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놀이와 莊嚴 두 번째: 응시-나를보다
전시기간: 2007.05.22 - 2007.06.17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강애란, 배병우, 서정국, 석철주, 전수천
전시내용:
놀이와 莊嚴 두 번째
응시 -나를 보다
조은정 | 미술평론가, 서울벤처정보대학원대학교 교수
“모든 것은 변하고 있으나 아무 것도 죽지는 않는다. 영혼은 여기저기를 방황하다 마음에 드는 뼈대를 취한다..… 따라서 한번 존재한 것은 다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존재하게 되니, 모든 운행의 주기는 반복한다." (오비디우스, 메타모르포시스)
실 한 타래
삶의 여정에서 결코 헤쳐 나갈 수 없는 듯이 생각되는 위험이나 어려움을 딛고 일어선 영웅은 궁극적인 평화를 얻는다. 매우 어렵고 힘든 자아발견과 자아발전을 추구한 결과, 생명의 바다 건너편에 정박할 수 있게 된 것이다."1) 하지만 애초에 길을 나설 때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속한 사회나 민족의 일반적인 노선을 택함으로써 위험부담이 적은 길을 택한다. 통과제의, 은총 등의 사회적 상징을 통해 구원받는 것이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자신의 내부에서 소명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가슴에 미노타우루스의 미궁을 안고 사는 것과 같다고 했다.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다는 미궁(迷宮)을 테세우스가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리아드네가 건네준 실타래 덕이었다.
아리아드네에게 ‘실타래’를 가르쳐준 이는 바로 미노타우루스 궁을 설계하고 건설한 장인 다이달로스였다. 사랑으로 가득한 마음을 안고 들판으로 달려간 아리아드네는 거친 마를 훑고 갈기갈기 찢어 헝클어진 줄기들을 모아 실을 자아내 실타래를 만들어 내었다. 그래서 ‘아마로 만든 실타래' 에는 그 어려운 난관을 의미하는 고행과 더불어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만 실이 만들어지는 '시간'이 녹아 있다.
장인이자 과학자, 예술가인 다이달로스는 외모는 추했으나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아내를 둔 이다. 그는 자기 예술의 도덕률에만 봉사하는 인간을 상징해왔지만 단순하고, 용기에 차 있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 확신하는 영웅이었다.2) 미궁을 헤쳐 나오는데 필요한 방법을 아리아드네에게 가르쳐 준 것과 같이 다이달로스에게 달려가면 그는 우리에게도 실타래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다만 아리아드네처럼 아마를 훑고, 잘게 쪼개고, 헝클어진 것들을 잡아 가닥을 이루고 실을 자아내야 하는 힘겨운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어찌되었든 다이달로스라는 자신의 미궁을 평정할 꿈을 가진 평범한 이들의 희망이자 지도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큰 위로가 된다. 미술이 우리에게 자아발견의 계기를 제공하거나 끊임없이 의식을 담금질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장인이나 미술가를 상징하는 인물이 다이달로스인 것은 자명하므로, 한편 스승의 지도에 따라 직접 인생을 직시하고 자아를 발전시키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최종적인 진도는 말을 통하지 않은 침묵의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석가모니에 의한 불교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석가모니라는 이름 자체가 '석가족의 조용한 자(muni)' 라는 데에서도 깨달음의 경지, 궁극적인 가르침은 침묵 속에 이루어짐을 알려준다.
자아를 추구하는 경향이 적은 미흡한 인간들을 위해 스스로 병이 든 사람이 2500년 전 인도 바이샬리 성에 살고 있었다. 가난하고 의지할 길 없는 이들을 구하기 위한 그의 재물은 고갈될 줄 몰랐다. 그는 법을 어기거나 정도를 넘은 자들을 돌보기 위하여 청정한 계율을 지켰으며 난폭하고 성내고 질투하고 악랄한 이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자기 통제를 잘 하였고 모든 게으른 이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대정진을 하였으며 일체의 흐트러진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선정, 정념, 해탈, 삼매에 머물렀으며 모든 잘못된 생각과 나쁜 지혜를 거두도록 하기 위하여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는 비록 세속의 옷을 입었지만 승려의 위의와 공덕을 갖추었으며 집에서 살았지만 삼계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아내와 자식이 있었지만 늘 청정한 행실을 닦았다. 주위에는 사람들이 들끓었지만 늘 혼자 있기를 좋아하였고 보석으로 장식한 옷을 입었지만 늘 상호(相好)로 몸을 장엄했고 비록 음식을 먹고 마시기를 했지만 늘 선정과 최고의 삼매 경지를 맛보았다. 비록 바둑이나 장기 같은 오락을 함께 즐겼지만 실제로는 그들을 성숙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욕망의 사악함을 보여주기 위해 음란한 곳에도 들어갔고, 술을 마셔도 정념정지를 잃지 않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유흥가에서도 노닐었다.
평소 품행이 이러할진대 여러 사람들의 스승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자들 가운데 있으면 장자들의 어른이 되었는데 법의 뛰어남을 잘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었고 거사들 가운데 있으면 탐욕과 집착을 끊은 탓에 그들의 어른이 되었으며 장군들 사이에 있으면 인애와 굳센 의지와 불굴의 용기를 길렀기 때문에 그들의 어른이 되었다. 귀족들 가운데 있으면 오만과 허영과 교만을 없앤 탓에, 대신들 가운데 있으면 법에 따라 정사를 다스린 탓에 그들의 어른이 되었다. 왕자들의 집착을 고귀한 기쁨과 최상의 능력으로 전환시켰기 때문에 그들의 어른이 되었으며 서민들의 뛰어난 복덕을 잘 알기 때문에 서민들 가운데 있으면 그들의 어른이 되었다. 그의 이름은 유마힐로서 중생들에게 한량없는 이익을 주었는데 그가 몸에 병을 나타낸 것도 병을 이유로 진리를 설법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병문안온 모든 이들에게 알려준 최초의 가르침은 '몸'에 대한 것이었다. 강하지도 굳세지도 못하고 힘도 없는 무상한 것으로 너무나 빨리 썩기 때문에 믿고 간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허물과 근심이 많은 것으로 어차피 무너지기 마련인 것이 바로 몸으로 부서지기 쉬우니 오래된 우물이 말라붙듯이 늘 노쇠함의 핍박을 받으며,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죽기 마련임을 인식시켰다.3) 현상계에 집중하지 말라는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이는 “이 몸뚱이는 죽어 없어지지만 이 몸속에 와 계시는 실재(self)는 영원하며 불멸이며 무한이니라”는 인도 고래의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4)
결국 우리에게 지도자들이 이끄는 세계는 신화적인 상상력이나 상징으로 인해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일지라도 궁극의 경지는 자아를 인식하고 발전시키는 일이다. 융(C. G. Jung, 1875-1961)은 이를 일러 자기실현' 이라 했다. 무의식의 깊은 바다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 세계에서 뿜어내는 진실한 목소리를 감지하는 것이 바로 자기실현의 역사라는 것이다. 곧 삶이란 자아가 참된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으로 바다 위에서 출렁대는 파도와 같은 자아가 수천 해리 깊이를 지닌 마음의 중심인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것이다.5) 하지만 중심을 향한 여정은 결코 평탄치 못할뿐더러 상징이라는 신화의 언어를 상실한 현대인은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하기 마련이다. 어둠의 세계에 있는 자기의 세계를 밝은 빛이 존재하는 자아의 세계로 끌어올리는 과정이 곧 자기실현의 과정, 곧 깨달음의 과정이라는 융의 주장에 기대어 보면 인간 모두가 그 세계의 실현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리아드네에게서 아마로 만든 실 한 타래를 건네받은 테세우스의 모험이 더욱 흥미진진하고 실현가능했던 것처럼. 아마 실타래를 들고 우리를 기다리는 아리아드네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듯하다. 모든 장인의 신 다이달로스를 찾아 공방에, 아틀리에에 그리고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서성이다가 가끔씩은 흥미진진한 경험을 하는 존재들이 우리 자신인 것을 보면 말이다.
응시, 지혜의 함성
'응시'는 막연한 '쳐다봄'이 아니다. 생의 여정에서는 나를 찾는다는 일정한 목표를 향하여 행하는 '행위' 이다. 인간은 현상적인 자아와 융이 말한 참된 자기인 초월적인 자아로 이루어져 있기에 인간 생의 여로는 궁극적으로 초월적인 자아를 찾는 과정이다. 이름, 형상들로 이루어져 때가 되면 용해되어 버리는 현상은 변화하는 사물, 영원한 실재가 아닌 에너지의 무상히 소멸하는 반향들일 뿐이다. 인도인의 철학에 따르면 밖으로 향하는 감각 능력으로는 대상을 포착하고 이해할 수 있을 뿐, 영원의 실재에 접할 수는 없다. 어떠한 감각과 쾌락과 경험도 의식에게 생명의 풍요로움에 대한 비밀을 가르쳐 줄 수 없다는 것이다.6) 참된 자아의 감추어진 진리를 깨닫기 위하여 인간은 두 가지 방식을 택한다. 영화 <매트릭스> 또는 〈트루먼 쇼〉처럼 눈앞에 보이는 세계를 환상으로 간주하
는 체계적인 경멸방식이 그 하나이고 성철스님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라고 한 일체 순수한 물질성을 철저히 깨닫는 방식이 다른 하나이다.
자신에 대한 응시, 내적인 자아에의 집중은 내면의 목소리, 참된 자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다이달로스가 가르쳐주고 아리아드네가 건네준 한 타래의 실 뭉치를 들고 미궁을 향해 들어가는 영웅처럼 내적 심연으로 들어갈 일이다. 『우파니샤드』에서도 “보이지도 않고 말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추정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고 그릴 수도 없다. 의식 상태에 있는 만물이 공유하는 자기 인식의 본질, 현상계는 이 안에서 소멸한다. 이는 평화요, 행복이요, 비이원적이다”라는 그 심연을 향한 여행은 순환한다. 현상계가 소멸한다는 그 세계를 향한 여행을 현상계에서 출발하는 아이러니는 현상계의 인정을 통한 비현상계에의 인식을 의미한다.
우리 삶에서 현상계의 이면 또는 현상계의 첨단을 보여주는 분야로 미술만큼 적합한 예는 드물 것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색과 형태라는 '현상'을 매개로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미술가는 의식적이든 아니든 다이달로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이 만든 부조리하고 삶을 옥죄는 현상의 세계를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이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생의 비밀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렇다면 들판에 심겨진 아마를 찾아내 그것을 베어내고 추스르는 일은 오로지 우리의 몫인 셈이다. 일상 생활에서 미술가는 종교단체에 속하였든 그렇지 않든 그 어느 존재보다 내적 탐구의 여행을 자주 떠나는 이들이다. 금번 전시의 제목인 ‘응시’는 실은 ‘내적 탐구'가 주제임을 드러낸다. 아래 작가 다섯은 각기 자신의 시선으로 현상계를 해석한다. 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예술가 특유의 예지력과 용기를 공유한 서정국, 석철주, 강애란, 배병우, 전수천은 현상계를 통한 궁극적인 자기의 내면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우리를 각성시킨다.
마음속의 대나무
중국의 문호인 소식(蘇軾, 소동파, 1036-1101)은 시(詩)도 잘 썼지만 그림에 대한 이론(畵論)도 높은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기에 여러 인사들과 깊은 교유를 갖고 있었다.
“대나무를 그릴 때는 반드시 먼저 마음속에 대나무를 완성하고 붓을 들고 자세히 바라보아야 그리고자 하는 것이 보일 것이니 그때에 급히 서둘러서 붓을 휘둘러 곧바로 그려내어, 보인 것을 따라잡아야 한다. 마치 토끼가 나옴에 새매가 쏜살같이 내려와 채가듯 해야 할 것이니 조금이라도 늦추면 토끼는 이미 달아나버릴 것이다. 문여가(문동)가 내게 이러한 것을 가르쳐 주었으나 나는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알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그러한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은 안팎이 한결같지 않아 마음과 손이 서로 응하지 않아서이니 배우지 않음의 잘못이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보이는 것이 있어도 그것을 잡기를 익숙히 하지 않는 자는 평소 스스로 알고 있으면서도 일에 임하여는 홀연히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어찌 유독 대나무에서만 그러하겠는가?"7)
서정국 〈대나무〉를 대할 때마다 소식의 '마음속의 대나무' 라는 글귀가 떠오르곤 하였다. 심상을 따라 그림을 그린다는 화론을 조각에서 느낀다는 것, 그것도 현대적인 물성의 맛이 물씬한 스테인레스 스틸로 만든 대나무에서 전통의 맛을 느낀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하지만 은백색의 스테인레스 스틸 대나무는 먹으로 쳐낸 죽(竹)처럼 한 가지 색으로 이룬 여러 색깔로 다가왔다. 또 하늘로 향해 곧게 뻗어나가다 그리 높지 않은 위치에서 끝나버리고 말지만 무한정 솟아오르는 대나무처럼 느껴졌다. 잎사귀 하나없이 나무의 마디만이 존재하는 그 기다란 대롱들 사이에서 “쏴아하-" 하고 스치는 파도소리 같기도 한 잎사귀들의 두런거림을 듣곤 하였다. 반사되는 빛에 의해 각기 다른 색을 갖는 스테인레스 스틸의 대나무는 실상 둥근 대롱의 연결부들에 지나지 않으나 그것들은 공간에서 소리와 생명을 지닌 나무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는 '속이 비고 마디로 이루어진 것이 수직으로 서 있으면 대나무다'라는 관념에 의한 결과일 것이다.
작가는 대나무뿐만 아니라 '갈대' 도 만들었다. 언젠가 그가 지칭한〈갈대〉와 〈대나무〉가 어떤 차가 있는지 그의 작품 앞에서 열심히 비교해본 일이 있다. 갈대라 이름붙인 것은 조금은 더 얇고 더 많은 것들의 조합을 보였다. 하지만 세부적인 특성을 비교할수록 갈대와 대나무의 다른 점보다는 오히려 같은 점을 더욱 확인해 들어가는 것이었다. 속이 비고, 마디로 이루어져 있고, 무리를 짓고, 바람에 흔들리고, 습기진 곳에 살고…. 그리하여 이들의 가장 큰 차가 갈대가 '풀'인 반면 대나무는 이름 그대로 ‘나무’ 라는 사실에 이르렀다. 대나무 잎은 가지에 나지만 갈대는 그 자신의 몸에서 잎이 돋는다. 30미터 이상 자란다는 대나무와 3미터 정도 자란다는 갈대의 유사성은 이것과 저것을 나누어 생각하는 사물에 대한 인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또한 미시적 세계와 거시적 세계의 유사성과 차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언젠가 문동은 소식에게 “한 폭의 좋은 비단에다 만 길의 대나무를 그려보리.”라는 시를 전하였다. 이 시를 받은 소식은 답하여 말하기를 “대나무의 길이가 만 길이면 의당 비단 250필을 써야 하니 형께서 그림 그리기를 게을리 한 이유를 알겠소이다. 형은 그저 이렇게 큰 비단을 얻는 데에만 마음이 있구려!" 라 하였다. 이에 문동은 세상에 어찌 만자나 되는 대나무가 있겠는가 라며 사과를 전해왔으나 소식은 다시 “세간에도 천 길의 대나무 있으니 달빛 받은 그림자 그쯤은 되리라”는 답을 통해 만 길이 가능한 대나무에 대해 말했다. 사물의 본질을 그림자와 비견함으로써 허와 실 또는 사물과 그림자 모두 하나임을 말한 것이었다.
서정국은 현상계의 외면, 우리가 그러하다고 생각해온 생명들의 본질에 대한 작가들의 성찰이 배어 있는 작품을 보여준다. 폐기처분된 철사들을 구부려〈풀잎〉을 만들었다. 풀잎과 철사의 속성은 다르나 외향은 아주 유사하다. 마디로 이루어진 파이프의 연결은 둥글게 말아 올라가고 있어 수직으로 벋어있어야 할 대나무의 본질에서 어긋나 보인다. 하지만 뿌리를 박고 자라는 나무는 바람에, 또 주변에 의해 덧없이 흔들릴 수도 있고 마디가 있다고 다 대나무라고 할 수도 없다. 〈갈대〉드로잉은 둥근 점의 수직적인 연결을 보인다. 아마도 갈대를 위에서 본다면, 또는 갈대의 잎을 제거하고 줄기만 본다면 이러한 공허로 가득할 것이다. 결국 작가는 속성은 다르나 유사해 보이는 것, 나무나 풀로서 그 성격이 다르지만 식물로서의 본성은 같은 것, 그들 생명성의 근원에 대한 응시를 통해창창한 대나무 숲과 숨 막히는 쇠 나무 숲이 기실 다르지 않은 세계임을 보여준다. 외면은 유사하나 그 본질은 다른 것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하여 결국 나무의 빈 마디 속처럼 공허하고 공허한 삶의 유추를 통해 내적인 공(空)을 찾아 진리에 다가가는 것이다.
산은 산일뿐
석철주는 전통에 충실한 작가로 평가되어 왔다. 소재에서 장독, 탈춤, 백자항아리, 산수 등 전통의 영역에서 보아오거나 옛날의 생활을 담은 것들을 화면에 옮겨왔기 때문이다. 장독대 자체의 미학을 차치하면 어린 시절 장독대에서 잠자리를 잡는 그를 보고 장독을 깰까봐 마음 졸이던 어머니에 대한 추억, 작은 항아리에 담긴 소박한 생활, 탈춤을 보며 느낀 힘찬 동세 등이 그 작업의 내용이라고 치면 당당히 ‘전통’의 선에서 이해되던 것들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추억을, 경험을 사회적 의미로 확대하는 데 성공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석철주의 ‘생활일기’ 는 사회적 상징을 담보한 한 개체의 현재 진행형적인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반영이다.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에서 빌어온 소재인 〈생활일기(신몽유도원도)〉 또한 그의 마음속에 그린 산수, 흉중구학(胸中丘壑)임에 틀림없다. 언젠가 단지 ‘신몽유도원도' 라는 제목에 착안하여 그의 작품을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비교한 적이 있었다. 물론 100센티미터가 넘는 두루마리 비단에 담채로 그린 안견의 그림과는 확연히 다르겠지만 기법이 아닌 구도와 산의 형태 등과 어느 곳 닮아있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했던 것이다. 부질없는 짓을 통해 그나마 얻은 것은, 흐릿하고도 아련하여 카메라로서는 포착하기 어려운 ‘예민한 신몽유도원의 산수가 그리도 장쾌하고 울울한 산처럼 느껴지는 것은 안견의 산수가 보여주었던 구축성이 바로 이 곳에서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는 점이었다. 결과는 ‘꿈처럼 아련' 하지만 지난 밤 꿈에서는 그토록 생생하던 눈앞의 정경이라는 실체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 드러나 있는 것이다.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3일 만에 그렸다는 안견의 <몽유도원도〉에는 인간이 거주하는 현실계와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는 이름의 이상계인 두 세계가 공존한다. 좌측에서 우측으로 읽어나가든, 우측에서 좌측으로 읽어나가든 두 세계는 구분되어 있고 한 번 지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세계이다. 이 두 세계를 가로지르는 물(폭포)의 이미지는 견고하게 성과 속을 가르는 전통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석철주의 산수에서는 공간을 가르는 폭포를 찾을 수 없음에도 폭포를 느끼고, 도화꽃 만발한 장소가 드러나지 않음에도 흐드러진 도화의 자태를 본다. 모든 것이 그 자리에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지나간 과거는 지나갔으니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없고, 현재 또한 자꾸만 지나는 찰라일 뿐”이라는 시간의 관념은 '공(空)' 을 설명하기에 적절한 말이다. 하지만 지나간 것이 있기에 현재라는 개념이 있고, 미래가 있기에 현재 또한 있는 법이다. 이것이 있으매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매 이것이 있다는 연기(緣起)야말로 우리 존재에 대한 이해를 보다 확실히 해주고 있지 않은가.
석철주의 산수는 없음을 드러내기 위한 있음의 표현이요, 있음을 부정하기 위한 없음의 행위이다. 이러한 과정은 무엇보다 그의 작품을 표현하는 작가 특유의 기법에 투사되어 있다. 먼저 캔버스에 밑칠을 한 다음 그리려는 주된 색을 칠한다. 청색 산수를 그리려면 청색을, 붉은 산수를 그리려면 붉은색 계열을 칠한다. 바탕색이 마르면 흰색을 칠하고는 마르기 전에 맹물을 붓에 묻혀 그림을 그려간다. 그러면 붓이 지나간 자리에서 형태가 드러난다. 마음속의 형태를 흰 바탕에 색을 입혀 그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흰 바탕에서 색을 통해 형태를 건져 올리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평면에서 마음속의 산수를 찾아가는 방식은 지우고, 칠하여 가는 첨삭과 소거라는 단순한 방식을 통해 세계를 구축한다. 결국 그에게 있어 첨삭이나 소거는 동일한 결과를 위한 다른 방식일 뿐인 것이다.
<몽유도원도〉는 제목을 통해 '한갓 꿈과 같은 세상에 대한 은유' 를 드러낸다. 눈앞에 펼쳐진 무릉도원이 눈을 뜨면 실체가 사라진다는 사실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그렇다면 우리가 인식하는 삶의 모습, 눈앞에 보인 세상은 과연 진실일까 의심도 해볼 만하다. 인도에 살았던 현명한 자 유마는 일체의 본성과 모습은 모두 허깨비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일체 모든 것은 덧없는 것이니 단 한순간도 머물지 않는다고 했다. 모든 법의 성품은 다 허망하게 보이는 것이 꿈과 같고 불꽃과 같고 신기루와 같다고도 했다. 왜냐하면 모든 법의 성품은 모두 분별심에서 시작된 때문인데 분별심이 일으킨 영상은 마치 물속에 비친 달과 같고 거울 속의 영상과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체의 모든 것은 마음이 건립한 것이니 아무리 높은 산도 아무리 깊은 강도 두려워할 이유가 하등 없다. 다만 산을 세우고 다시 지워내고 또 다시 세우는 것은 자연이 그러하듯 우리 삶도, 인식도 그러한 자리에 있음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강을 건너는 뗏목
강애란은 전시실에 인류 지혜의 보고(寶庫)인 도서관을 짓는다. 가지런히 꽂힌 책들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진 삶의 경험과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희망의 축적물이다.
“나는 지식의 유목적인 방랑을 담아내는 책 본래의 사이버적 정체성을 통하여 디지털 시대에 새로운 언어와 지식, 소통의 차원들을 책이라는 모티브를 통하여 발견하고자 하였다. 디지털 북 프로젝트는 세계 유수의 서점들을 찾아가서 사진을 찍고, 책을 고르는 사람들을 비디오에 담는다. 이러한 서점 사진과 비디오로 구성된 이미지를 전시장 벽면 가득히 프린트하여 부착하고 그 위에 빛나는 디지털 책들을 설치함으로써 가상의 책방을 완성한다. 빛나는 디지털 책들, 이를 쳐다보는 전시장의 관객 등이 구성하는 형식적, 주제적 구성은 빛이 나는 요소들을 더 함으로써 보다 높은 극적 효과를 추구한다.
최근작 〈The Virtual Book〉은 특정 공간에 미디어 인스톨레이션한 작업으로 이러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하나의 벽면에는 실버 마일러지에 디지털 프린트된 책방 이미지를 벽 개념으로 천정에서 바닥까지 부착하고 반대쪽에는 벽면 가득히 영상이 투사된다. 이로써 가상의 책방이 완성되며, 공간 안에 놓여진 플라스틱 책상 위에 불빛이 장착된 플라스틱 책들이 놓여진다. 이 가상의 책방에 들어선 관객은 책을 만지는 행위를 함으로써 그 책 안에 담긴 내용이 프로젝션됨을 알 수 있다. 이는 책이라는 것이 이 디지털 시대에 단지 책으로 읽혀지는 것이 아닌 무한한 깊이와 부피를 내포하고 있는 새로운 개념의 공간임을 말하고자 함이다"
인류의 자산이며 모든 지식을 분류하고 체계화시킬 수 있는 기본 단위라는 책이 갖는 아우라는 신성에 도전할 지경이다. 중국에서의 분서갱유(焚書坑儒), 나치의 자유주의 책자의 분서, 신실한 기독교도들이 성서 이외의 책을 태우는 장면이 삽입된 영화에 이르기까지 책을 태우고 부정하는 많은 사건들이 우리 역사에 존재한다. 이러한 '책' 존재에의 도전은 책이 지닌 강력한 힘을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문자열로 이루어진 책의 존재성은 인식의 문제에 있어 갈등을 촉발시켜 왔다. 특히 불교에서는 '책을 읽지 말라' 는 말로서 자신의 내면에 집중할 것을 강조함으로써 다른 이의 인식을 주입시켜 결과적으로 혼자 깨고 나가야 할 껍질을 다른 이가 깨줌으로써 알 속의 개체가 죽어버리는 결과를 경계한다. 또 이는 이미 문자화되는 과정에 고착되고 사장된 죽어버린 진리에의 접근을 경계하는 것이기도 하다.
책은 문자들의 집합체이다. 사고의 도구인 언설을 기록한 행위인 문자와 그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책은 말이 갖는 능력의 엄청난 저장소라 할 것이다. 인간의 말은 우주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 감응케 하는 주술적인 힘이 있는 것 중 하나이다. 만트라(Mantra)는 바로 이러한 말이 갖는 에너지, 도구를 상징한다. 순수한 말들은 엄청난 힘을 갖기에 '비밀주'가 되기도 하지만 일상 생활에서 책이란, 문자란 과연 진실만을 담고 있을까. 또한 언어가 끊어져 문자가 없는 곳에 도가 실현된다고 하였다. 불교 최고의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서 결국 문자가 아닌 것으로 '전수'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자와 책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 수 있을까.
무착스님의 진리에 대한 탐구방식에 대한 글을 쌍림스님은 우리가 알기 쉽게 풀이하였다.
“강을 건너려면 모름지기 뗏목이 있어야 하지만/언덕에 이르면 배는 필요 없는 법/아집이나 법집을 모두 집착이라 이름 하지만/ 이 치를 깨달으면 뉘라서 힘들게 설명을 하랴/누가 두 언덕이 있다고 말하는가/유 · 무 가운데 한쪽을 선택한다면/곧 마음이 더럽혀지리라.”8)
지혜의 궁전인 도서관은 그 넘치는 '과잉' 으로 인해 결핍, 혹은 내핍의 단계인 문자가 존재하지 않는 존재성인 또 다른 지혜의 궁전을 생각게 한다.9) 극단적인 일을 강요받았을 때 반대의 일을 생각게 되듯 책을 통하여 진리에 이를 수 있다. 유마는 사원에서, 일상에서 깨달은 자를 찾아다니지만 정작 그 실체는 없음을 보았다. 모든 생명있는 것들과 인간이 내뱉는 모든 말들과 성품도 그러한 것이다. 따라서 실체를 볼 수 없는 말의 현상화 도구로서 문자는 그 실체가 있는 것이라 할 수 없다. 지혜가 있는 자들은 문자에 집착하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였다. 일체의 언어가 그 자체 고유한 성품도 없고 그 자체 고유한 모습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일컬어 도라 하며 무엇을 일컬어 진리라 하겠는가. 결국 우리 자신에 대한 의문,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에 대한 의문들이 고개를 든다.
뗏목은 강을 건너기 위한 것이지 둘러메고 다니는 것은 아니다. 문자를 통한 진리는 개념에만 집착할 가능성이 크기에 오랫동안 선사(禪師)들은 문자를 경계해 왔다. 이런 면에서 강애란의 작업은 가상과 실재, 형식과 내용이라는 측면에서 여느 '책' 작업들과 구분된다. 손으로 만졌을 때 투사되는 책의 내용은 손에서 떼면 사라지기 마련이다. 또 책에 적힌 제목인 글자의 의미 그대로 보여지는 책 속의 세상은 상상에 의해 구축된 존재로서 상호관계성을 통해 실체를 갖는다. 언설의 형상화된 문자가 다시 상상된 문자의 의미를 통해 구체적인 물상으로 현현함으로써 책은 새로운 공간을 창출한다. 지식의 유목적 방랑을 본질로 하는 책은 작가가 지적하는대로 오늘날 사이버 세상과 닮아 있다. 실체가 아닌 세상에서 가상의 존재끼리는 서로가 실체이지만 실체의 눈으로 본 실체는 오직 그러할 뿐인 것이다.
뜰앞의 잣나무
전통적으로 소나무는 하늘과 땅의 매개체로 인식되어 왔다. 소나무에 흰 종이를 매어 신간(神竿)으로 삼은 것이나 왕릉을 조성할 때 주변에 소나무를 심었던 것 등이 이를 증명한다. 왕릉을 조성하고 소나무 숲을 조성해온 전통은 소나무에 시간을 통한 역사성과 과거 존재했던 사람의 무한한 고귀함을 부가하였다. 소나무 숲에서 여느 관목류의 숲과 달리 ‘사람' 을 느끼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소나무의 신화성을 제외하고라도 우리 주변에 있어온 나무였기에 친숙함에 더하여 오랜 역사성은 나무라는 식물을 '전통'의 상징으로 이해할 근거가 된다. 생물학적 식물인 나무가 문화적 상징성을 지니면서 무한한 지속성인 시간과 꿈틀대는 동물적 생명의 이미지를 획득한 것이다. 물론 여느 나무와는 다른 둥치의 곧음과 휘어짐이 공존하는 특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소나무라는 말은 꿈틀대는 나무의 몸체를 먼저 떠올리게 한다.
배병우가 "경주 경애왕릉의 소나무 숲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는 것은 미학적 의미를 담은 말이겠지만 자연의 일부로서 소나무가 역사로서, 사람의 일로서 다가왔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분명 하얀 눈밭에 점점이 뿌려져 전신을 드러내던 소나무와 경애왕릉의 소나무는 다른 화면을 드러낸다. 필자는 가지와 솔잎과 몸 전체를 드러내던 90년대 배병우의 소나무 사진에서 정선의 진경산수에 드러나는 송간(松間)을 보았었다. 겸재 정선의 산수화가 관념이라기보다는 실체로 다가온 이유가 바로 산중턱에 울울한 몇 개의 선으로 이루어진 그 송간묘선의 조화가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림 속 저 멀리서 상징화된 형태라 생각했던 그 소나무의 모습이 사진의 현실감과 현장감을 그대로 드러내며 산 속 소나무가 바로 그러함을 배병우의 사진이 보여주었다. 18세기 화가의 손에서 구현된 세계를 갤러리의 벽면에서, 그것도 도구가 다른 작업에서 확인하는 일은 경외심을 동반하였었다.
90년대 소나무 작업에서 바로 산수화의 그것처럼 그 가운데 노닐고자 한 자연의 공간을 보았다면, 경애왕릉에서 시작한 소나무 작업에서는 심상의 공간을 보았다. 흑백화면일 때 근경의 소나무는 짙은 농묵으로, 원경의 소나무들은 담묵이나 파묵으로 ‘그려진 듯이’ 서 있다. 채색을 배제함으로써 사물의 진실과 자신을 투사하여 정신성을 나타내고자 했던 옛 문인의 공간을 보여주는 것이다.
심지어 색채가 사용된 작업에서조차 어둠 속에 드러나는 소나무들은 아직 어둠을 그대로 간직한 채색, 물상적 채색의 공간인 담채(淡彩)의 맛을 담고 있다. 자연을 채택하여 기록한다기보다는 작가의 손에 의해 그려지는 것처럼 그 공간은 작가의 세계관과 그가 보는 세계를 우리 앞에 드러낸다. 배병우의 ‘소나무 숲’은 어스름한 새벽공기 속에 존재를 드러내는 나무들의 꿈틀거림, 쏟아지는 차가운 공기의 현전성 등으로 가상 같은 실체의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림같은 풍경’ 이란 것을 체득시키는 그의 작업은 어둔 밤에서 시작한다. 새벽이라 하기에는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감싼 모든 물상이 잠든 고요한 밤, 아직 어둠이 주위를 감싸고 있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공간에서 카메라를 준비한 작가는 무한정 숲을 본다. 어둠 속에서 숲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있음을 아는 것이다. 냄새, 소리 그리고 그들이 뿜어내는 존재성에 의해. 그렇게 무한한 어둠을 지켜보다 여명이 다가오면 작가는 드러나는 숲을 본다. 작가 자신이 전하는 ‘빛에 의해 사람이 되어가는’것의 느낌은 숲과 나의 경계가 없이 버무러져 있던 혼돈의 시간에서 자연과 분리되는 순간에 대한 전언과 같다.
배병우의 소나무 숲을 그 여명의 시간에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이조차 실재로 그러한 듯이 여긴다는 것은 그의 작업이 혼돈과 분리, 자연과 인간,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탄생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빛에 의해 드러나는 형태를 포착하였다기보다는 분명 존재했었고 존재하건만 빛에 의해 마치 없는 듯이 놔두고 드러나야만 형태에서 어둠의 실체를 확인하는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다른 세계를 보는 것이다. 가득한 형태를 통하여 드러나는 빛이 아니라 사라지는 어둠을 보는 그 경계에서 불이(不二)의 법칙을, 이것이 있으매 저것이 있는 시간의 정지를 경험한다. 옛 선사는 “밝음 속에 어둠이 엇갈리니 고르게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느끼겠구려” 라고 하였다.10) 밝음과 어둠의 경계에서 정작 어려운 일 중의 하나는 그것의 평정함을 아는 일일 것이다. 마음을 닦아 궁극의 경지에 이르기를 희원하는 산사(山寺)로 향하는 길목에서, 한때 세상을 주름잡았으나 이제 땅에 묻혀 세월의 덧없음과 인간의 유한함을 증명하는 무덤 주위에서 소나무 숲을 만난다는 사실은 이 소나무 숲의 공간이 ‘평정' 과 연계되었음을 또한 증명한다. 무덤이라는 죽음의 공간을 앞에 두고 만나는 소나무에서 덧없는 생을 보는 것처럼 사찰의 고요함 속에서 나를 죽이고 만나는 적멸의 공간을 본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조주 스님의 “뜰앞의 잣나무라!”는 외침을 그의 소나무 숲에서 만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선종의 마조 스님 맥을 이은 단하천연(丹霞天然,739-824) 선사는 수도인 장안성에 관리가 되려고 갔다가 한 선승을 만나 승려가 되었다. 그가 낙양의 혜림사에 머물 때 추운 겨울날 법당에 모셔져 있는 목불상을 꺼내어 아궁이에 넣어 불을 지폈다. 그러자 절에 주석한 스님이 “그럴 수가 있느냐?”며 펄쩍 뛰었다. 이에 천연선사는 “나는 부처님을 태워서 사리를 얻으려고 하오”라고 태연히 답하는 것이었다. 사찰의 스님이 "목불인데 어찌 사리가 있겠는가?”라고 하자 천연스님은 “사리가 안 나올 바에야 나무토막이지 무슨 부처이겠는가?”라고 하였다.11) 이른바 단하소불(丹霞燒佛)의 이야기다. 이는 금강경』에서 말하는 “만약 색으로써 나를 보려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한다면 사도를 행함이라 능히 참 진리인 여래를 보지 못한다." 12) 라는 경고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전수천의 엄청난 바코드 바위 위에 앉은 불상을 바라보면서 단하소불의 고사를 떠올렸다. 미술에서 실체가 아닌 이미지의 문제, 그리고 사회적인 금전적 가치라는 성과 속의 결합성을 생각했던 것이다. 실지로 우리가 바코드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그것을 인식하는 일은 돈을 주고 무언가를 구입할 때, 또는 책을 빌려 도서관을 나설 때 등이다. 불상에 매겨진 바코드는 불상의 물질적인 가치를 의미한다. 하지만 정작 신성의 정점에 선 불상이 갖는 가치란 무엇일까. 재료로 치자면 하나의 땔감과 다를 바 없는 나무토막이다. 하지만 그 앞에서 예배행위를 통하여 자신을 투사하면 그것은 하나의 규율이며 속세의 것이 아닌 세계의 의미를 획득한다. 바코드 위에 앉은 불상은 그리하여 속세의 가치 문제와 성스런 영역의 이야기를 동시에 전한다.
지고지순의 영역, 인간이 지향하는 그 궁극의 경지에 이르는 길은 색즉시공(色卽是空)의 원리를 깨닫는 일이다. 부처라는 정신성의 영역에 있는 것으로 알던 부처가 바코드 위에 앉았을 때 이 현상계인 색의 세계가 허망하거나 심지어 비속함을 본다. 하지만 바코드 또한 하나의 상징, 약속에 불과함을 인식하는 순간 어차피 모든 것이 헛되다는 가르침 또한 귓가에 울린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거대한 망인 바코드를 통해 구별하고 이것과 저것을 분류함으로써 얻었던 많은 편리함이 바코드를 주재하는 주체의 권력에 의해 자신의 구분 기준과는 관계없이 분류되는 것을 또한 본다. 듀얼 이미지의 듀상의 옆얼굴 아래에 바코드가 있는 〈Two faces of Duchamp〉 또한 보편적인 인성에, 예술에, 사회와 물성에 다해진 ‘분류’ 라는 미명의 폭력을 드러내는 작업으로 이해된다.
'선'에 주목하여 생각의 골을 드러낸 많은 작품들 중에서 세기의 작업이라 할 미국 평원에 그린 '움직이는 드로잉' 은 흰색의 선이었다. 한편 바코드들은 대개 검은 색으로 찍힌다. 마음대로 자유자재한 붓의 그것과 바코드는 색에서뿐만 아니라 방식에서 움직이다와 정지하다, 자발적이다와 규제적이라는 등의 상대적인 개념 짝을 지을 수 있다. 선이 자유로움을 잃은 토막으로 존재할 때, 그 선들의 조합이 이것을 다른 것들과 분리하여 분류하고 그리하여 가치를 매기는 도구로 사용됨에, 우리는 그것을 일러 선이라 말할 수 있는가.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이미지들은 자신을 돌아보는 방으로 들어가는 열쇠이다. 그 격리된 공간에서 사람들은 미술가가 제공하는 이미지에 자신의 해석을 넣어 감상한다. 그 시각적 경험의 해석에 지식이나 경험 또는 조언이 간여할 수 있겠지만 그 순간의 지각은 오로지 자신의 것이다. 관람자는 작은 공간에서 자신의 몸을 이완시키고 깊은 생각의 골을 지나 명상에 이르는 자신을 발견한다. 진리란, 진실한 자신이란 오로지 자신의 힘에 의해 처절한 자기 극복의 시련을 겪은 뒤에 오는 평안 또는 그 어떤 단계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로를 의심치 않고 나서야 인생의 궁극적 목표, 진리에 이를 수 있다. 진리에 이르는 길에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는 마음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니 '가치' 라는 문제 또한 주관적이며 자신의 의미망 안에서 구별될 일이다. 바코드가 ‘균등’ 의 표상이라면 평정심, 균질성, 치우치지 않는 마음의 상태에 대한 천착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인간의 권력적 사회성이 바코드에 각인되어 있기에 우리는 그 균질성의 또다른 분별심에 직면하게 된다.
석가모니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자신을 등불로 삼아 진리에 의지하라. 진리를 등불로 삼아 진리에 의지하라.” 또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고도 했다. 어차피 진리에 몸을 기댄 인생의 여정은 오롯한 자신의 일이다. 이 세상에서 참다운 깨달음은 천안(天眼)에 비유된다. 적정(寂定)을 버리지 않고서도 모든 불국토를 보고 그러면서도 대립적인 상(相)이나 갖가지 차별성을 짓지 않는 부처의 눈에 이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궁극적이 생의 목표중 하나가 아니던가.
1) 조셉 캠벨 지음. 이윤기 옮김, 『세계의 영웅신화, 대원사, 1989, p.28.
2) 조셉 캠벨 지음. 이윤기 옮김, 앞책, p.29.
3) 장순용 옮김, 『유마경』, 시공사, 1997,
4) 석진오 편저, 『크리슈나의 노래, 바가바드 기타』, 합동기획, 1983.
5) 융의 이론에 대해서는 이부영 외 옮김, 인간과 무의식의 상징, 집문당, 2000, 참조.
6) 하인리히 침머, 인도의 철학, 대원사, 1992, p.25.
7) 소동파 지음 · 김병애 옮김, 『마음속의 대나무」, 태학사, 2001.
8) 백련선서간행회, 『林間錄』上, 장경각, 1989, p.100.
9) 하인리히 침머, 앞책, p.186의 '지혜의 궁전' 개념을 적용하였다.
10)『林間錄』上, p.91.
11)宋傳燈錄11,祖堂集4, 전등록14, 會要19, 會元5 등에 실려 있는 일화이다.
12)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 行邪道 不能見如來,
전시명: 놀이와 莊嚴 두 번째: 응시-나를보다
전시기간: 2007.05.22 - 2007.06.17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강애란, 배병우, 서정국, 석철주, 전수천
전시내용:
놀이와 莊嚴 두 번째
응시 -나를 보다
조은정 | 미술평론가, 서울벤처정보대학원대학교 교수
“모든 것은 변하고 있으나 아무 것도 죽지는 않는다. 영혼은 여기저기를 방황하다 마음에 드는 뼈대를 취한다..… 따라서 한번 존재한 것은 다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존재하게 되니, 모든 운행의 주기는 반복한다." (오비디우스, 메타모르포시스)
실 한 타래
삶의 여정에서 결코 헤쳐 나갈 수 없는 듯이 생각되는 위험이나 어려움을 딛고 일어선 영웅은 궁극적인 평화를 얻는다. 매우 어렵고 힘든 자아발견과 자아발전을 추구한 결과, 생명의 바다 건너편에 정박할 수 있게 된 것이다."1) 하지만 애초에 길을 나설 때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속한 사회나 민족의 일반적인 노선을 택함으로써 위험부담이 적은 길을 택한다. 통과제의, 은총 등의 사회적 상징을 통해 구원받는 것이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자신의 내부에서 소명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가슴에 미노타우루스의 미궁을 안고 사는 것과 같다고 했다.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다는 미궁(迷宮)을 테세우스가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리아드네가 건네준 실타래 덕이었다.
아리아드네에게 ‘실타래’를 가르쳐준 이는 바로 미노타우루스 궁을 설계하고 건설한 장인 다이달로스였다. 사랑으로 가득한 마음을 안고 들판으로 달려간 아리아드네는 거친 마를 훑고 갈기갈기 찢어 헝클어진 줄기들을 모아 실을 자아내 실타래를 만들어 내었다. 그래서 ‘아마로 만든 실타래' 에는 그 어려운 난관을 의미하는 고행과 더불어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만 실이 만들어지는 '시간'이 녹아 있다.
장인이자 과학자, 예술가인 다이달로스는 외모는 추했으나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아내를 둔 이다. 그는 자기 예술의 도덕률에만 봉사하는 인간을 상징해왔지만 단순하고, 용기에 차 있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 확신하는 영웅이었다.2) 미궁을 헤쳐 나오는데 필요한 방법을 아리아드네에게 가르쳐 준 것과 같이 다이달로스에게 달려가면 그는 우리에게도 실타래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다만 아리아드네처럼 아마를 훑고, 잘게 쪼개고, 헝클어진 것들을 잡아 가닥을 이루고 실을 자아내야 하는 힘겨운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어찌되었든 다이달로스라는 자신의 미궁을 평정할 꿈을 가진 평범한 이들의 희망이자 지도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큰 위로가 된다. 미술이 우리에게 자아발견의 계기를 제공하거나 끊임없이 의식을 담금질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장인이나 미술가를 상징하는 인물이 다이달로스인 것은 자명하므로, 한편 스승의 지도에 따라 직접 인생을 직시하고 자아를 발전시키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최종적인 진도는 말을 통하지 않은 침묵의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석가모니에 의한 불교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석가모니라는 이름 자체가 '석가족의 조용한 자(muni)' 라는 데에서도 깨달음의 경지, 궁극적인 가르침은 침묵 속에 이루어짐을 알려준다.
자아를 추구하는 경향이 적은 미흡한 인간들을 위해 스스로 병이 든 사람이 2500년 전 인도 바이샬리 성에 살고 있었다. 가난하고 의지할 길 없는 이들을 구하기 위한 그의 재물은 고갈될 줄 몰랐다. 그는 법을 어기거나 정도를 넘은 자들을 돌보기 위하여 청정한 계율을 지켰으며 난폭하고 성내고 질투하고 악랄한 이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자기 통제를 잘 하였고 모든 게으른 이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대정진을 하였으며 일체의 흐트러진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선정, 정념, 해탈, 삼매에 머물렀으며 모든 잘못된 생각과 나쁜 지혜를 거두도록 하기 위하여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는 비록 세속의 옷을 입었지만 승려의 위의와 공덕을 갖추었으며 집에서 살았지만 삼계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아내와 자식이 있었지만 늘 청정한 행실을 닦았다. 주위에는 사람들이 들끓었지만 늘 혼자 있기를 좋아하였고 보석으로 장식한 옷을 입었지만 늘 상호(相好)로 몸을 장엄했고 비록 음식을 먹고 마시기를 했지만 늘 선정과 최고의 삼매 경지를 맛보았다. 비록 바둑이나 장기 같은 오락을 함께 즐겼지만 실제로는 그들을 성숙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욕망의 사악함을 보여주기 위해 음란한 곳에도 들어갔고, 술을 마셔도 정념정지를 잃지 않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유흥가에서도 노닐었다.
평소 품행이 이러할진대 여러 사람들의 스승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자들 가운데 있으면 장자들의 어른이 되었는데 법의 뛰어남을 잘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었고 거사들 가운데 있으면 탐욕과 집착을 끊은 탓에 그들의 어른이 되었으며 장군들 사이에 있으면 인애와 굳센 의지와 불굴의 용기를 길렀기 때문에 그들의 어른이 되었다. 귀족들 가운데 있으면 오만과 허영과 교만을 없앤 탓에, 대신들 가운데 있으면 법에 따라 정사를 다스린 탓에 그들의 어른이 되었다. 왕자들의 집착을 고귀한 기쁨과 최상의 능력으로 전환시켰기 때문에 그들의 어른이 되었으며 서민들의 뛰어난 복덕을 잘 알기 때문에 서민들 가운데 있으면 그들의 어른이 되었다. 그의 이름은 유마힐로서 중생들에게 한량없는 이익을 주었는데 그가 몸에 병을 나타낸 것도 병을 이유로 진리를 설법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병문안온 모든 이들에게 알려준 최초의 가르침은 '몸'에 대한 것이었다. 강하지도 굳세지도 못하고 힘도 없는 무상한 것으로 너무나 빨리 썩기 때문에 믿고 간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허물과 근심이 많은 것으로 어차피 무너지기 마련인 것이 바로 몸으로 부서지기 쉬우니 오래된 우물이 말라붙듯이 늘 노쇠함의 핍박을 받으며,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죽기 마련임을 인식시켰다.3) 현상계에 집중하지 말라는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이는 “이 몸뚱이는 죽어 없어지지만 이 몸속에 와 계시는 실재(self)는 영원하며 불멸이며 무한이니라”는 인도 고래의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4)
결국 우리에게 지도자들이 이끄는 세계는 신화적인 상상력이나 상징으로 인해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일지라도 궁극의 경지는 자아를 인식하고 발전시키는 일이다. 융(C. G. Jung, 1875-1961)은 이를 일러 자기실현' 이라 했다. 무의식의 깊은 바다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 세계에서 뿜어내는 진실한 목소리를 감지하는 것이 바로 자기실현의 역사라는 것이다. 곧 삶이란 자아가 참된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으로 바다 위에서 출렁대는 파도와 같은 자아가 수천 해리 깊이를 지닌 마음의 중심인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것이다.5) 하지만 중심을 향한 여정은 결코 평탄치 못할뿐더러 상징이라는 신화의 언어를 상실한 현대인은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하기 마련이다. 어둠의 세계에 있는 자기의 세계를 밝은 빛이 존재하는 자아의 세계로 끌어올리는 과정이 곧 자기실현의 과정, 곧 깨달음의 과정이라는 융의 주장에 기대어 보면 인간 모두가 그 세계의 실현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리아드네에게서 아마로 만든 실 한 타래를 건네받은 테세우스의 모험이 더욱 흥미진진하고 실현가능했던 것처럼. 아마 실타래를 들고 우리를 기다리는 아리아드네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듯하다. 모든 장인의 신 다이달로스를 찾아 공방에, 아틀리에에 그리고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서성이다가 가끔씩은 흥미진진한 경험을 하는 존재들이 우리 자신인 것을 보면 말이다.
응시, 지혜의 함성
'응시'는 막연한 '쳐다봄'이 아니다. 생의 여정에서는 나를 찾는다는 일정한 목표를 향하여 행하는 '행위' 이다. 인간은 현상적인 자아와 융이 말한 참된 자기인 초월적인 자아로 이루어져 있기에 인간 생의 여로는 궁극적으로 초월적인 자아를 찾는 과정이다. 이름, 형상들로 이루어져 때가 되면 용해되어 버리는 현상은 변화하는 사물, 영원한 실재가 아닌 에너지의 무상히 소멸하는 반향들일 뿐이다. 인도인의 철학에 따르면 밖으로 향하는 감각 능력으로는 대상을 포착하고 이해할 수 있을 뿐, 영원의 실재에 접할 수는 없다. 어떠한 감각과 쾌락과 경험도 의식에게 생명의 풍요로움에 대한 비밀을 가르쳐 줄 수 없다는 것이다.6) 참된 자아의 감추어진 진리를 깨닫기 위하여 인간은 두 가지 방식을 택한다. 영화 <매트릭스> 또는 〈트루먼 쇼〉처럼 눈앞에 보이는 세계를 환상으로 간주하
는 체계적인 경멸방식이 그 하나이고 성철스님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라고 한 일체 순수한 물질성을 철저히 깨닫는 방식이 다른 하나이다.
자신에 대한 응시, 내적인 자아에의 집중은 내면의 목소리, 참된 자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다이달로스가 가르쳐주고 아리아드네가 건네준 한 타래의 실 뭉치를 들고 미궁을 향해 들어가는 영웅처럼 내적 심연으로 들어갈 일이다. 『우파니샤드』에서도 “보이지도 않고 말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추정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고 그릴 수도 없다. 의식 상태에 있는 만물이 공유하는 자기 인식의 본질, 현상계는 이 안에서 소멸한다. 이는 평화요, 행복이요, 비이원적이다”라는 그 심연을 향한 여행은 순환한다. 현상계가 소멸한다는 그 세계를 향한 여행을 현상계에서 출발하는 아이러니는 현상계의 인정을 통한 비현상계에의 인식을 의미한다.
우리 삶에서 현상계의 이면 또는 현상계의 첨단을 보여주는 분야로 미술만큼 적합한 예는 드물 것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색과 형태라는 '현상'을 매개로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미술가는 의식적이든 아니든 다이달로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이 만든 부조리하고 삶을 옥죄는 현상의 세계를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이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생의 비밀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렇다면 들판에 심겨진 아마를 찾아내 그것을 베어내고 추스르는 일은 오로지 우리의 몫인 셈이다. 일상 생활에서 미술가는 종교단체에 속하였든 그렇지 않든 그 어느 존재보다 내적 탐구의 여행을 자주 떠나는 이들이다. 금번 전시의 제목인 ‘응시’는 실은 ‘내적 탐구'가 주제임을 드러낸다. 아래 작가 다섯은 각기 자신의 시선으로 현상계를 해석한다. 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예술가 특유의 예지력과 용기를 공유한 서정국, 석철주, 강애란, 배병우, 전수천은 현상계를 통한 궁극적인 자기의 내면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우리를 각성시킨다.
마음속의 대나무
중국의 문호인 소식(蘇軾, 소동파, 1036-1101)은 시(詩)도 잘 썼지만 그림에 대한 이론(畵論)도 높은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기에 여러 인사들과 깊은 교유를 갖고 있었다.
“대나무를 그릴 때는 반드시 먼저 마음속에 대나무를 완성하고 붓을 들고 자세히 바라보아야 그리고자 하는 것이 보일 것이니 그때에 급히 서둘러서 붓을 휘둘러 곧바로 그려내어, 보인 것을 따라잡아야 한다. 마치 토끼가 나옴에 새매가 쏜살같이 내려와 채가듯 해야 할 것이니 조금이라도 늦추면 토끼는 이미 달아나버릴 것이다. 문여가(문동)가 내게 이러한 것을 가르쳐 주었으나 나는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알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그러한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은 안팎이 한결같지 않아 마음과 손이 서로 응하지 않아서이니 배우지 않음의 잘못이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보이는 것이 있어도 그것을 잡기를 익숙히 하지 않는 자는 평소 스스로 알고 있으면서도 일에 임하여는 홀연히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어찌 유독 대나무에서만 그러하겠는가?"7)
서정국 〈대나무〉를 대할 때마다 소식의 '마음속의 대나무' 라는 글귀가 떠오르곤 하였다. 심상을 따라 그림을 그린다는 화론을 조각에서 느낀다는 것, 그것도 현대적인 물성의 맛이 물씬한 스테인레스 스틸로 만든 대나무에서 전통의 맛을 느낀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하지만 은백색의 스테인레스 스틸 대나무는 먹으로 쳐낸 죽(竹)처럼 한 가지 색으로 이룬 여러 색깔로 다가왔다. 또 하늘로 향해 곧게 뻗어나가다 그리 높지 않은 위치에서 끝나버리고 말지만 무한정 솟아오르는 대나무처럼 느껴졌다. 잎사귀 하나없이 나무의 마디만이 존재하는 그 기다란 대롱들 사이에서 “쏴아하-" 하고 스치는 파도소리 같기도 한 잎사귀들의 두런거림을 듣곤 하였다. 반사되는 빛에 의해 각기 다른 색을 갖는 스테인레스 스틸의 대나무는 실상 둥근 대롱의 연결부들에 지나지 않으나 그것들은 공간에서 소리와 생명을 지닌 나무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는 '속이 비고 마디로 이루어진 것이 수직으로 서 있으면 대나무다'라는 관념에 의한 결과일 것이다.
작가는 대나무뿐만 아니라 '갈대' 도 만들었다. 언젠가 그가 지칭한〈갈대〉와 〈대나무〉가 어떤 차가 있는지 그의 작품 앞에서 열심히 비교해본 일이 있다. 갈대라 이름붙인 것은 조금은 더 얇고 더 많은 것들의 조합을 보였다. 하지만 세부적인 특성을 비교할수록 갈대와 대나무의 다른 점보다는 오히려 같은 점을 더욱 확인해 들어가는 것이었다. 속이 비고, 마디로 이루어져 있고, 무리를 짓고, 바람에 흔들리고, 습기진 곳에 살고…. 그리하여 이들의 가장 큰 차가 갈대가 '풀'인 반면 대나무는 이름 그대로 ‘나무’ 라는 사실에 이르렀다. 대나무 잎은 가지에 나지만 갈대는 그 자신의 몸에서 잎이 돋는다. 30미터 이상 자란다는 대나무와 3미터 정도 자란다는 갈대의 유사성은 이것과 저것을 나누어 생각하는 사물에 대한 인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또한 미시적 세계와 거시적 세계의 유사성과 차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언젠가 문동은 소식에게 “한 폭의 좋은 비단에다 만 길의 대나무를 그려보리.”라는 시를 전하였다. 이 시를 받은 소식은 답하여 말하기를 “대나무의 길이가 만 길이면 의당 비단 250필을 써야 하니 형께서 그림 그리기를 게을리 한 이유를 알겠소이다. 형은 그저 이렇게 큰 비단을 얻는 데에만 마음이 있구려!" 라 하였다. 이에 문동은 세상에 어찌 만자나 되는 대나무가 있겠는가 라며 사과를 전해왔으나 소식은 다시 “세간에도 천 길의 대나무 있으니 달빛 받은 그림자 그쯤은 되리라”는 답을 통해 만 길이 가능한 대나무에 대해 말했다. 사물의 본질을 그림자와 비견함으로써 허와 실 또는 사물과 그림자 모두 하나임을 말한 것이었다.
서정국은 현상계의 외면, 우리가 그러하다고 생각해온 생명들의 본질에 대한 작가들의 성찰이 배어 있는 작품을 보여준다. 폐기처분된 철사들을 구부려〈풀잎〉을 만들었다. 풀잎과 철사의 속성은 다르나 외향은 아주 유사하다. 마디로 이루어진 파이프의 연결은 둥글게 말아 올라가고 있어 수직으로 벋어있어야 할 대나무의 본질에서 어긋나 보인다. 하지만 뿌리를 박고 자라는 나무는 바람에, 또 주변에 의해 덧없이 흔들릴 수도 있고 마디가 있다고 다 대나무라고 할 수도 없다. 〈갈대〉드로잉은 둥근 점의 수직적인 연결을 보인다. 아마도 갈대를 위에서 본다면, 또는 갈대의 잎을 제거하고 줄기만 본다면 이러한 공허로 가득할 것이다. 결국 작가는 속성은 다르나 유사해 보이는 것, 나무나 풀로서 그 성격이 다르지만 식물로서의 본성은 같은 것, 그들 생명성의 근원에 대한 응시를 통해창창한 대나무 숲과 숨 막히는 쇠 나무 숲이 기실 다르지 않은 세계임을 보여준다. 외면은 유사하나 그 본질은 다른 것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하여 결국 나무의 빈 마디 속처럼 공허하고 공허한 삶의 유추를 통해 내적인 공(空)을 찾아 진리에 다가가는 것이다.
산은 산일뿐
석철주는 전통에 충실한 작가로 평가되어 왔다. 소재에서 장독, 탈춤, 백자항아리, 산수 등 전통의 영역에서 보아오거나 옛날의 생활을 담은 것들을 화면에 옮겨왔기 때문이다. 장독대 자체의 미학을 차치하면 어린 시절 장독대에서 잠자리를 잡는 그를 보고 장독을 깰까봐 마음 졸이던 어머니에 대한 추억, 작은 항아리에 담긴 소박한 생활, 탈춤을 보며 느낀 힘찬 동세 등이 그 작업의 내용이라고 치면 당당히 ‘전통’의 선에서 이해되던 것들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추억을, 경험을 사회적 의미로 확대하는 데 성공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석철주의 ‘생활일기’ 는 사회적 상징을 담보한 한 개체의 현재 진행형적인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반영이다.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에서 빌어온 소재인 〈생활일기(신몽유도원도)〉 또한 그의 마음속에 그린 산수, 흉중구학(胸中丘壑)임에 틀림없다. 언젠가 단지 ‘신몽유도원도' 라는 제목에 착안하여 그의 작품을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비교한 적이 있었다. 물론 100센티미터가 넘는 두루마리 비단에 담채로 그린 안견의 그림과는 확연히 다르겠지만 기법이 아닌 구도와 산의 형태 등과 어느 곳 닮아있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했던 것이다. 부질없는 짓을 통해 그나마 얻은 것은, 흐릿하고도 아련하여 카메라로서는 포착하기 어려운 ‘예민한 신몽유도원의 산수가 그리도 장쾌하고 울울한 산처럼 느껴지는 것은 안견의 산수가 보여주었던 구축성이 바로 이 곳에서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는 점이었다. 결과는 ‘꿈처럼 아련' 하지만 지난 밤 꿈에서는 그토록 생생하던 눈앞의 정경이라는 실체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 드러나 있는 것이다.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3일 만에 그렸다는 안견의 <몽유도원도〉에는 인간이 거주하는 현실계와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는 이름의 이상계인 두 세계가 공존한다. 좌측에서 우측으로 읽어나가든, 우측에서 좌측으로 읽어나가든 두 세계는 구분되어 있고 한 번 지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세계이다. 이 두 세계를 가로지르는 물(폭포)의 이미지는 견고하게 성과 속을 가르는 전통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석철주의 산수에서는 공간을 가르는 폭포를 찾을 수 없음에도 폭포를 느끼고, 도화꽃 만발한 장소가 드러나지 않음에도 흐드러진 도화의 자태를 본다. 모든 것이 그 자리에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지나간 과거는 지나갔으니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없고, 현재 또한 자꾸만 지나는 찰라일 뿐”이라는 시간의 관념은 '공(空)' 을 설명하기에 적절한 말이다. 하지만 지나간 것이 있기에 현재라는 개념이 있고, 미래가 있기에 현재 또한 있는 법이다. 이것이 있으매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매 이것이 있다는 연기(緣起)야말로 우리 존재에 대한 이해를 보다 확실히 해주고 있지 않은가.
석철주의 산수는 없음을 드러내기 위한 있음의 표현이요, 있음을 부정하기 위한 없음의 행위이다. 이러한 과정은 무엇보다 그의 작품을 표현하는 작가 특유의 기법에 투사되어 있다. 먼저 캔버스에 밑칠을 한 다음 그리려는 주된 색을 칠한다. 청색 산수를 그리려면 청색을, 붉은 산수를 그리려면 붉은색 계열을 칠한다. 바탕색이 마르면 흰색을 칠하고는 마르기 전에 맹물을 붓에 묻혀 그림을 그려간다. 그러면 붓이 지나간 자리에서 형태가 드러난다. 마음속의 형태를 흰 바탕에 색을 입혀 그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흰 바탕에서 색을 통해 형태를 건져 올리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평면에서 마음속의 산수를 찾아가는 방식은 지우고, 칠하여 가는 첨삭과 소거라는 단순한 방식을 통해 세계를 구축한다. 결국 그에게 있어 첨삭이나 소거는 동일한 결과를 위한 다른 방식일 뿐인 것이다.
<몽유도원도〉는 제목을 통해 '한갓 꿈과 같은 세상에 대한 은유' 를 드러낸다. 눈앞에 펼쳐진 무릉도원이 눈을 뜨면 실체가 사라진다는 사실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그렇다면 우리가 인식하는 삶의 모습, 눈앞에 보인 세상은 과연 진실일까 의심도 해볼 만하다. 인도에 살았던 현명한 자 유마는 일체의 본성과 모습은 모두 허깨비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일체 모든 것은 덧없는 것이니 단 한순간도 머물지 않는다고 했다. 모든 법의 성품은 다 허망하게 보이는 것이 꿈과 같고 불꽃과 같고 신기루와 같다고도 했다. 왜냐하면 모든 법의 성품은 모두 분별심에서 시작된 때문인데 분별심이 일으킨 영상은 마치 물속에 비친 달과 같고 거울 속의 영상과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체의 모든 것은 마음이 건립한 것이니 아무리 높은 산도 아무리 깊은 강도 두려워할 이유가 하등 없다. 다만 산을 세우고 다시 지워내고 또 다시 세우는 것은 자연이 그러하듯 우리 삶도, 인식도 그러한 자리에 있음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강을 건너는 뗏목
강애란은 전시실에 인류 지혜의 보고(寶庫)인 도서관을 짓는다. 가지런히 꽂힌 책들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진 삶의 경험과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희망의 축적물이다.
“나는 지식의 유목적인 방랑을 담아내는 책 본래의 사이버적 정체성을 통하여 디지털 시대에 새로운 언어와 지식, 소통의 차원들을 책이라는 모티브를 통하여 발견하고자 하였다. 디지털 북 프로젝트는 세계 유수의 서점들을 찾아가서 사진을 찍고, 책을 고르는 사람들을 비디오에 담는다. 이러한 서점 사진과 비디오로 구성된 이미지를 전시장 벽면 가득히 프린트하여 부착하고 그 위에 빛나는 디지털 책들을 설치함으로써 가상의 책방을 완성한다. 빛나는 디지털 책들, 이를 쳐다보는 전시장의 관객 등이 구성하는 형식적, 주제적 구성은 빛이 나는 요소들을 더 함으로써 보다 높은 극적 효과를 추구한다.
최근작 〈The Virtual Book〉은 특정 공간에 미디어 인스톨레이션한 작업으로 이러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하나의 벽면에는 실버 마일러지에 디지털 프린트된 책방 이미지를 벽 개념으로 천정에서 바닥까지 부착하고 반대쪽에는 벽면 가득히 영상이 투사된다. 이로써 가상의 책방이 완성되며, 공간 안에 놓여진 플라스틱 책상 위에 불빛이 장착된 플라스틱 책들이 놓여진다. 이 가상의 책방에 들어선 관객은 책을 만지는 행위를 함으로써 그 책 안에 담긴 내용이 프로젝션됨을 알 수 있다. 이는 책이라는 것이 이 디지털 시대에 단지 책으로 읽혀지는 것이 아닌 무한한 깊이와 부피를 내포하고 있는 새로운 개념의 공간임을 말하고자 함이다"
인류의 자산이며 모든 지식을 분류하고 체계화시킬 수 있는 기본 단위라는 책이 갖는 아우라는 신성에 도전할 지경이다. 중국에서의 분서갱유(焚書坑儒), 나치의 자유주의 책자의 분서, 신실한 기독교도들이 성서 이외의 책을 태우는 장면이 삽입된 영화에 이르기까지 책을 태우고 부정하는 많은 사건들이 우리 역사에 존재한다. 이러한 '책' 존재에의 도전은 책이 지닌 강력한 힘을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문자열로 이루어진 책의 존재성은 인식의 문제에 있어 갈등을 촉발시켜 왔다. 특히 불교에서는 '책을 읽지 말라' 는 말로서 자신의 내면에 집중할 것을 강조함으로써 다른 이의 인식을 주입시켜 결과적으로 혼자 깨고 나가야 할 껍질을 다른 이가 깨줌으로써 알 속의 개체가 죽어버리는 결과를 경계한다. 또 이는 이미 문자화되는 과정에 고착되고 사장된 죽어버린 진리에의 접근을 경계하는 것이기도 하다.
책은 문자들의 집합체이다. 사고의 도구인 언설을 기록한 행위인 문자와 그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책은 말이 갖는 능력의 엄청난 저장소라 할 것이다. 인간의 말은 우주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 감응케 하는 주술적인 힘이 있는 것 중 하나이다. 만트라(Mantra)는 바로 이러한 말이 갖는 에너지, 도구를 상징한다. 순수한 말들은 엄청난 힘을 갖기에 '비밀주'가 되기도 하지만 일상 생활에서 책이란, 문자란 과연 진실만을 담고 있을까. 또한 언어가 끊어져 문자가 없는 곳에 도가 실현된다고 하였다. 불교 최고의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서 결국 문자가 아닌 것으로 '전수'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자와 책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 수 있을까.
무착스님의 진리에 대한 탐구방식에 대한 글을 쌍림스님은 우리가 알기 쉽게 풀이하였다.
“강을 건너려면 모름지기 뗏목이 있어야 하지만/언덕에 이르면 배는 필요 없는 법/아집이나 법집을 모두 집착이라 이름 하지만/ 이 치를 깨달으면 뉘라서 힘들게 설명을 하랴/누가 두 언덕이 있다고 말하는가/유 · 무 가운데 한쪽을 선택한다면/곧 마음이 더럽혀지리라.”8)
지혜의 궁전인 도서관은 그 넘치는 '과잉' 으로 인해 결핍, 혹은 내핍의 단계인 문자가 존재하지 않는 존재성인 또 다른 지혜의 궁전을 생각게 한다.9) 극단적인 일을 강요받았을 때 반대의 일을 생각게 되듯 책을 통하여 진리에 이를 수 있다. 유마는 사원에서, 일상에서 깨달은 자를 찾아다니지만 정작 그 실체는 없음을 보았다. 모든 생명있는 것들과 인간이 내뱉는 모든 말들과 성품도 그러한 것이다. 따라서 실체를 볼 수 없는 말의 현상화 도구로서 문자는 그 실체가 있는 것이라 할 수 없다. 지혜가 있는 자들은 문자에 집착하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였다. 일체의 언어가 그 자체 고유한 성품도 없고 그 자체 고유한 모습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일컬어 도라 하며 무엇을 일컬어 진리라 하겠는가. 결국 우리 자신에 대한 의문,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에 대한 의문들이 고개를 든다.
뗏목은 강을 건너기 위한 것이지 둘러메고 다니는 것은 아니다. 문자를 통한 진리는 개념에만 집착할 가능성이 크기에 오랫동안 선사(禪師)들은 문자를 경계해 왔다. 이런 면에서 강애란의 작업은 가상과 실재, 형식과 내용이라는 측면에서 여느 '책' 작업들과 구분된다. 손으로 만졌을 때 투사되는 책의 내용은 손에서 떼면 사라지기 마련이다. 또 책에 적힌 제목인 글자의 의미 그대로 보여지는 책 속의 세상은 상상에 의해 구축된 존재로서 상호관계성을 통해 실체를 갖는다. 언설의 형상화된 문자가 다시 상상된 문자의 의미를 통해 구체적인 물상으로 현현함으로써 책은 새로운 공간을 창출한다. 지식의 유목적 방랑을 본질로 하는 책은 작가가 지적하는대로 오늘날 사이버 세상과 닮아 있다. 실체가 아닌 세상에서 가상의 존재끼리는 서로가 실체이지만 실체의 눈으로 본 실체는 오직 그러할 뿐인 것이다.
뜰앞의 잣나무
전통적으로 소나무는 하늘과 땅의 매개체로 인식되어 왔다. 소나무에 흰 종이를 매어 신간(神竿)으로 삼은 것이나 왕릉을 조성할 때 주변에 소나무를 심었던 것 등이 이를 증명한다. 왕릉을 조성하고 소나무 숲을 조성해온 전통은 소나무에 시간을 통한 역사성과 과거 존재했던 사람의 무한한 고귀함을 부가하였다. 소나무 숲에서 여느 관목류의 숲과 달리 ‘사람' 을 느끼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소나무의 신화성을 제외하고라도 우리 주변에 있어온 나무였기에 친숙함에 더하여 오랜 역사성은 나무라는 식물을 '전통'의 상징으로 이해할 근거가 된다. 생물학적 식물인 나무가 문화적 상징성을 지니면서 무한한 지속성인 시간과 꿈틀대는 동물적 생명의 이미지를 획득한 것이다. 물론 여느 나무와는 다른 둥치의 곧음과 휘어짐이 공존하는 특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소나무라는 말은 꿈틀대는 나무의 몸체를 먼저 떠올리게 한다.
배병우가 "경주 경애왕릉의 소나무 숲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는 것은 미학적 의미를 담은 말이겠지만 자연의 일부로서 소나무가 역사로서, 사람의 일로서 다가왔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분명 하얀 눈밭에 점점이 뿌려져 전신을 드러내던 소나무와 경애왕릉의 소나무는 다른 화면을 드러낸다. 필자는 가지와 솔잎과 몸 전체를 드러내던 90년대 배병우의 소나무 사진에서 정선의 진경산수에 드러나는 송간(松間)을 보았었다. 겸재 정선의 산수화가 관념이라기보다는 실체로 다가온 이유가 바로 산중턱에 울울한 몇 개의 선으로 이루어진 그 송간묘선의 조화가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림 속 저 멀리서 상징화된 형태라 생각했던 그 소나무의 모습이 사진의 현실감과 현장감을 그대로 드러내며 산 속 소나무가 바로 그러함을 배병우의 사진이 보여주었다. 18세기 화가의 손에서 구현된 세계를 갤러리의 벽면에서, 그것도 도구가 다른 작업에서 확인하는 일은 경외심을 동반하였었다.
90년대 소나무 작업에서 바로 산수화의 그것처럼 그 가운데 노닐고자 한 자연의 공간을 보았다면, 경애왕릉에서 시작한 소나무 작업에서는 심상의 공간을 보았다. 흑백화면일 때 근경의 소나무는 짙은 농묵으로, 원경의 소나무들은 담묵이나 파묵으로 ‘그려진 듯이’ 서 있다. 채색을 배제함으로써 사물의 진실과 자신을 투사하여 정신성을 나타내고자 했던 옛 문인의 공간을 보여주는 것이다.
심지어 색채가 사용된 작업에서조차 어둠 속에 드러나는 소나무들은 아직 어둠을 그대로 간직한 채색, 물상적 채색의 공간인 담채(淡彩)의 맛을 담고 있다. 자연을 채택하여 기록한다기보다는 작가의 손에 의해 그려지는 것처럼 그 공간은 작가의 세계관과 그가 보는 세계를 우리 앞에 드러낸다. 배병우의 ‘소나무 숲’은 어스름한 새벽공기 속에 존재를 드러내는 나무들의 꿈틀거림, 쏟아지는 차가운 공기의 현전성 등으로 가상 같은 실체의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림같은 풍경’ 이란 것을 체득시키는 그의 작업은 어둔 밤에서 시작한다. 새벽이라 하기에는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감싼 모든 물상이 잠든 고요한 밤, 아직 어둠이 주위를 감싸고 있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공간에서 카메라를 준비한 작가는 무한정 숲을 본다. 어둠 속에서 숲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있음을 아는 것이다. 냄새, 소리 그리고 그들이 뿜어내는 존재성에 의해. 그렇게 무한한 어둠을 지켜보다 여명이 다가오면 작가는 드러나는 숲을 본다. 작가 자신이 전하는 ‘빛에 의해 사람이 되어가는’것의 느낌은 숲과 나의 경계가 없이 버무러져 있던 혼돈의 시간에서 자연과 분리되는 순간에 대한 전언과 같다.
배병우의 소나무 숲을 그 여명의 시간에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이조차 실재로 그러한 듯이 여긴다는 것은 그의 작업이 혼돈과 분리, 자연과 인간,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탄생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빛에 의해 드러나는 형태를 포착하였다기보다는 분명 존재했었고 존재하건만 빛에 의해 마치 없는 듯이 놔두고 드러나야만 형태에서 어둠의 실체를 확인하는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다른 세계를 보는 것이다. 가득한 형태를 통하여 드러나는 빛이 아니라 사라지는 어둠을 보는 그 경계에서 불이(不二)의 법칙을, 이것이 있으매 저것이 있는 시간의 정지를 경험한다. 옛 선사는 “밝음 속에 어둠이 엇갈리니 고르게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느끼겠구려” 라고 하였다.10) 밝음과 어둠의 경계에서 정작 어려운 일 중의 하나는 그것의 평정함을 아는 일일 것이다. 마음을 닦아 궁극의 경지에 이르기를 희원하는 산사(山寺)로 향하는 길목에서, 한때 세상을 주름잡았으나 이제 땅에 묻혀 세월의 덧없음과 인간의 유한함을 증명하는 무덤 주위에서 소나무 숲을 만난다는 사실은 이 소나무 숲의 공간이 ‘평정' 과 연계되었음을 또한 증명한다. 무덤이라는 죽음의 공간을 앞에 두고 만나는 소나무에서 덧없는 생을 보는 것처럼 사찰의 고요함 속에서 나를 죽이고 만나는 적멸의 공간을 본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조주 스님의 “뜰앞의 잣나무라!”는 외침을 그의 소나무 숲에서 만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선종의 마조 스님 맥을 이은 단하천연(丹霞天然,739-824) 선사는 수도인 장안성에 관리가 되려고 갔다가 한 선승을 만나 승려가 되었다. 그가 낙양의 혜림사에 머물 때 추운 겨울날 법당에 모셔져 있는 목불상을 꺼내어 아궁이에 넣어 불을 지폈다. 그러자 절에 주석한 스님이 “그럴 수가 있느냐?”며 펄쩍 뛰었다. 이에 천연선사는 “나는 부처님을 태워서 사리를 얻으려고 하오”라고 태연히 답하는 것이었다. 사찰의 스님이 "목불인데 어찌 사리가 있겠는가?”라고 하자 천연스님은 “사리가 안 나올 바에야 나무토막이지 무슨 부처이겠는가?”라고 하였다.11) 이른바 단하소불(丹霞燒佛)의 이야기다. 이는 금강경』에서 말하는 “만약 색으로써 나를 보려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한다면 사도를 행함이라 능히 참 진리인 여래를 보지 못한다." 12) 라는 경고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전수천의 엄청난 바코드 바위 위에 앉은 불상을 바라보면서 단하소불의 고사를 떠올렸다. 미술에서 실체가 아닌 이미지의 문제, 그리고 사회적인 금전적 가치라는 성과 속의 결합성을 생각했던 것이다. 실지로 우리가 바코드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그것을 인식하는 일은 돈을 주고 무언가를 구입할 때, 또는 책을 빌려 도서관을 나설 때 등이다. 불상에 매겨진 바코드는 불상의 물질적인 가치를 의미한다. 하지만 정작 신성의 정점에 선 불상이 갖는 가치란 무엇일까. 재료로 치자면 하나의 땔감과 다를 바 없는 나무토막이다. 하지만 그 앞에서 예배행위를 통하여 자신을 투사하면 그것은 하나의 규율이며 속세의 것이 아닌 세계의 의미를 획득한다. 바코드 위에 앉은 불상은 그리하여 속세의 가치 문제와 성스런 영역의 이야기를 동시에 전한다.
지고지순의 영역, 인간이 지향하는 그 궁극의 경지에 이르는 길은 색즉시공(色卽是空)의 원리를 깨닫는 일이다. 부처라는 정신성의 영역에 있는 것으로 알던 부처가 바코드 위에 앉았을 때 이 현상계인 색의 세계가 허망하거나 심지어 비속함을 본다. 하지만 바코드 또한 하나의 상징, 약속에 불과함을 인식하는 순간 어차피 모든 것이 헛되다는 가르침 또한 귓가에 울린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거대한 망인 바코드를 통해 구별하고 이것과 저것을 분류함으로써 얻었던 많은 편리함이 바코드를 주재하는 주체의 권력에 의해 자신의 구분 기준과는 관계없이 분류되는 것을 또한 본다. 듀얼 이미지의 듀상의 옆얼굴 아래에 바코드가 있는 〈Two faces of Duchamp〉 또한 보편적인 인성에, 예술에, 사회와 물성에 다해진 ‘분류’ 라는 미명의 폭력을 드러내는 작업으로 이해된다.
'선'에 주목하여 생각의 골을 드러낸 많은 작품들 중에서 세기의 작업이라 할 미국 평원에 그린 '움직이는 드로잉' 은 흰색의 선이었다. 한편 바코드들은 대개 검은 색으로 찍힌다. 마음대로 자유자재한 붓의 그것과 바코드는 색에서뿐만 아니라 방식에서 움직이다와 정지하다, 자발적이다와 규제적이라는 등의 상대적인 개념 짝을 지을 수 있다. 선이 자유로움을 잃은 토막으로 존재할 때, 그 선들의 조합이 이것을 다른 것들과 분리하여 분류하고 그리하여 가치를 매기는 도구로 사용됨에, 우리는 그것을 일러 선이라 말할 수 있는가.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이미지들은 자신을 돌아보는 방으로 들어가는 열쇠이다. 그 격리된 공간에서 사람들은 미술가가 제공하는 이미지에 자신의 해석을 넣어 감상한다. 그 시각적 경험의 해석에 지식이나 경험 또는 조언이 간여할 수 있겠지만 그 순간의 지각은 오로지 자신의 것이다. 관람자는 작은 공간에서 자신의 몸을 이완시키고 깊은 생각의 골을 지나 명상에 이르는 자신을 발견한다. 진리란, 진실한 자신이란 오로지 자신의 힘에 의해 처절한 자기 극복의 시련을 겪은 뒤에 오는 평안 또는 그 어떤 단계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로를 의심치 않고 나서야 인생의 궁극적 목표, 진리에 이를 수 있다. 진리에 이르는 길에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는 마음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니 '가치' 라는 문제 또한 주관적이며 자신의 의미망 안에서 구별될 일이다. 바코드가 ‘균등’ 의 표상이라면 평정심, 균질성, 치우치지 않는 마음의 상태에 대한 천착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인간의 권력적 사회성이 바코드에 각인되어 있기에 우리는 그 균질성의 또다른 분별심에 직면하게 된다.
석가모니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자신을 등불로 삼아 진리에 의지하라. 진리를 등불로 삼아 진리에 의지하라.” 또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고도 했다. 어차피 진리에 몸을 기댄 인생의 여정은 오롯한 자신의 일이다. 이 세상에서 참다운 깨달음은 천안(天眼)에 비유된다. 적정(寂定)을 버리지 않고서도 모든 불국토를 보고 그러면서도 대립적인 상(相)이나 갖가지 차별성을 짓지 않는 부처의 눈에 이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궁극적이 생의 목표중 하나가 아니던가.
1) 조셉 캠벨 지음. 이윤기 옮김, 『세계의 영웅신화, 대원사, 1989, p.28.
2) 조셉 캠벨 지음. 이윤기 옮김, 앞책, p.29.
3) 장순용 옮김, 『유마경』, 시공사, 1997,
4) 석진오 편저, 『크리슈나의 노래, 바가바드 기타』, 합동기획, 1983.
5) 융의 이론에 대해서는 이부영 외 옮김, 인간과 무의식의 상징, 집문당, 2000, 참조.
6) 하인리히 침머, 인도의 철학, 대원사, 1992, p.25.
7) 소동파 지음 · 김병애 옮김, 『마음속의 대나무」, 태학사, 2001.
8) 백련선서간행회, 『林間錄』上, 장경각, 1989, p.100.
9) 하인리히 침머, 앞책, p.186의 '지혜의 궁전' 개념을 적용하였다.
10)『林間錄』上, p.91.
11)宋傳燈錄11,祖堂集4, 전등록14, 會要19, 會元5 등에 실려 있는 일화이다.
12)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 行邪道 不能見如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