. 육중한 무쇠덩이를 깎아서 쇳가루를 만드는 과정 자체도 거의 육체의 학대에 가까운 것인데 그 가루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작업 역시 고도의 집중과 숙련을 요구한다. 그런 '무모한 일을 태연하게 진행하면서도 그는 늘 이 시간과의 싸움을 즐긴다. 그러나 노동의 결과로서 작품은 완성의 숨 막히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쇳가루를 이용해 바닥에 표현해 놓은 산수화나 글씨가 카메라와 빔 프로젝트를 통해 벽면에 투사될 때 보이는 영상이 풍부한 농담(談)과 습윤한 분위기를 지닌 한 폭의 산수화로 되살아나는 것도 볼만한 것이지만 쇳가루로 그린 그림이 시간의 누적에 따라 점진적으로 산화부식하면서 만들어내는 풍경 또한 그의 작업만이 가능한 세계임에 분명하다. 조각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조각과 회화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궁극적으로는 조각으로 회귀하는 그의 작업은 전통적인 장르개념에 한정하여 조각의 장르적 정체성을 강조할 때 그 세계가 얼마나 위축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최태훈은 임영선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저돌성과 김종구의 집요함을 다 같이 구비하고 있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두 요소 모두 과잉되면 작업이 억지스러울 수 있겠지만 최태훈에게서 그런 과잉이 의미를 추월하는 혐의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장점이기도 하다. 불로 쇠를 녹이고, 그라인더로 그 표피를 갈아내는 그의 작업 역시 노동에의 헌신이란 특징을 드러내고 있으나 그 과정을 통해 산출되는 결과는 자기완결성을 지닌 물체로서의 '조각' 이다. 임영선이나 김종구의 작업이 작가가 의도했던 그렇지 않던 작품의 의미가 분명한 반면 최태훈에게서 그 의미를 읽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형태 너머에 있는 의미의 해석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고 그의 작업이 무의미를 추구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단지 그것을 포착하고, 해석하는 것은 우리에게 유보되고 있는 것이다. 의미부여의 자유로움이 이해와 오해의 자유까지 허용할 수 있으나 그의 작품 또한 복잡한 상징의 얼개로 조직된 구조물임을 발견하기 위해 더욱 작품에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내가 추천한 세 명의 작가를 포함하여 이 전시에 출품한 작가들에게 나는 십오 년 전에 던졌던 질문을 다시 한번 환기하고자 한다. 과연 우리에게 조각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난 십 오년 동안 모란미술관을 거쳐 간 큐레이터들이 모란미술관과 어떤 방식으로든 인연을 맺었던 작가들을 추천하는 방식으로 개최되는 이 전시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은 바로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전시는 사립미술관으로서 미술관을 운영함에 있어서 견뎌내고 극복해야 할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한국조각은 물론 한국미술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온 모란미술관에서 일했다는 자부심과 함께 그 공헌에 바치는 헌사(詞)이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금 묻는다. 과연 조각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을 말과 문자로 밝혀내는 작업은 나와 나의 동료들에게 부과된 과제이지만 정작 해답의 실마리는 작가들에게 있다. 이제 작가들이 이 질문에 대해 작품으로 증명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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