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깨어있는 꿈 a wakeful dream
전시기간: 2019.09.24 - 2019.11.24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남경민, 보라리, 최수정, 허수영
전시내용:
"깨어있는 꿈 (a wakeful dream)”으로서의 예술
임성훈(미술비평, 미학 Ph. D.)
예술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예술이 재현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 물음이다. 예술은 과연 무엇을 재현하는가? 미술에서 재현은 본질적인 문제이다. 재현이 무엇인지를 미학적으로 탐구하기란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미술에서 재현이 하나의 방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서양미술의 경우를 보자. 오랫동안 서양미술사의 바탕에 놓여있었던 것은 모방적 재현이었다. 물론 시대와 그 문화적 양상에 따라 다양한 변용이 있기는 했지만, 모방은 미술의 근간으로 간주된다. 르네상스의 원근법과 명암법은 세상을 더 객관적으로 모방하기 위해 고안된 미술 기법이다. 그런데 19세기 말에 이르러 미술에서 하나의 기준이었던 모방론이 흔들리게 된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모방에서 벗어난 새로운 재현이 부단히 시도된다. 20세기 초반의 추상회화와 조각은 대상을 그저 모방하는데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대상의 핵심적인 측면, 그러니까 대상의 본질적인 측면을 재현하고자 한다. 나아가 20세기 중반 이후의 미술은 생각을 적극적으로 재현하기에 이른다. 현대미술의 난해성은 이에 연유한 바가 크다. 미술의 역사에서 자명하게 읽어낼 수 있듯이 재현은 하나의 방식만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모방이든 추상이든 생각을 표현하든지 간에 그 모든 것이 다 재현이다. 예술은 이러한 다양한 방식의 재현을 통해 그 시대의 문화풍경을 반영한다.
재현으로서의 예술은 본래적으로 비현실적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예술에 대해 인정을 하면서도, 그 인정을 그저 비현실적인 측면에서만 하곤 한다. 심지어 예술에 대해 현실을 도피한 유희라고 한갓되게 치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예술이 비현실적이기만 한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예술의 비현실성은 현실이 결코 갖지 못하는 엄청난 힘을 드러내 보여준다. 실상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에서 현실을 감성적으로 직관하고 제대로 인식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예술은 그 자체의 본래적인 비현실성을 통해 우리에게 또 다른 현실을 수많은 형식과 방식으로 재현해낸다. 예술은 불가능성을 통해 꿈을 현시한다. 예술의 불가능성은 현실의 가능성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체험을 주는 특별한 계기이다. 미학자 아도르노는『미학이론』에서 예술적인 체험을 “불가능성을 통해 약속된 가능성에 대한 체험” 이라고 말한다. 자유와 상상력은 예술의 불가능성을 통해 비로소 가능한 것이 된다.
예술적으로 재현된 그 모든 것은 가상이다. 가상이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짜로 나타나는 이미지이다. 그런데 예술에서 볼 수 있는 가상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망상이나 몽상 또는 허상과는 여러 면에서 많이 다르다. 예술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현실과 아무런 연관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술적 가상은 예술을 통해 반영된 현실이기 때문이다. 예술 철학자 아서 단토는『무엇이 예술인가』에서 예술을 “깨어있는 꿈(a wakeful dream)”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학술적인 차원에서 단토의 “깨어있는 꿈”을 여기서 논의하는 것은 그리 적절해 보이지 않으니, 그의 용어를 가장 넓은 의미에서 자유롭게 원용해 사용하기로 한다. 지금까지 줄곧 살펴보았듯이, 예술은 비현실적이며 가상적인 것, 달리 말해 꿈을 재현한다. 예술은 꿈이지만, 무의식에 침잠하여 화석화된 환영으로서의 꿈에 머물지는 않는다. 꿈은 현실과는 반대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거듭하여 곱씹어보면, 꿈이 현실과 관계하지 않을 경우 꿈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을 것이다. 꿈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현실에 상응할 때 비로소 꿈인 것이다. 예술은 이러한 꿈을 표상한다. 물론 예술은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술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현실이 변용되어 제시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현실만을 살아가는 존재는 아니다. 현실만이 전부라고 한다면, 인간은 예술이라는 놀이를 할 필요도 없을 터이다. 인간은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동시에 꿈을 꾸고, 이를 예술로 재현한다. 예술은 인간이 원초적으로 처해 있었던 이러한 이중적인 상황을 조형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이 꿈꾸었던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꿈을 꾸는 인간이 살고 있는 이 현실은 또한 어떠한가?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 물음에 답을 줄 수 있는 것은 예술뿐이다. 논리학이나 윤리학은 꿈이 아니라 현실을 다루기 때문이고, 신비로운 영역은 현실에서 벗어난 꿈을 주로 다루기 때문이다. 2019년 모란미술관의 가을 특별전인 <깨어있는 꿈(a wakeful dream>은 특히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관점에서 주목하고 기획된 것이다. 우선 꿈으로서의 예술을 통해 현실과는 또 다른 현실을 미학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상상적 현실 혹은 현실적 상상이 조형적으로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또한 꿈과 현실, 그 사이에서 작동하는 다양한 조형적 상관성에 대한 미적 체험을 통해 예술에서 환기되는 문화적 내러티브를 떠올리게 한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네 명의 작가들(남경민, 보라리, 최수정, 허수영)은 꿈과 현실의 이중주를 감상자에게 조형적으로 들려주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그들 각각의 작품들을 형식과 기법의 측면에서만 바라본다면, 어떤 공통점을 찾아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꿈과 현실 그 사이에서 예술로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한다는 점을 눈여겨본다면, 의의로 적잖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명 작가들의 작업은 감상자를 꿈의 세계로 초대하고, 다시 그 꿈이 지금 여기의 현실과 어떤 식으로 맞닿아 있는지를 감상자에게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남경민은 이번 전시에서 전통 회화에 나타난 꿈과 현실을 현재에서 바라보는 조형적 이미지로 재해석하고, 이를 그려내고 있다. 그의 작업에서 조선 후기의 풍속화와 민화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이미지로 변용되고 표상된다. 평면적 환영으로 가득한 화면은 꿈과 현실의 상관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보라리의 설치 작업에서는 회화와 조각의 이미지가 매우 미묘하게 교차되고 있다. 마치 꿈과 현실의 그물망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의 설치작업은 일상과 예술을 넘나드는 곳에서 감상자의 미적 체험을 이끌어낸다. 최수정은 그 아득한 그 때, 인간이 거주했던 동굴의 이미지를 회화적 내러티브로 전개한다. 그의 내러티브는 회화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그 무엇을 부단히 지시하고 있는 듯 보인다. 꿈과 현실의 관계가 그러하듯이, 그의 회화에서는 표면과 공간의 애매하거나 모순적인 친화성이 재현되고 있다. 허수영의 회화는 '현실’ [자연]을 그린 듯하면서도 '꿈' [미지의 자아 내면]의 이미지를, 그리고 꿈을 그린 듯하면서도 현실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미지는 부분적으로 자연의 풍경이나 자연물에 대한 상응적 지표로 파악될 수 있지만, 화면 전체의 이미지는 모호한 분위기를 이루면서 오롯이 조형적 흔적으로만 감지된다.
예술은 꿈과 현실 사이에 놓여 있는 인간의 본래적인 욕망을 조형적 스펙트럼으로 펼쳐낸다. 예술은 꿈을 표현하지만 꿈속에서만 있을 수 없고, 예술은 깨어있는 지금 여기의 현실을 반영하지만 현실 그 자체일 수는 없다. 예술은 꿈과 현실의 종합이다. 이번 전시는 예술이 재현하는 꿈을, 그리고 그 꿈이 관계하는 현실의 양상을 조망한다. 깨어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잃어버린 꿈들이 예술적 이미지로 다시 돌아온다. 예술의 꿈은 잠자는 동안에 헛되이 채워진 허상이 아니다. 현실의 깨어 있는 그 모든 것들을 표상하고 재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의 산물, 그것이 예술작품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관람자들이 “깨어있는 꿈”으로서의 예술이 주는 감동과 이해의 지평에 서서 꿈과 현실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가기를 바란다.
전시명: 깨어있는 꿈 a wakeful dream
전시기간: 2019.09.24 - 2019.11.24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남경민, 보라리, 최수정, 허수영
전시내용:
"깨어있는 꿈 (a wakeful dream)”으로서의 예술
임성훈(미술비평, 미학 Ph. D.)
예술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예술이 재현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 물음이다. 예술은 과연 무엇을 재현하는가? 미술에서 재현은 본질적인 문제이다. 재현이 무엇인지를 미학적으로 탐구하기란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미술에서 재현이 하나의 방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서양미술의 경우를 보자. 오랫동안 서양미술사의 바탕에 놓여있었던 것은 모방적 재현이었다. 물론 시대와 그 문화적 양상에 따라 다양한 변용이 있기는 했지만, 모방은 미술의 근간으로 간주된다. 르네상스의 원근법과 명암법은 세상을 더 객관적으로 모방하기 위해 고안된 미술 기법이다. 그런데 19세기 말에 이르러 미술에서 하나의 기준이었던 모방론이 흔들리게 된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모방에서 벗어난 새로운 재현이 부단히 시도된다. 20세기 초반의 추상회화와 조각은 대상을 그저 모방하는데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대상의 핵심적인 측면, 그러니까 대상의 본질적인 측면을 재현하고자 한다. 나아가 20세기 중반 이후의 미술은 생각을 적극적으로 재현하기에 이른다. 현대미술의 난해성은 이에 연유한 바가 크다. 미술의 역사에서 자명하게 읽어낼 수 있듯이 재현은 하나의 방식만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모방이든 추상이든 생각을 표현하든지 간에 그 모든 것이 다 재현이다. 예술은 이러한 다양한 방식의 재현을 통해 그 시대의 문화풍경을 반영한다.
재현으로서의 예술은 본래적으로 비현실적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예술에 대해 인정을 하면서도, 그 인정을 그저 비현실적인 측면에서만 하곤 한다. 심지어 예술에 대해 현실을 도피한 유희라고 한갓되게 치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예술이 비현실적이기만 한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예술의 비현실성은 현실이 결코 갖지 못하는 엄청난 힘을 드러내 보여준다. 실상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에서 현실을 감성적으로 직관하고 제대로 인식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예술은 그 자체의 본래적인 비현실성을 통해 우리에게 또 다른 현실을 수많은 형식과 방식으로 재현해낸다. 예술은 불가능성을 통해 꿈을 현시한다. 예술의 불가능성은 현실의 가능성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체험을 주는 특별한 계기이다. 미학자 아도르노는『미학이론』에서 예술적인 체험을 “불가능성을 통해 약속된 가능성에 대한 체험” 이라고 말한다. 자유와 상상력은 예술의 불가능성을 통해 비로소 가능한 것이 된다.
예술적으로 재현된 그 모든 것은 가상이다. 가상이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짜로 나타나는 이미지이다. 그런데 예술에서 볼 수 있는 가상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망상이나 몽상 또는 허상과는 여러 면에서 많이 다르다. 예술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현실과 아무런 연관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술적 가상은 예술을 통해 반영된 현실이기 때문이다. 예술 철학자 아서 단토는『무엇이 예술인가』에서 예술을 “깨어있는 꿈(a wakeful dream)”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학술적인 차원에서 단토의 “깨어있는 꿈”을 여기서 논의하는 것은 그리 적절해 보이지 않으니, 그의 용어를 가장 넓은 의미에서 자유롭게 원용해 사용하기로 한다. 지금까지 줄곧 살펴보았듯이, 예술은 비현실적이며 가상적인 것, 달리 말해 꿈을 재현한다. 예술은 꿈이지만, 무의식에 침잠하여 화석화된 환영으로서의 꿈에 머물지는 않는다. 꿈은 현실과는 반대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거듭하여 곱씹어보면, 꿈이 현실과 관계하지 않을 경우 꿈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을 것이다. 꿈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현실에 상응할 때 비로소 꿈인 것이다. 예술은 이러한 꿈을 표상한다. 물론 예술은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술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현실이 변용되어 제시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현실만을 살아가는 존재는 아니다. 현실만이 전부라고 한다면, 인간은 예술이라는 놀이를 할 필요도 없을 터이다. 인간은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동시에 꿈을 꾸고, 이를 예술로 재현한다. 예술은 인간이 원초적으로 처해 있었던 이러한 이중적인 상황을 조형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이 꿈꾸었던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꿈을 꾸는 인간이 살고 있는 이 현실은 또한 어떠한가?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 물음에 답을 줄 수 있는 것은 예술뿐이다. 논리학이나 윤리학은 꿈이 아니라 현실을 다루기 때문이고, 신비로운 영역은 현실에서 벗어난 꿈을 주로 다루기 때문이다. 2019년 모란미술관의 가을 특별전인 <깨어있는 꿈(a wakeful dream>은 특히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관점에서 주목하고 기획된 것이다. 우선 꿈으로서의 예술을 통해 현실과는 또 다른 현실을 미학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상상적 현실 혹은 현실적 상상이 조형적으로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또한 꿈과 현실, 그 사이에서 작동하는 다양한 조형적 상관성에 대한 미적 체험을 통해 예술에서 환기되는 문화적 내러티브를 떠올리게 한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네 명의 작가들(남경민, 보라리, 최수정, 허수영)은 꿈과 현실의 이중주를 감상자에게 조형적으로 들려주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그들 각각의 작품들을 형식과 기법의 측면에서만 바라본다면, 어떤 공통점을 찾아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꿈과 현실 그 사이에서 예술로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한다는 점을 눈여겨본다면, 의의로 적잖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명 작가들의 작업은 감상자를 꿈의 세계로 초대하고, 다시 그 꿈이 지금 여기의 현실과 어떤 식으로 맞닿아 있는지를 감상자에게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남경민은 이번 전시에서 전통 회화에 나타난 꿈과 현실을 현재에서 바라보는 조형적 이미지로 재해석하고, 이를 그려내고 있다. 그의 작업에서 조선 후기의 풍속화와 민화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이미지로 변용되고 표상된다. 평면적 환영으로 가득한 화면은 꿈과 현실의 상관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보라리의 설치 작업에서는 회화와 조각의 이미지가 매우 미묘하게 교차되고 있다. 마치 꿈과 현실의 그물망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의 설치작업은 일상과 예술을 넘나드는 곳에서 감상자의 미적 체험을 이끌어낸다. 최수정은 그 아득한 그 때, 인간이 거주했던 동굴의 이미지를 회화적 내러티브로 전개한다. 그의 내러티브는 회화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그 무엇을 부단히 지시하고 있는 듯 보인다. 꿈과 현실의 관계가 그러하듯이, 그의 회화에서는 표면과 공간의 애매하거나 모순적인 친화성이 재현되고 있다. 허수영의 회화는 '현실’ [자연]을 그린 듯하면서도 '꿈' [미지의 자아 내면]의 이미지를, 그리고 꿈을 그린 듯하면서도 현실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미지는 부분적으로 자연의 풍경이나 자연물에 대한 상응적 지표로 파악될 수 있지만, 화면 전체의 이미지는 모호한 분위기를 이루면서 오롯이 조형적 흔적으로만 감지된다.
예술은 꿈과 현실 사이에 놓여 있는 인간의 본래적인 욕망을 조형적 스펙트럼으로 펼쳐낸다. 예술은 꿈을 표현하지만 꿈속에서만 있을 수 없고, 예술은 깨어있는 지금 여기의 현실을 반영하지만 현실 그 자체일 수는 없다. 예술은 꿈과 현실의 종합이다. 이번 전시는 예술이 재현하는 꿈을, 그리고 그 꿈이 관계하는 현실의 양상을 조망한다. 깨어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잃어버린 꿈들이 예술적 이미지로 다시 돌아온다. 예술의 꿈은 잠자는 동안에 헛되이 채워진 허상이 아니다. 현실의 깨어 있는 그 모든 것들을 표상하고 재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의 산물, 그것이 예술작품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관람자들이 “깨어있는 꿈”으로서의 예술이 주는 감동과 이해의 지평에 서서 꿈과 현실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