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전시

반응하는 조각

전시명: 반응하는 조각 Reacting Sculpture 

전시기간: 2009.10.10 - 2009.12.10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김경아, 김  석, 김진희, 김한기, 박준식, 박헌열, 안병철, 왕광현, 이윤석, 전상욱, 정대현, 홍승남

전시내용:

소통과 반응


임성훈 | 모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1.

  반응은 몸의 근원적 충동이자 몸의 놀이이다. 어린 아이가 주변의 사물과 반응하면서 놀이하는 모습을 보자. 어떠한 제약도 없이 이 세상과 자연스럽고도 즐겁게 반응하는 놀이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어린 아이의 반응하는 놀이는 문화의 촉매 작용으로 인해 점점 빠른 속도로 극심한 변용을 겪게 된다. 이러한 변용 속에서 반응 본래의 생동감과 즐거움은 뒤로 밀려난다. 지적인 반응이 우위를 점하면서 몸의 반응 또한 추상화되고 관념화된다. 그 언젠가 살아 움직였던 반응은 이제 화석화되었다. 반응이라고 해봐야 그저 굵은 껍질 속에서 희미한 꿈틀거림으로 기억될 뿐이다. 반응은 본래의 생동감을 상실한 채 그저 수동적 반응이 된다. 수동적 반응은 “눈치를 본다”라는 말에 어울리는 반응에 불과하다. 이러한 반응에 참다운 소통의 계기란 마련될 수 없다. 그렇다면 반응 본래의 이름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그 이름은 능동적인 반응을 통해 환기되는 소통하는 반응이다.


2.

  반응에는 조건 반사적 반응, 감동적인 반응, 감각적인 반응, 즉각적인 반응, 지적인 반응, 충동적인 반응 등 수많은 반응들이 있다. 그런데 이 반응들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역시 소통하는 반응이 아닐까?소통은 반응을 복권시킨다. 반응은 소통으로 이어지는 끈이다. 그런데 반응이 각각 다를 경우 혹시 소통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전혀 문제가 없다. 소통은 서로 같은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소통은 동일성이 아니라 비동일성에 자신의 근거를 둔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소통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반응이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그만큼 소통의 계기는 더욱 많아진다.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은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다. 관객은 작품을 보면서 소통하는 반응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응과 소통은 작품과 관객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실상 소통하는 반응은 사람들 “사이에”존재한다. 관객은 자신의 체험뿐만 아니라 작가의 체험, 그리고 옆에 서 있는 다른 관객의 체험도 함께 공유한다. 예컨대, “음... 이런 식으로 작품을 구성할 수도 있군!” “앗, 이건 황당한 작품이네.” “요건 뭔가 재미난 구석이 있는 작품인 걸?” “응? 이런 것도 작품인가?” “이 작품은 왠지 나의 마음을 강하게 끄는 묘한 매력이 있네!” “저 작품은 글쎄 도대체가 뭘 하자는 건지 모르겠네.” “음... 이런 식의 작품을 구성하다니 역시 이 작가의 감각이 보통이 아냐.” 등과 같은 체험이 공유된다. 이와 같이 관객들은 작품들을 이리 저리 둘러보면서 다양한 반응을 경험하고 서로 소통한다. 그러기에 소통하는 반응은 전통적인 작품 감상에서 요구되는 사뭇 심각한 ‘몰입(concentration)'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반응은 움직인다,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면서.


3.

  이번 모란미술관이 개최하는 〈반응하는 조각>은 작품의 완결성이나 조형적 완성도 그 자체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다. 이번 전시가 주목하는 것은 관객에 의해 공유될 반응과 소통의 계기이다. 이번 기획전에 참여한 12명의 작가들은 자신들의 조형적 미학주의를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대한 관객의 반응과 또 이로 인해 유발되는 소통의 계기에 주목한 작품을 선보인다. ‘반응하는 조각’이란 주제로 작업을 하면서 작가들이 겪었을 어려움은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형성이 충분히 드러나면서 동시에 관객의 반응을 유도하기 위해 그 조형성이 지나치게 강조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반응하는 조각〉출품작 중 많은 작품들은 관객의 능동적인 반응과 참여를 통해서만 비로소 그 의미가 드러난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에서 어떤 반응이 일어날 것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단지 소통하는 반응을 위해 필요한 조형적 재료들을 관객에게 제공한다. 그러기에 때로는 작가와 관객의 전도(顚倒), 곧 관객이 작가가 되고 작가가 관객이 되는 전도가 일어나기도 한다. 물론 관객들은 작가들이 반응을 위해 내놓은 재료(혹은 작품)에 반응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반응하지 않는 것도 일종의 반응이 아니겠는가? 관객의 반응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 반응 자체가〈반응하는 조각〉전의 한 부분을 이룬다. 그러니까 〈반응하는 조각>전에서 이루어질 그 모든 반응들이 소통을 향한 작은 끈들인 셈이다.


4.

  김경아는 돌아다니는 ‘마침표’와 ‘쉼표’ 장난감과 벤치에 앉아 있는 큰 인형을 관객 앞에 내놓는다. 쉼표와 마침표는 관객의 발에 부딪히기도 하고 사이로 지나가면서 관객들 사이에 소통의 끈을 형성한다. 벤치에 앉아있는 큰 인형의 이름은 ‘아무(我無)’라 한다. 그 자리에 있으면 아무나 아무가 된다. 나를 만질 수 있듯이, 아무는 아무가 될 수 있기에 얼마든지 만지고 껴안을 수도 있다. 김석은 평범하고 일상적이지만 가장 원초적인 반응 중의 하나인 스마일을 벽에 걸어 놓았다. 그런데 무심코 바라본 스마일이 천천히 움직이는 게 아닌가? 평범한 이미지가 흥미로운 이미지로 바뀐다. 내가 본 이미지는 이미지일까 아니면 전도(顚倒)된 이미지일까? 김진희는 라디오 내부 부품을 뜯어내고 해체한 후 재구성해서 공중에 매달아 둔다. 부품들은 중첩된 얇은 막을 이루기도 하고, 뒤엉켜 소리를 내기도 한다. 사물의 변용이 강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김한기는 뼛조각 형의 퍼즐 조각을 관객이 마음대로 갖고 놀 수 있게 한다. 작가가 제시한 퍼즐의 원래 형태도 함께 전시되고 있지만 관객이 굳이 그 형태를 따라 퍼즐놀이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퍼즐 놀이를 하는 관객이 곧 작가이기 때문이다. 능동적인 반응에서 특히 ‘과정(process)'이 강조된 작품이다. 박준식의 설치작업은 풍경과 이데올로기의 중첩된 이미지를 보여준다. 평양 지도와 그 위에 설치된 랜드마크는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그러나 그 풍경을 보려 가까이 다가가려는 순간 그 풍경은 갑자기 사라진다. 결코 가까이 다가가 볼 수 없는 풍경, 그 풍경은 정치적 상황에 대한 메타포(metaphor)이다. 박헌열의 인체상은 인간 자신의 모습에 대한 반응을 표현한다. 몸은 보이는 관점에 따라 무한한 이미지의 변용을 겪는다. 그러한 이미지의 변용에 따른 몸은 어떻게 인식될까? 작가는 이 물음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안병철의 작품은 씨앗 형태를 이루고 있는 데, 그 표면은 광택으로 처리되어 주변의 사물을 반영하고 있다. 생명의 씨앗이 차가운 금속으로 표현된 것은 일종의 패러독스(paradox)이다. 작가는 패러독스의 씨앗을 만들고자 한 것일까? 이윤석의 종이 작업은 얼핏 보기에 단순해 보인다. 그러나 접고 펼치면서 드러나는 형태는 그리 단순한 조형성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치밀하고도 복잡한 메커니즘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 종이 작업은 단순함과 복잡함이 서로 교차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전상욱의 작품은 구상과 비구상 사이에 내재한 긴장감(tension)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긴장감은 상상력의 힘을 통해 더욱 강화된다. 관객들은 이에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정대현의 작품에는 장식적 이미지가 배제되어 있다. 작품의 원형적인 형태는 반응 본래의 원초적인 이미지를 관객들의 심상에 환기시킨다. 왕광현은 절단된 돌 위에 미러 스텐인리스 스틸을 붙인 작품을 전시장 입구에 전시하고 있다. 이 작품은 돌과 스텐인리스, 즉 자연과 문명의 이중적 관계를 함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홍승남의 작품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상호 관계성과 이에 따른 변용의 양상을 표현한다. 디지털의 개입으로 아날로그의 세계는 현저히 축소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날로그의 아우라가 완전히 상실된 것은 아니다. 작가는 디지털 주도의 문화를 인정하는 가운데 그래도 아직도 남아 있는 아날로그의 현존성을 시계를 통해 상징적으로 재현해내고 있다.


5.

  이번 전시에 참여한 12명의 작가들은 ‘반응’의 다양한 빛깔들을 각자의 고유한 조형성을 통해 선보인다. 작가들은 마치 “이 작품에는 이런 반응이 있어요.”라고 말하듯이 ‘반응’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반응하는 조각’에서 ‘반응’은 관객의 능동적인 참여를 전제로 하는 반응이다. 이러한 전제가 충족되는 〈반응하는 조각〉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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