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REFLECTION-반성
전시기간: 2012.05.04 - 2012.06.24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고명근, 권치규, 김승영, 최태훈
전시내용:
예술과 반성
임성훈|모란미술관 학예실장, 미학 Ph.D
예술은 인간이 자연과 문화라는 환경 속에서 행한 정신적 활동을 통해 산출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술이 재현하는 그 모든 것은 결국 인간의 문제와 관계한다. 인간이 없다면 예술 또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note 그런데 혹자는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을 내세워 이에 반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것도 인간, 자연, 문화와 관계한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엄밀히 따지면 예술을 위한 예술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은 18세기에 기술과 예술의 분리가 논의되고, 그에 따라 확립된 예술의 자율성 테제에 그 기원을 갖는 표제어이다. 그리고 19세기 동안 예술을 위한 예술은 “예술지상주의” 또는 “유미주의(Aestheticism)" 등과 같은 다른 이름을 갖기도 하는데, 그 핵심은 예술이 도덕, 종교, 형이상학적 진리의 가치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 그 자체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에 있다. 이는 예술의 순수성을 확보하려는 부단한 시도이며, 20세기 모더니즘 예술의 구호가 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특히 1960년대 이후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구호는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예술은 예술을 위한 예술로서만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비교적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예술은 예술로서만이 아니라 인간이 관계하는 자연과 문화 속에서 그 의미를 갖는다. 물론 이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 함의하고 있는 예술의 자율성을 전적으로 배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미학적 함의를 지나치게 (혹은 왜곡해서) 강조한 나머지 예술 그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동의할 수는 없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예술의 자율성이란 삶과 문화와 고립된 채 유령처럼 떠도는 몽상적인 자율성이 아니다. 예술은 자율적이면서도 동시에 문화의 작용과 반작용의 산물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로 예술은 반성을 필요로 한다. 예술을 통해 이루어지는 반성은 논리적 반성이나 도덕적 반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예술이 지식이나 윤리적 규범과 관계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관계해야만 한다. 그러나 단지 그러한 관계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는 없기에 예술에는 언제나 미적 반성이 요청되는 것이다.
이번 전시 <반성 - REFLECTION〉전은 예술을 통한 반성, 곧 미적 반성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조형적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는 의도에서 기획된 것이다. 예술은 새롭고, 참신하고, 독창적인 형식 혹은 충격적인 형식을 제시하고, 이에 따른 관객들의 자극이나 감동 등과 같은) 반응을 이끌어내는 역할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에는 조형적 감각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이루어질 미적 반성도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네 명의 작가들(고명근, 권치규, 김승영, 최태훈)의 작업은 이러한 미적 반성의 계기들을 생산 미학적 관점뿐만 아니라 수용 미학적인 관점에서도 제시하고 있다.
고명근은 사진과 조각의 결합에서 생겨나는 조형적 가능성을 확장하면서 동시에 예술을 통해 형성되는 미적 반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고명근의 작업을 사진이란 매체를 조각의 새로운 재료로 활용하는 실험적 작업이라고 간단히 평가하는 것은 그리 온당치 못하다. 오히려 삶의 내면적 풍경들을 마치 건축가의 설계도면처럼 조형적으로 구축하고, 이를 관객과의 상응 속에서 확인해 나가는 작업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권치규는 욕망과 그에 따른 긴장을 절제된 조형성으로 제시하고 있다. 인간은 자유로운 욕망을 갖고 있지만, 또한 그것을 제어해야하는 운명에 처해있다. 권치규는 이러한 욕망과 제어의 관계를 단순한 물리적인 차원이 아니라 인간, 자연, 문화 사이에 있을 수밖에 없는 긴장에 주목하고 이를 반성의 분위기로 이끌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김승영의 조각과 설치작업은 자연 현상을 독특한 조형의식으로 재현한다. 이를 통해 자연 현상의 이미지와 소리는 또 다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여기에서 반성이 이루어지는데, 이는 고답적인 반성이 아니라 자연의 흔적처럼 자연스러운 반성이다. 그리고 반성에 따른 이러한 지표(index)를 통해 동적인 것, 정적인 것, 우연성, 필연성 등이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최태훈은 철과 빛의 변용을 견실한 조형언어로 표현한다. 철과 빛으로 형성된 오브제는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또한 역설적으로 전혀 볼 수 없었던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 주목한다면, 최태훈은 일상적인 것을 예술적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반성의 공간을 창출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번〈반성 -REFLECTION>전에 참여한 네 명의 작가들의 조형성은 재료, 형식, 형태만을 고려한다면 분명 서로 다르다. 그러나 각각의 조형성에서 예술과 반성의 관계성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어떤 공통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예술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인간, 자연 그리고 문화의 문제를 반성하는 활동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적 반성은 우리네 삶의 의미를 확인하는 또 다른 존재론적인 행위이다. (물론 예술을 통한 반성이 단순히 삶을 비교한다거나 혹은 삶을 개선한다는 것과 같은 계몽적인 반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반성 -REFLECTION>전은 예술이 삶과 어떻게 관계하고, 또한 그것이 어떻게 조형적으로 모색될 수 있는지를 가늠해보는 전시이다. 이번 전시가 인간, 자연 그리고 문화가 어우러진 삶의 장소에서 이루어질 미적 반성의 계기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note] 물론 이 말을 인간중심주의를 강조하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실상 인간중심주의에 따른 세계관으로 인해 야기된 환경의 문제, 대표적으로 생태의 문제는 심각하다. 그럼에도 이 문제를 반성하고 해결해 나가야 하는 주체는 역시 인간일 수밖에 없다.
전시명: REFLECTION-반성
전시기간: 2012.05.04 - 2012.06.24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고명근, 권치규, 김승영, 최태훈
전시내용:
예술과 반성
임성훈|모란미술관 학예실장, 미학 Ph.D
예술은 인간이 자연과 문화라는 환경 속에서 행한 정신적 활동을 통해 산출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술이 재현하는 그 모든 것은 결국 인간의 문제와 관계한다. 인간이 없다면 예술 또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note 그런데 혹자는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을 내세워 이에 반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것도 인간, 자연, 문화와 관계한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엄밀히 따지면 예술을 위한 예술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은 18세기에 기술과 예술의 분리가 논의되고, 그에 따라 확립된 예술의 자율성 테제에 그 기원을 갖는 표제어이다. 그리고 19세기 동안 예술을 위한 예술은 “예술지상주의” 또는 “유미주의(Aestheticism)" 등과 같은 다른 이름을 갖기도 하는데, 그 핵심은 예술이 도덕, 종교, 형이상학적 진리의 가치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 그 자체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에 있다. 이는 예술의 순수성을 확보하려는 부단한 시도이며, 20세기 모더니즘 예술의 구호가 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특히 1960년대 이후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구호는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예술은 예술을 위한 예술로서만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비교적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예술은 예술로서만이 아니라 인간이 관계하는 자연과 문화 속에서 그 의미를 갖는다. 물론 이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 함의하고 있는 예술의 자율성을 전적으로 배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미학적 함의를 지나치게 (혹은 왜곡해서) 강조한 나머지 예술 그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동의할 수는 없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예술의 자율성이란 삶과 문화와 고립된 채 유령처럼 떠도는 몽상적인 자율성이 아니다. 예술은 자율적이면서도 동시에 문화의 작용과 반작용의 산물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로 예술은 반성을 필요로 한다. 예술을 통해 이루어지는 반성은 논리적 반성이나 도덕적 반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예술이 지식이나 윤리적 규범과 관계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관계해야만 한다. 그러나 단지 그러한 관계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는 없기에 예술에는 언제나 미적 반성이 요청되는 것이다.
이번 전시 <반성 - REFLECTION〉전은 예술을 통한 반성, 곧 미적 반성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조형적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는 의도에서 기획된 것이다. 예술은 새롭고, 참신하고, 독창적인 형식 혹은 충격적인 형식을 제시하고, 이에 따른 관객들의 자극이나 감동 등과 같은) 반응을 이끌어내는 역할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에는 조형적 감각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이루어질 미적 반성도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네 명의 작가들(고명근, 권치규, 김승영, 최태훈)의 작업은 이러한 미적 반성의 계기들을 생산 미학적 관점뿐만 아니라 수용 미학적인 관점에서도 제시하고 있다.
고명근은 사진과 조각의 결합에서 생겨나는 조형적 가능성을 확장하면서 동시에 예술을 통해 형성되는 미적 반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고명근의 작업을 사진이란 매체를 조각의 새로운 재료로 활용하는 실험적 작업이라고 간단히 평가하는 것은 그리 온당치 못하다. 오히려 삶의 내면적 풍경들을 마치 건축가의 설계도면처럼 조형적으로 구축하고, 이를 관객과의 상응 속에서 확인해 나가는 작업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권치규는 욕망과 그에 따른 긴장을 절제된 조형성으로 제시하고 있다. 인간은 자유로운 욕망을 갖고 있지만, 또한 그것을 제어해야하는 운명에 처해있다. 권치규는 이러한 욕망과 제어의 관계를 단순한 물리적인 차원이 아니라 인간, 자연, 문화 사이에 있을 수밖에 없는 긴장에 주목하고 이를 반성의 분위기로 이끌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김승영의 조각과 설치작업은 자연 현상을 독특한 조형의식으로 재현한다. 이를 통해 자연 현상의 이미지와 소리는 또 다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여기에서 반성이 이루어지는데, 이는 고답적인 반성이 아니라 자연의 흔적처럼 자연스러운 반성이다. 그리고 반성에 따른 이러한 지표(index)를 통해 동적인 것, 정적인 것, 우연성, 필연성 등이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최태훈은 철과 빛의 변용을 견실한 조형언어로 표현한다. 철과 빛으로 형성된 오브제는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또한 역설적으로 전혀 볼 수 없었던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 주목한다면, 최태훈은 일상적인 것을 예술적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반성의 공간을 창출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번〈반성 -REFLECTION>전에 참여한 네 명의 작가들의 조형성은 재료, 형식, 형태만을 고려한다면 분명 서로 다르다. 그러나 각각의 조형성에서 예술과 반성의 관계성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어떤 공통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예술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인간, 자연 그리고 문화의 문제를 반성하는 활동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적 반성은 우리네 삶의 의미를 확인하는 또 다른 존재론적인 행위이다. (물론 예술을 통한 반성이 단순히 삶을 비교한다거나 혹은 삶을 개선한다는 것과 같은 계몽적인 반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반성 -REFLECTION>전은 예술이 삶과 어떻게 관계하고, 또한 그것이 어떻게 조형적으로 모색될 수 있는지를 가늠해보는 전시이다. 이번 전시가 인간, 자연 그리고 문화가 어우러진 삶의 장소에서 이루어질 미적 반성의 계기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note] 물론 이 말을 인간중심주의를 강조하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실상 인간중심주의에 따른 세계관으로 인해 야기된 환경의 문제, 대표적으로 생태의 문제는 심각하다. 그럼에도 이 문제를 반성하고 해결해 나가야 하는 주체는 역시 인간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