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전시

오늘의 한국조각 2008 - 조각의 허물 혹은 껍질

전시명: 오늘의 한국조각 2008 - 조각의 허물 혹은 껍질

전시기간: 2008.05.10 - 2008.06.29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구경숙, 김일용, 박소영, 박원주, 차기율

전시내용:


오늘의 한국조각, 조각의 허물 혹은 껍질


고충환| 미술평론가


  모란미술관의 연례적 기획인 <오늘의 한국조각>은 한국현대조각을 대표하는 작가를 재조명하는 전시로서, 사실상 미술사(美術史)적인 성격과 의의를 갖고 있다. 이러한 성과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을 테지만, 그러나 최근의 전시관행이나 생리 그리고 지형 변화에 있어서 이러한 미술사적 성격의 전시가 아직도 실효성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따라서 미술사적인 성격과 더불어 '지금, 여기' 라는 한국현대조각의 현장성과 현실성을 아우를 수 있는 방안이 모색돼야 하리라 본다. 미술사적 특수성과 동시대적 특수성을 동시에 아우르면서 이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전략이 요구되는 것이다.

  현대조각은 그 외연이 전에 없이 넓어지고 유연해진 탓에 정통 조각의 재정의가 요청되는 현실에 맞닥트리고 있다. 이런 연유로 해서 이번 전시에서는 〈오늘의 한국조각〉이라는 큰 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동시에 〈조각의 허물 혹은 껍질〉이라는 부제를 통해 동시대적 특수성을 동시에 아우르고자 한다. <조각의 허물 혹은 껍질〉이라는 부제는 최근 조각계를 중심으로 담론의 쟁점이 되고 있는 소위 탈조각의 경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는 대략 정통조각에서의 양감과 질량과 매스를 결여한 조각, 가벼운 조각, 일시적인 조각, 움직이는 조각, 변형 가능한 조각, 그 실체가 희박한 조각 그리고 비물질조각 등으로 나타나며, 그 제반의 경향들은 정통조각과의 연관성이 유지되기도 하고 단절되기도 한다.

이에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형식은 가급적 피하고(이를테면 빛과 그림자 그리고 소리를 매체로 한, 최소한의 물질적 근거마저 결여한 비물질조각 같은), 정통조각과의 최소한의 연관성 속에서(정통조각과 탈조각의 경계에 위치한) 제반의 경향을 다룬 작품을 대상으로 했다. 양감과 질량과 매스가 빠져나간 그 빈자리로부터 정형화된 언어로는 환원될 수 없는 시적 아우라가 생성되고, 허물 혹은 껍질로부터 시적 울림이 파생되기를 기대해본다.


구경숙,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합체된 몸

  구경숙은 지금까지 대략 Silence(침묵), Herstory(여성사), Chrysalis(태반), Trace(흔적), Markings(자국), The Secret Garden(비밀정원) 등의 주제와 더불어 작업을 전개해오고 있다. 이 작업들로써 여성의 성적 정체성과 함께 몸을 매개로 한 인간의 존재론적 자의식을, 그리고 자기정체성과 관련한 실존적 문제의식을 다룬다.

  이들 가운데〈Chrysalis〉연작은 태반과 탯줄로써 존재와 존재를 이어주는 끈과 더불어 생명의 집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 집은 존재가 유래한 근원이며, 일정정도는 융이 말하는 심리적이고 존재론적 원천인 원형과도 연관된다. 주요 소재는 김이며, 청동으로 그 태반을 주조하기도 하는데, 이때 청동의 표면에 생긴 희고 푸른 녹은 김의 표면에 생긴 곰팡이 균에 의한 자연의 색감이나 질감에 상응하는 효과를 갖는다.

  또한 김을 소재로 하여 사람의 몸을 그대로 캐스팅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떠낸 몸의 형태가 김 자체의 성질인 수축과 이완하는 작용으로 인해 저절로 뒤틀리고 오그라들게 된다. 이렇게 변형된 형태를 매달아 설치한 인체에서는, 그 형태의 표면을 뒤덮고 있는 곰팡이 균의 희고 거뭇거뭇한 자연의 색채와 질감이, 수분이 빠져나간 변형되고 수축된 형태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껍질이 박제된 미라를 연상시킨다. 존재가 자연으로 되돌려지는 과정으로서의 부패와 영혼이 빠져나간 빈 육체, 그리고 그 육체의 흔적을 화석화한 시간이 하나의 결로 중첩돼 있는 것이다.

  이렇게 태반과 탯줄의 형상으로써 드러난 존재의 생명에다 미라의 형상으로써 드러난 존재의 흔적을 대비시킨다. 삶과 죽음이 혼재하고,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서로 맞물려있는 존재의 원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작가는 〈Markings〉연작에서는 신체의 흔적을 조형화한다. 여기서 마킹은 흔적이나 자국을 만들어내는 행위를 말하며, 이 행위가 신체를 매개로 할 때 지문과 눈동자 그리고 피처럼 한 개인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종의 기호가 된다. 철판 위에 젖은 천을 깔고 그 위에 오랜 시간 드러누운 작가의 몸에서 분비되는 지방 성분이 철판의 녹과 결합해서, 천에 신체의 흔적이 남게 되는 것이다. 이 작업에서는 자연의 생리와 함께 자연의 또 다른 한 속성인 시간(성)이 느껴진다. 산화현상의 점진적인 과정에 개입된 시간은 천에 남겨진 흔적에 시간의 형태를 부여한 것으로서, 시간을 가시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몸의 흔적으로 나타난 이미지는 결국 자연과 시간에 의한 작업인 셈이다.

  한편, 〈Invisible〉로 명명된 일련의 작업에서는 인공적인 과정을 통해 흔적을 만들어낸다. 등신대 크기의 인화지를 여러 장 연이어 붙이고 이를 빛에 노출시킨 연후에 그 표면에다 현상액을 바른 포장용 공기비닐을 덮고는, 그 위에 작가가 드러누워 자신의 몸을 찍는다. 이때 인화지에 가해지는 공기비닐의 압력이 몸의 굴곡에 반응함으로써 자연스런 몸의 실루엣을, 몸의 음영을 만든다. 그리고 이를 컴퓨터에 입력해서 색채 교정 등의 최소한의 조작만을 거친 연후에, 이를 출력한다. 그 이미지는 압력에 의한 비정형의 기포들과, 압력이 가해지지 않은 채 흰 여백으로 남겨진 부분, 그리고 공기비닐에 칠해진 현상액의 일부가 흘러내려 고착된 이미지가 서로 어우러져서 유기적이고 회화적인 느낌을 준다.

  구경숙은 이렇듯 자연과 인공적인 프로세스를 매개로 해서, 자신의 온몸을 던져 존재를 증명한다.


김일용, 조각난 몸과 파편화된 주체

  모델의 몸에 석고를 바른 후, 이를 떠낸 김일용의 작업은 친근하면서도 낯설다. 이런 이율배반적이고 역설적인 느낌은 해석되지 않은, 각색되지 않은, 미화되지 않은 모델의 맨몸을 직면하는 것에서 온다. 이를 작가는 소름과 껍질이라고 부른다. 몸의 표면질감이 만져질 듯한 감각적이고 촉각적인 경험을 형용하고 있는 이 개념은 작가의 작업이 신체를 소재로 한 여타의 작업군들과 구별되는 결정적인 특징이다. 모델의 맨몸이 몸의 경계를 넘어 세계 자체의 맨살과 직면하도록 유도한다. 그 경계의 끝에서 맞닥트린 세계의 맨살, 그러니까 인체에 대한 인문학적 베일을 걷어내고 본 모델의 맨몸이 소름끼치게 하고 당혹스럽게 하고 경외감마저 자아내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에 있어서 그 뚜렷한 실체를 얻게 되는 지점은, 인체를 떠낸 형상을 있는 그대로 제시할 때보다, 파편화된 인체의 부분 이미지들을 재조합하고 재구성할 때이다. 신체를 임의적으로 해체하고 분절하는 것에서 파편화된 세계인식과 조각난 주체에 바탕을 둔 후기 근대적 자의식을 엿보게 한다(주체란 이질적인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체적(積)연작으로 범주화할 수 있는 이들 작업에서 이질적인 신체의 부분 이미지들을 자의적으로 결합하는 한편, 입체적인 몸을 자잘하게 조각낸 연후에 이를 평면처럼 펼쳐 보이기도 하는데, 입체파의 조각적 버전을 보는 듯하다.

  작가는 이러한 신체의 입체파적 재구성에서 더 나아가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에 대한 선입견을 넘어선다. 그러니까 재구성해 놓은 부분 이미지들을 입체의 형태로 재구성해보면 하나의 온전한 신체로 복원되지가 않는다. 다시 말해, 부분 이미지는 다만 그 자체 자족적인 이미지일 뿐, 이를 재구성한다고 해서 전체가 복원되는 것이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체를 구성하는 제반 요소들을 합쳐 놓는다고 해서 하나의 온전한 주체로 복원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로써 작가의 조각은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에 대한 인식론적 경계를 넘어서며, 주체를 재현하거나 복원할 수 있다는 믿음이나 신념에 대한 불가능성을 주지시킨다.

  이렇듯 부분 이미지의 집합이 전체 이미지와 일치하지 않으며, 더욱이 그 실체에 있어서 손에 잡힐 듯한 사실성이나 즉물성에도 불구하고 신체를 닮아 있을 뿐 실제와는 다르다. 이를 작가는 유사 신체라고 부른다. 차이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신체를 자의적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바탕이 되고 있다. 함몰된 가슴이나 종잇장처럼 구겨진 신체, 그리고 특히 부분 이미지들로 마구 절단된 신체의 편린들이 금기의 경계를 넘어 불경(不敬)의 경지를 넘보게 하고, 에로스의 표면 위로 타나토스를 불러내며,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들러붙은 어떤 경계와 직면케 한다.

  처음엔 몸 자체에 집중하던 것에서 점차 몸을 분절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것에로 변화해온 작가의 작업은 이질적인 부분들의 무분별한 집합으로 구조화된 몸을 매개로 해서, 정형화된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의 다면성을 드러낸다. 파편화된 몸으로써 상처투성이의 존재를 드러내고, 불완전한 신체로써 부조리한 인간 실존을 증언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체의 재현 불가능성을 주지시킨다. 이로써 김일용의 작업은 (탈)주체론 혹은 (탈)존재론으로 부를 만한 어떤 경지를 예시해준다.


박소영, 꿈꾸는 오브제

  박소영의 작업 소재는 조화용으로 제작된 나뭇잎 모양의 기성품이거나, 때로는 똑같은 나뭇잎들이 중첩된 필름 형태의 출력물로써 이를 대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의 나뭇잎을 단위원소(모나드, 단자) 삼아, 이를 반복 중첩시켜나가는 과정을 통해 전체형상을 만든다. 그 형상은 정형보다는 비정형에 가깝고, 친근하면서도 낯설다. 익히 보아왔던 친근한 나뭇잎이지만, 정작 그것들이 모여 만들어낸 형상은 낯설고 애매모호하다. 그러니까 기성품을 차용해서 오브제를 만들고, 널리 알려진 기호를 차용해서 낯설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낯설게 하는 것은 세계와 세계에 대한 인식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이다(현상학적 에포케는 이런 차이에 대한 인식과 관련이 깊다). 선입견과 편견, 상식과 합리의 눈으로 보면 그 형상은 그저 나뭇잎에 지나지 않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다만 나뭇잎처럼 보일 뿐 비결정적인 어떤 형상, 암시적이고 잠재적인 어떤 형상인 것이다. 그것은 나뭇잎이면서 동시에 나뭇잎이 아니다. 일상속의 사물들은 그것이 본래 속해져 있던 맥락으로부터 약간만 빗겨나도 금방 낯선 본성을 드러낸다. 어찌 보면 예술이란 이런 일상과 비일상의 눈에 띄지 않는 차이, 캐니와 언캐니의 사이를 탐색하는 일이며, 클리쉐로부터 세계의 본성을 구출해내는 일이 아닐까.

  이렇게 만들어진 형상이 주렴처럼 벽에 드리우기도 하고, 바닥에 깔리기도 하고, 모서리에 붙여지기도 한다. 그 형상이 마치 파충류의 허물 같은 또는 알집 같은 생물학적 변태를 연상시키고, 새의 깃털 같은 가벼움을 상기시킨다. 현실과 실제를 닮아 있을뿐 사실은 암시적인 형상이다. 시작도 끝도 없이 이어지고 중첩된 비정형의 형상이 어떤 이미지나 결정적인 의미로 고정되기를 거부한 채 모호한 실체를 드러낸다.

  그 형상은 그 무엇보다도 조각의 허물 혹은 껍질을 떠올리게 한다. 빛을 투과하는 껍질과 표면(파사드)으로 축조된 조각, 최소한의 양감마저 결여한 채 안쪽과 바깥쪽의 구별이 무의미한 조각, 유기적인 질감으로써 단단한 질량을 배반하는 부드럽고 우호적이고 촉각적인 조각, 나아가 오브제와 레디메이드를 넘나드는 작가의 조각은 현저하게 탈조각적이다. 조각으로 부르기조차 힘든 그 조각은 조각을 배반하는 동시에 조각을 실현한다. 그럼으로써 무엇보다도 조각을 재정의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러한 애매한 경계나 경계에 대한 인식은 정체성의 논리로써 조각을 공고히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정체성을 이완시키고 변질시켜 차이의 논리를 유포시킨다. 조각을 사적인 놀이와 유희의 차원에로 전유하는 한편, 전통적인 조각의 기념비적 인상을 가로채서 마치 공기처럼 덧없고 가벼운 이미지의 입자들로 풀어 놓는다.

  작가는 때론 석고로 만든 형태나 기성품의 표면에다가 나뭇잎을 중첩시켜 만든 입체 형태의 작품을 제안하기도 한다. 그 형태가 실제를 닮아 있지만(이를테면 선인장이나 생물체의 돌기 같은) 그 닮은꼴은 다만 암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차용된 기성품 역시 그 정체가 모호한 것들(일상 속에서의 용도와 기능이 상실되고 폐기된 것들) 이란 점에서 허물 혹은 껍질 작업의 연관성 속에서 살펴볼 수 있다. 나뭇잎으로 축조된 표면이 형태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하는 한편, 무거운 본성을 가벼운 인상으로 변질시켜 놓는다. 여기에 빛마저 더해져(빛은 입체작품보다 허물 작업에서 더 결정적인 조형요소로 작용한다) 정적이고 관조적인 그리고 시적인 아우라를 내뿜는다. 

  박소영의 작업은 마치 꿈꾸는 것 같은 오브제를 실현하고 있다.                            


박원주, 존재론적 패러독스

  박원주는 구겨진 종이를 주물로 떠내고 이를〈무쇠 같은 마음>이라 부른다. 추측컨대, 그 종이는 그 혹은 그녀로부터 날아온 절교선언이 담긴 편지가 아닐까 싶다. 여하튼 종이의 내용이야 작가 자신만이 알 수 있을 테지만, 적어도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작가의 작업이 지극히 사적인 층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겨진 편지지에 담겨진 납덩이같은 마음이 그대로 무쇠 주물로 전이된 것이다. 비록 종이와 무쇠가 그 질량 면에서 비교할 수조차 없는 것이지만, 편지지의 내용과 납덩이같은 마음이 서로 상응하면서 설득력을 갖게 된다.

  그런가하면 구겨지거나 자잘한 조각들로 찢어진 종이를 일일이 꿰맞춰 원형을 복원한 연후에, 그 형태를 그대로 유리로 떠내기도 한다(펴기), 마구 구겨진 채 찢어진 편지지와 이를 재차 복원하는 행위와의 사이, 그리고 자잘한 조각들로 파편화된 유리와 이를 재차 복원하는 행위와의 사이에 미처 형상화되지 못한 빈 여백이 남겨지고, 그 여백으로부터 작가의 마음이 암시된다. 그러니까 작가의 작업은 마음처럼 가시화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해 있으며, 사물로부터 다른 사물로의 자유로운 이행을 통해 이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상식과 합리로 굳어진 관성을 무장해제 시키고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도록 유도하고, 낯설게 하기를 통해 이면보기와 행간읽기를 요구해오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에서는 이처럼 사물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바람을 그대로 통과시키는 구멍 난 유리창, 녹아내려 물을 담을 수 없는 유리잔, 그리고 종이로 만들어져 앉을 수 없는 벤치 등. 특히 종이로 만든 벤치는 노숙자를 위한 허구의 집을 암시하며, 종이의 가벼움과 노숙자의 무거움이 부닥치면서 허구의 질량을 강화한다. 그 허구가 겨냥하는 것이 사회복지정책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고, 집으로 상징되는 존재론적 패러독스일 수도 있다.

  이런 역설적인 표현은〈고독공포를 완화하는 의자>에서 정점에 이른다. 흔한 사무용품인 A4 용지를 일일이 자르고 붙여 만든 이 정교한 종이의자는 그러나 놀랍게도 전기의자를 재구성해놓은 것이다. 전기의자는 합법적으로 자행되는 살인도구란 점에서 가장 폭력적이며, 그 살인행위가 사실상 공공연한 합의에 의해 추동된 것이란 점에서 사회적이고 존재론적인 폭력욕망의 소산이다. 이제 문명화된 시대(?)에 걸맞게 전기의자는 과거 속의 유물로 사라졌다. 하지만 과연 폭력과 살인과 린치를 위한 공공연한 제도적 장치도 이와 함께 사라진 것일까.

  미셀 푸코는 미시화된 권력을 언급한 적이 있다. 옛날에 권력은 육체적 가해(감금과 고문)를 통한 직접적인 방식으로 개인을 감시해왔지만, 문명화된 시대에 권력은 정상과 비정상을 가름하는 가치기준(도덕률)을 개개인 속에 내재화(양심)하는 우회적이고 미시적인 방법으로 개인을 통제한다. 현대인은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제도의 눈(교육)에 의해 24시간 감시되고 있는 만큼 끊임없이 남을 의식하고 또한 자기를 의식한다. 그리고 육체적 가해가 사라진 자리에 고독공포가 자리한다. 그 공포는 하얀 종이처럼 추상적이지만, 정작 그 존재론적 무게는 전기의자만큼이나 무겁다. 똑같은 이치로 A4 용지를 접붙여 만든 <희망봉> 역시 사실은 희망이 없는 시대에 대한 역설적 표현처럼 읽힌다.

  이 이질적이고 낯선 물건들이나 기형의 오브제들은 경계 위의 불안정한 사유와 삶의 방식을 예시해준다. 불변적이고 불가역적인 진리에다 가변적이고 가역적인 사유를 대질시키는 한편, 기능적 사유가 정지된 지점으로부터 허약하고 깨어지기 쉬우나 그만큼 섬세한 사유를 파생시킨다.

  박원주는 이로써 사물을 고정된 기능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고유의 자족적인 존재성을 열어준다.                            


차기율, 생과 사가 순환하는 뫼비우스의 띠

  차기율의 작업에 부쳐진 주제들은 부유하는 영혼, 땅의 기억, 사유의 방, 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 사이로서, 이들 작업의 가장 큰 특징은 인위적인 과정을 가급적 배제함으로써 자연의 본성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예컨대 숲속에 버려져서 넝쿨 식물의 줄기와 뿌리가 한데 얽힌 리어카를 소재로서 도입하는 식이다. 얽혀 있는 줄기와 뿌리를 적당히 정리한 후에, 그 죽은 줄기의 부분 부분을 흙(테라코타) 덩어리로 감싼다. 흡사 자연이 조형화하고 생성시킨 유기체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작업은 그러니까 자연이 만든 오브제를 발견하고 이를 작업화한 것이다. 이는 그 자체 일종의 발견 오브제에 그 맥이 닿아 있다. 여기서 죽은 줄기를 감싸는 흙덩어리는 치유와 주술 그리고 제의 행위 암시하며, 자연이 내재한 생명력과 복원력을 암시한다. 이처럼 작가는 자연의 본성을 끌어내는 한편, 그 본성에 자기의 본성을 일치시키는 과정으로부터 작업의 당위성을 얻는다.

  특히〈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 사이〉를 주제로 한 작품들에서 순환의 여행은 말할 것도 없이 자연의 순환원리를 일컬으며(이를테면 생과 사가 하나의 고리로 순환하는), 그 원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삶의 존재를 지시한다. 이러한 순환과정을 여행과 여로 그리고 항해에다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방주는 노아의 방주로부터, 그리고 강목은 나무와 풀 등으로 한방에서 약초나 약재로 쓰이는 각종 식물의 대강(大綱)과 세목(細目)을 밝힌 서책인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따온 것이다. 이를 통해 동양(본초강목)과 서양(노아의 방주)에 나타난 자연사상과 생명사상을 하나로 융합시키는 프로젝트를 실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주로 포도나무 줄기를 소재로 취하는데, 여타의 나무들에 비해 뒤틀림 현상이 심해 마치 근육과도 같은 유기체의 본성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포도나무 줄기를 끓는 물에 삶은 연후에, 그 껍질을 일일이 벗겨내고 그 토막들을 연이어 조립하는 방법으로써 거대한 구조물을 만든다. 전체적인 형태가 타원형인 구조물을 세로로 길게 설치한 것에서 마구 얽히고설킨 덩굴나무가 연상되는가 하면, 비정형의 유기체적 다발이나 덩어리를 보는 듯도 하다. 그리고 그 줄기의 표면에는 여러 의미 있는 문자들, 주로 자연과 관련한 한문자들이 (이를테면 본초강목에서 인용한) 붓글씨로 기입돼 있다.

  주목할 점은 이 거대한 구조물이 마구 얽혀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의 고리로 연결돼 있다. 그럼으로써 생과 사가 순환하는 자연의 원리를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구조물의 중간 중간에 납작한 조약돌이 장착돼 있는데, 조약돌의 가운데를 뚫어 그 구멍 사이로 나무줄기가 관통하게 한 것이다. 마치 마디를 연상시키는 이 조약돌이 생과 사가 반복 순환하는 경계를 암시하며, 윤회의 계기를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조약돌의 표면에 난 크랙 위로 한문자를 표기한 오브제 작업과(그 자체 상처를 치유하는 주술적 의미를 담고 있는) 사진과 드로잉을 병치하고 중첩시킴으로써 그 의미를 강화한다.

  한의학에 바탕을 둔 문자들이나,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서로 결합된 것 같은 구조물, 그리고 생명원리를 암시하는 드로잉이 어우러진 차기율의 작업은 생명사상이나 생태담론적 비전을 향해 열려 있다.                            

주소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경춘로 2110번길 8

대표번호 : 031-594-8001  |  팩스 : 031-594-6325

이메일 moran1990@hanmail.net 

모란미술관 ⓒ 2015. All Rights Reserved.

12190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경춘로 2110번길 8 모란미술관

대표번호 031-594-8001    |    팩스 031-594-6325    |    이메일 moran1990@hanmail.net 

모란미술관 ⓒ 2015.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