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여행가는 길
전시기간: 2012.07.06 - 2012.08.26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민지영, 박은선, 이현진, 임 택, 최수정
전시내용:
예술로 떠나는 사유여행
임성훈 (모란미술관 학예실장, Ph. D.)
떠나는 것은 아름답다. 즐거운 마음이든 쓸쓸한 마음이든 떠남 그 자체는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기에 오래전부터 우리는 떠남에 대해 노래를 불러오지 않았던가. 어디론가 떠나는 것은 흔적을 남긴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떠나는 길에는 수많은 삶의 파편들이 흩어져 있다. 떠나지 않았다면 결코 보지 못했던 그런 산재된 흔적들이다. 수억 년을 한 자리에 있었던 바위도 그 언젠가는 떠난다, 흙으로 먼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떠나기 마련이다. 왜 떠나야 하는 지, 그 이유를 잘 알지는 못한다. 그것은 존재의 본질이자 비밀이리라. 알 수 있는 건, 떠난다는 것이 우리의 욕망이자 동시에 운명이라는 것뿐이다.
어떤 목적을 갖고 떠나기도 하고 그저 목적 없이 떠나기도 한다. 그 어떤 경우든 떠남에는 의미들이 부여된다. 그 의미들은 문화의 씨앗이다. 그리고 그 씨앗은 문화의 나무, 문화의 숲을 이루는 원천이 된다. 떠남이 있었기에 문화도 가능하였다. 인간의 문화는 여행의 문화이다. 실상 떠나는 것은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도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월세나 전세금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 어쩔 수 없이 정든 공간을 떠나야 하는 우리들이 아닌가? 이렇듯 떠남은 문화의 섬세한 결들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실상 우리는 떠남을 매일 경험하면서도 그것이 갖는 함의를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다. 너무도 빈번하게 생기는 일이어서 자각하지 못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의 삶 자체가 여행이어서 떠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디론가 떠났고, 떠나고 있고, 그리고 떠나게 될 것이다. 휴양지든 볼거리가 있는 곳이든, 혹은 어떤 낯선 곳이든 간에 떠나는 것은 현실을 살아가는 이곳을 새롭게 생각하게 만든다.
인간은 물음을 던지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닐까? 이곳에서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을 때,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예술과 여행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마음에서 만난다. 지식과 도덕만으로는 인간과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기에 물음의 보고인 예술로의 여행을 감행한다.
어디론가 떠나는 여행에는 낯설음과 익숙함이 교차한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을 떠나 ‘저곳’으로 여행하는 나에게 ‘저곳’은 낯선 곳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곳’ 이 아닌 ‘저곳’ 은 나에게 낯선 곳이지만 이미 '저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겐 너무도 익숙한 곳이 아닌가? 여행을 온 외국인이라면 서울의 거리 풍경을 호기심에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겠지만, 우리에겐 그저 일상적이며 익숙한 그저 그런 풍경들이다. 이렇듯 여행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기도 하는 묘한 행위이다. 예술처럼 여행에는 현실과 상상력이 교차한다.
여행은 기억의 예술이기도 하다. 여행의 길에서 저장된 그 모든 표상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내면화된 심상이 된다. 여행이 즐거운 것은 여행을 통해 현실이 다시 반추되기 때문이다. 여행은 망상이나 공상이 아니라 현실적 상상력을 동반한다. 예술이 그러하듯, 여행은 현실과 자신으로 돌아가기 위한 놀이이다.
흔히 망각하기 쉽지만, 예술작품은 단순히 물리적 기법만이 아니라 정신적 기법의 산물이다. 특히 현대예술에서 정신적 기법은 더욱 중요시된다. 올해 독일 카셀의 도큐멘터(DOCUMENTA) 전시기간 동안 “생각이란 무엇인가?(Was ist Denken?)”을 주제로 세미나가 개최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술로의 여행은 일종의 사유여행이다. 예술가는 밤을 고스란히 새우면서 예술로의 사유여행을 떠난다.
이번 모란미술관의 기획전 <여행가는 길>은 예술로 떠나는 사유여행으로 여러분들을 초대하는 전시이다. 〈여행가는 길〉展은 주제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고 여행을 하듯이 자유로운 마음으로 구성된 전시이다. 그러기에 관객들은 패키지 여행을 하는 관광객처럼 일방적으로 이끌려가는 장소에 서 있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여행가는 길〉展은 자유로운 예술여행이다. 뜨거운 여름, 다섯 작가(민지영, 박은선, 이현진, 임택, 최수정)들이 펼쳐내는 다양하고 흥미로운 예술의 길로바람을 쐬듯이 떠나보자.
작품에 대한 다섯가지 시선
민지영-분위기의 미학(Ästhetik der Atmosphäre)
이 도록에 실려 있는 민지영 작가의 작업노트에는 작가의 의도, 개별 작품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작품과 감상자와의 관계에 관한 설명까지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그러니 이에 대해 굳이 덧붙여 설명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단지 여기서는 작가의 작품이 어떠한 미학적 관점에서 조망될 수 있는지를 간략하게 언급해 보기로 하겠다. 우선 주목할 것은 민지영의 작품이 도시 공간에서 감지되는 어떤 분위기를 특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작가의 작품에 나타난 미학을 “분위기의 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게르노트 뵈메(Gernot Böhme)는 미적 경험을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미적 범주가 아니라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분위기"로 파악한다. 분위기는 다양하고 복잡한 것이기에 정확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뵈메에 따르면, 분위기란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느낌의 음색으로 공간을 채우는 것 같이 보이는 것” 이다.1) 물론 모든 예술작품은 저마다의 고유한 분위기를 갖고 있다. 그러나 민지영의 작품에 나타난 특징적인 측면은 단지 작품에 어떤 분위기가 존재하고, 그것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작가는 ‘분위기 그 자체' 를 화면에서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에 제시된 공간은 미묘한 색과 빛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공간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공간이 아니라 관람자의 몸으로 지각되는 공간이다. 도시의 구조물로 형성된 공간은 화면에서 분위기 그 자체로 드러난다. 그러기에 화면에 나타난 도시 공간은 마치 중세의 수도원의 어떤 공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화면은 견고하게 구성되어 있지만, 조화나 질서가 아니라 오히려 말할 수 없는 어떤 긴장감(tension)을 부여한다. 도시의 구조물은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낯선 것으로 체험된다. 이는 어떤 곳으로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체험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민지영 작가는 도시 공간을 "분위기의 미학의 차원으로 이끌어내고, 이를 성공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임성훈
1) Gernot Böhme, Atmosphäre, Frankfurt am Main, 1995, p.22.
박은선-그 투명한 마음으로..
인간은 자신의 어떤 존재인지 끊임없이 묻는다. 그리고 이러한 물음을 통해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를 인식하고 싶어한다. 인식할 수 있는 것과 인식할 수 없는 것의 경계에서 인간 자신의 존재 양상이 확인된다. 박은선 작가는 선(線)으로 안과 밖, 현재와 과거, 있음과 없음의 사이 혹은 그 경계에서 드러나는 긴장감을 표현한다. 작업에 나타난 선(線)은 경계를 형성하는 것이자 동시에 상반되는 두 존재 양상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 경계가 허물어지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작품은 이러한 공존관계를 자연스럽게 인식하도록 만든다. 자기 자신이 처한 존재상황을 명백히 구분해서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미 우리는 수많은 유형 무형의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관계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눈으로 볼 수 없다고 해서 단지 '없다'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없는 것’이 오히려 ‘가득 찬 것일 수 있다는 역설(paradox)이 그리 새삼스러운 말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마음으로서만 가능한 것이지, 어떤 형태로 제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을 그린다는 것, 그것은 마음을 그리는 것 혹은 말하는 것이리라. 화면에서 '보이는’ ‘없음(無)' 은 새로운 회화적 세계의 가능성을 열어간다. 모든 것이 사라진 화면에 또 다시 새로운 선이 그어질 것이다. 이렇게 그어진 선은 투명한 마음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선이다. 박은선 작가는 작업을 통해 그 투명한 마음의 본질을 들여다볼 것을 우리에게 권유하고 있다.
이원호
이현진-테크놀로지 자연
이현진의 미디어 작품은 만남과 마주함을 경험하게 한다. 이 만남은 테크놀로지와 자연의 마주함을 주선하는데, 그 목적은 바로 예술과 관람객간의 상호작용에 있다. 자연 풍경이나 속성을 디지털 테크놀로지, 영상, 센서를 통하여 다시 감상하게 하는 것이 바로 작품의 전략이다. 작가는 이를 “조우(遭遇)”라 부르는데, 구성된 혹은 재배치된 자연의 모습을 우연히 마주하게 되는 순간의 인식을 의미한다. 그 인식은 다름 아닌 미적 인식으로 테크놀로지를 통해 바라 본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 숭고함의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작품 <물수제비 던지기〉는 실제 강가에서 물수제비를 던지는 경험을 전시장 안에서 체험하게 한다. 실제 행위와 전시장의 인터렉티브 경험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전시장에서의 가상경험은 실제 강 위를 통통 튀는 물수제비 던지기의 행위를 고스란히 재현한 것이다. 그러나 가상의 물수제비 행위와 그에 따른 경험은 실제 물수제비를 던지는 그것과도 다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가? 게임 닌텐도 위(Wii)의 신체움직임은 실제 스포츠운동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통해 전혀 새로운 감각을 경험하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이현진의 테크놀로지로 재현된, 그리고 재구성된 자연은 자연을 바라보는 새로운 감각을 경험하게 한다. 전시되는 작품 <마주친 두 시간>에서는 일몰과 일출의 경험을 같은 공간에서 동시에 경험하게 한다. 해와 달의 공존은 현실에서 체험할 수 신비한 경험이다. 대형 스크린에 펼쳐지는 생성과 소멸의 에너지는 관객들에게 신기함보다는 자연의 경이로움을 선사할 것이다. 이 경험은 단순히 테크놀로지의 효과가 아닌,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감각에 직접적으로 반응하는 예술적 자각의 지점을 건드린다. 그 자각은 자연의 것이 아닌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감각을 보다 확장시켜 상상이라는 가능성의 지점들을 인식하게 한다. 이 가능성은 유희적이고 미학적인 인식을 통해 우리들로 하여금 새로운 예술의 경험과 마주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테크놀로지로 풀어내는 이현진의 “조우" 이다. 그녀의 테크놀로지 자연으로 감성적인 여행을 떠나보자.
백곤
임택 - 산수유람..
임택은 자신의 경험과 관념으로 혼합된 산수화를 입체적인 조형어법으로 재현하고 있는 작가이다. 작품에는 동양화의 본질적인 특징들, 즉 여백과 생략, 정신성, 다중적 시점 등이 현대적 조형감각에 적합한 방식으로 수용되고 있다. 이를 통해 이루어진 회화적 공간은 시각적 편협성을 극복하고 우리가 바라보는 자연이 얼마나 다양한 시각적 다양성을 갖고 있는지를 확인해 주고 있다. 임택의 산수화는 인간과 단적으로 분리된 순수한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현실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자연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업은 산수화에 대한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물론 임택은 산수화의 근본적인 정신을 훼손하거나 등한시하고 있지 않다. 이는 작품에 나타난 공간적 구성이 전통적인 산수화의 여백을 잘 살려내고 있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읽어낼 수 있다. 또한 단순한 형태로 이루어진 산은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효과를 유발하고 있다. 관람객은 이 모호한 경계에서 작품을 감상하면서 '산수유람' 이 만들어내는 예술적 공간에 참여한다. 임택의 산수 풍경은 일상과 탈(脫)일상 혹은 현실과 상상의 교차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 나서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업은 여행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과 닮아 있다.
이원호
최수정-발화와 침묵의 이미지
최수정의 회화, 설치, 영상작품은 현실과 비현실이 혼재된 이미지의 세계를 보여준다. 알록달록한 색상들로 채워지거나 혹은 비워지는 작가의 작품 속 이미지들은 눈의 시각적 시선과 사유의 심상 사이를 부유한다. 최수정에게 '이미지’ 는 중요하다. 이 이미지는 대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작품에서 특별히 이미지라고 지칭되는 부분들은 각 오브제들의 개별적 특성들이 아니라 오브제들이 모여 있는 듯하지만 혼란스럽게 펼쳐져 있는 현상을 지칭한다. 하나의 소재와 소재들이 합쳐져 있으면서도 전체로 통일되지 않고 각각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이미지, 작가는 이 이미지들의 파편들을 얇고 가볍게 끌어당긴다.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한 개별 이미지들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사유의 평평함이 바로 그녀가 작품을 통해 선보이고자 하는 이미지인 것이다. 그렇기에 작품에서 이미지는 전체이자 개별적 의미들로 단지 기표로만 작동하는 상징과 같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미지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바로 목소리로 발화하는 순간의 침묵을 말한다. 역설적이지만 최수정은 이 발화와 침묵의 공존을 통해 관객들에게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가 끊임없이 교차되고 그러한 세계에서 이미지와 시선은 끊임없이 부유하며 자연스럽게 미끌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작품에서 이미지는 회전목마의 돌고 도는 제자리걸음이나, 불빛의 켜짐과 꺼짐에 의한 별들의 반짝거림을 표현하는 것처럼 순간적이고 일시적이다. 또한 이미지는 사물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생각의 실타래를 풀어내 듯 비재현적이고 추상적으로 표현된다. 즉, 그녀에게 이미지는 마치 은하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의 깜박거림처럼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환영적인, 혹은 비현실적인 평면속에서 감각된다. 그렇기에 작품이 내뿜는 수많은 빛의 향연은 언제나 우리들을 예술의 아름다운 은하계로 끌어당긴다. 수많은 이미지가 생성되고 사라지는 최수정의 우주에는 언제나 알록달록한 새로운 빛의 꿈들이 깜박거린다.
백곤
전시명: 여행가는 길
전시기간: 2012.07.06 - 2012.08.26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민지영, 박은선, 이현진, 임 택, 최수정
전시내용:
예술로 떠나는 사유여행
임성훈 (모란미술관 학예실장, Ph. D.)
떠나는 것은 아름답다. 즐거운 마음이든 쓸쓸한 마음이든 떠남 그 자체는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기에 오래전부터 우리는 떠남에 대해 노래를 불러오지 않았던가. 어디론가 떠나는 것은 흔적을 남긴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떠나는 길에는 수많은 삶의 파편들이 흩어져 있다. 떠나지 않았다면 결코 보지 못했던 그런 산재된 흔적들이다. 수억 년을 한 자리에 있었던 바위도 그 언젠가는 떠난다, 흙으로 먼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떠나기 마련이다. 왜 떠나야 하는 지, 그 이유를 잘 알지는 못한다. 그것은 존재의 본질이자 비밀이리라. 알 수 있는 건, 떠난다는 것이 우리의 욕망이자 동시에 운명이라는 것뿐이다.
어떤 목적을 갖고 떠나기도 하고 그저 목적 없이 떠나기도 한다. 그 어떤 경우든 떠남에는 의미들이 부여된다. 그 의미들은 문화의 씨앗이다. 그리고 그 씨앗은 문화의 나무, 문화의 숲을 이루는 원천이 된다. 떠남이 있었기에 문화도 가능하였다. 인간의 문화는 여행의 문화이다. 실상 떠나는 것은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도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월세나 전세금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 어쩔 수 없이 정든 공간을 떠나야 하는 우리들이 아닌가? 이렇듯 떠남은 문화의 섬세한 결들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실상 우리는 떠남을 매일 경험하면서도 그것이 갖는 함의를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다. 너무도 빈번하게 생기는 일이어서 자각하지 못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의 삶 자체가 여행이어서 떠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디론가 떠났고, 떠나고 있고, 그리고 떠나게 될 것이다. 휴양지든 볼거리가 있는 곳이든, 혹은 어떤 낯선 곳이든 간에 떠나는 것은 현실을 살아가는 이곳을 새롭게 생각하게 만든다.
인간은 물음을 던지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닐까? 이곳에서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을 때,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예술과 여행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마음에서 만난다. 지식과 도덕만으로는 인간과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기에 물음의 보고인 예술로의 여행을 감행한다.
어디론가 떠나는 여행에는 낯설음과 익숙함이 교차한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을 떠나 ‘저곳’으로 여행하는 나에게 ‘저곳’은 낯선 곳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곳’ 이 아닌 ‘저곳’ 은 나에게 낯선 곳이지만 이미 '저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겐 너무도 익숙한 곳이 아닌가? 여행을 온 외국인이라면 서울의 거리 풍경을 호기심에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겠지만, 우리에겐 그저 일상적이며 익숙한 그저 그런 풍경들이다. 이렇듯 여행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기도 하는 묘한 행위이다. 예술처럼 여행에는 현실과 상상력이 교차한다.
여행은 기억의 예술이기도 하다. 여행의 길에서 저장된 그 모든 표상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내면화된 심상이 된다. 여행이 즐거운 것은 여행을 통해 현실이 다시 반추되기 때문이다. 여행은 망상이나 공상이 아니라 현실적 상상력을 동반한다. 예술이 그러하듯, 여행은 현실과 자신으로 돌아가기 위한 놀이이다.
흔히 망각하기 쉽지만, 예술작품은 단순히 물리적 기법만이 아니라 정신적 기법의 산물이다. 특히 현대예술에서 정신적 기법은 더욱 중요시된다. 올해 독일 카셀의 도큐멘터(DOCUMENTA) 전시기간 동안 “생각이란 무엇인가?(Was ist Denken?)”을 주제로 세미나가 개최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술로의 여행은 일종의 사유여행이다. 예술가는 밤을 고스란히 새우면서 예술로의 사유여행을 떠난다.
이번 모란미술관의 기획전 <여행가는 길>은 예술로 떠나는 사유여행으로 여러분들을 초대하는 전시이다. 〈여행가는 길〉展은 주제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고 여행을 하듯이 자유로운 마음으로 구성된 전시이다. 그러기에 관객들은 패키지 여행을 하는 관광객처럼 일방적으로 이끌려가는 장소에 서 있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여행가는 길〉展은 자유로운 예술여행이다. 뜨거운 여름, 다섯 작가(민지영, 박은선, 이현진, 임택, 최수정)들이 펼쳐내는 다양하고 흥미로운 예술의 길로바람을 쐬듯이 떠나보자.
작품에 대한 다섯가지 시선
민지영-분위기의 미학(Ästhetik der Atmosphäre)
이 도록에 실려 있는 민지영 작가의 작업노트에는 작가의 의도, 개별 작품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작품과 감상자와의 관계에 관한 설명까지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그러니 이에 대해 굳이 덧붙여 설명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단지 여기서는 작가의 작품이 어떠한 미학적 관점에서 조망될 수 있는지를 간략하게 언급해 보기로 하겠다. 우선 주목할 것은 민지영의 작품이 도시 공간에서 감지되는 어떤 분위기를 특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작가의 작품에 나타난 미학을 “분위기의 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게르노트 뵈메(Gernot Böhme)는 미적 경험을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미적 범주가 아니라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분위기"로 파악한다. 분위기는 다양하고 복잡한 것이기에 정확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뵈메에 따르면, 분위기란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느낌의 음색으로 공간을 채우는 것 같이 보이는 것” 이다.1) 물론 모든 예술작품은 저마다의 고유한 분위기를 갖고 있다. 그러나 민지영의 작품에 나타난 특징적인 측면은 단지 작품에 어떤 분위기가 존재하고, 그것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작가는 ‘분위기 그 자체' 를 화면에서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에 제시된 공간은 미묘한 색과 빛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공간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공간이 아니라 관람자의 몸으로 지각되는 공간이다. 도시의 구조물로 형성된 공간은 화면에서 분위기 그 자체로 드러난다. 그러기에 화면에 나타난 도시 공간은 마치 중세의 수도원의 어떤 공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화면은 견고하게 구성되어 있지만, 조화나 질서가 아니라 오히려 말할 수 없는 어떤 긴장감(tension)을 부여한다. 도시의 구조물은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낯선 것으로 체험된다. 이는 어떤 곳으로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체험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민지영 작가는 도시 공간을 "분위기의 미학의 차원으로 이끌어내고, 이를 성공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임성훈
1) Gernot Böhme, Atmosphäre, Frankfurt am Main, 1995, p.22.
박은선-그 투명한 마음으로..
인간은 자신의 어떤 존재인지 끊임없이 묻는다. 그리고 이러한 물음을 통해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를 인식하고 싶어한다. 인식할 수 있는 것과 인식할 수 없는 것의 경계에서 인간 자신의 존재 양상이 확인된다. 박은선 작가는 선(線)으로 안과 밖, 현재와 과거, 있음과 없음의 사이 혹은 그 경계에서 드러나는 긴장감을 표현한다. 작업에 나타난 선(線)은 경계를 형성하는 것이자 동시에 상반되는 두 존재 양상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 경계가 허물어지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작품은 이러한 공존관계를 자연스럽게 인식하도록 만든다. 자기 자신이 처한 존재상황을 명백히 구분해서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미 우리는 수많은 유형 무형의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관계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눈으로 볼 수 없다고 해서 단지 '없다'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없는 것’이 오히려 ‘가득 찬 것일 수 있다는 역설(paradox)이 그리 새삼스러운 말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마음으로서만 가능한 것이지, 어떤 형태로 제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을 그린다는 것, 그것은 마음을 그리는 것 혹은 말하는 것이리라. 화면에서 '보이는’ ‘없음(無)' 은 새로운 회화적 세계의 가능성을 열어간다. 모든 것이 사라진 화면에 또 다시 새로운 선이 그어질 것이다. 이렇게 그어진 선은 투명한 마음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선이다. 박은선 작가는 작업을 통해 그 투명한 마음의 본질을 들여다볼 것을 우리에게 권유하고 있다.
이원호
이현진-테크놀로지 자연
이현진의 미디어 작품은 만남과 마주함을 경험하게 한다. 이 만남은 테크놀로지와 자연의 마주함을 주선하는데, 그 목적은 바로 예술과 관람객간의 상호작용에 있다. 자연 풍경이나 속성을 디지털 테크놀로지, 영상, 센서를 통하여 다시 감상하게 하는 것이 바로 작품의 전략이다. 작가는 이를 “조우(遭遇)”라 부르는데, 구성된 혹은 재배치된 자연의 모습을 우연히 마주하게 되는 순간의 인식을 의미한다. 그 인식은 다름 아닌 미적 인식으로 테크놀로지를 통해 바라 본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 숭고함의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작품 <물수제비 던지기〉는 실제 강가에서 물수제비를 던지는 경험을 전시장 안에서 체험하게 한다. 실제 행위와 전시장의 인터렉티브 경험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전시장에서의 가상경험은 실제 강 위를 통통 튀는 물수제비 던지기의 행위를 고스란히 재현한 것이다. 그러나 가상의 물수제비 행위와 그에 따른 경험은 실제 물수제비를 던지는 그것과도 다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가? 게임 닌텐도 위(Wii)의 신체움직임은 실제 스포츠운동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통해 전혀 새로운 감각을 경험하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이현진의 테크놀로지로 재현된, 그리고 재구성된 자연은 자연을 바라보는 새로운 감각을 경험하게 한다. 전시되는 작품 <마주친 두 시간>에서는 일몰과 일출의 경험을 같은 공간에서 동시에 경험하게 한다. 해와 달의 공존은 현실에서 체험할 수 신비한 경험이다. 대형 스크린에 펼쳐지는 생성과 소멸의 에너지는 관객들에게 신기함보다는 자연의 경이로움을 선사할 것이다. 이 경험은 단순히 테크놀로지의 효과가 아닌,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감각에 직접적으로 반응하는 예술적 자각의 지점을 건드린다. 그 자각은 자연의 것이 아닌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감각을 보다 확장시켜 상상이라는 가능성의 지점들을 인식하게 한다. 이 가능성은 유희적이고 미학적인 인식을 통해 우리들로 하여금 새로운 예술의 경험과 마주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테크놀로지로 풀어내는 이현진의 “조우" 이다. 그녀의 테크놀로지 자연으로 감성적인 여행을 떠나보자.
백곤
임택 - 산수유람..
임택은 자신의 경험과 관념으로 혼합된 산수화를 입체적인 조형어법으로 재현하고 있는 작가이다. 작품에는 동양화의 본질적인 특징들, 즉 여백과 생략, 정신성, 다중적 시점 등이 현대적 조형감각에 적합한 방식으로 수용되고 있다. 이를 통해 이루어진 회화적 공간은 시각적 편협성을 극복하고 우리가 바라보는 자연이 얼마나 다양한 시각적 다양성을 갖고 있는지를 확인해 주고 있다. 임택의 산수화는 인간과 단적으로 분리된 순수한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현실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자연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업은 산수화에 대한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물론 임택은 산수화의 근본적인 정신을 훼손하거나 등한시하고 있지 않다. 이는 작품에 나타난 공간적 구성이 전통적인 산수화의 여백을 잘 살려내고 있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읽어낼 수 있다. 또한 단순한 형태로 이루어진 산은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효과를 유발하고 있다. 관람객은 이 모호한 경계에서 작품을 감상하면서 '산수유람' 이 만들어내는 예술적 공간에 참여한다. 임택의 산수 풍경은 일상과 탈(脫)일상 혹은 현실과 상상의 교차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 나서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업은 여행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과 닮아 있다.
이원호
최수정-발화와 침묵의 이미지
최수정의 회화, 설치, 영상작품은 현실과 비현실이 혼재된 이미지의 세계를 보여준다. 알록달록한 색상들로 채워지거나 혹은 비워지는 작가의 작품 속 이미지들은 눈의 시각적 시선과 사유의 심상 사이를 부유한다. 최수정에게 '이미지’ 는 중요하다. 이 이미지는 대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작품에서 특별히 이미지라고 지칭되는 부분들은 각 오브제들의 개별적 특성들이 아니라 오브제들이 모여 있는 듯하지만 혼란스럽게 펼쳐져 있는 현상을 지칭한다. 하나의 소재와 소재들이 합쳐져 있으면서도 전체로 통일되지 않고 각각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이미지, 작가는 이 이미지들의 파편들을 얇고 가볍게 끌어당긴다.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한 개별 이미지들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사유의 평평함이 바로 그녀가 작품을 통해 선보이고자 하는 이미지인 것이다. 그렇기에 작품에서 이미지는 전체이자 개별적 의미들로 단지 기표로만 작동하는 상징과 같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미지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바로 목소리로 발화하는 순간의 침묵을 말한다. 역설적이지만 최수정은 이 발화와 침묵의 공존을 통해 관객들에게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가 끊임없이 교차되고 그러한 세계에서 이미지와 시선은 끊임없이 부유하며 자연스럽게 미끌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작품에서 이미지는 회전목마의 돌고 도는 제자리걸음이나, 불빛의 켜짐과 꺼짐에 의한 별들의 반짝거림을 표현하는 것처럼 순간적이고 일시적이다. 또한 이미지는 사물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생각의 실타래를 풀어내 듯 비재현적이고 추상적으로 표현된다. 즉, 그녀에게 이미지는 마치 은하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의 깜박거림처럼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환영적인, 혹은 비현실적인 평면속에서 감각된다. 그렇기에 작품이 내뿜는 수많은 빛의 향연은 언제나 우리들을 예술의 아름다운 은하계로 끌어당긴다. 수많은 이미지가 생성되고 사라지는 최수정의 우주에는 언제나 알록달록한 새로운 빛의 꿈들이 깜박거린다.
백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