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토포스 - 은유의 장소
전시기간: 2012.10.12 - 2012.11.24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권오상, 남경민, 송명진, 이상희, 이진준
전시내용:
장소, 공간, 은유
임성훈 (모란미술관 학예실장, Ph. D.)
1.
어떤 사물을 볼 때, 그 사물만 보는 것은 아니다. 사물만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물은 그것이 놓인 장소 그리고 공간과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각 작품의 경우에도, 장소와 공간은 작품과 하나가 된다. (장소와 공간이 없는 조각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물론 여기서 장소는 어떤 특정한 영역을 나타내는 물리적인 장소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함의를 갖고 있는 장소이다. 또한 조형적 관점에서 흔히 언급되는 공간, 즉 사물의 형태를 이루는 공간인 포지티브 공간과 사물의 형태에 속하지 않는 공간인 네거티브 공간(negative space)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식의 공간 구분은 공간 개념을 매우 협소하게 만들 뿐이다. 그리스어 “토포스(topos)”는 장소와 공간을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토포스는 논리학, 미학, 생물학, 자연과학, 건축학 등에 큰 영향을 끼친 개념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의되고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토포스는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의 삶과 연관된 장소와 공간이다. 그러기에 토포스는 인간, 자연, 환경 그리고 문화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핵심적인 개념 중의 하나이다. 토포스는 장소와 공간을 함축하고 있는 말이어서, 장소와 공간을 분리해서는 이해될 수 없다. 물론 일반적으로 장소와 공간의 차이점을 설명할 수는 있다. 예컨대, 장소와 관련해서는 어떤 한정된 영역이나 방향성 또는 중심을 말할 수 있지만, 공간과 관련해서는 말할 수 없다. 이 글에서는 장소와 공간의 구분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고 맥락에 따라 교차적으로 사용하기로 한다.
II.
공간은 그저 텅 빈 공간이 아니다. 그렇다면 공간이란 무엇인가? 쉽게 답할 수 있는 물음은 아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대부분의 과학자나 철학자들이 공간을 단순히 물리적 관점에서만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특히 근대로 들어서면서 공간에 대한 자연과학과 철학에서 심층적으로 논의되었다.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은 변하지 않고 동일한 채로 존재하는 절대 공간을 주장하고, 물체와 독립된 공간의 고유성을 입증하고자 하였다. 이와는 달리 철학자 라이프니츠(G, W. von Leibniz, 1646-1716)는 뉴턴의 절대공간 개념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면서,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공간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공간은 어떤 실체적 현실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물 상호간의 위치나 거리 등과 같은 관계로 파악되는 것이다. 라이프니츠 공간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관계이며, 따라서 공간은 상대적이다. 어떤 장소도 그 자체로 확정될 수 없으며, 또한 말해질 수도 없다. 어떤 한 장소는 오직 다른 어떤 장소와의 관계에서만 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I, Kant, 1724-1804)는 뉴턴의 절대주의 공간 개념과 라이프니츠의 상대주의 공간 개념을 절충하고자 하였다. 칸트는 주관의 의식과 별도로 공간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비판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공간이라 부를 만한 어떤 대상도 외부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칸트는 공간이 “외감의 모든 현상들의 형식"이며, “감성의 주관적 조건" 이다.1) 요약해서 간단히 말하자면, 공간은 주관의 순수 형식인 것이다. 또한 현대 물리학에 지대한 공헌을 한 아인슈타인은 공간을 “모든 물리적 대상을 담는 용기”가 아니라 “물체계의 저장 성질”로, 즉 “물리적 대상들의 관계적 질서”로 파악하고, 시간과 공간의 상대적인 변화를 강조하였다.2) 장소와 공간에 대한 이러한 입장들을 살펴보더라도, 토포스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물리적인 문제를 넘어 삶, 인간 그리고 세계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으며, 또한 예술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함의를 갖고 있는 개념이란 점을 충분히 말해주고 있다.
III.
토포스는 단지 물리적인 장소와 공간을 넘어 관계의 장소와 공간이며, 주관이 경험하는 장소와 공간이다. 그러기에 토포스는 예술적 상상력의 장소와 공간이기도 하다. 또한 이런 점에서 예술로 표현된 토포스는 은유(metaphor)의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예술작품에서 은유의 공간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경험은 다시 우리의 삶과 현실의 공간을 새롭게 인식하게 해준다. 이번 〈topos - metaphor> 전에 참여한 다섯 작가들은 각자의 독특한 조형언어를 통해 은유의 공간을 선보이고 있다. 권오상은 각양각색의 이미지를 오려내 실내 공간에 다양한 방식으로 배치한 후 사진으로 찍은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수많은 이미지들로만 채워진 사진처럼 보이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평면성보다는 입체성이 강조되어 있고, 미묘한 공간 작업의 결과로 화면이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남경민이 재현하고 있는 공간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간이다. 현실의 공간과 상상의 공간이 화면에 이중적으로 교차되어 표현된 작가의 토포스는 사유와 은유의 장소이자 공간이 된다. 송명진은 이차원의 이미지와 삼차원의 이미지의 관계를 감각적인 조형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균열, 분출, 침범 등의 현상을 차용하여 장소와 공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이미지의 변용을 흥미롭게 제시하고 있다. 이상희는 인간이 자연을 만나는 공간을 화면에 그려내고 (혹은 비워내고 있다. 작가의 작품을 보는 순간, 자연미학자인 마틴 젤(Martin Seel)이 자연이란 우리 인간에게 ‘상응' 의 공간이자 동시에 ‘관조’ 의 공간이며 또한 '상상력' 의 공간이라고 말했던 것이 바로 떠올랐다. 이진준의 미디어 설치 및 영상, 사진 작업은 기술, 자연, 인간의 관계를 반성적인(reflective) 조형성으로 연출하고, 이를 통해 총체적인 미적 체험의 공간을 창출하고 있다. 이제 가을이 아름다운 모란미술관에서 다섯 작가가 재현한 토포스 사이에 난 은유의 길을 걸어가 보자.
1) Immanuel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B42.
2) 마르쿠스 슈뢰르, 『공간, 장소, 경계』, 정인모/ 배정희 옮김, 2010, p.48.
전시명: 토포스 - 은유의 장소
전시기간: 2012.10.12 - 2012.11.24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권오상, 남경민, 송명진, 이상희, 이진준
전시내용:
장소, 공간, 은유
임성훈 (모란미술관 학예실장, Ph. D.)
1.
어떤 사물을 볼 때, 그 사물만 보는 것은 아니다. 사물만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물은 그것이 놓인 장소 그리고 공간과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각 작품의 경우에도, 장소와 공간은 작품과 하나가 된다. (장소와 공간이 없는 조각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물론 여기서 장소는 어떤 특정한 영역을 나타내는 물리적인 장소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함의를 갖고 있는 장소이다. 또한 조형적 관점에서 흔히 언급되는 공간, 즉 사물의 형태를 이루는 공간인 포지티브 공간과 사물의 형태에 속하지 않는 공간인 네거티브 공간(negative space)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식의 공간 구분은 공간 개념을 매우 협소하게 만들 뿐이다. 그리스어 “토포스(topos)”는 장소와 공간을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토포스는 논리학, 미학, 생물학, 자연과학, 건축학 등에 큰 영향을 끼친 개념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의되고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토포스는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의 삶과 연관된 장소와 공간이다. 그러기에 토포스는 인간, 자연, 환경 그리고 문화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핵심적인 개념 중의 하나이다. 토포스는 장소와 공간을 함축하고 있는 말이어서, 장소와 공간을 분리해서는 이해될 수 없다. 물론 일반적으로 장소와 공간의 차이점을 설명할 수는 있다. 예컨대, 장소와 관련해서는 어떤 한정된 영역이나 방향성 또는 중심을 말할 수 있지만, 공간과 관련해서는 말할 수 없다. 이 글에서는 장소와 공간의 구분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고 맥락에 따라 교차적으로 사용하기로 한다.
II.
공간은 그저 텅 빈 공간이 아니다. 그렇다면 공간이란 무엇인가? 쉽게 답할 수 있는 물음은 아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대부분의 과학자나 철학자들이 공간을 단순히 물리적 관점에서만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특히 근대로 들어서면서 공간에 대한 자연과학과 철학에서 심층적으로 논의되었다.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은 변하지 않고 동일한 채로 존재하는 절대 공간을 주장하고, 물체와 독립된 공간의 고유성을 입증하고자 하였다. 이와는 달리 철학자 라이프니츠(G, W. von Leibniz, 1646-1716)는 뉴턴의 절대공간 개념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면서,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공간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공간은 어떤 실체적 현실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물 상호간의 위치나 거리 등과 같은 관계로 파악되는 것이다. 라이프니츠 공간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관계이며, 따라서 공간은 상대적이다. 어떤 장소도 그 자체로 확정될 수 없으며, 또한 말해질 수도 없다. 어떤 한 장소는 오직 다른 어떤 장소와의 관계에서만 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I, Kant, 1724-1804)는 뉴턴의 절대주의 공간 개념과 라이프니츠의 상대주의 공간 개념을 절충하고자 하였다. 칸트는 주관의 의식과 별도로 공간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비판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공간이라 부를 만한 어떤 대상도 외부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칸트는 공간이 “외감의 모든 현상들의 형식"이며, “감성의 주관적 조건" 이다.1) 요약해서 간단히 말하자면, 공간은 주관의 순수 형식인 것이다. 또한 현대 물리학에 지대한 공헌을 한 아인슈타인은 공간을 “모든 물리적 대상을 담는 용기”가 아니라 “물체계의 저장 성질”로, 즉 “물리적 대상들의 관계적 질서”로 파악하고, 시간과 공간의 상대적인 변화를 강조하였다.2) 장소와 공간에 대한 이러한 입장들을 살펴보더라도, 토포스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물리적인 문제를 넘어 삶, 인간 그리고 세계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으며, 또한 예술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함의를 갖고 있는 개념이란 점을 충분히 말해주고 있다.
III.
토포스는 단지 물리적인 장소와 공간을 넘어 관계의 장소와 공간이며, 주관이 경험하는 장소와 공간이다. 그러기에 토포스는 예술적 상상력의 장소와 공간이기도 하다. 또한 이런 점에서 예술로 표현된 토포스는 은유(metaphor)의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예술작품에서 은유의 공간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경험은 다시 우리의 삶과 현실의 공간을 새롭게 인식하게 해준다. 이번 〈topos - metaphor> 전에 참여한 다섯 작가들은 각자의 독특한 조형언어를 통해 은유의 공간을 선보이고 있다. 권오상은 각양각색의 이미지를 오려내 실내 공간에 다양한 방식으로 배치한 후 사진으로 찍은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수많은 이미지들로만 채워진 사진처럼 보이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평면성보다는 입체성이 강조되어 있고, 미묘한 공간 작업의 결과로 화면이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남경민이 재현하고 있는 공간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간이다. 현실의 공간과 상상의 공간이 화면에 이중적으로 교차되어 표현된 작가의 토포스는 사유와 은유의 장소이자 공간이 된다. 송명진은 이차원의 이미지와 삼차원의 이미지의 관계를 감각적인 조형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균열, 분출, 침범 등의 현상을 차용하여 장소와 공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이미지의 변용을 흥미롭게 제시하고 있다. 이상희는 인간이 자연을 만나는 공간을 화면에 그려내고 (혹은 비워내고 있다. 작가의 작품을 보는 순간, 자연미학자인 마틴 젤(Martin Seel)이 자연이란 우리 인간에게 ‘상응' 의 공간이자 동시에 ‘관조’ 의 공간이며 또한 '상상력' 의 공간이라고 말했던 것이 바로 떠올랐다. 이진준의 미디어 설치 및 영상, 사진 작업은 기술, 자연, 인간의 관계를 반성적인(reflective) 조형성으로 연출하고, 이를 통해 총체적인 미적 체험의 공간을 창출하고 있다. 이제 가을이 아름다운 모란미술관에서 다섯 작가가 재현한 토포스 사이에 난 은유의 길을 걸어가 보자.
1) Immanuel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B42.
2) 마르쿠스 슈뢰르, 『공간, 장소, 경계』, 정인모/ 배정희 옮김, 2010, p.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