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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전시

마나오 투파파우

전시명: 마나오 투파파우 Mamau Tupapau

전시기간: 

전시장소:

참여작가:

전시내용:

인간의 현현 또는 신들의 현전


전시감독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인간이 만든 신과 신이 만든 인간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했지만 여전히 신은 살아있다. 신은 인간에게 위안을 주고 때로는 벌을 내리기도 하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했지만 여전히 신은 살아있다. 신은 인간에게 위안을 주고 때로는 벌을 내리기도 하는 존재이다.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신은 인간이 만들어 낸 자신의 대체재이자 아바타이다. 때로는 인간에게 신이라는 실존적 허상이 필요하다. 신은 초인간적, 초자연적 위력을 가지고 인간에게 화복을 내리는 존재이다. 또 인간이 이루고자 하는 신념이나 믿음의 동반자이자 조력자이기도 하다. 그들은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면 신에게 도와달라고 기도를 하거나 염원한다. 이런 삶 속에 존재하는 신은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을 비롯한 종교의 이름으로 또는 토속신앙이나 원시종교로도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이 섬기고 희원하는 신들은 각각 다르지만 어찌 보면 신의 존재는 그를 신앙의 대상으로 인간들의 목적이 같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것이 공인받은 종교의 형태를 지녔거나 아니면 사교의 형태 아니면 또 다른 군소 토속신앙처럼 다양한 모습을 지녔다 할지라도 사실 신들의 존재는 인간에게 길흉화복을 내려주는 존재라는 점에서 같은 의미를 지니지만, 신들은 그를 믿고 서기고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낸다. 이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빌어 신의 모습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본 적이 없지만 그렇더라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할 수 없는 신을 형상화 또는 인간의 세계로 불러오기 위해서 자신들의 모습에 신의 존재를 투영한다. 그래서 신은 인간과 가장 닮아있다. 그리고 신 앞에 모든 인간이 평등한 것처럼, 모든 신은 어디에서고 간에 평등하다. 그를 섬기는 사람들과 상관없이 말이다. 이렇게 신은 인간과 다르지만 같다. 그리고 어느 민족이고 종족이건 간에 그들의 신을 가지고 있다. 아니 모시고 섬기고 있다. 그래서 신은 그를 섬기는 사람들의 현현에 다름 아니며 시간이 흐르고 환경이 바뀌어도 여전히 존재한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은 인간의 삶에, 특히 예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의 모습과 그 존재를 상기시키기 위해 많은 도상과 상징 또는 신의 대체재로서 조각 등이 제작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신의 존재는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며 현존하는데 이렇게 현현한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삶을 관장하는 신의 모습은 인간의 실존적 가치를 되돌아보는 동시에 다양한 문화적 ‘다름’에도 불구하고 신 또는 신화적이라는 ‘같음'을 통해 인문학적 동질성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러한 신의 세계, 존재도 세상이 발달함에 따라 달라진다. 이는 신들도 세태의 변화를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은 넓어지고 사람들의 생각은 한정된 세계에서 무한한 우주로 넓어지면서, 그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이나 질서에 대해 생각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신들의 세계에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우선 잡다하게 많은 신들이 하나의 원리로 통일되는 초월신, 최고신(High god)의 형태로 나타난다. 최고신 또는 초월신, 절대신의 경우 전 시대의 신들과는 그 기능이나 형태에서 서로 다르고 신들 상호간에도 어떤 절대적인 연관이 없으며, 저마다 독자적으로 기능하며 존재한다. 신의 세계가 정비되면서 최고신들이 등장하는데, 인도의 브라만, 유대의 야훼, 로마의 주피터, 중국의 상제(上帝), 페르시아의 미트라 같은 신들이 바로 최고신이다. 하지만 신은 항상 양면성을 지닌 존재이다. 그래서 아무리 최고신이라 하더라도 신은 인간이 만든 신과 신이 만든 인간의 사이에 존재한다. 물론 종교적으로는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신들의 힘이나 능력 밖에 있는 일을 해결하고자 신이라는 장치 또는 개념을 만들어냈다는 것에 의견도 만만치 않다. 그리고 그런 신의 존재는 각각의 자연환경이나 지정학적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또 유럽의 신은 분명하게 신화로 존재하고 역사 속에는 인간만이 존재 할 뿐이다. 하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경우 말 그대로 직접적으로 보이진 않지만 인간들의 삶과 함께 긴밀하게 존재한다. 따라서 유럽의 신은 인간세계와는 다른 또 다른 세계에 존재하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남미의 신들은 사람들의 주변에 존재한다. 물론 유럽에도 숲속에 사는 요정(Nymph)같이 생활밀착형 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서양의 신은 대개 초인적이다. 그들은 무서운 힘을 지녔거나 도술을 펼치고 자연을 부리며 인간 세상과 다른 또 다른 세계에 산다. 하지만 아시아나 아프리카, 중남미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신은 인간적이다. 물론 천계와 세상을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사람들과 매우 가까운 곳에 산다. 때로는 인간들을 도와주고 희노애락을 함께 한다. 그래서 서양, 즉 유럽신화를 대표하는 그리스 로마신화의 경우, 마치 소설처럼 기승전결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동양의 대표적인 신화라 할 산해경(山海經)에는 온갖 괴물, 즉 신들이 존재하고 등장하지만 일정한 줄거리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계속해서 이어질 뿐이다. 이것은 아마도 서양은 일찍이 기독교라는 유일신 체제를 가졌기 때문에 신들의 세계도 유일신이라는 체제 속에서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 해본다. 그런 점에서 동양, 중남미,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신은 매우 다양하며, 곳곳에 존재하는 다원적인 신의 모습들이 공존한다. 따라서 유럽의 경우 신, 조물주가 인간을 만들고 인간들이 신의 세계를 동경한 나머지 신의 세계를 모방한 또 다른 세계를 만들었다면, 아시아나 중남미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신은 인간이 만들었고 인간들 사이에 함께 살아가는 또 다른 존재처럼 자리한다.


보이지 않는 실존

  우리 민속신앙에 등장하는 도깨비는 아마도 인간이 만들어낸 신의 영역에 가장 잘 부합한다. 도깨비들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가지고 있지만 인간을 죽이거나 다치게 할 만큼 독하지 못하다. 때로는 인간의 꾀에 넘어가 자신이 지닌 초자연적 힘을 이용당하기도 한다. 마치 우리 민화에 등장하는 호랑이 같은 존재이다. 이렇게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중남미, 아메리카원주민들의 신은 유럽의 신이 하나의 신의 영역으로 통합될 때 분화해서 하늘의 신, 바다의 신, 바람의 신, 뇌우의 신, 농사의 신, 어업의 신처럼 자연신(Nature God)의 형태로 나뉘어 곳곳에 포진하는 형태로 정착했다. 특히 자연신의 경우 말 그대로 어느 특정 자연현상이 신격화되어 숭배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자연현상의 모든 면들이 신격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도 인간생활과 관계가 깊고 이해관계가 많은 부분들이 신격화되었다. 예를 들면 농사가 주업이었던 우리나라에서는 대지모신이, 인도차이나의 경우 여러 민족 들 사이에서 태양신이 중심이 되었고, 노르웨이 같이 바다를 무대로 삶을 살아야 하는 경우 바람의 신이 중심이 되었다. 인도 토다(Toda)족은 젖소 사육이 주업이었던 탓에 소를 신성시하였고, 아이누 족은 곰을 신성시하는 것처럼 생업이나 자연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경우 한반도, 한민족이라는 특성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은 여러 종류의 수많은 신을 믿어 왔다. 자연신과 인격신이 공존할 뿐만 아니라, 서로 겹쳐진다. 절대적인 타자로서 피안에 있는 신이 의인화되어 인격신으로 자리하는가 하면, 실존했던 사람이 죽은 뒤에 그 영혼이 신격화되어 인격신으로 자리하기도 한다. 즉 지역과 산업, 자연환경에 따라 매우 다양한 신들이 존재한다. 이들 신은 대체로 영어의 GOD가 아닌 gods 또는 deities와 같은 존재들이다. 한국인들의 삶속에 존재하는 신 즉 민간신앙에서 숭앙되면서 축원과 굿을 바치는 영험하고 신비한 존재가 곧 신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신을 정의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정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신이란 애니미즘이나 영혼 숭배, 죽은 자의 영혼에 관한 공포까지도 신이라는 개념 속에 포함된다. 그래서 한국의 신은 도처에 존재한다. 자연 속에, 마을 공동체에, 집안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다. 산에 산신이, 나무와 바위에도 신령이 있고, 물이 흐르는 곳에는 물 할미라는 물의 신이 있다. 땅에는 지신, 논밭에는 용신이 있고 마을 어귀에는 장승이 액운을 막기 위해 존재했고 곳에 따라서는 큰 나무가 신목으로 서있었다. 집안에는 업주, 터주, 성주, 조완, 조상신들이 함께 살았다. 지붕에서 발견되는 커다란 구렁이나 뱀은 집안을 지켜주는 신이 현현한 것으로 여겼다. 이렇게 개인과 집안을 지켜주는 신들은 마을의 신과는 조금 다른 존재였으나 마을의 신이 전체를 아울러 개인이 속한 마을을 지켜준다는 의미에서 개인의 신과 마을의 신은 다르지만 같은 임무를 수행했다는 점에서는 같다. 이렇듯 한국사회에서 발견되는 또는 함께 살아온 수많은 신들은 실은 내세적 종교인 불교가 주류를 이루었던 고려시대와 조상신 중심의 유교문화가 혼재된 탓도 크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존재하는 모든 신은 수호신 즉 '막이의 신'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집안을 지키는 삼신, 또는 삼신할매는 안방의 신으로 자손의 번영을 담당하는 가신이었다. 그는 집안의 재산과 가운을 지키고 잡귀와 재앙으로부터 집안사람들을 지키는 액막이 기능을 하였다. 가신은 늘 집안에 상주했지만 마을신은 굿을 올리는 날 마을을 방문했다가 원래 거처하는 숲이나 하늘로 돌아가는 신이었다. 또 신을 섬기거나 신과 소통하는 매개는 주로 남성이었다. 하지만 가신의 경우는 집안의 안주인인 여자가 맡았다. 마을신을 남성이 맡았다면 집안의 신은 여성이 맡는 분업체제였다. 마을신이나 가신은 보호자와 같았다. 이들이 정한 실은 사람들이 정한 금기를 어겨 부정을 타게 되면 마을신이나 집안 신을 막론하고 저주와 재앙을 받았다. 그래서 동티가 나고 살을 타는 개인에게 은닉된 공포의 신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내리는 저주와 재앙이 단어처럼 무지막지하고 감당 못할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동티나 살을 타게 되는 경우 골탕을 먹거나 어딘가가 좀 불편한 정도였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항상 마을신이나 집안의 신들이 '희고 착한 신'의 상태로 머물도록 마음을 쓰고 정성을 다했다. 왜냐하면 숭배와 숭앙의 반대편에 동티나 살이라고 하는 공포가 늘 존재했던 때문이다. 신은 사람들에게 금기의 그물을 드려두고 그것을 어기지 못하도록 구속을 했다. 즉 도리에 어긋나거나 순리에 따르도록 하는 힘을 지닌 존재였다. 이러한 신의 존재는 마을과 집안의 평화와 공존공영을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규범이자 생활 철학 같은 것이었다. 즉 인간들은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본다는 신의 존재를 상정하고 최소한의 원칙과 도리를 지키며 살아가도록 하는 제재하는 존재였던 셈이다. 아무도 없는 것에서 일탈을 하는 것도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신의 존재로 인해 스스로를 제어하는 동인이 되었던 셈이다. 이렇게 한국 그리고 아시아와 중남미, 아메리카원주민들에게는 스스로가 스스로를 지배하는 장치이자 제어하는 힘이 되었던 것이다. 즉 은밀한 유혹과 시험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는 마음속의 규범이자 장치였던 셈이다. 법 이전에 스스로 공동체내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지켜야 하는 규범이자 규약이었으며 스스로에게는 자신을 지키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최소한의 도덕률이었던 셈이다. 각종 금기의 그물이 마을신이나 가신을 에워싸서 사람들을 구속하고 제약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한국의 신은 무속신앙의 신과 마을신 그리고 가신의 형태로 존재한다. 하지만 유교적 전통이 뿌리내리는 조선시대 이후에는 조상신까지 포함해서 4가지 신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대부분이 영적으로 존재한다. 형태는 없지만 엄연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많은 신들은 원래부터 존재하지만 죽은 자의 영혼이 신격화하여 신이 되기도 한다. 김유신이 죽어 천신이 되고 탈해가 사후에 산신이 되며 관우가 죽어서 관운장으로 사당에 모셔지는 것도 이런 이치이다. 특히 신과 영이 만나는 인격신의 경우 우리 한국 사람들이 믿는 신들의 사령 즉 매개자의 역할을 한다.                            


신이 되고픈 인간

  신은 인간의 삶과 운명을 관장하지만 신이란 존재는 인간이 고안해낸 최고의 권력이자 최대의 힘을 지닌 영명한 존재이다. 그리고 인간들은 이렇게 만들어 논 아니 상정한 신 또는 신이라는 경지에 도달하거나 신을 만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하지만 신학을 통해서 신을 만날 수는 없다. 신학은 학문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체험이며 신에 관한 이야기는 글로 읽어서 습득할 수 있지만 신과 직접 만나는 방법은 수행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신을 만나기 위해 또는 신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니 기울여도 갈 수 없지만 그 경지에 오르고자 최선을 다하도록 하는 장치가 신의 존재일수도 있다. 지금까지 종교라는 이름아래 존재하는 신 이외의 신은 신으로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신에 대한 개념과 생각 그리고 신을 대하는 태도가 각각 다를 뿐이다. 하지만 서구 또는 미주를 중심으로 하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신들의 관점과 규범을 일반화하기 위해 고안해낸 장치에 다름 아니다. 나름의 문화를 가지고 있는 소위 아시아, 중남미, 아프리카,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인간으로 개조하고자 신의 영역에 까지 접근해서 폭력적으로 자신들과 동일화하고자 했다. 야만이나 비합리적이라는 평가를 통해서 그들의 신을 타자들에게 강요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머리와 가슴속에 있는 신들을 숭앙하며 그들이 지켜보는 안에서 인간의 가치를 구현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은 신을 닮은 자신들의 모습을 만들어서 신에게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다. 사실 신이란 이들에게는 완성체, 완벽한 사람을 의미하기도 했다. 수양과 학습을 통해 신의 경지에 도달하는 그리하여 남들을 도와주고 지켜줄 수 있는 소박한 신의 세계를 동경한 것이다. 그리고 신이 언제어디서난 신이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스스로 인간된 도리를 다하고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인간, 즉 완성을 행해 매진하는 인간이 되고자 했다. 그리하여 도덕적으로 완성된 아니 도덕률을 지키고 살아가는 선한 사람이 되고자 한 것이다. 신이 되고자 했던 사람들은 신의 모습을 만들거나 그렸으며 스스로 동경하는 신의 세계를 그렸다. 때로는 재미있게 때로는 무섭게 또 때로는 익살 맞은 친구의 모습으로 말이다. 남태평양의 파푸아 뉴기니아 조각이나 미술품은 서술적이며 신화적이며 회화성이 탁월하다. 또 아프리카의 그것보다 자연친화적이고 낭만적인 특징을 지닌다. 따라서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인간적인 동시에 상징적이며 신비한 원시조각은 대담한 구조와 함께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원시미술은 현대미술에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인간에 신의 말은 진리이고 신의 말에 따르는 것이 윤리이다. 왜 사람은 인간에 따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사람이 복잡한 다중구조의 인격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들로 구성되어있다. 그 중에서 진, 선, 미에 해당하는 고귀, 고결, 고상, 성스러운 것 등의 부분을 인간으로부터 떼어서 신에게 부여하여 순수화하고 인간을 초월한 것으로서 독립시키고 그 초월자에게 따르고, 모방하고, 배우고 닦음으로서 보다 나은 삶을 실현할 수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인간은 신을 만들었다. 그 결과 신은 진리이고 선이며 인간은 모순과 불합리한 존재인 동시에 부족한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은 많은 시간동안 스스로의 신의 만들고 그려왔고 신이 되고자 했다. 지역과 시간과 장르를 넘나들며 존재하는 신의 존재를 통해 진리와 절대적 가치가 사라진 규범과 도덕이라는 최소한 사람 사는 세상의 가치와 틀이 사라져가는 오늘을 돌아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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