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조각을 조각이게 하는 것에 대하여
전시기간: 2013.05.03 - 2013.07.07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배형경, 민균홍, 고관호
전시내용:
조각을 조각이게 하는 것에 대하여
임성훈(미학, 미술비평, Ph.D.)
우리는 현상만을 경험하지 않는다. 예술작품을 '본다'라는 것이 단지 대상으로서의 작품을 본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현상으로서 보이는 작품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또한 경험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Platon은 개별적인 현상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현상적인 아름다움은 가짜 이미지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현상적인 아름다움을 넘어 영원히 변치 않는 원형적인 아름다움, 즉 참된 것과 함께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묻고자 했다. 플라톤에 따르면,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부를 수 있는 근거로서의 아름다움, 달리 말하자면 보편적인 아름다움이란 이데아Idea의 아름다움이다. 이데아의 아름다움은 이 세상의 모든 현상적인 아름다움이 다 사라진다 해도 그래도 존재하는 아름다움, 곧 본질로서의 아름다움이다. 물론 플라톤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오늘날의 예술에 그대로 적용하기란 무리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세기의 현대예술은 현란할 정도로 다양한 변용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플라톤이 던졌던 물음이 무의미한 것으로 폐기 처분된 것은 아니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조각이란 무엇인가?
현대예술, 특히 1960년대 이후 전개된 현대예술의 특징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다원적이라 할 수 있다. 팝 아트Pop Art, 미니멀리즘Minimalism, 퍼포먼스Performance, 개념미술Conceptual Art, 신체미술Body Art, 대지미술Land Art,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 설치미술Installation Art, 공공미술Public Art, 생태미술Ecology Art, 키치미술 Kitsch Art, 미디어 아트Media Art 등 여기에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내용과 형식을 가진 현대예술이 등장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예술 장르들 간의 경계를 말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장르를 넘나드는 새로운 조형적 시도가 지속적으로 모색되어 왔다. 현대 조각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특히 모더니즘 이후의 조각은 조각의 존재방식에 근본적인 물음이 제기될 정도로 다양한 조형적 변용을 겪어왔다. 이런 상황에서 조각을 조각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시대착오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현대조각의 바로 이러한 상황이 더욱 무엇이 조각을 조각이게 하는지를 물어보게 한다. 물론 여기서 나는 오늘날 조각 개념을 다시 정의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현대조각의 확장과 그에 따른 다양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조각을 조각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물음이 부재한다면, 현대조각이 드러내는 조형적 다양성이 갖는 의미 또한 퇴색될 것이기 때문이다.
조각을 조각이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을 상정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여기에는 이만 오천년 전의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에서 오늘의 조각에 이르는 조각사의 근본 물음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각의 존재방식과 관련해서 공간, 매스 그리고 구조가 조각의 본질적인 요소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조각은 공간의 놀이이다. 조형론의 관점에서 포지티브 공간과 네거티브 공간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조각의 공간 문제를 심층적으로 논의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 흔히 조각과 관련해서 공간에 대한 점유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조각은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다. 공간은 본질적으로 ‘관계’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각 작업은 매스(덩어리)를 다루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전통적인 작업에서 다루어지는 물리적 덩어리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조각의 본질이라는 측면에서 본 매스란 단지 움켜쥘 수 있는 덩어리가 아니라 어떤 조형적 분위기 내지 조형적 에너지를 질료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요소이다. 조각은 또한 필연적으로 구조적이다. 전통적인 조각에서 현대의 설치조각에 이르기까지 조각은 공간과 매스의 연관성 속에서 이루어진 어떤 구조로 존재한다. 이러한 조각의 구조는 조형적 긴장감을 촉발시키는 중요한 요소로 가능하다.
조각을 조각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은 곧 조각의 공간, 매스 그리고 구조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과 그대로 맞닿아 있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조형성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한 시대의 문화의 문제이기도 하다. 조각을 한다는 것, 이것은 물리적 대상을 조형적 솜씨로 표현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조각이란 작업은 근본적으로 정신적이며 문화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집트인들에게 채석기술을 배웠던 그리스인들은 초기에 눈을 통해 신체조각을 만들었지만, 점차 이러한 사실적인 조각에서 벗어나 이상적인 인체미를 조각에서 구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조형적 기술(기법)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문화의 정신성이 여실히 반영된 결과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조각의 본질을 이루는 공간, 매스 그리고 구조의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조형적 측면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문화적 감수성과 정신성의 차원에서 또한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이번 <조각을 조각이게 하는 것에 대하여>에 참여한 세 명의 작가들(배형경, 민균홍, 고관호)은 저마다의 고유한 조형언어를 견지하고 있지만, 그들의 작업태도와 그 태도에 따른 산물인 작품들에는 지금까지 논의해 온 조각의 본질에 대한 문제의식이 공유되고 있다.
배형경(1955-)은 지난 30년 동안 지속적으로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물음을 조형적으로 모색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브론즈와 철로 이루어진 배형경의 인체조각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흙이 존재의 흔적처럼 붙어 있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인체조각에는 섬세한 사실적 재현성이 생략되고 마치 다듬지 않은 거친 나무의 결에서 느껴지는 그러한 표현성이 강조되어 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이러한 표현성이 결코 과도한 내면적 감정을 드러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인간이 처한 존재적 상황을 절제된 형식으로 보여주는 구도적인 조형성이 엿보인다.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으며, 한 시대의 문화 속에서 관계하면서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이다. 배형경은 이러한 인간 존재의 관계성을 애써 무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망이 구속의 격자가 되어 인간 스스로를 옥죄기도 한다. 여기에 인간이라는 존재의 비극성이 있다. 배형경은 이번 전시에서 인체조각을 중심으로 한 설치작업을 통해 이러한 인간의 비극적 상황을 조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설치작업에서 인간의 비극성만이 강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인간이란 비극적인 존재이지만 또한 그러기에 동시에 존엄한 존재임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초라하지만 존엄한 존재이다. 배형경의 인체조각은 인간이 아무리 초라한 존재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오히려 그로 인해 존엄할 수 있다는 역설을 조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민균홍(1958-)은 철과 알루미늄을 재료로 조각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업을 한다. 금속을 다루는 작가이면서도 스테인리스 스틸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철과 알루미늄만을 재료로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조형적 사유가 함축되어 있는 듯 보인다. 철의 자연스러운 덧없음과 알루미늄의 물성에 따른 지속성이 대립성을 이루면서도 상호적으로 보완되고 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재료의 측면뿐만 아니라 선과 면을 위주로 한 조형적 형태에서도 이러한 조화로운 대립을 읽어낼 수 있다. 흔히 민균홍의 작업을 두고 회화적이라고 평가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선의 느낌이나 면의 조형적 특성을 강조한 작품들은 마치 회화의 본질을 이루는 평면성의 문제를 조각으로 표현해낸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민균홍은 어쩔 수 없는 조각가이다. 선과 면이라는 기본적인 조형적 가능태를 또 하나의 견고한 조각의 현실태로 고스란히 내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민균홍의 선과 면은 조각의 근본 바탕인 공간, 매스 그리고 구조의 차원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얼핏 보면 감각적 조형성이 두드러진 듯 보이지만 이러한 그의 조형언어를 이해한다면 감각에서 한 발 물러나 과정을 통해 빛나는 조형성을 보여주는 조각임을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민균홍은 감각적으로 탄성을 자아내는 참신한 조각이나 독창적인 조각을 만들어내는데 별 관심이 없다. 그리 서두르지 않게 재료와 더불어 사유하는 작업의 과정 속에서 조각을 조각이게 하는 그 무엇인가를 체험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고관호(1967- )는 매스의 본질을 지속적으로 탐구해온 작가이다. 그런데 작가의 매스 개념은 흔히 조형적으로만 이해되는 매스와는 그 차원을 달리 한다. 고관호의 매스는 사유의 매스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들에 나타난 매스란 단순히 부분들이 모여서 이루어낸 어떤 덩어리가 아니다. 매스의 본질을 향해 거듭하여 물음을 던지고, 또한 이 물음에서 다시 새로운 방식으로 조형적 매스가 드러날 수 있는지를 부단히 고민해 온 작가의 반성적 산물이다. 그러기에 작가는 매스를 조형적인 감각성으로 억지로 표현하려 애쓰지 않는다. 무엇보다 고관호의 작품은 매스의 본질이란 공간을 점유하는 축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의 공유속에서 드러나는 것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철선이 수평과 수직으로 만나면서 이루어진 사각형의 격자들이 형성하는 '구sphere'는 단지 공간구조 속에서 입체감을 느끼게 하는 중후하거나 묵직한 대상으로서 있는 '구'가 아니라 감상자와의 교감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매스로서의 '구'이다. '구'는 내부의 중심에서 응집성을 보이면서 동시에 외부로 확산되고, 이에 따라 단순히 정적인 밀도감이 아니라 역동적인 밀도감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기에 '구'의 전체와 부분은 견고한 조형적 조화를 견지하고 있다. 고관호는 수학적으로 정밀하게 설계된 작업을 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공간의 관계 속에서 자연스러운 조형성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매스의 본질을 반성적으로 사유하고 조각의 근원적인 의미를 탐구하고 있다.
이번 <조각을 조각이게 하는 것에 대하여>의 참여한 배형경, 민균홍 그리고 고관호는 조각의 본질을 이루는 공간, 매스 그리고 구조에 대한 견실한 이해를 바탕으로 조각이 조각이라 불릴 수 있는 가능 조건들을 조형적으로 모색하고 있는 작가들이다. 유행에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금 조각이 무엇인지를 반성적으로 묻고 있는 세 작가의 작업 태도와 그에 따른 결과물인 작품들은 현대조각의 확장과 그에 따른 다양성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주는 조형적 근간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예술적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전시명: 조각을 조각이게 하는 것에 대하여
전시기간: 2013.05.03 - 2013.07.07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배형경, 민균홍, 고관호
전시내용:
조각을 조각이게 하는 것에 대하여
임성훈(미학, 미술비평, Ph.D.)
우리는 현상만을 경험하지 않는다. 예술작품을 '본다'라는 것이 단지 대상으로서의 작품을 본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현상으로서 보이는 작품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또한 경험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Platon은 개별적인 현상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현상적인 아름다움은 가짜 이미지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현상적인 아름다움을 넘어 영원히 변치 않는 원형적인 아름다움, 즉 참된 것과 함께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묻고자 했다. 플라톤에 따르면,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부를 수 있는 근거로서의 아름다움, 달리 말하자면 보편적인 아름다움이란 이데아Idea의 아름다움이다. 이데아의 아름다움은 이 세상의 모든 현상적인 아름다움이 다 사라진다 해도 그래도 존재하는 아름다움, 곧 본질로서의 아름다움이다. 물론 플라톤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오늘날의 예술에 그대로 적용하기란 무리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세기의 현대예술은 현란할 정도로 다양한 변용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플라톤이 던졌던 물음이 무의미한 것으로 폐기 처분된 것은 아니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조각이란 무엇인가?
현대예술, 특히 1960년대 이후 전개된 현대예술의 특징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다원적이라 할 수 있다. 팝 아트Pop Art, 미니멀리즘Minimalism, 퍼포먼스Performance, 개념미술Conceptual Art, 신체미술Body Art, 대지미술Land Art,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 설치미술Installation Art, 공공미술Public Art, 생태미술Ecology Art, 키치미술 Kitsch Art, 미디어 아트Media Art 등 여기에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내용과 형식을 가진 현대예술이 등장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예술 장르들 간의 경계를 말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장르를 넘나드는 새로운 조형적 시도가 지속적으로 모색되어 왔다. 현대 조각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특히 모더니즘 이후의 조각은 조각의 존재방식에 근본적인 물음이 제기될 정도로 다양한 조형적 변용을 겪어왔다. 이런 상황에서 조각을 조각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시대착오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현대조각의 바로 이러한 상황이 더욱 무엇이 조각을 조각이게 하는지를 물어보게 한다. 물론 여기서 나는 오늘날 조각 개념을 다시 정의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현대조각의 확장과 그에 따른 다양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조각을 조각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물음이 부재한다면, 현대조각이 드러내는 조형적 다양성이 갖는 의미 또한 퇴색될 것이기 때문이다.
조각을 조각이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을 상정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여기에는 이만 오천년 전의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에서 오늘의 조각에 이르는 조각사의 근본 물음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각의 존재방식과 관련해서 공간, 매스 그리고 구조가 조각의 본질적인 요소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조각은 공간의 놀이이다. 조형론의 관점에서 포지티브 공간과 네거티브 공간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조각의 공간 문제를 심층적으로 논의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 흔히 조각과 관련해서 공간에 대한 점유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조각은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다. 공간은 본질적으로 ‘관계’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각 작업은 매스(덩어리)를 다루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전통적인 작업에서 다루어지는 물리적 덩어리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조각의 본질이라는 측면에서 본 매스란 단지 움켜쥘 수 있는 덩어리가 아니라 어떤 조형적 분위기 내지 조형적 에너지를 질료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요소이다. 조각은 또한 필연적으로 구조적이다. 전통적인 조각에서 현대의 설치조각에 이르기까지 조각은 공간과 매스의 연관성 속에서 이루어진 어떤 구조로 존재한다. 이러한 조각의 구조는 조형적 긴장감을 촉발시키는 중요한 요소로 가능하다.
조각을 조각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은 곧 조각의 공간, 매스 그리고 구조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과 그대로 맞닿아 있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조형성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한 시대의 문화의 문제이기도 하다. 조각을 한다는 것, 이것은 물리적 대상을 조형적 솜씨로 표현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조각이란 작업은 근본적으로 정신적이며 문화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집트인들에게 채석기술을 배웠던 그리스인들은 초기에 눈을 통해 신체조각을 만들었지만, 점차 이러한 사실적인 조각에서 벗어나 이상적인 인체미를 조각에서 구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조형적 기술(기법)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문화의 정신성이 여실히 반영된 결과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조각의 본질을 이루는 공간, 매스 그리고 구조의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조형적 측면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문화적 감수성과 정신성의 차원에서 또한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이번 <조각을 조각이게 하는 것에 대하여>에 참여한 세 명의 작가들(배형경, 민균홍, 고관호)은 저마다의 고유한 조형언어를 견지하고 있지만, 그들의 작업태도와 그 태도에 따른 산물인 작품들에는 지금까지 논의해 온 조각의 본질에 대한 문제의식이 공유되고 있다.
배형경(1955-)은 지난 30년 동안 지속적으로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물음을 조형적으로 모색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브론즈와 철로 이루어진 배형경의 인체조각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흙이 존재의 흔적처럼 붙어 있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인체조각에는 섬세한 사실적 재현성이 생략되고 마치 다듬지 않은 거친 나무의 결에서 느껴지는 그러한 표현성이 강조되어 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이러한 표현성이 결코 과도한 내면적 감정을 드러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인간이 처한 존재적 상황을 절제된 형식으로 보여주는 구도적인 조형성이 엿보인다.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으며, 한 시대의 문화 속에서 관계하면서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이다. 배형경은 이러한 인간 존재의 관계성을 애써 무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망이 구속의 격자가 되어 인간 스스로를 옥죄기도 한다. 여기에 인간이라는 존재의 비극성이 있다. 배형경은 이번 전시에서 인체조각을 중심으로 한 설치작업을 통해 이러한 인간의 비극적 상황을 조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설치작업에서 인간의 비극성만이 강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인간이란 비극적인 존재이지만 또한 그러기에 동시에 존엄한 존재임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초라하지만 존엄한 존재이다. 배형경의 인체조각은 인간이 아무리 초라한 존재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오히려 그로 인해 존엄할 수 있다는 역설을 조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민균홍(1958-)은 철과 알루미늄을 재료로 조각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업을 한다. 금속을 다루는 작가이면서도 스테인리스 스틸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철과 알루미늄만을 재료로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조형적 사유가 함축되어 있는 듯 보인다. 철의 자연스러운 덧없음과 알루미늄의 물성에 따른 지속성이 대립성을 이루면서도 상호적으로 보완되고 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재료의 측면뿐만 아니라 선과 면을 위주로 한 조형적 형태에서도 이러한 조화로운 대립을 읽어낼 수 있다. 흔히 민균홍의 작업을 두고 회화적이라고 평가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선의 느낌이나 면의 조형적 특성을 강조한 작품들은 마치 회화의 본질을 이루는 평면성의 문제를 조각으로 표현해낸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민균홍은 어쩔 수 없는 조각가이다. 선과 면이라는 기본적인 조형적 가능태를 또 하나의 견고한 조각의 현실태로 고스란히 내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민균홍의 선과 면은 조각의 근본 바탕인 공간, 매스 그리고 구조의 차원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얼핏 보면 감각적 조형성이 두드러진 듯 보이지만 이러한 그의 조형언어를 이해한다면 감각에서 한 발 물러나 과정을 통해 빛나는 조형성을 보여주는 조각임을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민균홍은 감각적으로 탄성을 자아내는 참신한 조각이나 독창적인 조각을 만들어내는데 별 관심이 없다. 그리 서두르지 않게 재료와 더불어 사유하는 작업의 과정 속에서 조각을 조각이게 하는 그 무엇인가를 체험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고관호(1967- )는 매스의 본질을 지속적으로 탐구해온 작가이다. 그런데 작가의 매스 개념은 흔히 조형적으로만 이해되는 매스와는 그 차원을 달리 한다. 고관호의 매스는 사유의 매스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들에 나타난 매스란 단순히 부분들이 모여서 이루어낸 어떤 덩어리가 아니다. 매스의 본질을 향해 거듭하여 물음을 던지고, 또한 이 물음에서 다시 새로운 방식으로 조형적 매스가 드러날 수 있는지를 부단히 고민해 온 작가의 반성적 산물이다. 그러기에 작가는 매스를 조형적인 감각성으로 억지로 표현하려 애쓰지 않는다. 무엇보다 고관호의 작품은 매스의 본질이란 공간을 점유하는 축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의 공유속에서 드러나는 것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철선이 수평과 수직으로 만나면서 이루어진 사각형의 격자들이 형성하는 '구sphere'는 단지 공간구조 속에서 입체감을 느끼게 하는 중후하거나 묵직한 대상으로서 있는 '구'가 아니라 감상자와의 교감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매스로서의 '구'이다. '구'는 내부의 중심에서 응집성을 보이면서 동시에 외부로 확산되고, 이에 따라 단순히 정적인 밀도감이 아니라 역동적인 밀도감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기에 '구'의 전체와 부분은 견고한 조형적 조화를 견지하고 있다. 고관호는 수학적으로 정밀하게 설계된 작업을 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공간의 관계 속에서 자연스러운 조형성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매스의 본질을 반성적으로 사유하고 조각의 근원적인 의미를 탐구하고 있다.
이번 <조각을 조각이게 하는 것에 대하여>의 참여한 배형경, 민균홍 그리고 고관호는 조각의 본질을 이루는 공간, 매스 그리고 구조에 대한 견실한 이해를 바탕으로 조각이 조각이라 불릴 수 있는 가능 조건들을 조형적으로 모색하고 있는 작가들이다. 유행에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금 조각이 무엇인지를 반성적으로 묻고 있는 세 작가의 작업 태도와 그에 따른 결과물인 작품들은 현대조각의 확장과 그에 따른 다양성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주는 조형적 근간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예술적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