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놀이와 莊嚴 세 번째 眞진實실不불虛허
전시기간: 2005.05.09 - 2005.06.14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배준성, 서유라, 정종미, 한만영
전시내용:
놀이와 장엄 세 번째
진실불허(眞實不虛)
조은정(미술평론가)
"길손이가 부처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아이는 정채봉의 동화 『오세암』을 읽고 문제 10개를 내오라는 학교 숙제를 하는 중이었다.
오갈 데 없는 아이 길손이와 앞이 안 보이는 누나를 한 스님이 돌보아주었는데 하도 길손이가 짓궂어서 여러 스님들이 불편했던지라 스님은 아이를 데리고 암자에 가 있었다. 어느 겨울 아이를 암자에 놔두고 산 아래 마을에 양식을 구하러 내려간 사이 너무도 눈이 많이 와 봄이 가까운 두 달이 지나서야 스님이 암자에 이르러보니 아이가 법당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이었다. 관세음보살이 놀아주고 먹여주었다면서…. 하지만 곧 아이는 죽었고 그러자 누나는 눈을 떠 세상을 보았다….
답변이 없자 아이가 말했다.
“에이…. 진실해서지!"
아, 질문은 기적에 대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물음. 5세 아이가 부처가 되었다고 해서 오세암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5세 아이가 부처가 될 수 있었을까에 대한 물음. 책에 묘사된 길손이는 정말 장난이 심한 개구쟁이지만 누나에게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일일이 설명해주고, 그림 속 관세음보살에게도 자기가 본 세상을 자세히 일러주는 아이었다. 작가는 길손이가 떠난 뒤 누나 감이는 자신의 눈으로 보는 세상보다 동생이 들려주던 세상이 더 아름다워서 길손이가 더 생각났다고 적고 있었다. 순간 장 피에르 주네 감독의 〈아멜리에〉가 떠올랐다. 노틀담에서 투신한 관광객에 어머니가 깔려 죽고 키우던 금붕어마저 자살하자 혼자가 된 아멜리에가 늘 같은 시각 같은 거리를 걷는 시각장애인에게 신문가판대에는 어떤 사람이 있고 누가 옆을 지나는지 그의 머리가 어떻고 하는 등의 설명을 아주 빠르게 들려준다. 잠깐 부축해 걷는 동안이었지만 시각장애인은 기쁨에 들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아무 것도 보지 못하여 암흑이었던 세상은 아멜리에의 눈과 말을 통해서 밝은 빛으로 가득한 움직이는 세상이 되었던 것이다.
길손이가 한 많은 일 중에서 두드러진 일은 자신의 눈으로 본 세상을 그림 속 관세음보살과 앞 못 보는 누나에게 전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길손이가 진실했다는 것은 세상을 진실로 보았으며 진실로 전하였다는 말일 것이다. 진실하게 '본다' 란 어떤 것일까? 겸우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빛이 물체에 닿으면 이 눈이 물체로부터 반사되는 광을 인식하는 것인데, 광명이 없다면 볼 수 없는 것이요. 눈을 여의고도 못 보는 것이요. 보는 대상이 사라져도 못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를 모두 여의고도 보는 놈이 있어요. 이 보는 자, 보는 대상을 여의고도 깜깜한 암흑의 한밤중에도 보는 놈이 있어요. 생각으로 보는 놈이 있지 않나요. 현실을 여의고 보는 일념(한 생각 일으키는 놈)이 있어요. '그 놈은 무량겁 전에도 있었고 무량겁 후에도 있었다' 이것입니다."
경제 위주의 정책과 부를 좇던 사회 전반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제자리걸음과 후퇴를 반복하는 시기에 이르렀다. 경제적 수치로서의 삶을 유지하기는 이른바 위기임에 틀림없지만, 숫자적 순위를 놓아버린 순간 그동안 잊었던 것들의 가치가 새롭게 드러나는 것을 깨닫는다.
진실에 대한 많은 논의 중 「반야심경」에 나오는 한 구절인 '진실불허' 는 모든 개념을 요약한 실행의 문제를 짚는다. 물론 한글로만 이해하자면 '진실하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는 희극적 언어로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한자의 여러 음을 두루 생각하여 보자면 ‘진실하여(眞實) 허망하지 않는다(不虛)' 라는 뜻에 이른다. 동양적 사고의 전통에서는 희귀한 알레고리가 적용되는 언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진리를 구하는 사리자에게 법을 전하는 방식으로 금강의 지혜를 요약한 「반야심경」에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이 공하기에 이것도 저것도 없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등의 의식도 없는 것이기에 나고 죽음조차 없다고 했다.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닌 상태를 상정한다면 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나고 죽음이 없다는 말을 단지 태어나고 죽는다는 사실로만 이해한다면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인생이 허망하다라는 사실을 넘어서는 '진실' 이란 실체에 대면한다면 우리 삶을 어떻게 성찰할 수 있을까. 아이러니 또는 알레고리를 포함한 이번 전시명은 그래서 우리 삶을 즐겁게 되돌아보는 어구가 될 수 있는 '진실불허' 를 택하였다. 장난스레 다가간 관람자도 전시를 둘러보고 나면 그 즐거움 뒤에 드리운 허망함의 그림자 그리고 그것을 넘어선 작가들의 치열한 진실, 진리에의 여정에 맞닥뜨릴 것이다. 진실, 진리에 대한 대면이야말로 우리 생의 목표가 아니던가. 겸우선사는 진리란 바뀌는 현상을 보는 본심이라 정의하였다. 현실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데 바뀌는 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인데, 태양을 보거나 허공을 보거나 보는 그 본심은 항상 바뀌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본 것을 보이지 않는 이에게 자신의 언어로 설명한 길손이처럼 예술가는 관객에게 우리가 보지 못한 세상을 묘사해준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눈으로 본 것보다 더 아름답기도 하고 더 자세하기조차 해서 앞을 못 보았던 누나 감이가 바로 자신인 양 느껴지기도 한다. 이 세상을 돌아보고 전하는 진리에 대한 여정, 그 앞에 선 예술가들의 눈에 보여진 세상을 그들의 말로 듣는 것, 그것이바로 이번 전시의 목적이다. 초대된 4인의 작가 한만영, 정종미, 배준성, 서유라는 각기 다른 연배의 작가로서 회화를 통해 시지각 혹은 인식으로서 보는 것에 대한 문제에 천착하는 작가이다.
한만영의 작품은 실체와 환영,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대라는 이 시대 미술에서 주요한 요소를 보여준다. 시간의 문제, 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인쇄된 명화와 실재하는 작품, 화려함과 비속함 등 양면적이면서도 기실은 우리 인간사에서 다반사인 것들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작가가 제시한 탑은 무한한 모듈로 이루어진 구조체이다. 실재했던 인간으로서 석가가 열반에 이르러 '내가 아닌 진리에 의지처를 삼으러' 는 말을 남긴 뒤 화장되어 나온 사리를 모신 곳이 탑이므로 탑은 곧 석가의 무덤, 깨달음의 증거이다. 관람객은 무한히 번식하는 모듈구조 속에서 분신사리와 팔만구천탑의 일화를 떠올리게 된다. 생에의 반향, 구도를 향한 욕망은 실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허망을 접고 석가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데 열중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에게 구도자 석가의 모습이 필요한 것은 우리 안에 내재한 불성을 일깨우는 모범적 거울로서이다. 부처가 활활 타는 불길이라면 우리도 곧 그렇게 될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장작임을 아는 것이 바로 구도를 향한 여정에서 선행될 일일 것이다. 56억 7천만년 후에 할 일을 생각하는 미륵이 이 모듈 앞에 앉아 있음은 거울 속 이미지인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반추가 곧 구도에 이르는 길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기성의 바이얼린이 작품으로 사용되는 것을 현대미술사에서 갖는 의미를 새삼 새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회화의 영역에 끌어들여 말 그대로 그림이 되게 한 점이나, 미술사의 한 작품을 그것에 그려 넣는 행위를 통해 시각과 청각의 문제, 좋다는 것의 나열 그리고 그것의 존재성에 대한 물음 등이 한 박스 안에 담겨 있는 것을 본다. 인간이 시간이라고 느끼는 것, 전통이라고 느끼는 것, 명품이라고 하는 것의 분별은 과연 어떤 경계가 있을까. 그 경계를 인식하는 순간 화면에 끌어들인 오브제가 실은 화면과 얼마나 이질적인 시간의 존재인가라는 사실에 이르면 '조우' 라고 여겨졌던 이들이 머쓱할 정도로 자기만의 세계의 것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 다른 시간이 분명 화면이라는 한 공간 안에 존재한다. 여기가 바로 작가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경계를 제시한 지점이다. 그런 점에서 여행지에서 만났던 어떤 인물에 대한 기록과 작은 기념품 그리고 그것을 끄집어내어 화면에 재현하는 그 과정 모두가 시간의 차를 두고 있지만 생각이 일어남과 작품이 생성됨이라는 과정에서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하나로 귀착되는 지점이 화면에 있음을 본다.
이러한 시각은 전통 산수화를 화면에 재구성한 풍경 시리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회색 화면에 어스름하게 드러나는 총석정도는 18세기 겸재의 진경산수의 한 폭에서 가져온 것이지만 겸재가 실재하는 자연경관을 그린 것임은 물론이다. 실재한 자연을 그린 그림을 다시 그리는 일, 겸재가 본 총석정이 200년의 시간을 넘어 화면에 존재한다. 물론 결코 우리 눈앞의 장대한 화면이 겸재의 총석정도는 아니다. 평론가 이석우가 생성과 소멸의 접점' 이라 일렀던 경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물론 지적 추론이 필요하다. 하지만 결코 그의 화면이 주는 소멸의 순간 즉 시간과 공간, 입체와 평면이 분별을 잃는 것을 경험하며 돈오점수의 가능성을, 염화미소의 의미를 다시 추론한다.
정종미는 역사 속 여성의 모습을 종이와 천 등 여성적인 소재와 천연염색을 통해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 일련의 작품들과 어부사시사 등 시각적 감흥을 청각적 장치로 바꾼 문학작품을 다시 시각화하는 감각적인 시도를 보여주는 등 폭넓은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의 작품은 시공을 초월하여 삶의 존재 방식에 대한 문제를 깊이 탐구하게 한다. 보자기부인, 종이부인 등 재료와 형태를 상기시키는 익명의 존재들은 최근, 이름을 지니고 나타난다. 역사 속에 실재했던 여인들이지만 거의 알려진 것이 없는 그들을 깊이 연구하여 그녀들의 모습을 역사에 존재하는 성격으로 파악한다. 고분벽화에서 걸어 나온 듯한 하백의 딸로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 세 가지 기지로서 나라를 구하였으며 역사서와 야사 모두에 여왕의 이름을 역사에 남긴 신라의 선덕여왕, 멀리서 배를 타고 한없는 여행 끝에 도착한 나라 가야의 왕비가 된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 등 고대세계의 여인들을 우리는 이렇게 당당한 모습으로 만난 적이 없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허황후와 선덕여왕을 통해 시공의 새로운 경험치를 추출하고 있다. 일명 허황후, 허황옥은 부처만을 의지한 채 몇몇 시종과 함께 작은 배에 탑과 함께 몸을 실어 길을 떠난 여인이다. 자신의 배우자를 찾아 알 수 없는 곳을 거리낌 없이 떠났던 그녀를 통해 가야는 탑을 세웠고 모든 생명을 가엾이 여기는 자비(慈悲)를 배웠다. 작가는 왕비 허황후의 이름이 허황옥이며 아유타국의 공주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그녀는 푸른 바탕 위에 금빛으로 서 있다. 감물들인 종이옷은 푸른 바탕이 배어날 정도로 얇고도 부드러운 것이며 피부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그녀의 국적과 이름 그리고 신분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일견 그녀에게서 익숙한 존재를 읽어내게 되는데, 고려 불화에서 익히 보아온 관세음보살처럼 투명하고도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발밑에 연꽃이 피어 그녀의 덕을 찬양하는 이 그림은 호흡을 조정하여 유려한 선을 내는 금물로 그려져 역사 속에 실재하는 인물이 어떻게 신화화 되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과정을 유추하게 한다.
한편 신라의 선덕여왕은 머리에 높은 금관을 착용하여 한눈에도 그녀가 신라의 왕이었던 존재임을 의심할 바 없게 한다. 정면을 응시하는 그녀의 머리 뒤에는 눈부신 금관을 더욱 드러내주는 푸른색 두광이 있어 이 역사 속에서 정치를 하고, 나라를 이끌던 존재를 종교적 차원의 이해망으로 이끌고 있음을 드러낸다. 눈부신 금박을 배경으로 중국이 보내온 수수께끼의 주인공인 향기 없는 모란을 연꽃처럼 들고 선 그녀의 자태는 여왕의 옷을 입은 대승불교의 보살상 같다.
인도의 보살상 같은 허황옥, 신라의 보살상 같은 선덕여왕. 두 인물은 실재했던 인물을 그들의 행적을 통해 그들 삶의 방식을 보살로 파악한 인물들이다. 이 두 인물이 나란히 한 공간에서 그윽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것은 이들 모두가 화생(化生)의 공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손에 의해 염색되고 만들어진 수많은 지화(紙花)는 인간인 그녀들을 위로하는 도구인 동시에 공간을 연화화생의 차원으로 전이시키는 기제이다.
충실한 자기 역할과 삶에의 의지를 보여준 두 여인은 실재했던 인물이 진실하게 살아 역사에 당당히 존재하는 동시에 고귀한 영혼의 영적 상승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는 진실로 시회와 인간적 차원의 삶에 집중한 페미니즘적 차원의 시각에서 벗어난 인간과 인격 자체로서 여성을 파악하는 시각이 아닐 수 없으며, 그러한 태도야말로 판단을 보류하고 그들 그대로를 보아준 작가의 평정심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배준성은 화가의 옷 시리즈를 통해 겹겹이 쌓아올려진 인식의 문제와 관람자의 관음증적 태도를 목도한 작가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한 화면에 다른 이미지가 공존하는 렌티큘러를 이용한 작품은 뮤지엄 혹은 명화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전도, 그것을 통한 인식의 변환과 시간에 대한 고찰을 보여준다.
배준성의 작품에서 현란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그 옷 속에서 우리가 정작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어쩌면 비단의 광택이 자르르하고 트리폴리가 엄청난 그 옷 속에 숨어 있는 몸일 것이다. 그래서 겹겹이 가리워진 그 무거운 비닐을 들치고 관객들은 밑으로 밑으로 시선을 옮겼던 것이다. 하지만 옷이 사회적이며 권력적인 것만큼이나 몸 또한 권력에 깊이 관여됨을 안다. 우리 몸이란 무엇일까?
세탁소에 갓 들어온 새 옷걸이에게 헌 옷걸이가 말했다. 헌 옷걸이 왈, “너는 옷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기 바란다.”새 옷걸이가 물었다. “왜 옷걸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시는지요?"다시 헌 옷걸이가 말했다. “잠깐씩 입혀지는 옷이 자기의 신분인양 오만해지는 옷걸이들을 그동안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 몸이 옷걸이라는 은유는 비단 사회적 현상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권력의 옷을 벗은 자연의 몸 자체도 인생의 사계절이라는 옷을 입는다. 배준성의 그림에서 가장 멋진 모습으로, 권력적으로 그려진 옷 아래 가리워진 몸을 보는 것은 그저 한 발자국만 옆으로 옮기면 된다. 이는 누군가 한 발자국만 옆으로 비켜서면 발가벗기워진 모습으로 미술관에 버젓이 자리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잘 알려진 명화조차도 발가벗기워진 몸으로 미술관에 버젓이 자리한다. 인간 그대로의 모습으로 선 서전트의 여인상이 스캔들의 중심에 선 것을 은유한 작품 앞에서 느슨한 드레스의 끈 하나가 빌미가 되어 인간을 곤란한 상황으로 몰아간 어이없음과 광기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타자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관음증은 어떤 차가 있을까. 우리 몸이 옷걸이여서 옷이 입혀지는 것이고, 인생의 사계절이 입혀지는 것이라면, 삶과 죽음 또한 옷에 불과한 것일 테다. 평화 그 자체인 불성인 원적(圓寂)의 상태는 갈고 닦음으로 이루어진다. 표현 언어와 상태에 대한 인식을 차치하고, 인간종이 지닌 한 형상인 본성에 대한 인식, 상승된 단계에 대한 열망은 동서양 공히 영혼의 연마과정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인간은 편안한 생활 속에서는 발전할 수 없다.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 인간의 정신은 단련되고 또한 일을 똑똑히 판단할 수 있는 힘이 길러지면 성공할 수 있다.”는 헬렌 켈러의 말을 빌려 작가는 이러한 연마과정을 설명한다. 일견 세속적인 언어로 묘사된 성공이란 언어 속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그녀의 영혼이 의미하는 성공이란 다른 의미일 것임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인간이 살아있으면 사람(human)이라 하고 죽으면 유령(phantom)이라 한다. 일상에서 느끼는 삶과 죽음의 엄연한 경계를 옷걸이에 대한 인식을 통해 극복할 수 있음을, 배준성의 유령이 공존하는 미술관에서, 살아 움직이는 낙서가 가득한 벽면에서 확인하게 된다.
책은 진리를 담은 것이기에 신성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정작 물질로는 종이일 뿐이며 구성은 글씨와 행간 혹은 그림으로 이루어진 것일 뿐이다. 실재하는 책을 그린 듯한 서유라의 화면은 기실은 자신이 생각한 개념에 맞추어 이 세상에 없는 책 모양을 그린 것이다. 화사한 색감으로 겹겹이 쌓아올려진 책들은 그 자체의 구조로 존재하지만 사실과 기록의 문제, 그렇다고 믿는 것에 대한 문제를 보여준다.
이번에 출품한 도교, 불교 시리즈는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전통 종교에 대한 책들의 모음이다. 경전은 실체하지만 추상의 영역에 있는 종교를 생활 속에서 구체화시키는 도구이다. 책속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종교적인 아우라는 경전을 지고지순한 단계로 끌어올린다. 이제는 보지 못한 선지자에 대한 희망과 믿음이 배어 있는 경전은 기실 선지자 그의 것이 아닌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위에서 원하는 것이 덧붙여진 것인 만큼 종교적 가르침을 전하는 책들만큼 권력적인 것도 드물다. 게다가 그것을 해석하는 시각에 따라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도 하고, 영원한 죄인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작가의 종교 경전 시리즈는 종교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에 대한 연구보고서이다.
〈문화재 수난사〉의 경우, 단순히 물건으로만 보았을 때는 그저 사금파리 혹은 종이나 돌덩이에 불과하지만 그것에 역사적 가치를 부여했을 때 역사의 증거물로 작용하는 물질을 본다. 게다가 타자의 역사에 관여될 때 필연적으로 따르는 역사의 교란 혹은 {곡의 도구로 사용되며 점유되는 문화재는 자국민의 손에 의해사도 물질화된다. 담담히 그림 속 그림을 통해 전하는 이들 문화재가 어떤 의미일까에 대한 소박한 접근법은, 경전에 이르러 종교가 어떤 것이며 우리 삶에서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조용히 풀어내는 방식에도 적용된다.
작가는〈불교〉에서는 원시불교의 내용을 담은 「아함경」에서부터 현대 사회에서 불교가 갖는 의미를 조명하는 책을 지어 보인다. 그리고 《금강경》을 펼쳐 보인다. 하지만 정작 눈을 사로잡는 것은 엄숙한 경전의 글귀도, 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지침서도 아닌, 화면 우측 하단에서 책등에 오롯이 피어난 화사한 자태의 연꽃 한 송이다. 이 세상이 한 송이 꽃이라는 가르침은 금강경과 반야심경 가르침의 요체라는데 그 실체의 모습을 그림 속 그림으로 보는 것이다. 무한히 존재하지만 그 존재성을 표현할 수 없는 허공, 그 허공에서 움직이는 기상이야말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가르침이 있다. 허공의 빈 것과 찬 것을 나누는 행위가 얼마나 자주 급박히 따라가야만 파악될 수 있는 것인가를 아는 일. 이 우주가 모두 하나임을 아는 일은 세계가 한 송이 꽃과 같음을 아는 일이라 했다. 〈도교〉에서는 도덕경과 은사의 한가로운 삶을 보여주는 그림들 사이에 불노장생에의 욕망이 근원임을 눈이 부신 분홍색 천도가지를 통해 보여준다.
작가들은 그동안 우리가 보아왔던 세상, 지금 본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은 무엇인가에 대한 예술가적 사유를 우리 앞에 드러낸다. 우리가 본다는 것은 보려는 주체와 보여질 대상이 있음을 의미한다. 모든 일을 헤아려 보는 것, 그것을 우리는 ‘비추어보다' 라고 말한다. 대자연 혹은 우주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것 동시에 그러한 부정을 통해 자신의 존재성을 찾는 종교가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에서부터 출발하는 아이러니를 그림 속 그림, 그림이 된 사물과 인간들에서 확인한다. 동시에 인간이 무한한 욕망의 존재이기에 이 구도의 여정이 가능하다는 사실 또한 일러주는 작가들의 통찰력이 놀라울 뿐이다.
전시명: 놀이와 莊嚴 세 번째 眞진實실不불虛허
전시기간: 2005.05.09 - 2005.06.14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배준성, 서유라, 정종미, 한만영
전시내용:
놀이와 장엄 세 번째
진실불허(眞實不虛)
조은정(미술평론가)
"길손이가 부처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아이는 정채봉의 동화 『오세암』을 읽고 문제 10개를 내오라는 학교 숙제를 하는 중이었다.
오갈 데 없는 아이 길손이와 앞이 안 보이는 누나를 한 스님이 돌보아주었는데 하도 길손이가 짓궂어서 여러 스님들이 불편했던지라 스님은 아이를 데리고 암자에 가 있었다. 어느 겨울 아이를 암자에 놔두고 산 아래 마을에 양식을 구하러 내려간 사이 너무도 눈이 많이 와 봄이 가까운 두 달이 지나서야 스님이 암자에 이르러보니 아이가 법당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이었다. 관세음보살이 놀아주고 먹여주었다면서…. 하지만 곧 아이는 죽었고 그러자 누나는 눈을 떠 세상을 보았다….
답변이 없자 아이가 말했다.
“에이…. 진실해서지!"
아, 질문은 기적에 대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물음. 5세 아이가 부처가 되었다고 해서 오세암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5세 아이가 부처가 될 수 있었을까에 대한 물음. 책에 묘사된 길손이는 정말 장난이 심한 개구쟁이지만 누나에게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일일이 설명해주고, 그림 속 관세음보살에게도 자기가 본 세상을 자세히 일러주는 아이었다. 작가는 길손이가 떠난 뒤 누나 감이는 자신의 눈으로 보는 세상보다 동생이 들려주던 세상이 더 아름다워서 길손이가 더 생각났다고 적고 있었다. 순간 장 피에르 주네 감독의 〈아멜리에〉가 떠올랐다. 노틀담에서 투신한 관광객에 어머니가 깔려 죽고 키우던 금붕어마저 자살하자 혼자가 된 아멜리에가 늘 같은 시각 같은 거리를 걷는 시각장애인에게 신문가판대에는 어떤 사람이 있고 누가 옆을 지나는지 그의 머리가 어떻고 하는 등의 설명을 아주 빠르게 들려준다. 잠깐 부축해 걷는 동안이었지만 시각장애인은 기쁨에 들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아무 것도 보지 못하여 암흑이었던 세상은 아멜리에의 눈과 말을 통해서 밝은 빛으로 가득한 움직이는 세상이 되었던 것이다.
길손이가 한 많은 일 중에서 두드러진 일은 자신의 눈으로 본 세상을 그림 속 관세음보살과 앞 못 보는 누나에게 전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길손이가 진실했다는 것은 세상을 진실로 보았으며 진실로 전하였다는 말일 것이다. 진실하게 '본다' 란 어떤 것일까? 겸우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빛이 물체에 닿으면 이 눈이 물체로부터 반사되는 광을 인식하는 것인데, 광명이 없다면 볼 수 없는 것이요. 눈을 여의고도 못 보는 것이요. 보는 대상이 사라져도 못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를 모두 여의고도 보는 놈이 있어요. 이 보는 자, 보는 대상을 여의고도 깜깜한 암흑의 한밤중에도 보는 놈이 있어요. 생각으로 보는 놈이 있지 않나요. 현실을 여의고 보는 일념(한 생각 일으키는 놈)이 있어요. '그 놈은 무량겁 전에도 있었고 무량겁 후에도 있었다' 이것입니다."
경제 위주의 정책과 부를 좇던 사회 전반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제자리걸음과 후퇴를 반복하는 시기에 이르렀다. 경제적 수치로서의 삶을 유지하기는 이른바 위기임에 틀림없지만, 숫자적 순위를 놓아버린 순간 그동안 잊었던 것들의 가치가 새롭게 드러나는 것을 깨닫는다.
진실에 대한 많은 논의 중 「반야심경」에 나오는 한 구절인 '진실불허' 는 모든 개념을 요약한 실행의 문제를 짚는다. 물론 한글로만 이해하자면 '진실하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는 희극적 언어로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한자의 여러 음을 두루 생각하여 보자면 ‘진실하여(眞實) 허망하지 않는다(不虛)' 라는 뜻에 이른다. 동양적 사고의 전통에서는 희귀한 알레고리가 적용되는 언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진리를 구하는 사리자에게 법을 전하는 방식으로 금강의 지혜를 요약한 「반야심경」에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이 공하기에 이것도 저것도 없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등의 의식도 없는 것이기에 나고 죽음조차 없다고 했다.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닌 상태를 상정한다면 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나고 죽음이 없다는 말을 단지 태어나고 죽는다는 사실로만 이해한다면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인생이 허망하다라는 사실을 넘어서는 '진실' 이란 실체에 대면한다면 우리 삶을 어떻게 성찰할 수 있을까. 아이러니 또는 알레고리를 포함한 이번 전시명은 그래서 우리 삶을 즐겁게 되돌아보는 어구가 될 수 있는 '진실불허' 를 택하였다. 장난스레 다가간 관람자도 전시를 둘러보고 나면 그 즐거움 뒤에 드리운 허망함의 그림자 그리고 그것을 넘어선 작가들의 치열한 진실, 진리에의 여정에 맞닥뜨릴 것이다. 진실, 진리에 대한 대면이야말로 우리 생의 목표가 아니던가. 겸우선사는 진리란 바뀌는 현상을 보는 본심이라 정의하였다. 현실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데 바뀌는 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인데, 태양을 보거나 허공을 보거나 보는 그 본심은 항상 바뀌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본 것을 보이지 않는 이에게 자신의 언어로 설명한 길손이처럼 예술가는 관객에게 우리가 보지 못한 세상을 묘사해준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눈으로 본 것보다 더 아름답기도 하고 더 자세하기조차 해서 앞을 못 보았던 누나 감이가 바로 자신인 양 느껴지기도 한다. 이 세상을 돌아보고 전하는 진리에 대한 여정, 그 앞에 선 예술가들의 눈에 보여진 세상을 그들의 말로 듣는 것, 그것이바로 이번 전시의 목적이다. 초대된 4인의 작가 한만영, 정종미, 배준성, 서유라는 각기 다른 연배의 작가로서 회화를 통해 시지각 혹은 인식으로서 보는 것에 대한 문제에 천착하는 작가이다.
한만영의 작품은 실체와 환영,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대라는 이 시대 미술에서 주요한 요소를 보여준다. 시간의 문제, 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인쇄된 명화와 실재하는 작품, 화려함과 비속함 등 양면적이면서도 기실은 우리 인간사에서 다반사인 것들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작가가 제시한 탑은 무한한 모듈로 이루어진 구조체이다. 실재했던 인간으로서 석가가 열반에 이르러 '내가 아닌 진리에 의지처를 삼으러' 는 말을 남긴 뒤 화장되어 나온 사리를 모신 곳이 탑이므로 탑은 곧 석가의 무덤, 깨달음의 증거이다. 관람객은 무한히 번식하는 모듈구조 속에서 분신사리와 팔만구천탑의 일화를 떠올리게 된다. 생에의 반향, 구도를 향한 욕망은 실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허망을 접고 석가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데 열중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에게 구도자 석가의 모습이 필요한 것은 우리 안에 내재한 불성을 일깨우는 모범적 거울로서이다. 부처가 활활 타는 불길이라면 우리도 곧 그렇게 될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장작임을 아는 것이 바로 구도를 향한 여정에서 선행될 일일 것이다. 56억 7천만년 후에 할 일을 생각하는 미륵이 이 모듈 앞에 앉아 있음은 거울 속 이미지인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반추가 곧 구도에 이르는 길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기성의 바이얼린이 작품으로 사용되는 것을 현대미술사에서 갖는 의미를 새삼 새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회화의 영역에 끌어들여 말 그대로 그림이 되게 한 점이나, 미술사의 한 작품을 그것에 그려 넣는 행위를 통해 시각과 청각의 문제, 좋다는 것의 나열 그리고 그것의 존재성에 대한 물음 등이 한 박스 안에 담겨 있는 것을 본다. 인간이 시간이라고 느끼는 것, 전통이라고 느끼는 것, 명품이라고 하는 것의 분별은 과연 어떤 경계가 있을까. 그 경계를 인식하는 순간 화면에 끌어들인 오브제가 실은 화면과 얼마나 이질적인 시간의 존재인가라는 사실에 이르면 '조우' 라고 여겨졌던 이들이 머쓱할 정도로 자기만의 세계의 것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 다른 시간이 분명 화면이라는 한 공간 안에 존재한다. 여기가 바로 작가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경계를 제시한 지점이다. 그런 점에서 여행지에서 만났던 어떤 인물에 대한 기록과 작은 기념품 그리고 그것을 끄집어내어 화면에 재현하는 그 과정 모두가 시간의 차를 두고 있지만 생각이 일어남과 작품이 생성됨이라는 과정에서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하나로 귀착되는 지점이 화면에 있음을 본다.
이러한 시각은 전통 산수화를 화면에 재구성한 풍경 시리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회색 화면에 어스름하게 드러나는 총석정도는 18세기 겸재의 진경산수의 한 폭에서 가져온 것이지만 겸재가 실재하는 자연경관을 그린 것임은 물론이다. 실재한 자연을 그린 그림을 다시 그리는 일, 겸재가 본 총석정이 200년의 시간을 넘어 화면에 존재한다. 물론 결코 우리 눈앞의 장대한 화면이 겸재의 총석정도는 아니다. 평론가 이석우가 생성과 소멸의 접점' 이라 일렀던 경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물론 지적 추론이 필요하다. 하지만 결코 그의 화면이 주는 소멸의 순간 즉 시간과 공간, 입체와 평면이 분별을 잃는 것을 경험하며 돈오점수의 가능성을, 염화미소의 의미를 다시 추론한다.
정종미는 역사 속 여성의 모습을 종이와 천 등 여성적인 소재와 천연염색을 통해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 일련의 작품들과 어부사시사 등 시각적 감흥을 청각적 장치로 바꾼 문학작품을 다시 시각화하는 감각적인 시도를 보여주는 등 폭넓은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의 작품은 시공을 초월하여 삶의 존재 방식에 대한 문제를 깊이 탐구하게 한다. 보자기부인, 종이부인 등 재료와 형태를 상기시키는 익명의 존재들은 최근, 이름을 지니고 나타난다. 역사 속에 실재했던 여인들이지만 거의 알려진 것이 없는 그들을 깊이 연구하여 그녀들의 모습을 역사에 존재하는 성격으로 파악한다. 고분벽화에서 걸어 나온 듯한 하백의 딸로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 세 가지 기지로서 나라를 구하였으며 역사서와 야사 모두에 여왕의 이름을 역사에 남긴 신라의 선덕여왕, 멀리서 배를 타고 한없는 여행 끝에 도착한 나라 가야의 왕비가 된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 등 고대세계의 여인들을 우리는 이렇게 당당한 모습으로 만난 적이 없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허황후와 선덕여왕을 통해 시공의 새로운 경험치를 추출하고 있다. 일명 허황후, 허황옥은 부처만을 의지한 채 몇몇 시종과 함께 작은 배에 탑과 함께 몸을 실어 길을 떠난 여인이다. 자신의 배우자를 찾아 알 수 없는 곳을 거리낌 없이 떠났던 그녀를 통해 가야는 탑을 세웠고 모든 생명을 가엾이 여기는 자비(慈悲)를 배웠다. 작가는 왕비 허황후의 이름이 허황옥이며 아유타국의 공주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그녀는 푸른 바탕 위에 금빛으로 서 있다. 감물들인 종이옷은 푸른 바탕이 배어날 정도로 얇고도 부드러운 것이며 피부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그녀의 국적과 이름 그리고 신분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일견 그녀에게서 익숙한 존재를 읽어내게 되는데, 고려 불화에서 익히 보아온 관세음보살처럼 투명하고도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발밑에 연꽃이 피어 그녀의 덕을 찬양하는 이 그림은 호흡을 조정하여 유려한 선을 내는 금물로 그려져 역사 속에 실재하는 인물이 어떻게 신화화 되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과정을 유추하게 한다.
한편 신라의 선덕여왕은 머리에 높은 금관을 착용하여 한눈에도 그녀가 신라의 왕이었던 존재임을 의심할 바 없게 한다. 정면을 응시하는 그녀의 머리 뒤에는 눈부신 금관을 더욱 드러내주는 푸른색 두광이 있어 이 역사 속에서 정치를 하고, 나라를 이끌던 존재를 종교적 차원의 이해망으로 이끌고 있음을 드러낸다. 눈부신 금박을 배경으로 중국이 보내온 수수께끼의 주인공인 향기 없는 모란을 연꽃처럼 들고 선 그녀의 자태는 여왕의 옷을 입은 대승불교의 보살상 같다.
인도의 보살상 같은 허황옥, 신라의 보살상 같은 선덕여왕. 두 인물은 실재했던 인물을 그들의 행적을 통해 그들 삶의 방식을 보살로 파악한 인물들이다. 이 두 인물이 나란히 한 공간에서 그윽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것은 이들 모두가 화생(化生)의 공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손에 의해 염색되고 만들어진 수많은 지화(紙花)는 인간인 그녀들을 위로하는 도구인 동시에 공간을 연화화생의 차원으로 전이시키는 기제이다.
충실한 자기 역할과 삶에의 의지를 보여준 두 여인은 실재했던 인물이 진실하게 살아 역사에 당당히 존재하는 동시에 고귀한 영혼의 영적 상승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는 진실로 시회와 인간적 차원의 삶에 집중한 페미니즘적 차원의 시각에서 벗어난 인간과 인격 자체로서 여성을 파악하는 시각이 아닐 수 없으며, 그러한 태도야말로 판단을 보류하고 그들 그대로를 보아준 작가의 평정심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배준성은 화가의 옷 시리즈를 통해 겹겹이 쌓아올려진 인식의 문제와 관람자의 관음증적 태도를 목도한 작가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한 화면에 다른 이미지가 공존하는 렌티큘러를 이용한 작품은 뮤지엄 혹은 명화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전도, 그것을 통한 인식의 변환과 시간에 대한 고찰을 보여준다.
배준성의 작품에서 현란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그 옷 속에서 우리가 정작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어쩌면 비단의 광택이 자르르하고 트리폴리가 엄청난 그 옷 속에 숨어 있는 몸일 것이다. 그래서 겹겹이 가리워진 그 무거운 비닐을 들치고 관객들은 밑으로 밑으로 시선을 옮겼던 것이다. 하지만 옷이 사회적이며 권력적인 것만큼이나 몸 또한 권력에 깊이 관여됨을 안다. 우리 몸이란 무엇일까?
세탁소에 갓 들어온 새 옷걸이에게 헌 옷걸이가 말했다. 헌 옷걸이 왈, “너는 옷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기 바란다.”새 옷걸이가 물었다. “왜 옷걸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시는지요?"다시 헌 옷걸이가 말했다. “잠깐씩 입혀지는 옷이 자기의 신분인양 오만해지는 옷걸이들을 그동안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 몸이 옷걸이라는 은유는 비단 사회적 현상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권력의 옷을 벗은 자연의 몸 자체도 인생의 사계절이라는 옷을 입는다. 배준성의 그림에서 가장 멋진 모습으로, 권력적으로 그려진 옷 아래 가리워진 몸을 보는 것은 그저 한 발자국만 옆으로 옮기면 된다. 이는 누군가 한 발자국만 옆으로 비켜서면 발가벗기워진 모습으로 미술관에 버젓이 자리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잘 알려진 명화조차도 발가벗기워진 몸으로 미술관에 버젓이 자리한다. 인간 그대로의 모습으로 선 서전트의 여인상이 스캔들의 중심에 선 것을 은유한 작품 앞에서 느슨한 드레스의 끈 하나가 빌미가 되어 인간을 곤란한 상황으로 몰아간 어이없음과 광기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타자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관음증은 어떤 차가 있을까. 우리 몸이 옷걸이여서 옷이 입혀지는 것이고, 인생의 사계절이 입혀지는 것이라면, 삶과 죽음 또한 옷에 불과한 것일 테다. 평화 그 자체인 불성인 원적(圓寂)의 상태는 갈고 닦음으로 이루어진다. 표현 언어와 상태에 대한 인식을 차치하고, 인간종이 지닌 한 형상인 본성에 대한 인식, 상승된 단계에 대한 열망은 동서양 공히 영혼의 연마과정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인간은 편안한 생활 속에서는 발전할 수 없다.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 인간의 정신은 단련되고 또한 일을 똑똑히 판단할 수 있는 힘이 길러지면 성공할 수 있다.”는 헬렌 켈러의 말을 빌려 작가는 이러한 연마과정을 설명한다. 일견 세속적인 언어로 묘사된 성공이란 언어 속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그녀의 영혼이 의미하는 성공이란 다른 의미일 것임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인간이 살아있으면 사람(human)이라 하고 죽으면 유령(phantom)이라 한다. 일상에서 느끼는 삶과 죽음의 엄연한 경계를 옷걸이에 대한 인식을 통해 극복할 수 있음을, 배준성의 유령이 공존하는 미술관에서, 살아 움직이는 낙서가 가득한 벽면에서 확인하게 된다.
책은 진리를 담은 것이기에 신성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정작 물질로는 종이일 뿐이며 구성은 글씨와 행간 혹은 그림으로 이루어진 것일 뿐이다. 실재하는 책을 그린 듯한 서유라의 화면은 기실은 자신이 생각한 개념에 맞추어 이 세상에 없는 책 모양을 그린 것이다. 화사한 색감으로 겹겹이 쌓아올려진 책들은 그 자체의 구조로 존재하지만 사실과 기록의 문제, 그렇다고 믿는 것에 대한 문제를 보여준다.
이번에 출품한 도교, 불교 시리즈는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전통 종교에 대한 책들의 모음이다. 경전은 실체하지만 추상의 영역에 있는 종교를 생활 속에서 구체화시키는 도구이다. 책속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종교적인 아우라는 경전을 지고지순한 단계로 끌어올린다. 이제는 보지 못한 선지자에 대한 희망과 믿음이 배어 있는 경전은 기실 선지자 그의 것이 아닌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위에서 원하는 것이 덧붙여진 것인 만큼 종교적 가르침을 전하는 책들만큼 권력적인 것도 드물다. 게다가 그것을 해석하는 시각에 따라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도 하고, 영원한 죄인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작가의 종교 경전 시리즈는 종교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에 대한 연구보고서이다.
〈문화재 수난사〉의 경우, 단순히 물건으로만 보았을 때는 그저 사금파리 혹은 종이나 돌덩이에 불과하지만 그것에 역사적 가치를 부여했을 때 역사의 증거물로 작용하는 물질을 본다. 게다가 타자의 역사에 관여될 때 필연적으로 따르는 역사의 교란 혹은 {곡의 도구로 사용되며 점유되는 문화재는 자국민의 손에 의해사도 물질화된다. 담담히 그림 속 그림을 통해 전하는 이들 문화재가 어떤 의미일까에 대한 소박한 접근법은, 경전에 이르러 종교가 어떤 것이며 우리 삶에서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조용히 풀어내는 방식에도 적용된다.
작가는〈불교〉에서는 원시불교의 내용을 담은 「아함경」에서부터 현대 사회에서 불교가 갖는 의미를 조명하는 책을 지어 보인다. 그리고 《금강경》을 펼쳐 보인다. 하지만 정작 눈을 사로잡는 것은 엄숙한 경전의 글귀도, 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지침서도 아닌, 화면 우측 하단에서 책등에 오롯이 피어난 화사한 자태의 연꽃 한 송이다. 이 세상이 한 송이 꽃이라는 가르침은 금강경과 반야심경 가르침의 요체라는데 그 실체의 모습을 그림 속 그림으로 보는 것이다. 무한히 존재하지만 그 존재성을 표현할 수 없는 허공, 그 허공에서 움직이는 기상이야말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가르침이 있다. 허공의 빈 것과 찬 것을 나누는 행위가 얼마나 자주 급박히 따라가야만 파악될 수 있는 것인가를 아는 일. 이 우주가 모두 하나임을 아는 일은 세계가 한 송이 꽃과 같음을 아는 일이라 했다. 〈도교〉에서는 도덕경과 은사의 한가로운 삶을 보여주는 그림들 사이에 불노장생에의 욕망이 근원임을 눈이 부신 분홍색 천도가지를 통해 보여준다.
작가들은 그동안 우리가 보아왔던 세상, 지금 본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은 무엇인가에 대한 예술가적 사유를 우리 앞에 드러낸다. 우리가 본다는 것은 보려는 주체와 보여질 대상이 있음을 의미한다. 모든 일을 헤아려 보는 것, 그것을 우리는 ‘비추어보다' 라고 말한다. 대자연 혹은 우주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것 동시에 그러한 부정을 통해 자신의 존재성을 찾는 종교가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에서부터 출발하는 아이러니를 그림 속 그림, 그림이 된 사물과 인간들에서 확인한다. 동시에 인간이 무한한 욕망의 존재이기에 이 구도의 여정이 가능하다는 사실 또한 일러주는 작가들의 통찰력이 놀라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