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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전시

놀이와 莊嚴 첫번째

전시명: 놀이와 莊嚴 첫번째

전시기간: 2005.05.28 - 2005.06.24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고영을, 권여현, 김성곤, 배형경, 서  용, 이성도, 이종구, 이한수, 정정엽, 홍성경

전시내용:


놀이와 장엄 첫번째

한국미술의 힘, 놀이와 장엄


조은정 | 미술평론가. 한남대학교 대학원 겸임교수


  서양화나 서구식 조소의 도입이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졌고, 이후 한국전쟁을 지나며 선진국이라 생각한 다른 나라 미술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해온 것은 사실이다. 근대기, 일본을 통하여 유입된 서구미술은 배워야 하는 대상이었으며, 재료극복에서 소재, 주제에 이르기까지 일정 기간 학습이 필요했다. 한국미술이 미국이나 유럽에 소개될 것을 강하게 열망하여 급기야 한국 현대미술을 미국에 소개하기 위하여 내한한 프세티 여사에게 자신의 그림을 소개하기 위해 몰려든 근·현대미술가들의 이야기는 지나간 시대의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 현대 한국미술은 세계 다른 나라 미술과 구분하여 스스로를 타자화하고 그에 따라 규정하거나 평가하지는 않는다. 세계화를 지향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자신감의 회복은 “어떻게 해야 그들과 같아질 것인가"에서 "나는 어떻게 다른가”라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수반하였고, 이는 한국 현대미술이 놓인 새로운 위상의 문제이기도 하다. 모란미술관의 기획전 '놀이와 장엄'은 바로 이러한 한국 현대미술의 위상을 파악하는 일종의 시약이다.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예술

  사태충동과 형식충동이 가장 잘 보존되었을 때 발생하는 제3의 충동인 유희본능은 변화와 휴식을 공유한 개념이다. 유희본능으로서 ‘놀이'는 현대미술의 동력원이 된다. 기성세대에 대한 도전, 권위의 탈피를 위한 시도 등 아방가르드적인 요소는 미술을 다채롭게 하며 그 근저에는 놀이 개념이 존재함 또한 부정할 수 없다. 미술에서 놀이가 매우 본능적인 개인 차원의 사태가 아니라 사회적인 코드를 갖는 것은 바로 이러한 놀이의 발흥이 단순한 모방과 유희가 아니라 변화를 요구하는 제3의 충동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 작가들의 놀이적인 요소가 보다 사회적인 성격이 강하게 부각되는 것은 여기에 더하여 인간집단의 공동생활을 통한 경험의 발산이라는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주위를 아름답게 장식하려는 욕구는 문양의 발생 등 미적 형식과 연관되어 인간의 예술의지를 설명하는 배경이 된다. 한편 장식이란 용어와 유사하지만 현대의 일상어로서 '장엄한' 이라는 형용사가 아닌 동사로서 ‘장엄(莊嚴)하다' 라는 용어는 한국미술사에서 포착되는 중요한 미술발전의 동인 중 하나이다. 불교에서 '장엄' 이란 '화려하고 엄숙하게 장식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한국미술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 불교미술이 오늘날 현대미술에서 전통의 한 모습으로 작용하고 있기에 '장엄'의 개념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름답게 장식한다, 아름답게 정돈한다는 뜻을 지닌 산스크리트어의 alamkara, manda 등이 중국에서는 장엄(莊嚴), 장식엄정(淨) 등으로 번역되었다. 경전적인 의미로는 불국토가 아름답고 엄숙하게 있는 것을 뜻하는데, 후에 신자들이 불당이나 불교조각 등을 장식하는 것까지 의미하게 되었다. 또 구체적으로는 부처나 보살이 선행이나 덕성으로 자신을 장식하는 일, 아름다운 물건으로 불상을 장식하는 일, 불국토나 불전을 장식하는 일 등을 일컬어 모두 '장엄하다'고 한다. 하지만 장엄이란 구체적인 방식이나 법칙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으므로, 종교적으로 정신이나 주변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 모두를 ‘장엄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화엄경』에는 부처가 여러 곳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나타내는데, 화엄이란 여러 가지 꽃으로 장식한다는 의미이므로『화엄경』전체의 내용은 차별 없는 온갖 종류의 꽃에 둘러싸인 무한대의 부처를 설한 것이다. 화엄경에 설해진 부처의 세계는 불상, 불화, 사찰건물 등 불교 미술을 구현하는 데 있어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다. 한편 금강경』에서는 현상계의 장엄에 멈추지 말고 청정심으로 정신을 닦아야 한다고 하였다. 즉 장엄불토에는 세간불토, 신불토, 심불토의 세 종류가 있는데 세간불토 장엄은 절을 짓고 경을 쓰고 보시와 공양을 하는 것, 신불토 장엄은 모든 사람을 공경하는 것, 심불토 장엄은 마음을 항상 깨끗이 하여 얻음이 없는 마음을 닦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정신적인 장엄에 장엄의 목표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수행의 목표가 정신적인 장엄에 있다는 것일 뿐, 세간불토나 신불토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현대적 의미에서 '놀이와 장엄'은 예술을 통하여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깨달음의 경지로 해석될 것이다. 마음을 닦는 행위, 주위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 정신적인 고양을 위한 행위 전체가 장엄의 영역에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놀이와 장엄은 동일한 무게이자 또 동전의 양면처럼 궁극적으로는 정신에서 솟아난 의지로서 생을 유지하는 힘이요, 창작의 원천이 된다. 미술을 통해 구현된 장엄의 세계, 그것을 구현하는 놀이의 마음이 이 전시의 주제인 것이다.


상징과 은유의 꽃

  이번 '놀이와 장엄' 그 첫 번째 전시에 초대된 작가들은 10인 모두 서로 아무런 관련없이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한 이들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세계를 관통하는 주요한 개념은 '개인적인 놀이를 통한 사회적 의식의 장엄' 이다.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 작가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현대미술의 어떤 층위로 복구시켜 분류하자면 전통에 대한 탐구, 인간 문화의 반성, 생명성에 대한 경외 등으로 세분화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인간이 생산한 문화에 대한 관심이라는 공통분모는 작가들이 발을 담군 '사회'에 비판의식을 보여주게 한다. 그리고 상징과 비유로 가득한 경전처럼 그 구조는 수십 겹의 층위를 지니지만 결국 진리라는 하나의 의지처로 회귀됨을 볼 수 있다.

  전통불화가로서 조선시대 불화의 맥을 잇는 구봉스님에게서 초를 내는 법에 이르기까지 이수자 과정을 밟은 고영을은 전통불화가로서 이름나 있다. 사찰에 봉안하는 예배용 불화는 도상을 따르되 과감히 현대적 해석을 가하여 이전에 보지 못한 불화를 창안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시왕도에 열 명의 왕과 그 권속뿐만 아니라 경전의 내용에 따른 지옥을 구체적으로 그려넣어 불교에 익숙하지 않은 현대인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소통이 되는 불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불화 전통의 계승자이자 현대 화가라는 작가의 정체성, 민중미술과 예배미술을 고루 섭렵한 이력, 지방에 거주하는 여성작가, 서양화를 공부한 불화가라는 점 등 그의 사회적 위치에서 간취되는 것은 '경계성' 이다. 그의 작품세계가 때로는 낯설게 보이는 것도 아마 이 경계성에서 발현된 것일 것이다. 하지만 미술가로서 사회에 대한 책무를 잊어버리지 않는 듯이 보이는 그의 태도는 최근 독도를 탐구하게 하였다. 아미타내영의 배경이 독도라는 점이나 검은 비단 바탕에 아름다운 금물로 그려진 독도는 도상에 꽉 매인 듯이 여겼던 불화란 것이 실은 일상사의 한 형식에 지나지 않음을 증명하여 주는 듯하다. 자신의 삶의 여정을 화폭에 남김으로써 이 작가는 놀이와 장엄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 것이다.

  서용의 변상도, 정토도, 만다라 등은 사찰 내부에서의 예배를 위하여 걸려진 것이 아닌, 석굴사원 벽면의 장엄을 목적으로 한 벽화에 기초한 것이다. 작가는 고비사막의 모래바람 속에서 만난 돈황벽화의 장엄한 세계에 매료되어 오랜 시간 모사작업을 통해 제작방식, 도상을 습득하였다. 재료와 기법에서 전통을 계승하여 흙과 삼베를 이용하여 충실한 바탕재의 마련, 착색기법에서의 전통 존중 등을 통하여 돈황의 벽화가 제작된 애초의 모습에 더하여 시간의 흔적까지 구현하였다.

  <고비사막의 연가>는 가장 원색적이며 바탕에 붉은색과 에메랄드그린, 황토색과 먹선만 남은 초를 통하여 시간을 거슬러 올라 덧붙여진 온갖 치장을 벗어버린 나신 자체의 진실을 마주 대하게 한다. 돈황에서 만난 벽화가 세월의 흔적을 쓰고 바탕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과 달리 전시장에서 만나는 그의 화면은 소속된 공간을 떠남으로써 보다 근원적인 형태의 진실, 인간과 불성의 세계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화려한 색상과 찬란한 금색으로 치장되었을 그림이 시간을 지나며 온갖 치장을 떨구어버린, 처음 그려지던 애초의 모습에 가까워질수록 진실을 드러내는 경험을 하게 하는 것이다. 각기 다른 시기에 개착되어 조영된 돈황 석굴사원의 특성상 각 굴마다 다른 양식이 존재하게 되었고 모사를 통해 시대 양식과 정신이 다른 점을 익숙히 알고 있는 작가는 불교미술의 외형적인 계승에 머물지 않는다. 익숙한 도상에도 불구하고<산화가>, <공양지덕> 등을 통해서는 전통을 바탕으로 한 현대적인 변용에 작가의 의도가 실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엄청난 신체성이 요구되는 작업 뒤에 노동의 즐거움이, 새로운 도상 창조의 놀이가 스며있다. 시간과 공간의 중압감을 벗어난 화면은 장엄이란 놀이와 다를 바 없는 하나의 개념임을 증명하여 준다. 이성도의 테라코타 기법으로 조형된 소형의 동자, 동녀상은 고전미를 느끼게 한다. 사찰 전각 내부에서 시왕상이나 나한상의 권속으로 위치한 동자상은 대부분 나무로 조각되거나 소조로 만들어진다. 이들은 모두 화려하며 세밀한 채색을 가하여 동자의 사랑스러우면서도 소박한 모습을 강조하여 권속으로서 인간의 전형, 법을 구하는 선재동자의 희구를 표현한 것들이다. 그런데 이성도의 동자상은 전통의 형태를 그대로 차용하여 표현하되 실지 크기보다 작게, 채색을 소거함으로써 일반적인 동자상을 넘어서고 있다. 극소화를 통하여 조각적이기보다는 공예적인 형태감을 일층 강화시켰지만 채색을 제거하여 형태감을 최대화하고 작가의 신체성이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종교미술에서 채색이 소거됨은 장식, 장엄을 떠나는 동시에 극히 개인적인 물성화를 초래하여, 관람자는 이 작은 동자상에 구현된 작가의 신체성에 주목하게 된다. 이러한 감상의 단계에 따라 전통의 형태는 관객의 눈에 의해 현대작가의 작업으로 새로이 창조된다. 매우 도상에 충실한 작품이 오히려 그 형태의 완벽한 재현으로 인해 불성으로부터 독립하여 개인적인 체험의 작업이 되는 것이다.

  또한 미륵리사지의 고려시대 불상을 재해석한 작품은 건축적인 석굴사원 구조 속의 주존불을 부조로 전환하여 본 것이다. 재료의 전환, 형식을 고수하되 다를 수밖에 없는 작가적 양식이 개입됨으로써 시대정신이 드러나는 불교미술의 본질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감정의 개입이 극도로 자제된 형태에서 오히려 강조되는 시대 양식은 바로 현대미술에서 불교미술의 전통적 해석이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때 법고창신의 정신이 실현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전통 불교미술의 도상과 유물을 차용하여 자신의 세계를 심화시킨 이종구의 세계는 불성이 내재한 개체에 대한 조명작업이라 할 수 있다. 백제시대 서산마애불의 좌우협시를 민초의 모습으로 대치시킨 작업은 전통과 현대, 불성의 개념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가시화한 것이다. 시무외 여원인을 한 석가여래입상 좌측에 위치한 미륵반가사유상 대신 어머니는 몸빼 바지를 입고 쭈그려앉아 있고, 웃음 활짝 띤 보주를 두 손에 쥔 보살 대신 두루마기를 깨끗이 차려입은 아버지가 쭈그리고 앉아 있다. 두광배 연화문의 깨진 부분까지 충실하게 모사한 이 작가는 하지만 불상의 대좌부분은 모사하지 않았다. 서산마애불상은 주존불과 좌우협시불 모두가 따로이 연화좌를 밟고 있는데 반해 이종구의 화면에서 대좌는 찾아볼 수 없다. 어쩌면 좌우협시불의 다른 생김새보다도 더욱 도드라진 다른 점이 바로 대좌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화면의 부처는 두 발을 굳건히 땅에 딛고 있고 그 땅은 어머니, 아버지가 밟고 있는 땅과 같은 것이다. 모든 인간의 존엄함을 외치며 등장한 석가모니의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이념이 “우리의 농촌이든 제3세계 현실이든 인간과 존엄과 평등을 향한 나의 작업을 계속 하겠다"는 작가의 소신과 닿아 있음을 알아채게 되는 것이다.

  직접적인 불교의 도상을 차용한 이들 작가들과 달리 이한수는 종교적 도상의 이종교배를 시도하고 있다. <천개의 눈을 가진 선녀>는 천수천안관음보살에 기초한 개념이지만-물론 인도의 힌두신 인드라에서 발원한 것이지만 정작 형태는 도교의 선녀, 기독교의 날개 달린 천사, 통인을 한 여래상이 조합된 형태이다. 눈에 거슬릴 정도의 형광색으로 칠해진 상은 합성이라는 미덕에 변형이라는 결과를 안고 있으며 결국 공상과학적인 다원적인 종교상을 상상케 한다.

  가장 종교적이며 인간친화적인 존재를 합성함으로써 유머와 패러디만이 남아 그 성스러움을 제거한 상태가 되었다. 가장성스러운 존재의 합성물이 변조를 통해 가장 키치적인 상황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어두운 방안에서 비열한 형광색을 띠고 번쩍이는 이 성상은 결국 문화적 다원주의와 혼성화가 정말 정체성 구현에 옳은 일일까라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더불어 가장 장엄하다고 생각한 대상이 일개 놀이에 불과한 유희의 대상으로 전락한 상황에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하며 과연 현대 사회에서 기성의 종교가 갖는 가치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사유하게 되는 것이다.

  종교적인 도상만큼이나 강한 이미지를 갖는 '알려진 그림' 에 개입한 권여현의 작업은 스스로 작품 내부에 참여하는 놀이적인 성격이 강해 보인다. 이전의 분장을 통해 다른 페르소나를 보여준 작업에서조차 그 결과의 진지함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호기심으로 대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역할놀이-정체성 찾기 놀이는 심리적인 환상경인 <루소숲>에서도 지속되고 있다. 장식적이며 기이한 풍경에 삽입된 나체 대신의 착의의 여성과 사자 대신 작가의 옆모습, 그리고 원본에는 없는 뱀과 화면 하단 좌측에 도자기 등을 삽입하여 보다 다양한 사회적 코드를 부여하였다.

  “이 사진 작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사유를 하지만 결국 나 자신은 타인의 시선 속에 완성된다는 것이다. 고로 나는 타인 속에 존재한다.”는 자의식은 경험체의 총산인<깔때기>를 통해 심화되어 왔다. 감각적으로 입력되는 모든 현상을 미술화시키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는 작가의 깔때기는 의식하는 존재에 대한 인식인 동시에 역으로 감각되기 이전의 상황들 또한 자신의 경험이 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진리는 체득해야 하는 것, 모든 의식을 열어놓고 받아들일 때에 진리는 체험될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배형경의 인체는 삶에 대한 성찰을 보여 주어왔다는 점에서 경험의 구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구체적이면서도 구체성을 띠지 않는 인체는 그 자세를 통해 불격을 보여주기도 하였고, 관념이나 추상 또는 구상으로 규정되는 것을 거부한 채 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를 보여주어 왔다. 그간 삶과 죽음의 문제에 천착하였던 작가는 이번에 인체에 부적을 더하여 조형화한 새로운 작업을 선보였다. 작가는 부적의 작업을 인간 현상계의 문제에서 보다 나아가 “정토에의 소망을 구체화하려는 작업으로 규정한다. 현생에 대한 복된 삶을 추구하는 방편이나 치유의 의미를 지닌 부적을 인간 삶에 결부시킴으로써, 단순한 문자가 갖는 주술적 성격이 오히려 인간의 생의 의지를 확인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과 부적을 혼합한 금번의 수직적 형태는 문자적인 추상성과 깊은 색채의 의미, 인간의 왜소함과 여전히 확언할 수 없는 그 불명료한 형태 등이 어우러져 현대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에 대해 또한 자문해보고 있다.

  부적의 붉은색이 갖는 벽사, 소망의 의미는 정정엽의 붉은 팥에서도 결코 퇴색되지 않는 의미망을 형성한다. 화면 한가득 붉은색으로 나타난 곡식은 흰 화면에 뿌려진 곡식 낱 알갱이로 그 하나하나 부피와 배아와 껍질을 지닌 생명체들이다. 하늘에 있는 별만큼이나 많을 것 같은 팥알갱이 하나하나를 그려내는 작가의 시선은 항아사 만큼이나 많은 존재, 겨자씨만큼 작지만 생명을 지닌 존재에 대한 불경의 비유를 떠올리게 한다. 정말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에도 생명은 있고 오히려 그것이 생명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구질구질하며 하염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축적이 우리 삶임을 인정한 여성적인 시각에서 재현된 팥알은 바로 여성의 삶을 상징하고 있다. 여성적인 생명성, 소우주가 바로 작고 작은 씨앗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증식하는 씨앗은 생명의 본질이며 그 작은 것들이 삶을 관장하는 여성의 에너지와 같은 힘을 지니고 있다.

  홍성경과 김성곤의 작업은 전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엔타시스가 있는 건축물의 기둥, 그 위에 올려진 보와 그 기둥 위에 얹혀진 홍성경의 공포구조는 한국적 조형미의 대표적인 격인 동시에 사찰건축의 주요한 장엄요소이기도 하다. 김성곤의 사찰의 꽃살문은 청정세계를 의미하는 동시에 불국토를 장엄하는 전통을 보여준다. 열어젖힌 문 사이로 만개한 벚꽃은 인공이 아닌 자연의 장엄 경지를 실감하게 한다.

  『화엄경』에서는 부처가 처음으로 정각을 이룬 마가다국의 적멸도량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 땅은 금강으로 되어 장엄을 갖추었고 온갖 보배와 꽃들로 장식하였으며, 가장 묘한 보배바퀴는 원만하고 청정하며 한량없는 묘한 빛깔로 갖가지로 장엄하여 마치 큰 바다와 같았다. 보배로 된 당과 번과 일산들은 그 광명이 번쩍이고 묘한 향과 화만이 그 주위를 감쌌다. 칠보로 된 그물로 그 위를 덮고 한량없는 보배를 내리어 그 변화가 자재하며 온갖 보배 나무는 그 꽃과 잎이 무성하고 빛났었다.…"

  아름다운 장식과 향기로 장엄한 불전에 가장 큰 장엄은 자연의 힘이었다. 하지만 불전 내부의 장엄은 건축적인 요소나 장엄을 위한 여러 도구에 의해 실현될 수밖에 없다. 변하지 않는 경전의 내용도 읽는 이의 입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기 마련인 것처럼, 건축이나 미적인 판단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 필연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화하지 않는 것은 예술에 대한 의지, 인간 경험의 축적에 대한 믿음, 자아에 대한 성찰 등은 놀이와 장엄이라는 틀을 통해 한국미술의 과거와 현재를 연관지어 볼 수 있게 한다. 또한 놀이와 장엄이라는 두 틀은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성격의 속성으로 인해 새로운 미술을 위한 실험의 장을 제공할 수 있는 든든한 힘이라고 믿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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