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조각으로 표상된 몸(신체)의 미학
전시기간: 2019.04.30 - 2019.06.30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노 준, 이환권, 천성명, 최수앙
전시내용:
조각으로 표상된 몸의 미학
임성훈 (미학, Ph.D
몸은 현대미술의 중요한 쟁점이자 주제이다. 특히 1960년대 이후의 현대미술에서 몸은 표현의 단순히 미술의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미술이 된다. 몸의 재현적 가능성은 오늘날 쉽게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되고 있다. 현대미술에서 몸은 재료이자 동시에 주제이며, 몸의 행위 또한 미술이다. 특히 조각에서 몸은 신석기 시대의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조형적 대상이며, 영감과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조각은 몸의 미학을 그 시대와 사회 그리고 문화의 양상에 따라 제시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인체 조각을 보더라도 아케익 시기에서 헬레니즘 시기에 이르는 약 600 년간의 인체조각의 전개에서 상징적인 몸, 사실적인 몸, 자연적인 몸, 이상적인 몸, 개성적인 몸 등이 표현되었다. 조각의 역사는 몸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로댕 이후 현대조각이 재현하는 몸은 이전의 전통적인 인체조각과는 다른 조형적 변용을 급격하게 보여준다. 현대조각에서 몸은 완전한 형태가 아니라 탈중심적이고 정체성이 의문시되는 몸, 단편적인 몸으로 표현되고, 나아가 돌연변이적인 몸, 애브젝트한 몸, 인공적인 몸, 사이보그로서의 몸 등으로 나타난다. 특히 몸의 조형적 가능성이 미디어와 더불어 더욱 확장되면서 몸으로 표상된 조각은 사회적, 문화적 함의에 대한 지표로서의 미학을 드러낸다.
서구 지성사에서 몸은 이성 [정신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성은 신뢰할 만한 것이지만, 몸은 감각적인 것이며, 변덕스럽고 합리적이지 못한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성과 몸의 이분법적인 오해와 불신은 플라톤 이래로 오래 지속되었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추구하는 이성을 강조하고, 몸은 영혼이 잠시 머무는 장소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
중세에서도 몸은 죄를 범하는 장소이며 인간의 헛된 욕망이 거하는 곳이며, 또한 진리의 추구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근대에 들어와서도 이러한 정신과 몸의 이분법은 지속되었다. 데카르트는 몸을 생물학적 메커니즘으로 파악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정신이 몸을 작동시키는 근본적인 것이라고 여긴다. 이렇듯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몸은 이성의 주변부에 머무는 감각적인 요소로만 취급되었다.
몸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점을 가져온 이는 니체이다. 삶의 문제를 물었던 니체에게 몸은 중요하다. 그는 몸을 둘러싸고 있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 개념을 걷어내고 몸에 고유한 생명력을 적극적으로 강조한다. 달리 말해, 니체는 정신과 이성으로 인해 부당하게 통제당하고 억압되어 온 몸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는 전통적으로 논의되어 온 정신과 몸의 관계를 과감하게 전복시킨다. 니체는 정신은 작은 이성"에 불과한 것이고, 오히려 몸이 "커다란 이성"이며, 심지어 정신은 몸의 장난감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니체에게 있어 몸은 이 세상의 어떠한 최고의 이성보다도 더 이성적인 것이다. 이는 “나는 전적으로 몸일 뿐,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며, 영혼이란 것도 몸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붙인 말에 불과하다"는 니체의 말에서 여실히 확인된다. 니체 이후 몸은 새로운 지평에서 논의된다. 현대의 현상학자인 메를로-퐁티는 의식이란 언제나 몸과 관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몸과 의식이 분리되는 일이란 없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코기도(COGITO)와는 달리, 그는 “신체화 된 코기토(EMBODIED COGITO)"를 강조한다. 또한 메를로-퐁티는 "몸은 육체적인 대상에 비교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예술 작품에 비교되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몸의 미학을 제시한다. 오늘날 몸을 이성에 비해 열등한 것이라고 여기는 경향은 점차로 사라지고 있다. 몸은 인간의 존재방식에서 근원적인 것이며 원초적인 것이다. 현대 조각은 로댕 이후 전개된 몸의 다양한 조형적 변용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변용 속에서 몸의 의미는 지속적으로 재발견된다.
이번 <조각으로 표상된 몸 [신체의 미학>은 몸의 미학에 함축된 여러 측면들을 보여주고 있는 조각가들의 작품을 현시하고 있다. 인간은 몸을 지닌 존재, 아니 몸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의 몸은 어느 정도 지식과 규범으로 파악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지식이나 규범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특유성을 갖고 있다. 인간은 무엇보다 느끼는 존재이며, 이 느낌에서 몸은 본래적인 것이다. 몸은 느낌의 통로이다. 인간은 몸으로 세계를 경험한다. 조각은 근원적인 체험의 장소인 몸을 가장 민감하게 표상한다. 몸의 곁들이 조각으로 인해 촉발되는 분위기 속에서 섬세하게 보인다. 이번 전시는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낯설게 느껴지는 몸이라는 기호를 조형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전시에 참여한 네 명의 조각가들(노준, 이환권, 천성명, 최수앙)은 각자의 특징적인 방식으로 몸의 현존성을 재현하고 있다. 조각가들이 표상하고 있는 몸은 단순히 대상으로서의 몸을 모방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몸에서 환기되는 다층적인 사회적, 문화적 함의를 조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몸이 전시장에서 낯선 형태로 나타난다. 그로테스크한 몸, 기이한 몸, 실존적인 몸, 즉물적인 몸, 왜곡되고 과장된 몸은 낯설고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조각으로 표상된 이러한 몸은 우리에게 몸에 대한 새로운 사유들을 이끌어낸다.
노준의 작업에는 동물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얼굴이나 몸통은 인간의 몸으로 표현되어 있다. 인간은 동물과 함께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그의 조각은 동물과 인간이라는 구분에서 비롯되는 간격, 분열 혹은 우위성의 문제를 떠나 양자 사이에서 생겨날 수 있는 조형적인 감정이입을 우선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업은 동물과 인간이라는 통상적인 이분법적에서 벗어나 흥미롭고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몸의 미학을 확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터이다. 이환권의 작업에서 나타난 가장 큰 조형적 특징은 몸의 왜곡과 과장이다. 그가 제시하는 몸은 왜곡과 과장으로 인해 드러난 허상으로서의 몸이다. 그렇다면 허상이 아닌 본질로서의 몸은 무엇일까? 알 수 없다. 다만, 이러한 허상의 몸은 동시에 본질로서의 몸에 대해 생각하게끔 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니까 몸의 본질에 대한 생각은 몸의 허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환권의 작업은 왜곡과 과장된 형태의 몸을 표현함으로써 현상과 본질 사이에 내재한 관계의 아포리아 (APORIA)를 제시하고 있다.
천성명의 조각은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몸을 즉물적인 메타포로 보여준다. <그림자를 삼키다 > 연작은 능률화, 표준화, 성과주의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표상을 고스란히 조형적으로 제시한다. 그의 조각이 드러내는 몸은 얼핏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낯섦은 의외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것임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또한 〈부조리한 덩어리>는 서로 연결된 덩어리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관계가 아니라 강제적이고 억지로 이루어진 관계의 덩어리라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몸은 인간에게 내재한 부조리를 과감하게 드러내는 예술이 된다. 이로써 그의 조각은 몸으로 표상된 부조리의 미학을 이끌어낸다. 최수앙의 몸 조각은 조각의 전통성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조형적 변용들을 지속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의 작업 <SHEDDINGS>은 몸과 물질 그리고 정신의 상호 관계성을 설치적 조각의 형태로 재현한다.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ENTWINED〉는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주제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것보다는 오히려 몸의 변용에 따른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메타포를 응축한 작품이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메타포는 〈STALL>에서도 또 다른 방식으로 감지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업은 몸 조각의 상징과 알레고리를 현대적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번 <조각으로 표상된 몸[신체]의 미학>에 참여한 조각가들은 단순히 몸의 조형적 형태나 기교적 표현에 중점을 두고 있지 않다. 조각가들은 몸을 조각으로 표상함으로써 또 다른 조각의 가능성과 조건을 생각하고, 이를 통해 몸 조각의 또 다른 존재방식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전시장을 둘러 본 이라면 누구라고 느낄 수 있듯이 무엇보다 이번 전시는 조각으로 표상된 몸의 현존성을 미학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달리 말해 대상으로서의 몸 조각이라기보다는 관점으로서의 몸 조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조각가들이 보여주는 몸조각은 매우 다양한 분위기의 미학을 산출하고 있다. 몸은 알 수 없는 그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조각에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상상력의 원천이다. 조각이 표상하는 몸의 미학은 그 시대와 사회의 문화 풍경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 몸 조각의 미학에 반영된 문화풍경을 저마다의 고유한 방식으로 떠올려 보는 것도 좋을 터이다.
전시명: 조각으로 표상된 몸(신체)의 미학
전시기간: 2019.04.30 - 2019.06.30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노 준, 이환권, 천성명, 최수앙
전시내용:
조각으로 표상된 몸의 미학
임성훈 (미학, Ph.D
몸은 현대미술의 중요한 쟁점이자 주제이다. 특히 1960년대 이후의 현대미술에서 몸은 표현의 단순히 미술의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미술이 된다. 몸의 재현적 가능성은 오늘날 쉽게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되고 있다. 현대미술에서 몸은 재료이자 동시에 주제이며, 몸의 행위 또한 미술이다. 특히 조각에서 몸은 신석기 시대의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조형적 대상이며, 영감과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조각은 몸의 미학을 그 시대와 사회 그리고 문화의 양상에 따라 제시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인체 조각을 보더라도 아케익 시기에서 헬레니즘 시기에 이르는 약 600 년간의 인체조각의 전개에서 상징적인 몸, 사실적인 몸, 자연적인 몸, 이상적인 몸, 개성적인 몸 등이 표현되었다. 조각의 역사는 몸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로댕 이후 현대조각이 재현하는 몸은 이전의 전통적인 인체조각과는 다른 조형적 변용을 급격하게 보여준다. 현대조각에서 몸은 완전한 형태가 아니라 탈중심적이고 정체성이 의문시되는 몸, 단편적인 몸으로 표현되고, 나아가 돌연변이적인 몸, 애브젝트한 몸, 인공적인 몸, 사이보그로서의 몸 등으로 나타난다. 특히 몸의 조형적 가능성이 미디어와 더불어 더욱 확장되면서 몸으로 표상된 조각은 사회적, 문화적 함의에 대한 지표로서의 미학을 드러낸다.
서구 지성사에서 몸은 이성 [정신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성은 신뢰할 만한 것이지만, 몸은 감각적인 것이며, 변덕스럽고 합리적이지 못한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성과 몸의 이분법적인 오해와 불신은 플라톤 이래로 오래 지속되었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추구하는 이성을 강조하고, 몸은 영혼이 잠시 머무는 장소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
중세에서도 몸은 죄를 범하는 장소이며 인간의 헛된 욕망이 거하는 곳이며, 또한 진리의 추구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근대에 들어와서도 이러한 정신과 몸의 이분법은 지속되었다. 데카르트는 몸을 생물학적 메커니즘으로 파악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정신이 몸을 작동시키는 근본적인 것이라고 여긴다. 이렇듯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몸은 이성의 주변부에 머무는 감각적인 요소로만 취급되었다.
몸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점을 가져온 이는 니체이다. 삶의 문제를 물었던 니체에게 몸은 중요하다. 그는 몸을 둘러싸고 있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 개념을 걷어내고 몸에 고유한 생명력을 적극적으로 강조한다. 달리 말해, 니체는 정신과 이성으로 인해 부당하게 통제당하고 억압되어 온 몸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는 전통적으로 논의되어 온 정신과 몸의 관계를 과감하게 전복시킨다. 니체는 정신은 작은 이성"에 불과한 것이고, 오히려 몸이 "커다란 이성"이며, 심지어 정신은 몸의 장난감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니체에게 있어 몸은 이 세상의 어떠한 최고의 이성보다도 더 이성적인 것이다. 이는 “나는 전적으로 몸일 뿐,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며, 영혼이란 것도 몸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붙인 말에 불과하다"는 니체의 말에서 여실히 확인된다. 니체 이후 몸은 새로운 지평에서 논의된다. 현대의 현상학자인 메를로-퐁티는 의식이란 언제나 몸과 관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몸과 의식이 분리되는 일이란 없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코기도(COGITO)와는 달리, 그는 “신체화 된 코기토(EMBODIED COGITO)"를 강조한다. 또한 메를로-퐁티는 "몸은 육체적인 대상에 비교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예술 작품에 비교되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몸의 미학을 제시한다. 오늘날 몸을 이성에 비해 열등한 것이라고 여기는 경향은 점차로 사라지고 있다. 몸은 인간의 존재방식에서 근원적인 것이며 원초적인 것이다. 현대 조각은 로댕 이후 전개된 몸의 다양한 조형적 변용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변용 속에서 몸의 의미는 지속적으로 재발견된다.
이번 <조각으로 표상된 몸 [신체의 미학>은 몸의 미학에 함축된 여러 측면들을 보여주고 있는 조각가들의 작품을 현시하고 있다. 인간은 몸을 지닌 존재, 아니 몸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의 몸은 어느 정도 지식과 규범으로 파악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지식이나 규범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특유성을 갖고 있다. 인간은 무엇보다 느끼는 존재이며, 이 느낌에서 몸은 본래적인 것이다. 몸은 느낌의 통로이다. 인간은 몸으로 세계를 경험한다. 조각은 근원적인 체험의 장소인 몸을 가장 민감하게 표상한다. 몸의 곁들이 조각으로 인해 촉발되는 분위기 속에서 섬세하게 보인다. 이번 전시는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낯설게 느껴지는 몸이라는 기호를 조형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전시에 참여한 네 명의 조각가들(노준, 이환권, 천성명, 최수앙)은 각자의 특징적인 방식으로 몸의 현존성을 재현하고 있다. 조각가들이 표상하고 있는 몸은 단순히 대상으로서의 몸을 모방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몸에서 환기되는 다층적인 사회적, 문화적 함의를 조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몸이 전시장에서 낯선 형태로 나타난다. 그로테스크한 몸, 기이한 몸, 실존적인 몸, 즉물적인 몸, 왜곡되고 과장된 몸은 낯설고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조각으로 표상된 이러한 몸은 우리에게 몸에 대한 새로운 사유들을 이끌어낸다.
노준의 작업에는 동물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얼굴이나 몸통은 인간의 몸으로 표현되어 있다. 인간은 동물과 함께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그의 조각은 동물과 인간이라는 구분에서 비롯되는 간격, 분열 혹은 우위성의 문제를 떠나 양자 사이에서 생겨날 수 있는 조형적인 감정이입을 우선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업은 동물과 인간이라는 통상적인 이분법적에서 벗어나 흥미롭고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몸의 미학을 확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터이다. 이환권의 작업에서 나타난 가장 큰 조형적 특징은 몸의 왜곡과 과장이다. 그가 제시하는 몸은 왜곡과 과장으로 인해 드러난 허상으로서의 몸이다. 그렇다면 허상이 아닌 본질로서의 몸은 무엇일까? 알 수 없다. 다만, 이러한 허상의 몸은 동시에 본질로서의 몸에 대해 생각하게끔 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니까 몸의 본질에 대한 생각은 몸의 허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환권의 작업은 왜곡과 과장된 형태의 몸을 표현함으로써 현상과 본질 사이에 내재한 관계의 아포리아 (APORIA)를 제시하고 있다.
천성명의 조각은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몸을 즉물적인 메타포로 보여준다. <그림자를 삼키다 > 연작은 능률화, 표준화, 성과주의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표상을 고스란히 조형적으로 제시한다. 그의 조각이 드러내는 몸은 얼핏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낯섦은 의외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것임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또한 〈부조리한 덩어리>는 서로 연결된 덩어리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관계가 아니라 강제적이고 억지로 이루어진 관계의 덩어리라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몸은 인간에게 내재한 부조리를 과감하게 드러내는 예술이 된다. 이로써 그의 조각은 몸으로 표상된 부조리의 미학을 이끌어낸다. 최수앙의 몸 조각은 조각의 전통성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조형적 변용들을 지속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의 작업 <SHEDDINGS>은 몸과 물질 그리고 정신의 상호 관계성을 설치적 조각의 형태로 재현한다.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ENTWINED〉는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주제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것보다는 오히려 몸의 변용에 따른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메타포를 응축한 작품이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메타포는 〈STALL>에서도 또 다른 방식으로 감지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업은 몸 조각의 상징과 알레고리를 현대적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번 <조각으로 표상된 몸[신체]의 미학>에 참여한 조각가들은 단순히 몸의 조형적 형태나 기교적 표현에 중점을 두고 있지 않다. 조각가들은 몸을 조각으로 표상함으로써 또 다른 조각의 가능성과 조건을 생각하고, 이를 통해 몸 조각의 또 다른 존재방식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전시장을 둘러 본 이라면 누구라고 느낄 수 있듯이 무엇보다 이번 전시는 조각으로 표상된 몸의 현존성을 미학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달리 말해 대상으로서의 몸 조각이라기보다는 관점으로서의 몸 조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조각가들이 보여주는 몸조각은 매우 다양한 분위기의 미학을 산출하고 있다. 몸은 알 수 없는 그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조각에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상상력의 원천이다. 조각이 표상하는 몸의 미학은 그 시대와 사회의 문화 풍경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 몸 조각의 미학에 반영된 문화풍경을 저마다의 고유한 방식으로 떠올려 보는 것도 좋을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