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전시

움직이는 풍경

전시명: 움직이는 풍경

전시기간: 2008.09.20 - 2008.12.07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강선미, 김동원, 김세일, 박종성, 박현정, 손기덕, 송영미, 음현정, 이상선, 이샛별, 이승현, 이영조, 한계륜, 한  슬, 홍승혜, 황용진

전시내용:


Bridge the Gap


김성원 | 미술평론가


1.

  ‘전망(perspective)’, ‘경치(scenery)’, ‘스케이프(scape)’ 풍경을 이르는 또 다른 단어들이다. ‘풍경’이 이제 더 이상 전통적 의미의 '풍경화' 에 국한되지 않는다면, ‘풍경’은 아마도 '예술' 이라는 단어로 치환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움직이는 풍경'은 오늘날 예술과 예술 풍경에 관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르네상스 시대 황금률인 원근법이 사라진 오늘날 현대미술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에게 현실을 상상할 수 있게 했던 소실점은 이제 현실 속으로 그 '점'을 버리고 소실(?)되었다. 현실 속으로 소실된 예술의 원근법(perspective)은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엇을 ‘전망(perspective)' 하게 하는가? 물론 무척이나 광범위하고 적지 않은 확대해석을 필요로 하지만, 어째든 예술의 개념이 변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예술은 우리에게 그 어떤 '전망'을 제안하고 있음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는 이 변화된 '전망'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움직이는 풍경' 의 또 다른 해석을 시도해본다.

  오늘날 예술가는 과거와 동일한 방법으로 세계를 투영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와 어떻게 ‘관계’ 를 맺는가에 있다. 미술이 전통적 의미의 '재현의 역사' 라는 관점에서 볼 때, 재현의 황금률인 ‘소실점' 이 사라졌다는 것, 즉 소실만이 남게 되었다는 것은 전통적 방식의 현실 재현이불가능 해졌다는 말과도 같다. 이제 미술은 더 이상 원근법을 규칙으로 실제를 보다 더 실제처럼 투영하지 않는다. 실제에 대한 환영은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현실 속으로 ‘소실’ 된 전망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고 또 다른 방법으로 되돌아온다. 이것은 그 동안 우리가 20세기 후반의 현대미술의 변화를 논하며 빈번히 거론되었던 아방가르드와 선구자, 그리고 예술의 종말인가 아닌가 등에 관한 논쟁과도 일맥상통한다. 진보를 담보로 했던 수백 년 동안의 미술사의 전개가 그 막을 내리고, 현재의 미술은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분석을 통하여 전통적 개념의 미술의 종말을 거론한 아서 단토의 입장과, 미술에 있어서 '게임의 종말'과 '플레이의 종말'의 혼동에 주의 할 것을 경고하며, 게임(미술의 본질)의 종말이 온 것이 아니라, 그것을 플레이(생산하는 방법)하는 방법이 변했다고 말하는 위베르 다미슈의 입장은 각기 조금 다르지만, 이들이 20세기 미술사가 수직적 진보를 멈추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과거와의 단절을 예고하는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세잔느의 〈쌩 빅뚜와르>에서 말레비치의 <백색 바탕에 백색 사각형〉 그리고 이브 클랭의 청색 모노크롬에 이르는 동안 그리고 아예 2차원의 공간을 던져버리고 3차원의 현실로 뛰어든 20세기 후반의 예술가들.… 이들은 방법은 다르지만 모두 전통적 ‘원급법'을 버리고 재현에 대한 방향 전환을 시도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예술로부터 기다라는 것은 무엇인가? 실제 보다 더 실제 같은 환영을 기다린다기 보다는 실제와 '어떻게’관계를 맺는가를 보려고 한다. 즉, ‘무엇’ 을 보여주는가 보다는 ‘어떻게’ 보여주는 가다. 오늘날 예술가는 현실 속에서 현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우리에게 익숙한 매체인 회화, 조각, 사진, 영상 등의 조형언어를 사용해서 그들의 이러한 시도를 표현한다고 하더라도 이들의 회화는 과거의 그것과 다른 선상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그리는 풍경은 이제 더 이상 '감상' 해야 하는 현실세계의 '재현'이 아니다. 이들이 제안하는 '풍경' 은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고 우리의 삶과 관계를 맺고 있다. 예를 들어 도시 풍경을 '그린다'고 가정했을 때, 오늘날 예술가들에게는 도시풍경을 ‘그릴 수 있는 수 십 가지의 방법이 존재한다. 즉, 우리의 관심은 이러한 다양한 방법’, 즉 ‘매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매체가 되었던, 이들이 현실 속에서 그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도시 풍경이 우리 삶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우리에게 어떠한 '삶의 가능성들'을 제안하는 가에 있다. 단토는 '예술의 종말' 을 논하기는 했지만 결코 비관적이지 않은 가능성을 제안했다. 그는 오늘날 예술가들은 ‘생활 철학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과거 사회에서 예술가의 역할은 ‘구원자' 또는 ‘선구자’ 였으며, 이 역할은 상속 받은 낭만주의의 유산을 통해서 예술의 ‘예외적’위상과 가치를 지원하는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현재 예술가의 이러한 ‘선구자' 입장이 점점 약화되면서 예술적 유토피아, 새로운 정신, 그것과의 함수관계에 의한 발견들은 점진적으로 또 다른 새로운 입장들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만일 유토피아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그리고 아직도 현대미술이 어떠한 유토피아를 추구하고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변화와 희망에 대한 가능성들일 것이다. 그래서 단토가 말하는 ‘생활 철학자' 들로서의 예술가의 제안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개념을 창조하는 철학자들과는 달리 이들이 창조하는 것은 “감각적 집합” 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날 예술은 시각 청각 촉각을 동원하는 “감각적 집합' 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변화 시키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며, 보다 흥미로운 일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2.

  〈움직이는 풍경> 전시는 국내 미술 현장과 현대미술에 대한 다양한 차원의 ‘전망' 을 제안한다. 여기에는 작품들 하나하나가 제안하는 다양하고 복합적인 '풍경들 이외에, 중심과 주변의 풍경, 세대의 풍경, 다름의 풍경 그리고 이 다름을 나누는 풍경이 있다. 모란미술관의 지리적 위치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물론 그다지 외딴 곳은 아니지만, 수도권 도시이라는 지리적 조건은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국내 현대미술 현장의 중심과 주변의 '차이'를 인식하게 한다. 미술과 그 현장에 있어서 로컬과 센터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이 가능은 한 것일까? 만일 현실적으로 '차이'가 있다면 이들의 '갭' 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는가? 현대미술이 여기서 이 '갭'을 최소화 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 있을까?물론 간단하지 않은 중심과 주변에 관한 이 문제들, 그렇다고 해서 그다지 새로운 이슈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이분법적 사유에서 갈등한다. 우리는 그 동안 ‘사이 영역’, ‘소통’, ‘교류’, ‘관계’ 라는 비평적 담론들을 통해서 글로벌과 로컬, 중심과 주변, 소수와 다수의 문제, 즉 수직적 '단절' 의 수평적 '연결' 을 시도해 왔다. 즉, 지역과 대도시, 예술 애호가와 일반 대중, 소외계층과 특권계층, 메인 스트림, 스타 시스템, 아트 마켓, 미술교육 등 '예술' 을 둘러싼 다양한 변수들의 차이를 최소화하기 위한 시도를 지속해 왔다. 〈움직이는 풍경〉전시도 이러한 시도 가운데 하나다. 전시를 매개체로 지역의 소외 계층에게 예술과 만날 수 있는 여건을 제안하고, 이들의 일상이 보다 흥미롭고 풍요로워 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풍경〉 전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지역사회의 다양한 교육기관들과 연계활동과 효율적인 교육프로그램은 예술가들에게 있어서는 또 다른 방식에서 일상으로서의 침투이며, 이들의 이러한 간접적 '개입'은 지역과 중심을 연결하며 새로운 ‘풍경’ 을 창출할 수 있게 된다.

  그런가 하면 <움직이는 풍경> 전시는 스승과 제자들이 함께 하는 전시다. 그리 특별한 풍경은 아니지만, 여기서 우리는 ‘스승과 제자' 라는 ‘경계’를 벗어 날수 있는 유연한 공간을 확보하게 된다. 즉, 스승과 제자에서 서로 다른 세대들로의 ‘이동’이다. 이 ‘이동’은 ‘스승과 제자’에 존재하는 일종의 ‘서열’의 ‘갭’ 을 허문다. 왜냐하면 '세대' 개념에서는 '서열’ 보다 ‘다름’ 이 우선한다. 사회문화적 백그라운드가 다르고, 경험이 다르다. 이 전시에 참여하는 2030세대와 4050세대는 전시라는 민주적(?) 공간 안에서 그 어떤 하이라키도 없이 서로의 ‘다름’을 교류하게 된다. 총 16명의 작가의 30여점의 작품이 보여 지게되는〈움직이는 풍경〉전시에서 우리는 매체의 다양성에 주목해 본다. 회화, 드로잉, 영상, 조각, 설치 등 다양한 조형 매체들은 매체 간의 역사적 서열과는 무관하다. 또 참여 작가들이 다루는 ‘주제’또한 그 어떠한 우열도 없다. 여기에는 다만 인간과 삶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복합적 '풍경들 이 있다. 내면세계, 물질적인 것, 추상적인 것, 인간, 소외, 도시, 성, 대중문화·… 이 작가들이 만들어내는 이러한 현실의 '풍경' 은 우리 사회의 동질성과 이질성, 획일화와 다양성, 불확실성과 확실성 사이 영역을 탐구하고 있다. 그리고 참여 작가들의 다양한 제안들은 우리의 일상과의 상호교류를 통해서,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현재에서의 존재방법들에 대한 모색이다. 〈움직이는 풍경〉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변화하고 또 다른 만남의 장을 만드는 과정이 바로 우리들의 현재 모습이다. <움직이는 풍경〉은 서열과 계층 간의 ‘끊어짐' 을 상호관계의 역동성을 통해서 미분가능한 구부러짐으로 전환시킨다. 그리고 이것은 상하 그리고 수직구조에서 수평으로 이동하며 틈새와 사이에 자리 잡으며, '차이'의 '갭'을 연결하는 유연한 다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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