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전시

니르바나, 생과 사의 경계에서

전시명: 모란미술관 백련사 개창 기념전 니르바나, 생과 사의 경계에서

전시기간: 2004.06.19 - 2004.08.28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강용면, 고명근, 김세일, 김종구, 노주환, 안성금, 이호신, 이흥덕, 정광호, 천성명, 최태훈, 홍성담

전시내용:

 

니르바나, 生과 死의 경계에서


조은정 | 미술평론가, 한남대학교 대학원 겸임교수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보다 더 빠르게 상념이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을 모란미술관에서는 경험하곤 한다. 인간의 존재성이라든가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번잡한 일상에서는 쉽게 떠올리기 어려운 생에의 진지함이 더 많은 시간을 전시장에 머물게도 한다. 삶에 대해, 사회에 대해, 그리고 지고지순한 예술의 본질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작품들은 生의 열기를 반영한다. 하지만 이 모두 인간의 일임을 인식하는 순간, 산자락 너머 모란공원의 진실에 맞닥뜨리게 된다. 젊은 피 뿌리며 자유를 외치던 민주투사, 공장에서 밤샘하다 붉어진 눈 비비대며 인간다운 삶을 부르짖다 간 노동자, 고위관리직으로 귀한 대접받던 이들, 호의호식하던 재력가들이 모두 한산자락을 의지처로 삼고 있는 것이다. 무덤의 정적은 죽은 이의 것이지만 碑銘은 산자에게 어떤 삶을 원하느냐 묻는다.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은 인간의 인지발달과 함께하여 종교와 철학을 낳았지만 여전히 그 명확한 개념정리는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의학적인 정의에도 불구하도 정신과 육체의 관계는 거주자와 집 또는 氣 理 등 상대적이면서 절대부가결의 관계로 상정되기도 한다. 인간 정신과 육체의 관계에 대한 성찰은 수많은 신화를 통해 그 분리와 합일이 반복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육체, 몸 자체에 대한 규정 대부분은 종교라는 틀에서 생산된 인간 자신에 대한 정의와 부합된다. 타락의 길로 이끌어 낙원에서 추방되게 한 육체를 죄악시하는 서양식 사고는, 가부장적 세계관의 주요 틀로서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로 사용된 육체에 대한 관념의 반영이다. 육체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방식을 개발한 동양적 사고는 어차피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도구로서 육체를 파악하는 세계관을 보여준다. 그런데 동서양 공히 공통된 인식은 육체란 반드시 소멸하는 것이어서 그 어떠한 인간도 세상에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몸-다섯 명의 살인자, 네 마리 독사, 비어 있는 마을

  無에서부터 生이 생기매 死 또한 생기는 아이러니를 직시하며 인생의 의미를 짚어가는 『유마경』은 여러 불교의 경전 중에서도 성숙한 이타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부처님 재세시 인도 땅 바이샬리에는 유마힐이 자유자재한 방편으로 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해 성안에서 출가하지 않고 살고 있었다. 그는 마을의 집회에 나가서도 늘 최고의 설법자로 존경받았으며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노인이나 중년층 또 청년들과도 교유하였지만 항상 법과 조화되게 설법하였다. 존귀하고 천한 것에 대한 세상의 가르침을 따르면서도 하는 일에는 늘 빈틈이 없었으며 세간의 재물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세속의 이익에 대해서도 익힌 것이 많았다.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저자에 나가 노닐었으며 중생을 보호하기 위해 온갖 정치에 관여하였고, 자신의 해탈이 목표인 소승에서부터 다른 사람의 해탈까지 목표로 하는 대승으로 이끌기 위해 법을 강론하는 곳에 들어갔으며, 어린이를 깨우쳐 주기 위해 학당에 들어갔으며, 욕망의 사악함을 보여 주기 위해 음란한 곳에도 들어갔다. 술을 마셔도 를 잃지 않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유흥가에서 노닐었다. 

  유마힐은 한량없이 불가사의하고 능숙한 방편의 지혜로 중생에게 이익을 주었는데, 그 자유자재한 방편으로 몸에 병을 나타내었다. 그러자 국왕, 대신, 장자, 거사, 왕자 등과 관속 수천 명이 모두 가서 문병을 하였고 유마힐은 그들이 도착하자 병을 이유로 설법을 하였다. 그 첫 마디는 육신몸에 대한 것이었다. 고통과 괴로움의 병주머니가 몸이라는 정의를 내리고 난 뒤, “이 몸은 실답지 않은 것으로, 사대(四大땅, 물, 불, 바람)로 집을 삼으며 이 몸은 텅 비어서 나와 내 것으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 몸은 지성이 없는 것이 마치 초목과 같으며, 이 몸은 작위가 없는 것이라 풍차처럼 돌아가는 것이며, 이 몸은 청정치 않아 더러움과 악으로 가득 찼으며, 이 몸은 거짓된 것이니 임시로 입고 먹고 마시면서 기르고  있긴 하지만 끝내는 부서져 사라지는 것이며, 이 몸은 우환이 많으니 404가지 병들이 모인 곳이며, 이 몸은 부서지기 쉬우니 오래된 우물이 말라붙듯이 늘 노쇠함의 핍박을 받으며, 이 몸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죽게 마련이며, 이 몸은 온(蘊)·처(處) · 계(界)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인데 이 온 • 처 • 계는 다섯 명의 살인자, 네 마리의 독사, 비어있는 마을에 비유할 수 있다."고 하였다.

  유마힐은 병을 핑계로 중생을 모았고 그 몸의 병을 방편으로 하여 인간이 집착하기 쉬운 몸의 무상함을 말하고, 그 스스로 병든 몸을 보여줌으로써 무상함을 일깨워 준 것이다. "이 몸은 강하지도 굳세지도 못하고 힘도 없는 무상한 것이다. 너무나 빨리 썩기 때문에 믿고 간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허물과 근심이 많은 것으로 어차피 무너지기 마련이다." 

  인간 육신의 현상적 존재에 대한 무상함은 허무로 빠져들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 허무를 극복하고 궁극적인 진리에 다다르기 위해 유마힐은 지혜에서 생겨난 法身인 여래의 몸을 제시한다. 여래의 몸은 진실에서 생긴 것이며, 실재에서 생긴 것이며, 의식적 자각에서 생긴 것으로서 모든 중생의 병이 없는 상태임을 이야기한다. 현상계의 죽음을 넘어서는 방법은 최고의 깨달음을 얻는 단계에 이르는 것임을 이야기한 것이다.


소멸을 위한 탄생

  인간이 자꾸 태어나고 죽는 것을 반복하는 이유는 인간인 이상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벗어나 나고 죽음이 없어 고요한 상태에 이르는 단계를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식적이든 그렇지 않는 영적 진화를 희구하며 윤회를 반복하는 인간에게 생존 자체가 목표일 때는 역으로 죽음 소멸에 접근하게 된다. 생애의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죽음에의 의지로 귀결되는 공식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절망하지 않는 것은, 그 생애의 의지가 죽음을 초극하는 매제가 되기 때문이다. 현상계의 대표자로서 몸은 소멸되는 특성에 의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지만 인생의 정신을 담은 그릇이라는 긍정을 위한 도구인 것이다.

  不二란 생과 사를 분별하지 않는 것, 진실과 삿됨을 구별하지 않는 것처럼 언어나 문자에 의한 분별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때로 침묵은 천둥소리와 같을 수 있다. 분별이 없는 상태, 침묵과 같은 상태를 향해 정신적 항해를 계속해야 하는 凡人에게 인생은 오딧세이의 멀고먼 항로와 같다. 결국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사유는 인간 역사와 예술형성의 원인인 동시에 인간 삶의 본질을 의미한다.

  생존의 의지라는 측면에서 예술을 정의 내린다면, 현대미술의 다양함은 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라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수많은 종교와 종파가 혼재하는 한국이라는 영토 안에서 생에 대한 또는 죽음에 대한 생각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깨달은 이에게 생과 사는 둘이 아닌 개념일 것이다. 하지만 현상계에서 생존의 몸부림을 계속하는 LA들에게 생과 사의 경계는 이승과 저승, 만남과 이별, 존재와 소멸이라는 이분법적인 틀의 외곽을 형성하고 있다. 삶을 인정하기 위해 죽음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의 인간의 세계를 알면서도 현실에 머무는 인간은 본질과 닮아 있다. 나(我)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을 버리지 않는 것, 니르바나가 궁극적으로 완전한 적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적멸에 들지 않는 것, 영원히 벗어나는 것이 궁극적인 안락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몸과 마음을 싫어하거나 염려하지 않는 것, 번뇌가 없는 경지를 알면서도 끊임없이 생사를 유전하는 것 등에서 더욱 그렇다. 결국 인간 하나하나는 보살의 본질을 지니고 있기에 깨달은 자, 부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이 생산한 예술은 인생에 대한 성찰이기에 삶의 궁극적인 목표와 닿아 있다.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이 경험하게 되는 생에의 반대세력인 권력과 압제에 대한 항거로서 미술작품이 탄생되는 것은 당연하다. 개인적 차원에서 무한한 갈등과 욕망 그리고 이를 극복하여 본성인, 참된 나로 돌아가려는 그 사투의 과정이 작품에 드러나는 것 또한 당연하다. 삼국 정립기에 도입된 불교가 국가체제를 구축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던 이후, 역사 속에서 불교는 정치적 이념으로 또 도덕으로, 생활로 한국인의 생활에 스며있다. 또한 현대 물질문명의 속도에 지쳐버린 영혼에게는 스스로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게 하는 自省의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境界, 그리고 警戒

  한국 현대 작가에게 불교는 동양의 상징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어 소재적인 측면에서 접근할 때는 警戒해야 할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이 될 수 있다. 이국적 요소로서 불교를 신비주의와 결합하여 이해하는 시각은 서양이 동양을 타자화하는 것과 결과적으로 다를 바 없는 스스로를 타자화하는, 오리엔탈리즘의 재생산에 불과한 것이다. 한국인에게 불교란 현재의 자신의 선택된 종교와는 관계없이 역사 속에 흐르는 한줄기 강과 같은 존재이다. 언어에, 생활습관에 사유에 묻

어 있는 불교는 생활 속에서 여전히 그 도도한 물결을 잠재우지 않고 있다.

  추상미술이 화단을 지배하던 때에도 불교적 내용은 한국 구상미술을 유지시켜주는 틀이 되어 주었고, 전후 정체성을 상실하여 가던 혼돈기에도 한국미술의 중심을 지켜주는 주요한 원동력이었다. 지나친 서구화에 대한 반성으로 한국미술의 한국성을 찾아 나서던 때에 중요한 자원이었음은 물론이다. 현대 한국 미술에서 불교는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한국미술의 정체성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데 이는 한국의 역사와 분리될 수 없는 한국불교의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 삶을 불평등하게 하는 많은 요소들 이를테면 개인과 사회, 남자와 여자, 부자와 빈자, 권력과 지배 등의 경계는 분리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들이 합일과 조화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기에 인간의 역사는 지속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境界짓는 일이 인간이 가장 警戒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임을 주지시킨 경향으로서 포스트모던은 미술사적으로뿐만 아니라 인류의 사고 변화에도 중요한 흐름이다. 현대화의 급속한 속도에 제동을 건 전통에 대한 탐구의 한 자락으로서 90년대 이후 지속된 한국적인 미술에 대한 탐구 기류도 포스트모더니즘에 어느 정도 빚을 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현재 한국 화단에서는 스스로 사유의 강으로 몸을 던져 사회적으로는 전통의 이름으로, 내적으로는 자아성찰을 시도하는 세계를 끌어올리고 있는 많은 작가를 만날 수 있다. 이들의 작품이 불교를 전혀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조차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은, 그들 작품이 보편적 조형언어를 지니고 있는 데 기인한다. 특수성, 희귀성, 천재성의 강박에 시달리지 않는 불교적 사유는 보편성에서 얻는 특수성에의 합일, 낮은 곳에서 얻는 지극히 궁구한 진리, 그리고 모두가 깨달음에 얻을 수 있다는 겸허함을 강화시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미덕을 형상화시키는 데 집중하는 힘이 된다.


生과 死의 경계를 잊다

  언외언의 세계, 다함이 있고 또한 다함이 없는 세계가 곧 니르바나(涅槃)이다. 따라서 니르바나란 육체의 소멸이 아니라 일체의 번뇌가 사라진 청정함을 의미한다. 유마경』에서는 '보살'이라는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죽음은 모든 활동이 끊어진 모습, 삶은 모든 활동이 지속되는 것이다. 보살은 죽더라도 일체의 착한 법을 쌓는 일을 중단하지 않으며 태어나더라도 일체의 악한 법을 짓는 활동을 계속하지 않는다."라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이어서 "햇빛이 세상의 어둠과 함께 하겠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태양이 뜨면 뭇 어둠은 사라지지만 태양이 이 땅을 운행하는 이유는 어둠을 없애고 밝게 비추기 위해서"라며 번뇌에 물들지 않고 중생들의 번뇌의 어둠을 몰아내는 보살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절대적이지도, 상대적이지도 않은 죽음에 대한 관념은 윤회를 통해 인정될 수 있겠지만, 보다 근원적인 긍정의 힘은 法(darma)에 대한 정의에서 보다 명확히 드러난다. 인식대상인 법이 주관과 객관의 상호적인 관계에서 존재한다는 인식론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궁극적으로 나도 없고 중생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 온갖 인연에 거스르거나 다투지 않고 이의를 일으키지 않는 것, 나와 내 것에 대한 소견을 벗어나는 것, 뜻에 의지하지 문자에 의지하지 않는 것, 지혜에 의지하지 지식에 의지하지 않는 것 등이 바른 법공양이라 『유마경』은 전한다. 법을 실체로 여기지 않고 인식의 대상으로 규정하기에 어떤 현상의 가능성도 인정될 수 있는 역설에 의지하여 大乘의 수레는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를 통관하여 나와 너를 구분짓는 이분적 사고는 남북한 역사가 안고 있는 주요한 문제점이기에 현대사 이해를 위한 열쇠이다. 따라서 니르바나, 생과 사의 경계에서」에 참여한 12인의 작가들은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또 내적 성찰의 측면에서도 다원적인 시각에서 이해되는 작가들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전후세대들이 갖는 니르바나란 의미는 그만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체를 하나의 경향으로 묶을 수 있는 동시에 또 각각 작가적 양식에서 독자적 세계를 갖추고 있어 분리할 수밖에 없으며, 그들 스스로 영구적이라 생각되지만 동시에 소멸하는 것들, 소멸이라 보이지만 영원한 근원적인 것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강용면은 전통에서 한국 조각의 정체성을 찾아내는 단서를 잡았다. 오방색과 단청이라는 색채에 대한 접근과 샤머니즘의 무신, 불교의 하위신인 조왕신 등의 도상을 차용한 형태적 접근은 한국문화원형의 탐구 결과이다. 오방색이나 단청의 색은 현대인의 눈에는 짙고 강하여 물질을 실체로 보이게 하는 요소이지만 실지로 색은 본질이 없는 존재이다. 눈은 색채에 의해 형태를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를 당하기도 하며, 눈 자체도 현상계의 모든 것을 생긴대로 지각하지도 않는다. 강한 이미지 그 자체가 허상일 수 있으며 色 자체가 바로 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사찰 문이나 불단에서 볼 수 있는 형태들의 조합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는 존재하지만 실지로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이나 꽃들이다. 존재와 부재는 역사적으로 증명되는 것도 아닌, 의 문제였던 것이다. <온고지신> 시리즈를 통해 구현하였던 밥그릇과 여러 존재의 관계는 보다 은유적이어서, 無明과 나고 죽음을 강조함으로써 관찰자로 하여금 이 과정을 없앰으로써 근심이나 걱정, 고통이나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니르바나를 희구하게 한다. 한국인의 삶에 대한 연구가 생의 의미에 대한 연구로 귀결되고 있는 것이다.

  고명근은 사진과 조각이라는 다른 장르를 통합하여 하나의 작업도구로 삼는다. 스스로 이전에는 입체적 구조에 사진을 입히는 작업을 하였지만 이제는 사진과 조각을 따로 놓고 각기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사진과 조각의 접목이라는 시도가 형상의 복제, 플라스틱으로의 고정을 통하여 완벽한 일루전을 이루어내었고 그 환영적인 공간이 피부에 머문 것임을 인지하면서도 시선은 공간에 흡수되는 경험을 선사한다. 하지만 불완전하며 표피적인 공간은 보이는 것에 대한 불신을 낳기 마련이다. 보이는 것이 과연 진실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은 리얼리티의 추구를 동반한다. 자연과 상된 영역의 사이버공간, 실재의 대극점에 있는 허구를 표면의 이미지를 통해서 역으로 드러나는 구조에서 확인하게 된다. 고혹적일뿐만 아니라 단단하며 이지적으로 보이는 구조물은 현실계의 존재를 증명하는 사진이 모여 이루어낸 가상의 공간이다. 실재하는 것들이 모여 생산한 이미지는 가변적이며 위험천만한 비현실적인 공

간인 것이다.

  김세일의 <미륵>은 국보83호 반가사유상을 보여준다. 역사와 예술을 함께 담은 조형물은 현세의 것이되 미래를 희구하는 내용의 종교적 숭배물이었다. 하지만 조성된 지 천년은 족히 지난 이 시점, 박물관 조명 아래서 불상은 그저 말 그대로 된 물질일 뿐이다. 그동안의 몇몇 작품들이 사물과 박물에 대한 경계에의 관심을 드러냈던 것에서도 반가사유상이 단순히 그 아름다운 형태 때문에 차용된 만은 아님이 분명한 것이다. 하지만 그 불상의 모습이 철사로 엉겨있는 것을 보는 마음은 심란하다. 얽히고설킨 그 가는 선들이 끝을 알 수 없는 번뇌를 상징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이 苦인 이유는 번뇌 때문이다. 하지만 미륵의 사유는 번뇌가 아닌 미래 세계를 담보하는 자신의 본분이다. 그럼에도 주변의 철사뭉치를 번뇌라고 선뜻 생각해버리는 것은 실타래처럼 엉킨 욕망의 그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세계를 감싸고 있는 인드라망은 언어와 잡다한 생각이 걸려들기 때문에 빠져나가기 어려운 그물이라 한다. 미래를 생각하며 50억년이 넘는 세월을 기다리는 미륵을 기다리는 현실의 인간은 헤어나기 어려운 망상적 존재일 지도 모른다.

  김종구는 무쇠를 수직으로 세우던 초기작품에서부터 유학생활의 소산인 쇳가루를 통해 수평의 미시적 세계를 발견하였다. 형태의 파괴가 새로운 형태의 생산인 쇳가루를 내는 작업은 작가의 노동에 의해 만들어지고 의도에 의해 배열되어 관객으로 하여금 형태의 소멸과 생성에 의한 사유의 시간을 갖게 하였다. 이후 현대 광학기기를 도입하여 집적된 쇳가루가 보여준 세상은 미시적 세계의 거대한 우주적인 구조였다. 이후 작가는 헝겊, 석고판을 도입하여 outdoor painting을 시도하는 동시에 시간을 끌어들여 변화, 속도를 담아내었다. 광목에 접착된 쇳가루 글씨는 시간이 지나면서 공기중의 산소와 작용하여 색상의 변화와 번짐을 보인다. 견고한 물질이 외부의 힘에 의해 형태가 변화하고 시간에 의해 화학적 반응과 색상의 변화가 필연임은 우주삼라만상이 모두 유한한 존재임을 실감나게 한다. 있음과 없음의 경계에 변화'가 작용하는 물성의 법칙은 쇠에서 더욱 강하게 드러나는데, 그 어느 물체보다 강해 보이지만 공기 중에서조차 변화되고 말아곧 소멸에 이르는 물체로서 쇠는 인간의 역사를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노주환은 컴퓨터 인쇄의 발달로 인해 이제는 사회적인 소통의 역할을 잃어버린 활자를 재료로 사용하고 있다. 무수히 작은 활자들은 조합되어 책이 되고 신문이 되어 지식체계를 형성하였다. 문자는 지배와 피지배를 낳았고 문명과 비문명을 낳아 인간 세계를 계급적으로 구분하게 만들었고 활자는 그 전령사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지만, 용도가 폐기된 이후 활자는 그저 쇠붙이라는 물질에 불과하다. 언어의 권력성, 문자의 기록성을 강조하는 것이 작품의 목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일일이 용접하여 바닥에 구축된 활자들은 거대한 세계의 로 보이는데, 그 미시적 세계의 집적은 현상계의 어떤 것을 상상케 함으로써 오히려 거시적인 지형도를 제시한다. 활자의 죽음은 문자의 죽음이 아니라 인식의 또 다른 삶임을 인지하며, 미시적 세계와 거시적 세계가 분별될 수 없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토우처럼 흙과 물과 바람과 불로 이루어진 인간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그 生의 소멸에 있다는 역설적인 상황을 토우에 비쳐진 문명의 빛을 통해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소멸과 생성은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이 모든 것이 현상계의 꿈임을 제시하는 <반야심경>의 늘어진 활자들 속에서 새삼스레 문자의 힘을 인지한다.

  안성금이 부처상을 절개하여 놓았을 때, 법당의 부처를 아궁이에 넣어 방을 덥힌 이야기가 생각났다. 빛은 그저 상일뿐 나무로 깎은 물체가 부처는 아닌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신성의 아우라에 의지한 많은 행위가 있어왔고 여전히 불가침의 영역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금기가 없는 불교이면서도 금기가 있는 것이 종교이니 그 아이러니를 불상 또한 안고 있는 것이다. "나를 의지처로 삼지 말고 법을 의지처로 삼으라 했던 부처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작가는 부처의 형상을 훼손 내지는 깨어버리기를 통해 시도하였던 것이다. 알을 깨고 나와야 하는 것이 종교의 본질이라는 작가의 생각은 작은 글씨 빼곡한 경전의 문구가 새겨진 화면에서도 그대로 구현된다. 쌀알에 반야심경을 새겼던 옛 장인들의 정신은 무한한 자기 수련의 과정이 예술로 나타난 것이었으며, 중생이 모두 부처라는 신념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둥근 원이나 깨알 같은 글씨의 재생은 현대 종교미술의 일면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자연과 가람을 주요 소재로 하는 이호신의 작품세계는 대상의 사실성에 충실한 표현에서 출발한다. <가람의 풍광과 진경> 시리즈에서는 직접 답사를 통해 자연과 어우러져 조영된 사찰건축을 담아내었다. 진경산수라는 한국화의 전통에 사찰건축이라는 문화유산과 정신세계를 함께 담아내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이므로 새가 되어 풍광을 바라보듯 대개 발아래 세계가 펼쳐져 있다. 사찰 영역에는 늘상 소나무가 있게 마련이어서 작가는 '진경' 에 기대 겸재의 송간묘선을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다비장 가는 길>은 불교계의 정신적 지주가 열반에 든 후 만장을 휘날리며 그를 다비하러 떠나는 대중을 무심히 열거하여 생과 사에 대한 의미를 짚는다. 이 작가의 화면에서는 길가의 이름모를 풀과 꽃, 산속이나 바닷가의 소나무 모두 눈앞에 있는 사물로서 그저 그렇게 그 자리에 있다. 꽃은 꽃대로,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것, 무념무상으로 대상을 대하는 것이 진실에 직면하는 것임을 작가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저 그대로 보아주는 것에서 소유란 개념은 일어날 수 없으며, 존재하지 않는 지나간 과거나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연연하지 않고 현실에 충실한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흥덕은 초기에는 모순과 압제의 권력 아래 생산된 억압과 부패를 지옥도로 묘사하였다. 타락과 암흑의 거래가 오가는 카페에서 저마다의 욕망에 눈이 먼 부유하는 인간군상을 담아 내었다. 또 수많은 사람이 오가지만 발밑의 구걸인을 알아채지 못하는, 실내에서는 상대방을 응시하지 않고 서로 눈을 감아버리는 소통불능의 장소로 지하철의 모습을 재현한다. 그의 화면은 짙은 색상과 탐욕적인 인물들이 엉킨 욕망으로 가득한 세상을 보여준다. 인간의 욕망은 육체에서 시작된다. 자신의 노동력을 아끼려들거나 외모를 치장하려는 것 또 타인의 육체 소유를 목표로 하기 십상이어서 육체는 正道가 아닌 길을 걷게 하는장치와 같은 것이다. 타인의 육체 훔쳐보기-관음증은 인간 삶의 한 모습임이 사실이다. 진실을 은폐하려는 지배계층의 사고는 생명에의 의지를 억압하는 기제이다. 따라서 작가가 다루는 性은 눈요깃감에서는 거리가 먼 외면하는 진실의 한 면일 뿐이다. 어둡고 타락한 도시에서 정작 시선을 붙드는 것은 비록 그 크기는 작지만 부처에게 예수에게 구원을 청하는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지옥처럼 보이는 어두운 까페에도 두 눈을 반짝이는 깨어 있는 자가불안으로 가득한 길거리에도 영혼이 맑은 이는 있다. 고정관념에 전도되어 눈앞의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 또한 미망에 빠지는 일임을 작가는 주지시키고 있다.

  정광호의 나뭇잎은 잎맥만으로 이루어져 마치 종이에 연필로 사물을 재현하듯 공간에 선으로 드로잉을 하였다는 점에서 회화적이다. 하지만 내면을 드러내는 구리선의 물성이 강하게 인지되기에 분명 조각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를 비-조각이라 칭했는데 부정함으로써 긍정에 이르는 동양적 사유의 추론에 따르면 회화가 아닌 조각임을 강조하는 용어인 셈이다. 구리선의 연결로 이루어진 도자기는 실은 도자기 표면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불의 작용으로 태토와 유약이 밀착된 상태에서 식어가는 과정(바람)의 작용으로 피부면 하층이 분열되어 생긴 로 이루어져 있다. 빙렬이 있는 도자기는 물과 불과 흙, 바람이 작용한 결과라는 점에서 인간의 육체와도 같다. 하지만 공간에 설치된 도자기 형태는 이미 안과 밖, 겉과 속의 구별이 없다. 역사성과 공간성 그리고 견고함이 소거된 도자기의 본질과는 먼 구리선으로 이어진 도자기 앞에서조차 도자기라는 물체의 기능과 생김새, 역사까지를 떠올리는 자신의 의식세계에 놀라게 된다. 도자기의 실체가 아님을 인지하면서도 형태에서 도자기의 속성을 떠올리게 되는 의식은, 실로 미망에 허덕이는 일상사에 다름아닌 것이다. 

  천성명의 일련의 작업은 <잠들다> <들판에 서다> <거울 속에 숨다> 등 일상사의 한순간을 정지시킨 다음 다시 쪼개내어 행위를 반복시키고 지속시킨다. 작가는 꿈속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어떤 여자가 와서 "아직도 자고 있네"라며 나가더라는 형의 이야기를 전한다. 아직도 우리 모두 잠자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며 묻는 작가는 문득 찾아온 낯섦은 익숙함에서 비롯된 것이며 익숙함은 무감각함을 유발한다고 말한다. 그가 생산한 인체는 사회적으로 미숙한 인간의 형상인 키덜트이다. 육체와 정신이 조화롭게 성장하지 못한 키덜트는 내적인 자아분열의 현대인을 의미한다. 의식 저편에서 잠을 자고 있는 것이 과연 나인가, 나란 무엇인가에 대한 처절한 물음은 생과 사, 땅과 표면의 경계에 누인 육체가 파편화되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진실을 인정하는 것은 외연의 현상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잠과 깸의 경계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일지도 모르기에 분열된 자아는 성인과 유아의 경계에 삶과 죽음의 경계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최태훈의 용접조각은 물상의 재현, 공간에의 드로잉이라는 측면에서 현대조각의 한 흐름에 속하는 것이지만, 그가 생산한 물상은 우리가 경험했던 가시적인 세계의 것으로 규정할 수 없다. 철이나 동을 때리고 자르고 붙여서 만들어낸 것은 형태적으로는 숲이나 인간의 눈 등이지만 그 물질을 통해 확인된 것은 진실이라 믿었던 세계에 대한 일루전임을 보여준다. 하나의 공간은 수많은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공간은 또 다른 공간에 의해 구성되는 작업과정은 우주의 생성을 말하는 듯 하다. "한 브라마가 있는데 그의 몸에는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털이 있는데 그 털 하나하나는 브라마로 이루어져 있고...” 하는 미립자에 대한 개념을 그의 작품에서 만난다. 사물을 이루는 요소로서 부분을 과연 실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사물이란 부분의 조합이지 어떤 물체라 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과연 사물이란 그 본질이란 것이 있는 것일까 하는 사유의 프리즘을 만나는 것이다.

  홍성담은 "죽음이란 본래의 고향인 태허 속으로 되돌아가는 일이다. 이제 사람들이 떠나고 내 몸의 모든 것이 다하여 허물어지면 다시 태허 속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단지 그 모든 것이 모였다 흩어질 뿐이다. 사람들의 세월은 그렇게 또 흘러갔다."고 말한다. 육체가 집이라고 생각하는 작가는 삶과 죽음은 잠시 장소를 옮기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한다.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오방색과蓮花生 등 불교도상의 차용은 엄중한 삶의 영역이 부정한 영역의 죽음과 화해하는 공간을 만들기 위한 장치에 불과한 것이다. 삶과 죽음은 서로 엄중한 것이나 밥에 의해 화해되는 육체를 밥으로 연명시키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영역의 문제에 불과한 것이다.

  12인의 작가는 앞서 지적한 것처럼 형상성, 전통, 존재에 대한 의문 등 보편적인 유사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하나의 주류로 정리하기에는 너무도 상이하며 작가적 양식이 강한 이들이다. 한국전쟁 이후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인 50년대~70년대 생들인 작가들은 생태적으로 사회에서 인간의 존재성에 대한 강한 의식을 지닌 듯하다. 하지만 이 모든 구조는 미망에서 파생된 번뇌의 소산이라는 성찰은 생과 사의 경계가 삶에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한다. 예술가 특유의 직관력과 전통의 힘으로 한국의 작가들은 생과 사의 문제를 풀어나가고 있다. 凡人은 뜰 앞의 잣나무가 바로 자신이 자신이 아님을 깨달은 의 경지는 알 수 없다. 비록 자각하지는 못할지라도 참 나를 통해 구현된 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이치를 중득한 예술가의 세계는 LA의 미혹함을 떨쳐내기 위한 진리의 방편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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