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전시

[모란미술관 야외미술프로젝트] NATURE

전시명: [모란미술관 야외미술프로젝트] NATURE

전시기간: 2012.08.24 ~ 2012.09.23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김주연, 하석원, 이명호, 조영철, 박형렬

전시내용:

자연으로의 산책,

야외미술 프로젝트 "Nature"


백곤 | 미학


1. 리차드 롱의 "Nature”

  영국의 예술가 리차드 롱(Richard Long)은 생태미술의 획기적인 가능성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예술사에서도 의미 있는 업적을 남겼다. 그 위대한 업적은 바로 "걷기 (walking)"를 통해 이루어졌다. 1967년 그는 하나의 흑백사진을 남겼는데, 그 사진에는 영국의 야외 잔디밭 사이를 가로지르는 한 줄의 선이 있다. 〈A Line Made by Walking〉이라는 리차드 롱의 작품은 자연환경을 거대한 캔버스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마이클 하이저(Michael Heizer)나 로버트 스미스슨(Robert Smithson), 크리스토(Christo)의 작업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자연에 가하는 예술적, 문화적 행위를 최대한 배제하고자 하였다는 점과 자연을 자연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과연 리차드 롱의 선과 스미스슨이나 크리스토의 거대하고 긴 장벽은 어떠한 점이 다른 것일까? 화이트큐브의 전시장에서 바깥으로 뛰쳐나와 대자연에서 펼친 예술행위는 동일한 것이 아닌가? 의미 있게도 이러한 여러 질문들이 생태미술을 가능케 하였고, 수많은 예술가들을 자연에서 예술적 가치를 찾기 위해 노력하게 만들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리차드 롱의 작품은 생태미술에서 가장 의미 있는 작업 중의 하나라 하겠다. 

  이번 야외미술프로젝트 “Nature”는 바로 리차드 롱의 정신에서부터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번 전시를 단순히 생태미술, 환경미술이라고 정의내리고 싶진 않다. 과연 리차드 롱의 생태학적 정신을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는가? 인류 역사에서 인간은 문명과 문화를 형성하면서 살아왔다. 그리고 그 문화는 인간의 독특성과 고유성을 드러내었고, 또한 지속적으로 인간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문화란 인간에 의해 창조된 것이자 자연과 대립되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서구의 정신사에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왔는데, 바로 인간이 생태학적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는 아주 의미 있는 전환인데, 인간이 자연이라는 거대한 환경 속에 살아가면서 그 안에서 문화를 형성해간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물론 동양에서는 결코 인간이 자연을 거스를 수 없는 존재임을 지각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서구적 사상의 입장에서 주체는 언제나 인간이었기에 리차드 롱의 작품이 더욱 의미가 있다. 그의 작업에서 인간은 주체가 되지 않고,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체험하는 존재로 인간이 있을 뿐이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문화적, 예술적 행위를 벗어버리고, 자연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체험을 통해 입증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리차드 롱은 대체 무슨 체험을 했다는 말인가? 그것은 바로 자연을 자연으로 느끼고, 자신을 거대한 자연환경 속에 살아있는 생명체임을 인정했다는 말일 것이다. 이는 거대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미미함에서 오는 경외감이나 자연의 숭고함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인간의 경험과 인식에 대한 지점이다. 이 체험은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찾는 경험이자 자연에 담겨있는 내재적 가치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그렇기에 리차드 롱은 크리스토나 스미스슨과는 다르게 자연에 대한 아무런 예술적 행위(재현을 위한 오브제 삽입이나 인위적 변경)를 하지 않고 자연 속에서 자신의 예술적 행위를 결정했다. 이는 주체적 시각에서 자연환경을 관찰하고 변화시켜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연과의 상호관계를 인지하고 조화를 꾀하는 생태미학적인 접근을 가능케 한다. 그는 "걷기"라는 단순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행위를 통해서 서구 사회의 인간중심적, 과학적 입장에서 자연 바라보기를 중지하고 자연을 자연으로 바라보기를 제안한 예술가이자 철학자였다. 리차드 롱의 이러한 자연관이 이번 야외미술프로젝트 "Nature가 지향하고자 하는 정신이다.


2. 자연이해를 위한 야외미술프로젝트 “Nature”

  모란미술관 야외미술프로젝트 “Nature”는 환경미술이나 공공미술이 아니다. 이 프로젝트는 '자연'의 속성을 이해하고 자연 속에서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예술적, 문화적 행위가 어떻게 자연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를 연구하는 프로젝트이다. 오해의 소지를 피하기 위해 연구의 의미를 학술적인 조사가 아니라,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한정지어보자. 그렇다면 이 프로젝트에서 찾아야 할 의미가 무엇인가가 중요해진다. 이 프로젝트는 과연 어떠한 것을 찾고자 하는가? 리차드 롱과 같이 걷는 행위를 통해 자연을 느끼고, 인식하고자 하는 것인가? 역설적이게도 그가 행위와 체험을 중요시한 만큼 기록을 위한 프레임(사진)의 설정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결국 자연을 바라보는 주체는 인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화를 넘어서는 자연의 의미 또한 인간의 문화적, 예술적 행위를 통해 발화되고 인식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연을 이해하기 위한 예술적 행위가 중요해진다. 그 행위가 바로 '자연 그대로의 자연’을 이해하기 위한 시작점이 되기 때문이다. 이 프로젝트는 모란미술관의 개활지 자연공간(6612m㎡_약 2,000평)을 예술의 행위를 통해 문화적 공간으로 확장, 변모시키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서 문화적 공간이란 인간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최소한의 프레임(예술행위)을 통해 자연공간을 새롭게 지각하기 위한 공간이다. 이 공간은 물리적인 장소성을 벗어나 개념의 지평을 자연의 꽉 찬 공간에서 예술의 빈 공간으로 확장시켜준다. 바로 자연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프레임으로 잠시 작동시켜 관람객과 자연을 매개시켜주고 자신은 사라지는 비물질적인 비어있음의 공간을 일컫는다. 그렇기에 예술은 예술작품이되, 인간의 인식지평을 넓히고 스스로는 예술을 벗어난다. 리차드 롱의 행위가 예술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야외미술프로젝트 “Nature"는 이처럼 예술을 통한 자연-환경의 이해에 주목하고자 한다.비가 오고,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살아 있는 자연의 땅에 예술의 숨결을 불어넣어 의미 있는 예술의 공간으로 변화시킨 다섯 작가의 연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3. 자연에 대한 다섯 시선들"

  '자연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던지는 김주연은 일상적인 공간 안에서 자연을 생각하게끔 하는 작업을 해왔다. <Metamorphosis〉라는 작품은 신문지 사이로 자라는 씨앗의 생장과 소멸의 과정을 잘 보여준다. 자연의 흙이 아닌 인간의 문화적 매체인 신문 속에서 피어나는 씨앗은 자연과 문화의 경계를 넘어서 인간의 인식지평을 넓힌다. 이질적인 매체를 통해 자연의 속성을 생각하게 하는 그녀의 작품은 결국 흙도, 신문도 대 자연의 산물임을 깨닫게 한다. 그녀의 이번 작품 <산책>은 이러한 깨달음을 대자연의 품으로 되돌려준다. 그리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직접 산책을 하면서 자연의 이야기를 감지할 수 있게 해준다. 정서와 감성을 자극하는 김주연의 작품은 안내 표지판이 되어 야외 전시장 곳곳을 일일이 안내한다. '길 없는 길’, ‘물 건너가는 바람', '숨 쉬는 돌’, ‘비에 젖은 풍경소리' 등 자연의 속삭임을 정서적으로 표현한 안내 문구는 특정한 장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에서 느낄 수 있는 감성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물리적인 장소를 지시하는 도시의 표지판이 인간을 정확하게 그 자리로 이동시키는 반면, 김주연의 감성적인 표지판은 자연의 역사와 그 장소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자연의 감정들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너른 들판의 바람을 타고 날아 온, 이성이 아닌 감각으로 체화된 단어들은 단지 언어가 아니라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자연의 숨소리로 발화된다. 그 소리는 나지막하게 우리들에게 들려오는데, 바로 자연의 숨소리에 귀기우리라고 말한다.

  도시 문명과 자연과의 관계를 통해 자연의 의미에 대해 탐구하는 하석원은 작품을 통해 "인간이 과연 자연을 품을 수 있는 존재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데카르트적인 순수과학의 정신에 의해 끊임없이 분할되는 자연의 의미를 되살리고자 하며, 자연은 결코 인간에 의해 통제되거나 물질성을 띤 대상이 아님을 증명하고자 한다. 그것은 인간의 시선에 대한 것으로 자연을 인간이라는 주체의 틀을 통해 바라보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우리 (인간) 속에 자연을 담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이기적인 사고로부터 나온 발상이라고 말한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순행하는 자연을 자연의 품에서 탈각시켜 인간의 품으로 가져오려는 생각은 얼마나 그릇된 것인가? 그는 하늘로 솟아오르는 듯한 8개의 높은 철재의자들을 통해 이러한 생각들을 표현한다. 8개의 의자 프레임은 동그란 원을 그리며 둘러싸여 있는데, 의자의 프레임은 그것이 의자라는 것만을 보여줄 뿐 자연 공간을 향해 열려있다. 그 사이로 보이는 4개의 나무와 물속에 잠긴 4개의 철판은 각각 자연과 인간의 문명(문화)을 상징한다. 작품 <귀환을 기다리며>는 인간 문명의 틀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자연(나무)과 의자의 프레임이 자연에 의해 서서히 부식되는 과정을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순리를 보여준다. 마치 꽃이 피어나듯이 나무와 철판의 녹이 자연스럽게 하늘 위로 올라가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하석원은 “자연은 자유를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단어일 것이다."라는 말로 이를 정의 내린다. 자연 그대로의 자연으로 귀환하는 순간을 기다리듯 그의 작품은 드넓은 자연을 향해 팔을 내뻗는다.

  두 작가가 자연이 주는 정서적이고 순리적인 측면을 강조했다면 이명호는 자연을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의 틀로 가져온다. 그는 자연 속 대상, 즉 나무를 자연환경에서 탈각시켜 하나의 이미지로 만들어낸다. 바로 나무를 하얀 캔버스에 담는 것이다. 그는 나무 뒤편에 하얀 광목 천으로 네모난 프레임을 설정하는데, 그 프레임이 캔버스가 되어 자연의 나무를 하나의 대상으로 독립시킨다. 그리하여 회화 속 대상이 된 자연(나무)은 더 이상 살아있는 자연이 아니라 이미지, 즉 미메시스의 의미를 갖게 된다. 실제 자연 속의 나무와 캔버스 안에 서 있는 나무는 어떻게 다른가? 자연환경에서 벗어난 자연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 그는 예술(문화)과 자연의 관계를 회화의 평면성을 통해 찾고자 한다. 회화가 재현하고 있는 대상이 살아 숨 쉬고 움직이기에 대상화 될 수 없는 자연이라고 한다면 회화는 무엇을 재현할 수 있을 것인가? 그의 네모난 평면 캔버스 속에 자리한 자연(나무)은 재현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대자연 속에 고스란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자연 그 자체가 된다. 그리하여 나무는 부분이자 전체를 상징한다. 이러한 캔버스의 틀은 단지 자연과 예술의 관계를 전환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가장 자연스럽게 바라보게끔 만들어준다. 그의 작품은 회화의 캔버스에 담아두는 그렇지 않던 간에 이미 그 자리에 서 있는 생명을 가진 나무를 바라보게 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나무를 나무로 명명하고 나무라 부르는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박형렬은 자연을 '포획한다'라는 개념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그는 땅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이는데, 거대한 대지를 소유하기 위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위트 있게 다룬다. 공기를 비닐포장지에 포획하거나 바위를 랩으로 싼다든지, 나무를 부위 별로 네모난 얼음상자처럼 잘라 가져간다든지 하는 <The captured nature〉 시리즈는 인간이 대지에 가하는 미미한 욕심들을 극적 구성의 사진으로 재치 있게 보여준다. 땅은 인류문명이 시작되면서부터 소유의 대상이 되었고, 땅을 소유하고 지배하기 위한 처절한 권력다툼은 끊임없는 분쟁을 낳았다. 이 시대 한국사회에서 땅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 무엇보다도 높다고 하겠다. 한국사회에서 땅을 구조화한 기본단위인 1평(3.3m²)의 가치와 인간의 집착에 대해 연구한다. 작품은 정확히 1평으로 계산된 0에서 9까지의 숫자들 각각을 180m㎡(15×12m)의 직사각형 안에 양각의 형태로 조각된다(정확히 오랜 삽질을 통해 제작된다). 전시가 진행되면서 비, 바람에 의해 조금씩 무너져가는 숫자들은 인간이 그렇게 소유하고자 하는 땅이 대자연 앞에서 얼마나 초라하고 무의미한지를 잘 보여준다. '자연을 포획한다'는 인간의 문화적 욕망이 담겨져 있는 희극적 코미디를 바라보는 자연은 조용히 인간을 다독거려 인간에게 자연을 자연 그대로의 자연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므로 박형렬의 '포획된 자연'은 바로 대자연 앞에서 인간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성찰을 위한 위트 있는 예술적 행위인 것이다.

  네 명의 작가들이 자연에 대해 직접적인 의미를 부여했다면 조영철은 조금 다르게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을 표현한다. 그는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특히, 말, 사슴, 무스, 코끼리 등)를 철선으로 제작하여 작품으로 보여주는데, 동물이 자연의 일부이며 세상과 끊임없이 관계 맺기를 시도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의 작품은 단순히 동물의 형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으며, 자연의 이치를 닮은 정서를 표현하고자 한다. 그는 야생동물을 통해 자연의 질서에 대해 연구해왔는데, 특별히 '이동'에 주목한다. 야생동물들의 이동은 단지 공간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에 순응하고 변화를 읽어내는 그들의 삶의 양식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조영철은 이러한 동물들의 이동을 통해 그들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을 순화시키고자 한다. 즉, 동물을 거대자연의 흐름 속에 위치하는 정서적인 형상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고양이가 자신의 몸을 내어주면서 인간들에게 휴식을 제공하거나 코끼리가 도시자연의 형상에 맞춰 자신의 몸을 다각형으로 만드는 것과 같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살아가는 생명의 자연스러움을 보여주는 정서인 것이다. 바람을 담아내면서도 고스란히 흘려 보내주는 얇은 스테인리스 스틸 선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그의 동물 형상들은 인간 또한 자연의 일원임을 조용히 깨닫게 한다. 이러한 자연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조영철의 정서적인 동물들은 또 다시 '이동'의 길에 오른다.


4. 자연으로의 걷기

  모란미술관 야외미술프로젝트의 첫 번째 전시 “Nature는 '예술에 있어 자연은 어떤 의미인가? 자연은 예술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물음들과 이를 바라보는 여러 작가들의 해석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환경적인 자연과 예술, 문화적 맥락에서의 자연의 의미가 각각 다르듯, 자연의 개념은 이를 바라보는 주체의 시선과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 프로젝트가 생태미술이 아님을, 환경미술이나 공공미술이 아님을 앞에서 주지했듯이 전시는 "자연"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에 집중해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리차드 롱의 걷기가 보여주는 자연이해에는 인간이 아닌 자연을 위한 행위가 있었다. 그것은 자연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이기에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체험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문화가 자연적인 질서의 파괴를 넘어서서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교훈도 남겨준다. 그러나 이 전시“Nature”가 지향하는 것은 거창하게 자연의 원리를 이해하고 순응해야 한다는 계몽적인 태도가 아니라, 자연을 산책하듯 가볍게 "자연"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고 있는지를 느껴보자는 것이다. 그러한 산책, 걷기의 시작을 통해 우리의 몸과 정신이 자연이 주는 메시지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이 프로젝트는 성공적인 예술이 될 수 있다. 또한 다섯 명의 예술가가 고민하고 연구한 자연에 대한 예술적 생각들이 넓은 대지에 고루 퍼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인간의 문화가 개념의 확장을 위해 잠시 자연의 힘을 빌려왔다면 이제 다시 그 개념을 자연으로 되돌려야 할 때이다. 자연은 또 다시 녹색의 잎과 향기로운 바람과 부드러운 정서를 우리들에게 선물한다. 이제 우리들이 자연에게 줄 아름다운 선물이 필요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연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예술, 자연을 이해하기 위한 발걸음, 바로 자연 속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자! 이제 준비가 되었다면 다섯 예술가들과 함께 자연으로의 걷기를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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