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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전시

프리미티비즘 전

전시명: 프리미티비즘 전

전시기간: 1995.11.18 - 1995.12.20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김부자, 김정헌, 김태섭, 도지호, 박진화, 송  창, 안창홍, 유병훈, 유휴열, 윤석남, 이규완, 이민주, 이  열, 이  환, 이희중, 임미령, 임옥상, 임  효,
               장혜용, 정강자, 정은미, 조현재, 김영대, 박영란, 박희선, 신명덕, 양희태, 윤석원, 이영섭, 정재철

전시내용:


의식과 무의식의 한계를 넘어

프리미티비즘展


  인간은 항상 근원을 이야기한다. 비록 우리가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속에는 '근원'에 대한 동경과 두려움이 담겨져 있다. 태고적부터 되풀이 되어져온 물음인,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라는 명제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그 담론의 형태가 변화되어 다양하게 나타났지만, 그 의미는 언제나 하나로 통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는 존재는 과연 누구이며, 그것의 존재의 의미는 과연 어떤 것일까?

  현대 사회를 지탱해온 것은, 엄밀한 이성(理性)이라는 설계도를 기초로 하는 '합리성' 이라는 장엄한 건축물이었다. 이 건축물은 또한 과학이라는 객관성을 통해 유지되며, 산술이나 법칙화 되지 못하는 부수적인 것들(꿈, 상상, 죽음의 세계 등)은 근대화. 현대화라는 그물망에 걸러져 혼돈이라는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사실상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 세계 내의 다른 동물들과 변별성을 유지해온 것은 집단 생활을 통한 문명의 발전에 있다. 최소한의 생활의 기본 조건을 충족시킨 인간들은, 거기에서 남는 에너지를 사회·문화적인 활동에 쏟았으며, 계속된 진보를 위해 합리성이라는 토대를 기반으로 현대의 세계를 만들었다.

  여기에서 '이성'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개념인 것이며, 모든 현대인들의 사유 지침이 되었다. 또 그를 통하여 우리들의 행위와 그에 따른 실행 방향을 설정하게 되었으며, 그 어느 누구도 전지전능한 이성의 힘을 의심하는 불경죄를 저지르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의 생활 세계에서는 그 이성의 장엄한 벽에 흠집을 내고 허물어뜨리려는 불경한(?) 생각들이 지금 우리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다. 결국 '프리미티비즘' (Primitivism) 이라는 이번 전시의 성격도 그러한 불경스러운 행위의 하나가 될 것이다.

  프리미티브 (primitive)라는 용어는 대략 18-19세기에 걸쳐 고고학, 인류학 등의 활발한 활동을 통해 문화사가들에 의해 명명 되어진 개념이다. 대략적인 뜻은 서구의 발달된 문화에 비해 뒤떨어지는 문명화되지 못한 아프리카 · 아시아·남방 계통의 문화를 지칭하는 것과, 과학적인 원근법이나 해부학이 등장하기시작한 르네상스 이전의 예술, 20세기 초엽의, 입체파와 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러시아 표현주의 향의 화가들을 일컫는다. 특히 마지막 경향은 '프리미티비즘' (Primitivism)이라는 예술사조로 지칭되어 미술사가들의 연구 항목이 되고 있다.

  이러한 초기의 '프리미티브'의 성격과 이번 전시의 성격은 시간적인 간격 외에도 여러 가지 다른 의미를 보여준다. 물론 현재에 사용하는 '프리미티브'가 초기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이제 그것은 서구의 중심으로 편중된 시각이 아닌 독특한 그 자체의 성격 확립으로, 더이상 종속이나 하위의 개념이 아닌 독립적인 개념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 개념이 예술의 흐름에 포괄되어 새로운 미술이 흐름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그 흐름을 구분하면 대략 다음의 세가지로 나뉜다.    첫번째는 전통적인 프리미티비즘의 '원시성' '소박성'·'단순성' 이라는 개념의 확장에 있다. 이것은 현대인들이 가지는 일상적이고 허위 의식적인 측면을 뛰어넘어 진정한 인간의 참모습을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이 공동체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그 공동체를 유지시켜줄 조직과 체계는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조직과 체계의 모토는 '최소한의 억압을 통한 최대한의 행복' 이었는데, 이러한 초기의 의미가 인간사회의 구성 요소들의 다양성과 이질화 경향, 전체와 부분간의 부조화로 인해 그 자체가 억압적인 요소로 남아있게 되었다.

  결국 인간의 행복을 목표로한 조직과 체계는 그 자체가 억압의 요소가 되었으며, 지금까지 인간을 그 조직의 하나의 구성요소, 즉 하나의 나사못에 지나지 않게 만든 것이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감히 현실 생활에서 이루지 못할 꿈과 환상들을 항상 그리워하게 되었으며, 우리의 핏발서고 풀어진 눈동자 뒤편에는 열대의 태양, 깊은 바다 속의 꿈같은 정경들을 그리워하게 된 것이다. 결국 예술은 현실의 법칙과는 다른 자율적인 법칙을 가지고 있으며, 현실에 기반하고 있지만 현실을 항상 뛰어넘는 것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인간의 무의식을 분석하는 경향을 들 수 있다. 특히 이것은 현대의 정신분석학'에 근거하는데, 프로이드, 융, 아들러, 라깡 등에 의해 대표되는 단순한 정신 요법이 아닌 사회 철학의 경향까지도 나타낸 것이다. 즉 '현실 원칙 (reality principle)과 '쾌락 원칙' (pleasure principle) 간의 부조화를 개인의 심리적인 측면에만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사회와 사회, 현재와 과거까지도 그 의미를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무의식은 영역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며, 현실과 전적으로 무관하고, 욕구의 본능적 유희나 쾌락추구에 전념하면서, 논리도 부정도 인과 관계도 모순도 모르는 것이다. 이러한 무의식에 도달하는 왕도는 '꿈'이다. 꿈은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네오지 않기 때문에, 꿈은 상징이 가득 담긴 텍스트가 된다.

  이러한 상징적 텍스트는 모호성으로 가득차 있다. 무의식은 말해야 하는 바를 나타내는 기법이 주로 시각적인 이미지에만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다소 빈약한 것이며, 또한 말에 의한 의미를 종종 교묘하게 바꾸어야 하기 때문에, 꿈이라는 텍스트 역시 비밀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꿈은 상징, 신화 등으로 이어져 우리의 한정된 현실 인식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폭의 확대는 현실을 재구성, 재해석하게 해주며, 욕구와 현실간에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한 개선책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무의식에 대한 이러한 연구는 미술의 시각적인 부분과 연관성을 가지게되기 때문에 다른 여타의 학문보다 더욱 친숙한 것이 된다. 또 이러한 연구 방법은 미술작품이 실제 만들어지는 방식에 대한 의식을 검증할 수 있으며, 그 과정이 의미하는 어떤 것을 밝혀주게 된다.

  세번째는 우리의 토속성과 전통성과의 연관성 문제이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한국성을 이야기함에 있어, 그 조형적인 단서를 선과 색, 형에서 찾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불화, 탑, 사찰의 건축, 수묵화, 산수화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된 조형물들을 그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또한 그 사상적 배경으로는 불교, 유교, 도교, 원시 샤머니즘 등이 있다. 특히 이 중에서 샤머니즘은 다른 사상들의 기반이 되고 있는데, 환웅설화가 기반하는 한민족의 사상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한민족은 그 민족의 특성상 단일성을 토대로 하여 동일한 민족 의식과 생활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사상적 맥락은 불교, 유교, 도교 식의 단일한 믿음 체계가 아니라, 토속신앙과 결부되어 혼재적인 양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외래 문화나 종교가 유입되어도, 곧 융화 흡수되어 우리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 온 것이다. 이러한 융화 흡수의 근본적인 태도는 우리의 원시 샤머니즘에서 기인한다. 원시 샤머니즘은 초기의 애니미즘이나 탄생설화의 단계에서 계속된 발전을 통해 天·地·人의 조화를 중시하는, 즉 하늘과 땅의 결합을 통한 인본주의 사상의 토대가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 민족의 토속적이며 본래적인 사상이 나오는 것이며, 이를 통해 샤머니즘을 기초로한 토속신앙과 전통 문화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융합적인 샤머니즘은 정형화된 예술 작품보다는 오히려 민가의 토기, 낡은 사찰의 기와, 벽 한구석에 붙어있는 민화들에서 그 유래를 찾는 것이 쉬운 일이다. 근대 이후 현대를 통해 서구 문화의 대량 흡수 이후, 우리 문화의 위치가 마치 서구 문화의 들러리 내지는 시간 메우기 식의 어설픈 모양새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것의 회복은 이러한 토속적이며 융합적인 우리 문화의 제 모습을 다시 해석해내는 것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프리미티비즘의 경향은 단순히 원시적이거나 신화적이 아닌 우리의 전통적인 융화 개념에 입각하여야만 이해되는 개념일 것이다.

  이상의 프리미티비즘' 에 대한 고찰이 바로 이번 전시의 경향을 정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정리가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은 충분히 동감할 수 있다. 특히 프리미티비즘'이라는 용어를 자의적으로 해석했다는 느낌도 지울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를 어떠한 완결된 개념의 바탕에 서서 그 정형화된 모습을 기대한다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일 것이다. 90년대의 한국미술이 이전의 양적인 측면을 벗어나 질적인 승화의 단계에 서있다면, 이번 전시는 그러한 연장선상에서만 타당성을 가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미술의 정감은 서구의 문화적 토대나 편협한 한국성의 해석으로는 판단이 되지 않는 시점에 서있다. 즉 더 이상 허공에 맴도는 잡다한 이야기들의 단편들이 아니라, 결국 현재의 우리와 과거의 우리와의 사이에 어떠한 타협점과 공통점을 찾아야만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이번 모란미술관의 '프리미비즘'은 그러한 매개 기능의 한 방식을 제시하는 것이 될 것이다.


김진엽 (미술평론가 / 모란미술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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