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전시

오색의 공간 그리고 나

전시명: 오색의 공간 그리고 나 

전시기간: 2007.12.15 - 2008.03.30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홍성도, 정  현, 김홍식, 이재효, 고틀립

전시내용:


五人五色, 空間과 나


조은정 | 미술평론가


  공간에 대한 인식은 시대마다, 민족마다, 학문마다 다른 틀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 펼쳐진 빈곳을 의미하며 시간과 함께 우리 물질계를 이루는 기본단위로 인식된다. 화면에서 대상이 그려지지 않은 빈곳, 또 건축적으로 다른 것으로 채워지지 않은 빈 곳을 이른다. 실상 건축은 그 빈 곳을 만들기 위하여 성립된 개념이니 비물질이 물질계를 형성하는 이상한 개념이 바로 공간인 것이다.


모란미술관의 다섯 방, 공간

  사랑하는 이를 묻고 그를 기리러 찾아와 잠시 쉬어가던 모란공원의 '휴게소'가 마음의 평화와 삶의 기록을 담은 미술관으로 모양새를 바꾸어 새로운 공간이 된 곳이 모란미술관이다. 모란공원의 휴게소는 죽음을 슬퍼하는 기운이 가셔지지 않은 곳이지만 사람으로 북적이고 이상스럽게 시끄럽고 분주히 움직이지만 고정된 이미지를 갖는 곳이었다. 현재의 미술관은 밝은 빛이 바닥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사방에 가득한 나무와 풀 그리고 작품을 보며 생을 찬미하는 조용하면서도 생기 가득한 장소이다. 같은 장소, 거의 유사한 풍경, 조금 변한 건물이 이렇게 다른 공간으로 인식될 수 있을까.

  모란미술관에는 다섯 방이 있다. 정확히는 여섯이지만 현관이자 진입공간이니 오로지 작품만을 위한 공간은 다섯이다. 이들은 넓이도 다르거니와 벽의 길이와 생김새, 빛이 들어오는 양이 달라 각각의 방이 나름대로의 특성을 갖는다. 대개의 관람자는 2층으로 입장하는데 2층이 1층인 셈이고 1층이 지하층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지하라고 생각했던 곳에도 지하공간의 특성인 어둠과 쾌쾌함이 아니라 창밖의 푸른 나무와 길 그리고 강한 햇살이 있으니 우리가 지닌 공간에 대한 인식의 허를 찔린 셈이다.

  금번 전시는 이러한 모란미술관에 존재하는 공간을 염두에 두고 공간에서의 인간, 인간이 담기는 공간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공간에 작용하는 여러 힘의 요인과 그에 대응하는 인간의 지각에 대한 탐구가 바로 전시의 주제이기도 하다. 공간에 대한 인식은 이제 시간과 분리되어 인지될 수 없는 인식의 문제로 논의된 만큼, 공간에 대한 이야기는 시간의 의미이며 공간과 시간으로 엮어진 역사적 장소의 의미도 담고 있다.

  동양의 전통적인 공간 개념 가운데 하늘의 별자리와 인간사, 동물의 상징을 견주어 해석한 〈천성금비지도>에 따르면 흔히 말하는 오방과 이를 지시하는 색상, 방향에 위치하는 동물을 접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드러난 사신도(四神圖)가 사방을 상징하는 방향의 동물임과 동시에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는 한 방식이 되어온 이래 한국에서 '오방'은 방향성과 장소성을 상징하는 주요한 개념으로 작용하고 있다.

  금번 전시는 모란미술관의 오방(五房)을 오방(五方)에 대입하여 개념을 풀어나간 것이다. 다섯의 미술평론가가 다섯의 작가를 추천하여 각각의 방위개념과 색상 그리고 각각의 색상이 담은 내용을 작품으로 풀어내고 이를 해석하는 작업이다. 다섯의 평론가가 함께 전시에 참여하는 방식도 색다르지만 각각의 방향성에 맞는 작가를 찾아내는 시각이 돋보이는 전시라 할 것이다. 즉 작가로서는 일종의 피드백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방향에 대한 비평가의 인식과 작품을 통해 받은 느낌이 반영된 전시인 것이다.

  이들 다섯의 비평가가 적용한 방위 개념은 우선 상징 색상에 의거한 것이다. 동서남북은 각각 파랑, 흰색, 노랑, 빨강, 검정의 색으로 먼저 작가들의 작품에 주조를 이루는 색에 의거한 작업을 물색하고 이어 작품의 재료나 표상세계를 방위개념에서 찾아내어 적용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분류 아래 각각의 작가들은 방위가 갖는 내용을 맞추어 작품을 설정하고, 평론가는 이를 해석하여 하나의 개념을 완성시킨다. 즉 이미 생산된 작업의 해석이 아닌, 작업과 전시개념을 융합하여 하나의 완성품을 만들어내는 이론과 실제 작품의 공동 작업이 바로 금번 전시의 특성인 것이다.


오인 오색의 공간

  전통적으로 방위개념은 방향에 머물지 않고 우주의 본질, 생명의 근원에 대한 상징을 갖는다. 고타마 싣다르타가 성안에서 머물며 인생의 이치를 알지 못했을 때 그는 성문을 나가 이전에 보지도 생각지도 못했던 세계를 접했다. 동문 밖에서는 얼굴에 주름이 지고 이빨이 빠져 이상한 몰골이 되어 버린 노인을 보았다. 남문 밖에서는 병에 걸려 신음하는 병자를 보았고 서문 밖에서는 생명이 다하여 죽은 시체를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문 밖에서는 일상의 생활을 접고 도를 닦고 있는 승려를 보았다. 이른바 사문유관(四門觀)이다. 이러한 인간의 삶을 보고 샤카국 태자였던 고타마 싣다르타는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사문유관은 왕자가 성자가 되기까지의 극적인 사건이지만 수많은 상징을 찾아낼 수 있다.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사방개념을 역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반어법과도 같은 우리 인식의 문을 두드리는 대화법인 것이다. 동쪽의 노인은 인간의 생명이 시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나무가 한창일 때 색은 파랑으로 인지되고 우리는 그러한 때의 인간을 청년(年)이라 한다. 그런데 그 푸름이 없어진 자리를 싣다르타에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남쪽은 붉은색이기에 불, 에너지를 상징한다. 그런데 화기가 넘치면 병이 되고 도 에너지가 소갈되면 환자가 된다. 그러한 단계를 보여준 것이다. 서쪽에서 만난 시신을 장사지내는 장면은 서쪽, 흰색으로 인지되는 알지 못하는 세계, 아무것도 없는 미혹한 죽음의 세계에 대한 상징일 것이다. 북쪽은 검은색인데 싣다르타는 여기서 수도승을 만났다. 검은색은 모든 것을 삼키는 블랙홀과 같은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실상 모든 것이 있는, 모든 색이 있는 무한의 공간이다. 다 있지만 아직은 없는 카오스와 같은 곳의 상징이다. 싣다르타 태자가 수도승 북쪽에서 만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각각의 방위는 색상과 인생의 단계와 미혹과 현명함 등을 모두 나타낼 수 있는 상징 언어이다. 또한 그러한 개념에 맞게 동쪽은 나무, 서쪽은 쇠붙이, 남쪽은 광선, 북쪽은 돌, 가운데는 흙을 상징하는 전통 동양의 사상은 다섯의 방에 다섯의 개념이 무한히 펼쳐질 수 있는 가능성의 증거가 된다.

  윤범모는 조각가 정현의 검은색을, 정준모는 사진작업을 하는 홍성도와 중앙의 노랑색을, 최열은 금속의 판화작업을 하는 김홍식과 함께 서쪽의 흰색을, 최태만은 조각가 이재효와 함께 동쪽을 상징하는 파랑색을, 조은정은 미디어 작가인 바르후 고틀립과 함께 남쪽의 붉은색을 해석한다.

  이재효는 나무를 잘라내어 둥글게 만들어 공간에 던져놓기도 하고 천장에서부터 아래로 이어지는 세계를 만들기도 한다. 최태만은 “구체를 만들기 위해 전기톱으로 나무의 표면을 켜서 형태를 만드는 작업과정은 매우 인위적이지만 그것을 통해 나무의 물성이 전면적으로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잘린 표면의 투명도가 높을수록 그 내부의 복잡한 구조가 무질서로부터 질서를 잘 갖춘 조직으로 자리 잡는다. 그래서 그것은 피부를 절개하여 현미경으로 관찰한 세포 같기도 하고 왕성하게 운동하고 있는 세포들이 분열과 결합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동적인 순간을 결빙시켜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내부는 복잡하지만 형태는 단순한 그의 작품을 통해 자연의 구조에 대해 유추할 근거가 마련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동쪽의 상징인 파랑색을 나무의 생명력에서 찾아본 것이다. 나아가 그의 작업이 "버려진 것들, 볼품없는 것들, 쓸모없는 것들의 속살을 드러내는 작업의 과정에 대해 작가는 나무토막이 마치 '나는 나무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받아들인다."라며 노동력을 집중하는 작업방식에 대해 설명한다.

  최열은 서쪽의 방위개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오행(五行)의 서방西方)은 금(金)이니 여기 서쪽에선 강철판이 제격이다. 낡은 추억을 이토록 싱싱한 금속에 정지시켜 둠으로써 그 풍경의 순간이 무엇이냐고 묻게 하고 있으니 지금 내가 서쪽 강가를 따라 달려온 우연의 그 뜻과 일치하는 게 아닐까. 서경(書經)의 ‘홍범(洪範)에 네 번째 숫자에 해당하는 쇠 금은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 매운 맛' 이라고 하였다. 또 사기(史記)에 태백(太白)은 금성(金星)인데 이는 가을을 주관하며 사형(死刑)을 주관하는 별자리이다. 금성 다시 말해 샛별은 별자리의 사궁(宮) 가운데 서궁(宮) 백호(白虎)이다. 서궁의 별인 샛별은 하늘의 무기고로써 군대를 일으켜 폭력을 막는 일을 주관하고 농지와 수리시설을 주관하며 거기엔 정원, 창고, 감옥이 자리잡고 있으니 파수꾼으로 권력을 수호하는 궁궐인게다."

  최열은 김홍식의 작업에서 '지금' 서쪽인 서구제국주의의 재판을 보았다. 김홍식의 알루미늄판을 부식시켜 평면처럼 보이는 판에 형태를 새기는 작업방식에서 재료로서의 금속을 다른 나라에서 이방인이 되어 있었던 그 느낌에 대한 집중에서 서쪽의 세계를 그리고 결과물의 차가운 백색에서 색깔을 추려내었다.

  조은정은 외국인이면서 한국에서 활동하는 작가 고틀립을 보며 처용이 활동하던 당시를 떠올리며 외국인으로서의 처용, 그의 모습으로 남은 공간을 상징하는 처용무에 주목하였다. 남쪽은 붉음, 광선, 그리고 에너지를 상징한다. 광선과 발산하는 소리, 기계를 사용하는 고틀립의 작업은 이러한 남쪽을 상징하는 개념에 어울리는 작업이다. 유럽에서 라디오의 음향작업으로 널리 알려진 고틀립이 색이라는 것을 공간으로 확산시키는 작업을 통해 관객에게 보여주려는 것은 남방→붉음 →태양→기(氣)로 상징되는 인간이 존재하도록 가능하게 하는 힘을 가시화하는 작업이라고 보았다. 긍의 소리조각과 영상작품을 통해 구현되는 공간은 물질의 세계가 보이는 것에만 있지 않음을 강조한다고 평가한 것이다. 복합적인 기계장비와 고객의 참여로 이루어진 고틀립의 작품을 통해 현재진행형인 우리 시대 미술인 미디어 아트, 사운드 아트의 현재를 조명하였다.

  정현은 석탄과 침목, 전봇대를 이용하여 인간상과 인간사를 조명한다. 방위는 북이며 검정색을 개념으로 한다. 윤범모는 “정현은 같은 돌이라 해도 화강암이나 대리석 같은 고급석재보다 아무데서나 쉽게 주을 수 있는 막돌을 즐겨 선택한다. 건축 자재로도 사용할 수 없는 이른바 쓸모없는 돌덩어리다. 이들 막돌은 모양도 없지만 결조차 일정하지 않아 다루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불규칙한 성질의 돌을 통하여 작가는 우연성을 발견하게 되고, 또 작업과정에서 조형성을 구축하게 된다. 처음부터 작가의 의지를 고집하기보다 재료를 다루는 과정에서 재료의 성질을 이해하고 상호 조화의 접점을 찾는다. 이는 탄광에서 직접 구입한 석탄덩어리 작업도 마찬가지이다. 제멋대로 생긴 석탄 덩어리와 시간을 지내다 보면 언제가 나름대로의 형상을 도출하게 마련이다. 작가는 이들 볼품없는, 다른 조소작가는 결코 관심조차 두지 않는 하찮은 재료와 교감하면서 새로운 생명 탄생의 길을 모색한다."고 평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대단한 것이 나오는, 어둠에서 깨치는 미망을 말하는 것이다.

  홍성도의 사진작업은 자연, 도시에 대한 조명을 보여준다. 그는 도시풍경을 특유의 해체화한 시각에서 '재현' 한다. 프랙시 글래스에서 파편화된 이미지로 존재한 도시는 생경하고 그렇게 보일리 없어라고 말하게 한다. 눈에 비친, 글래스에 비친 풍경이 실재인가에 대한 의문을 동반하는 것은 그가 한때 매우 리얼하게 재현하는 조각 작품을 구현하던 조각도였다는 데서 시작된다. 관광객은 한 도시를 다 보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가 보았던 몇몇 건물과 사건, 사람들의 이미지에 대한 기억일 뿐이다. 공간에 대한 기억, 그것은 결코 연속일 수 없는 것으로 모두가 함께하는 도시일지라도 극히 개인적인 기억에 의해 재생되는 특정의 공간이다. Tourist' 시리즈를 통해 우리는 보는 것, 기억하는 것의 의미에 대해 자문한다. 결국 이 다섯의 작가들은 사문을 나섰던 싣다르타가 보았던 방식으로 자신이 본 세계에 대한 인식을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다시 설명하여 준다. 그들이 본 공간, 그들이 보여주는 방식은 매체에서, 방식에서 다를지라도 관통하는 하나의 요소가 있으니 바로 생명성에 대한 관심이다. 인간이 깃들고 인간이 소통하고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상념들이 다섯의 방에 쏟아져 들어와 있다.

  그리고 하나 더, 전시 부대 행사로서 늘상 있어온 일반인이나 학생들을 위한 행사 이외에 장애인과 외국인 노동자와 그 자녀를 위한 행사 등을 계획하였다. 미술을 통해 사회적 소통을 추구하며 함께하는 세상에 대한 인식을 더욱 확산시키는 것이다. 생명성, 그것은 동쪽이든 서쪽이든 가리지 않고 인간이 추구해온 간절한 것이며 인간종은 그 생명성을 공유하기를 희망함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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