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21세기를 향한 조각의 새 표현전
전시기간: 1990.04.28 - 1990.06.30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야외전시장
참여 작가: 김 윤, 김윤화, 김익태, 김진성, 김홍곤, 류 인, 박상숙, 박희선, 신달호, 심정수, 이연수, 이원경, 장대일, 전항섭, 지경수, 최병민, 최승호, 최종걸
전시 내용:
개관기념 야외조각전에 부쳐
심광현(미술평론가)
1.
최근 들어 미술관 설립이 활발해지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충분치 않지만, 최근의 주제로 본다면 90년대 중반까지는 우리나라에도 나름대로 "미술관 문화"라고 할 만한 틀이 일정하게 자리잡힐 것으로 보인다. 80년대 초반 화랑의 설립이 활발해지다가 80년대 중반 이후 화랑제도의 틀이 잡혀지면서 초보적인 형태로 자리잡히기 시작한 미술 중개기구의 제도화 과정은 미술관 문화의 정착에 의해서야 본격적으로 그 토대가 마련된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90년대에 "미술관 문화"가 일정한 틀을 갖추게 되는 일은 우리 미술계의 내적 발전의 동력에 의해서도 필연적으로 예상되는 일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서는 미술관이라는 존재가 낮설게 여겨지고 있고, 화랑과 미술관의 구별조차 일반화되어 있지 못한 실정이고 보면, 미술관 문화의 정착을 위해 전문가들의 능동적인 노력이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미술관은 그 위상 자체가 상업적인 목표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는 화랑과는 달리 공공적인 성격(순수하게 전시만을 주된 목표로 하는)을 떤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규모가 크고 견실한 재정이 요구되고 있는 만큼, 미술관 문화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경제적 토대가 일정한 단계에 이르지 않으면 안된다.
실제로 선진국의 경우에도 미술관 문화가 꽃피기 시작한 것은 2차대전 이후, 특히 1960년대에 이르러서라고 할 수 있는 바, 그것도 주로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과 육성에 의해 가능해진 일이었다. 그러나 미술관 문화가 한 사회 속에서 성장해 나가기 위해서는 재정적 토대가 견실하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오히려 그와 같은 재정들이 무엇 때문에 “미술관"이라는—— 비생산적이고 사치스러운 취향에 불과해 보이는——시설과 제도의 운영에 투여되는가에 대한 사회성원들의 일정한 합의와 요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초기 단계에 일정한 재원이 충당된다고 해도 그것이 단지 전시효과에 머물 뿐 사회 성원들의 능동적 참여를 유발시키지 못한다면 지속성을 결하게 된다. 이 때문에 미술관의 존립 여부와 미술관 문화의 개화 여부는 결국 재정적 기초가 그 관건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이 공공적인 차원에서 사회성원들의 미술문화에 대한 요구와 필요성이 어느 정도인가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미술관의 발전은 국가나 공공기구에 의한 제도적 설립 자체만으로 촉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미술관의 존재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일정한 성원들에 의해 능동적으로 추동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맥락 속에서 사설미술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주ㆍ객관적인 여건이 불충분한 상황 속에서도 나름대로 일정한 전망을 지닌 개인들에 의해 설립되고 운영되는 사설미술관은 국가에 의한 공립, 또는 국립미술관 보다도 훨씬 능동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으며, 차후 보다 른 규모로 확장될 공립미술관이 견실하게 발전할 수 있는 전문역량과 특화된 관객충을 다져나가는 토대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사설미술관의 존재는 경제적인 이유로 특정의 소수인에게 얽매여 온 미술의 소통기능을 공공적인 차원으로 확대해 나가는 미술 민주화 과정의 개척자적인 전위 라고도 칭할 수 있다. 그리고 사설미술관의 보람과 동시에 현실적인 운영의 어려움은 바로 그와 같은 개척자적인 역할에서 비롯되는 셉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그 운영상의 어려움 이외에도 사설미술관은 사적의 틀에 의해 제한된다는 점으로 인해 언제라도 그 공공적 성격이 파괴될 수 있다는 또 다른 한계를 지닌다. 이를테면 상업적인 틀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대다수 작가들과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 사설미술관은 도심의 공해를 피해 자유롭게 숨설 수 있는 녹지대처럼 보여지게 되나, 언제든지 그 녹지대가 폐쇄되거나 출입을 제한당할 가능성도 항존한다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이런 점들로 인해, 특히 사설미술관의 역사가 매우 일천한 우리나라의 경우, 그것이 현실적으로 미술 민주화, 또는 최대한의 소통을 향한 미술문화의 적극적인 개화의 방향에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을지를 가능할 수 있는 명확한 척도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사설미술관이 가진 장점을 대화하기 위해 창조적이고 개방적인 역량을 지닌 전문미술인들의 동적 참여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참여 속에서 이론적인 전망을 현실화해내는 적극적인 실천 속에서 바람직한 미술관 문화의 토대가 조금씩 쌓여나가리라는 점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
경춘국도변에 신설된 모란미술관은 일단 일상적인 차원에서의 대중적 소통의 場으로 기능하기에는 어렵다는 한계 속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한계 자체가 오히려 사설미술관으로서의 특수한 개성을 더욱 강화시켜주는 입지가 될 수도 있다. 서울-경기-강원 지역을 연결하는 지역미술의 활성화와 공원묘지라는 특성 속에서 움직이는 독특한 미술관 운영이라는 성격은 나름대로 우리 미술문화의 다면적 발전에 기여할 일정한 토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상식적 견지에서 보자면 공원묘지와 미술관의 결합이란 어울리지 않는다. 더우기 미술관이란 기껏해야 “박제화된 미술작품의 공동묘지”에 다름 아니라는, 미술관문화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상기해 본다면, 이와 같은 결합은 애당초 부정적인 모습으로만 비춰질 수 있다. 그러나 문화란 언제나 상식의 틀을 뛰어넘는 데서, 상식의 빈 틈바구니 사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곤 한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누구나 맞게되는 죽음을 마무리하며, 그 죽음을 회고하고 추도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찾을 수밖에 없는 공원묘지는 일상의 번거로움과 가혹함으로부터 벗어나 삶 전체를 차분하게 조망케 해주는 내적 반성의 場으로 기능한다.
여기서는 누구나가 복잡다단한 삶의 의미를 재고하게 되며 그로부터 새로운 삶의 전망을 다져나가기 위해 생각을 가다듬게 된다. 이런 장소에 미술관이 들어선다는 것은 ——그것이 제대로 충분하게 기능하기만 한다면—— 오히려 상업적이고 장식적인 효과에 종속되어 전문적인 미술사의 문맥 속에서 질식되어가고 있는 현대미술을 낡은 삶과 새로운 삶을 반성하고 조망하는 밀도있는 소통의 場으로 이끌어내게 해줄 궁정적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가능성 자체는 단지 하나의 가능성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볼 때, 잘 다듬어진 공원묘지를 찾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 친지의 죽음이란 그들의 부와 권력을 가늠하고 분배하는 계기 정도로 간주될 수도 있는 것이며, 삶과 죽음에 대한 반성이 일상적 삶으로부터의 일시적 도피의 수단으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란미술관은 이런 식으로 죽음의 의미를 부와 권력으로 장식하는 일에 미술품이라는 장식을 더해 일조하는 역할로 한정될 수도 있으며, 삶과 죽음에 대한 형이상학적 몽상의 분위기를 배가시키는 공간으로 기여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미술과 삶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사고 · 능동적인 성찰이 보다 적극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관례적인 장식적 미술품을 전시장으로부터 미술관으로 그대로 옮겨놓는 일 대신, 복합적인 삶의 의미를 새롭게 반추하고 전망할 수 있는 생동하는 작품들을 미술관 공간 속에서 적절히 배치해 낼 수 있는 적극적인 기획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럴 때라야 모란미술관의 새로운 개성이 제자리를 잡게될 것으로 보인다.
3.
이번 개관기념 야외조각전의 의의도 바로 이런 측면에서라야 올바로 측정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조각예술은 매체의 특성상 정태적이며 사물적인 점이 일차적으로 두드러지는 까닭에 여타 예술에 비해 특히 사물화(事物化)의 위험에 직면하기 쉽다. 특히 순수한 조형성, 物性에 대한 탐구라는 논리를 내세워, 조각을 단순한 3차원의 입체들의 형식구성의 차원으로 몰고왔던 추상조각의 경우 그와 같은 위험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비록 전문화된 미술사의 맥락 속에서 모더니즘 미술비평의 "전문언어"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현대조각의 대다수 작품들이 그와 같은 전문언어의 보호망 속에서는 자신에 내재한 사물화의 위험을 은폐할 수 있다해도, 모란미술관 같은 특수한 공간에 놓여지게 될 경우 그것의 박제화된 성격은 직접적으로 노출되고 말 것이다. 특히 삶과 죽음의 첨예한 긴장의 場 속에서는 전문화된 언어의 포장조차 미술관이 미술관 묘지로 전락되는 일을 방지하는 일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모란공원의 미술관에 들어서는 조각작품들은 그야말로 오직 작품 그자체의 내적 긴장 —— 물질적 매체와 작품의 생명력 사이의 —— 에 의해 그 진가를 대중적으로 검증받아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런 검증과정에서는 조각이 단순한 3차원의 물체로 전락하지 않게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의 생생한 소통을 촉진하고, 반영하는 삶의 조각으로서의 활력을 견지하는 작품만이 살아남게 될 것이며, 그럴 때라야 삶과 죽음의 의미를 회고하는 수많은 관객들에게 삶의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의미와 그로부터 솟아나는 활력을 새롭게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21세기를 향한 조각의 새 표현”이라는 전시제목도 바로 이와 같이 物化된 20세기 추상조각의 한계를 넘어서서 역동적인 동시대의 삶과 긴밀히 결합되는 현대조각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려는 시도에 한해 적절한 표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조각형식은 형식 그 자체의 창안에 의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에 대한 새로운 반성을 통해 획득되는 의식전체의 변혁이 함축하는 내용적 힘에 의해 추동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번 전시를 통해 사설미술관으로서의 모란미술관의 올바른 위상이 점검되고, 이 미술관이 장차 우리시대의 삶과 죽음의 복합적인 연관과 의미를 올바로 조망할 수 있는 미술의 적극적 기능을 활성화할 공간으로서 능동적으로 운영되기를 기대해본다.
전시명: 21세기를 향한 조각의 새 표현전
전시기간: 1990.04.28 - 1990.06.30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야외전시장
참여 작가: 김 윤, 김윤화, 김익태, 김진성, 김홍곤, 류 인, 박상숙, 박희선, 신달호, 심정수, 이연수, 이원경, 장대일, 전항섭, 지경수, 최병민, 최승호, 최종걸
전시 내용:
개관기념 야외조각전에 부쳐
심광현(미술평론가)
1.
최근 들어 미술관 설립이 활발해지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충분치 않지만, 최근의 주제로 본다면 90년대 중반까지는 우리나라에도 나름대로 "미술관 문화"라고 할 만한 틀이 일정하게 자리잡힐 것으로 보인다. 80년대 초반 화랑의 설립이 활발해지다가 80년대 중반 이후 화랑제도의 틀이 잡혀지면서 초보적인 형태로 자리잡히기 시작한 미술 중개기구의 제도화 과정은 미술관 문화의 정착에 의해서야 본격적으로 그 토대가 마련된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90년대에 "미술관 문화"가 일정한 틀을 갖추게 되는 일은 우리 미술계의 내적 발전의 동력에 의해서도 필연적으로 예상되는 일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서는 미술관이라는 존재가 낮설게 여겨지고 있고, 화랑과 미술관의 구별조차 일반화되어 있지 못한 실정이고 보면, 미술관 문화의 정착을 위해 전문가들의 능동적인 노력이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미술관은 그 위상 자체가 상업적인 목표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는 화랑과는 달리 공공적인 성격(순수하게 전시만을 주된 목표로 하는)을 떤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규모가 크고 견실한 재정이 요구되고 있는 만큼, 미술관 문화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경제적 토대가 일정한 단계에 이르지 않으면 안된다.
실제로 선진국의 경우에도 미술관 문화가 꽃피기 시작한 것은 2차대전 이후, 특히 1960년대에 이르러서라고 할 수 있는 바, 그것도 주로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과 육성에 의해 가능해진 일이었다. 그러나 미술관 문화가 한 사회 속에서 성장해 나가기 위해서는 재정적 토대가 견실하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오히려 그와 같은 재정들이 무엇 때문에 “미술관"이라는—— 비생산적이고 사치스러운 취향에 불과해 보이는——시설과 제도의 운영에 투여되는가에 대한 사회성원들의 일정한 합의와 요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초기 단계에 일정한 재원이 충당된다고 해도 그것이 단지 전시효과에 머물 뿐 사회 성원들의 능동적 참여를 유발시키지 못한다면 지속성을 결하게 된다. 이 때문에 미술관의 존립 여부와 미술관 문화의 개화 여부는 결국 재정적 기초가 그 관건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이 공공적인 차원에서 사회성원들의 미술문화에 대한 요구와 필요성이 어느 정도인가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미술관의 발전은 국가나 공공기구에 의한 제도적 설립 자체만으로 촉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미술관의 존재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일정한 성원들에 의해 능동적으로 추동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맥락 속에서 사설미술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주ㆍ객관적인 여건이 불충분한 상황 속에서도 나름대로 일정한 전망을 지닌 개인들에 의해 설립되고 운영되는 사설미술관은 국가에 의한 공립, 또는 국립미술관 보다도 훨씬 능동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으며, 차후 보다 른 규모로 확장될 공립미술관이 견실하게 발전할 수 있는 전문역량과 특화된 관객충을 다져나가는 토대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사설미술관의 존재는 경제적인 이유로 특정의 소수인에게 얽매여 온 미술의 소통기능을 공공적인 차원으로 확대해 나가는 미술 민주화 과정의 개척자적인 전위 라고도 칭할 수 있다. 그리고 사설미술관의 보람과 동시에 현실적인 운영의 어려움은 바로 그와 같은 개척자적인 역할에서 비롯되는 셉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그 운영상의 어려움 이외에도 사설미술관은 사적의 틀에 의해 제한된다는 점으로 인해 언제라도 그 공공적 성격이 파괴될 수 있다는 또 다른 한계를 지닌다. 이를테면 상업적인 틀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대다수 작가들과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 사설미술관은 도심의 공해를 피해 자유롭게 숨설 수 있는 녹지대처럼 보여지게 되나, 언제든지 그 녹지대가 폐쇄되거나 출입을 제한당할 가능성도 항존한다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이런 점들로 인해, 특히 사설미술관의 역사가 매우 일천한 우리나라의 경우, 그것이 현실적으로 미술 민주화, 또는 최대한의 소통을 향한 미술문화의 적극적인 개화의 방향에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을지를 가능할 수 있는 명확한 척도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사설미술관이 가진 장점을 대화하기 위해 창조적이고 개방적인 역량을 지닌 전문미술인들의 동적 참여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참여 속에서 이론적인 전망을 현실화해내는 적극적인 실천 속에서 바람직한 미술관 문화의 토대가 조금씩 쌓여나가리라는 점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
경춘국도변에 신설된 모란미술관은 일단 일상적인 차원에서의 대중적 소통의 場으로 기능하기에는 어렵다는 한계 속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한계 자체가 오히려 사설미술관으로서의 특수한 개성을 더욱 강화시켜주는 입지가 될 수도 있다. 서울-경기-강원 지역을 연결하는 지역미술의 활성화와 공원묘지라는 특성 속에서 움직이는 독특한 미술관 운영이라는 성격은 나름대로 우리 미술문화의 다면적 발전에 기여할 일정한 토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상식적 견지에서 보자면 공원묘지와 미술관의 결합이란 어울리지 않는다. 더우기 미술관이란 기껏해야 “박제화된 미술작품의 공동묘지”에 다름 아니라는, 미술관문화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상기해 본다면, 이와 같은 결합은 애당초 부정적인 모습으로만 비춰질 수 있다. 그러나 문화란 언제나 상식의 틀을 뛰어넘는 데서, 상식의 빈 틈바구니 사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곤 한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누구나 맞게되는 죽음을 마무리하며, 그 죽음을 회고하고 추도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찾을 수밖에 없는 공원묘지는 일상의 번거로움과 가혹함으로부터 벗어나 삶 전체를 차분하게 조망케 해주는 내적 반성의 場으로 기능한다.
여기서는 누구나가 복잡다단한 삶의 의미를 재고하게 되며 그로부터 새로운 삶의 전망을 다져나가기 위해 생각을 가다듬게 된다. 이런 장소에 미술관이 들어선다는 것은 ——그것이 제대로 충분하게 기능하기만 한다면—— 오히려 상업적이고 장식적인 효과에 종속되어 전문적인 미술사의 문맥 속에서 질식되어가고 있는 현대미술을 낡은 삶과 새로운 삶을 반성하고 조망하는 밀도있는 소통의 場으로 이끌어내게 해줄 궁정적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가능성 자체는 단지 하나의 가능성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볼 때, 잘 다듬어진 공원묘지를 찾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 친지의 죽음이란 그들의 부와 권력을 가늠하고 분배하는 계기 정도로 간주될 수도 있는 것이며, 삶과 죽음에 대한 반성이 일상적 삶으로부터의 일시적 도피의 수단으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란미술관은 이런 식으로 죽음의 의미를 부와 권력으로 장식하는 일에 미술품이라는 장식을 더해 일조하는 역할로 한정될 수도 있으며, 삶과 죽음에 대한 형이상학적 몽상의 분위기를 배가시키는 공간으로 기여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미술과 삶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사고 · 능동적인 성찰이 보다 적극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관례적인 장식적 미술품을 전시장으로부터 미술관으로 그대로 옮겨놓는 일 대신, 복합적인 삶의 의미를 새롭게 반추하고 전망할 수 있는 생동하는 작품들을 미술관 공간 속에서 적절히 배치해 낼 수 있는 적극적인 기획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럴 때라야 모란미술관의 새로운 개성이 제자리를 잡게될 것으로 보인다.
3.
이번 개관기념 야외조각전의 의의도 바로 이런 측면에서라야 올바로 측정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조각예술은 매체의 특성상 정태적이며 사물적인 점이 일차적으로 두드러지는 까닭에 여타 예술에 비해 특히 사물화(事物化)의 위험에 직면하기 쉽다. 특히 순수한 조형성, 物性에 대한 탐구라는 논리를 내세워, 조각을 단순한 3차원의 입체들의 형식구성의 차원으로 몰고왔던 추상조각의 경우 그와 같은 위험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비록 전문화된 미술사의 맥락 속에서 모더니즘 미술비평의 "전문언어"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현대조각의 대다수 작품들이 그와 같은 전문언어의 보호망 속에서는 자신에 내재한 사물화의 위험을 은폐할 수 있다해도, 모란미술관 같은 특수한 공간에 놓여지게 될 경우 그것의 박제화된 성격은 직접적으로 노출되고 말 것이다. 특히 삶과 죽음의 첨예한 긴장의 場 속에서는 전문화된 언어의 포장조차 미술관이 미술관 묘지로 전락되는 일을 방지하는 일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모란공원의 미술관에 들어서는 조각작품들은 그야말로 오직 작품 그자체의 내적 긴장 —— 물질적 매체와 작품의 생명력 사이의 —— 에 의해 그 진가를 대중적으로 검증받아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런 검증과정에서는 조각이 단순한 3차원의 물체로 전락하지 않게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의 생생한 소통을 촉진하고, 반영하는 삶의 조각으로서의 활력을 견지하는 작품만이 살아남게 될 것이며, 그럴 때라야 삶과 죽음의 의미를 회고하는 수많은 관객들에게 삶의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의미와 그로부터 솟아나는 활력을 새롭게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21세기를 향한 조각의 새 표현”이라는 전시제목도 바로 이와 같이 物化된 20세기 추상조각의 한계를 넘어서서 역동적인 동시대의 삶과 긴밀히 결합되는 현대조각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려는 시도에 한해 적절한 표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조각형식은 형식 그 자체의 창안에 의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에 대한 새로운 반성을 통해 획득되는 의식전체의 변혁이 함축하는 내용적 힘에 의해 추동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번 전시를 통해 사설미술관으로서의 모란미술관의 올바른 위상이 점검되고, 이 미술관이 장차 우리시대의 삶과 죽음의 복합적인 연관과 의미를 올바로 조망할 수 있는 미술의 적극적 기능을 활성화할 공간으로서 능동적으로 운영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