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시명: 신화·설화·우화
전시기간: 1992.06.02 - 1992.07.17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구재산, 박경범, 성동훈, 오정교, 이애리, 전종무, 주명우, 최민수
전시내용:
神話·說話·寓話 — 그 담론의 세계와 세계를 보는 작은 창
최태만(기획실장)
마법의 손과 형상의 마력
우리는 미술의 기원이 마법 혹은 신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을 미술의 역사를 통해 확인해 왔다. 고대 원시사회에서 예술이 마법적 도구, 즉 인간집단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필요로 했던 무기로 활용되었던 점을 라스코나 알타미라 등의 동굴벽화에서 유추해내고 있는 것이다. 원시인이 주술적인 맥락에서 행하였던 모방, 유사화, 형상의 마력에 대한 신비적 태도, 집단무의식적 도취, 위장술로 쓰여졌을 마술적 분장, 열광적 춤을 통한 공동체의식의 확인과 사기의 함양 등은 예술의 기원을 설명하는데 설득력있는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연주의적, 일원론적 세계관을 추론케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 마법적 의식이 종교적 행위로 더 나아가 마법자체가 예술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보노라면 예술적 행위에 수반되는 마술적 행위가 환기시켜주는 매력의 역사가 선사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술작품이란 물건의 제작에 얽힌 마법적, 신화적, 전설적, 우화적 담론들은 어느 시대나 지역과 민족을 초월하는 공통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특히 조각의 창작과정과 관련한 가장 극적인 알레고리는 아마 '창세기'에 나오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창조일 것이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은 야훼, 즉 하나님에 의해 흙으로 조소되었다고 구약성서는 전하고 있다. 그러나 흙으로 빚은 그 형상에 창조주가 입김을 불어넣음으로써 비로소 생명체로 육화하였다는 이 내용은 조각작업에 수반하는 마법의 손과 형상의 마력에 대해 아주 시적(的)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많은 조각가들이 자신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물건을 마치 생명이 있는 자식인 것처럼 생각하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좋은 비유가 될 것이다.
이러한 비유의 근원은 또한 토우(土偶)나 토용(土俑), 토템과 우상 등이 야만의 시대에 공공연하게 이루어진 야만적인 의식(儀式)의 일환으로 바쳐졌을 산제물을 대체한 부장품에서 출발한 것이란 점을 고려해 볼 때, 그리고 인간이 절대적인 권능을 지닌 신이란 존재를 인식하면서, 그것의 형상을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과 동일시한 것을 고려해 볼 때, 형상에 대한 인간의 깊은 동경과 경외, 신비감, 재앙의 공포로부터의 해방이란 생존의 수단으로 형상성을 지닌 물건을 만들고 그속에 혼이 깃든 것처럼 여긴 마법의 역사와도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의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과거의 모든 전설적, 신화적 이야기들, 예컨대 봉덕사신종의 주물과정에서 어린이를 제물로 바쳐 비로소 신비로운 범종의 소리를 창조해내었다는 '에밀레종' 이야기나 무영탑(無影塔)과 석공 아사달에 얽힌 애틋한 사랑이야기는 예술작품의 창작과정에 얽힌 신비적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극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예술가의 일거리는 별을 보며 점괘를 뽑아내거나 우주의 운행질서를 예견하는 점성술사나 무로부터 전혀 새로운 금속류를 발명해내는 연금술사 혹은 더 나아가 광기에 사로잡힌 주술사의 행위에 비유되기도 하는 것이다.
신화의 轉化, 새로운 신화의 시대와 신비주의
그러나 예술의 분화가 이루어지면서 과거에는 용맹한 사냥군이자 영매력을 지닌 마술사이거나 솜씨좋은 장인이었던 사람이 이제는 대문자 A로 시작하는 예술가(Artist)로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면서, 즉 서구의 경우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게 되면 이제 예술가는 더이상 염력을 동원하여 자연의 질서를 조정하거나 자연의 재앙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주문을 외고 우상을 숭배하는 마술사 혹은 기술과 기교만을 제공하는 장인으로서가 아니라 소우주의 창조자로서 존경받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인들이 믿었던 우주 (cosmos)의 ‘창조자(Demiurgos)'의 반열로 올라서게 되는데 그 대표적 존재가 바로 미켈란젤로인 것이다. 이 거장의 출현은 이제 새로운 신화의 탄생을 촉발시켰던 바 오늘날 우리가 사회적 통념으로 용인하고 있는 예술가는 곧 천재라는 등식을 그의 생애와 예술이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이러한 등식과 필연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서명(署名)의 카리스마는 천재신화를 강화하고 예술작품의 가치를 보증하는 척도로 작용하였다. 중세시대의 종교지상주의와 비교할 때, 신의 문제보다 인본주의의 탐구에 더 몰두했던 르네상스 시대, 즉 이성과 과학이 존중되었던 이 시기에 근대적 예술가의 전형을 보여주었던 미켈란젤로의 천재신화가 후대에 나타나는 낭만주의적 예술가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도래가 신비적 세계관에 입각한 신화시대의 붕괴 혹은 신비주의에 기초한 예술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던 것은 아니다. 현실을 신비라는 안개로 감싸버리는 경향을 신비화라고 정의한다면 인간의 역사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었을 때, 이 신비화의 흐름은 항상 새롭게 대두되었다. 매너리즘의 거장 엘 그레코에게서 볼 수 있는 카톨릭적 신비주의와 윌리엄 블레이크에게서 두드러진 신비주의, 독일 표현주의의 선배인 뵈클린의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몽환적 신비의 세계 등은 세계관의 동요가 현저하게 일어나고 사회의 소외현상이 격심하게 야기되며, 세기말적 우수와 고뇌가 만연할 때, 경험과 지적 인식활동에 기초한 예술보다 영감, 신비주의, 종말론적 위기의식 등에 뿌리를 둔 신비주의의 부각이 두드러진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사례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화와 신비주의의 묘한 일치점과 변별점을 인식할 수 있는데 그 일치점은 당연히 이 두 개념이 비현실적인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이지만, 차별성을 거론하자면 신화의 경우 단지 소재의 일부로서 형식적 맥락으로 사용될 수 있는 반면 신비주의의 경우 사회적, 정신적 분위기에 더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고대 고전주의 미술을 비롯하여 이른바 후기 현대주의 미술에서 공공연하게 드러나고 있는 신화적 내용은 대개 신화의 몰역사성에 기초한 영원성이란 주제를 형식적 맥락에서 단지 '인용'하거나 '차용'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초월적 세계관을 드러내기 위한 언표행위로 활용되어 현실의 신비화를 강화시키는 경우 고전주의 등에서 볼 수 있는 유미주의, 이상미의 구현을 위한 장치로서의 신화의 차용이란 맥락은 사회적 활동으로부터의 도피, 현실에의 참여란 요청과의 거리두기, 방관자적 관조나 책임회피, 세계를 인식하고 파악하며 개혁하려는 의지보다 파편화와 사물화의 도구와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게 된다는 점을 간과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특히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현실의 신비화가 세계의 불가해성, 행위의 인과에 대한 책임의 회피, 백일몽으로의 잠입 혹은 불가지론 속으로의 도피를 조장하는 경우 그것은 결국 허구를 허구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착종된 허구를 더욱 강화하는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화-그 담론이 주는 재미의 세계
신화나 우화, 전설에의 집착이 현실의 신비화와 물신숭배를 조장하여 결국에는 의식의 사물화와 파편화를 가져온다면 그것은 현실의 진상과 진실의 은폐란 또 하나의 문제만을 노출하는 결과를 낳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속에 내재되어 있는 담론의 세계는 새로운 물건에 대한 게걸스러운 집착이 만연하는 이 물신숭배의 시대를 우화적으로 드러내고 비판하는 긍정적인 측면도 지니고 있음을 나는 주목하고 있다. 나아가 그것이 소통지향적 특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나는 상당한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이 전시회를 지켜보고 있다. 결국 신화의 부재는 곧 인간의 부재를 의미하기 때문에.
신화와 설화, 우화를 주제로 삼고 있는 이 전시회가 그러므로 요설(妖說)로 가득 찬 마술의 세계가 아니라 대화의 궁핍이 만연된 우리 조각을 재미있고 의미심장한 이야기의 세계로 인도해 주기를 기대해 본다.
전시명: 신화·설화·우화
전시기간: 1992.06.02 - 1992.07.17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구재산, 박경범, 성동훈, 오정교, 이애리, 전종무, 주명우, 최민수
전시내용:
神話·說話·寓話 — 그 담론의 세계와 세계를 보는 작은 창
최태만(기획실장)
마법의 손과 형상의 마력
우리는 미술의 기원이 마법 혹은 신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을 미술의 역사를 통해 확인해 왔다. 고대 원시사회에서 예술이 마법적 도구, 즉 인간집단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필요로 했던 무기로 활용되었던 점을 라스코나 알타미라 등의 동굴벽화에서 유추해내고 있는 것이다. 원시인이 주술적인 맥락에서 행하였던 모방, 유사화, 형상의 마력에 대한 신비적 태도, 집단무의식적 도취, 위장술로 쓰여졌을 마술적 분장, 열광적 춤을 통한 공동체의식의 확인과 사기의 함양 등은 예술의 기원을 설명하는데 설득력있는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연주의적, 일원론적 세계관을 추론케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 마법적 의식이 종교적 행위로 더 나아가 마법자체가 예술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보노라면 예술적 행위에 수반되는 마술적 행위가 환기시켜주는 매력의 역사가 선사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술작품이란 물건의 제작에 얽힌 마법적, 신화적, 전설적, 우화적 담론들은 어느 시대나 지역과 민족을 초월하는 공통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특히 조각의 창작과정과 관련한 가장 극적인 알레고리는 아마 '창세기'에 나오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창조일 것이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은 야훼, 즉 하나님에 의해 흙으로 조소되었다고 구약성서는 전하고 있다. 그러나 흙으로 빚은 그 형상에 창조주가 입김을 불어넣음으로써 비로소 생명체로 육화하였다는 이 내용은 조각작업에 수반하는 마법의 손과 형상의 마력에 대해 아주 시적(的)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많은 조각가들이 자신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물건을 마치 생명이 있는 자식인 것처럼 생각하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좋은 비유가 될 것이다.
이러한 비유의 근원은 또한 토우(土偶)나 토용(土俑), 토템과 우상 등이 야만의 시대에 공공연하게 이루어진 야만적인 의식(儀式)의 일환으로 바쳐졌을 산제물을 대체한 부장품에서 출발한 것이란 점을 고려해 볼 때, 그리고 인간이 절대적인 권능을 지닌 신이란 존재를 인식하면서, 그것의 형상을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과 동일시한 것을 고려해 볼 때, 형상에 대한 인간의 깊은 동경과 경외, 신비감, 재앙의 공포로부터의 해방이란 생존의 수단으로 형상성을 지닌 물건을 만들고 그속에 혼이 깃든 것처럼 여긴 마법의 역사와도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의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과거의 모든 전설적, 신화적 이야기들, 예컨대 봉덕사신종의 주물과정에서 어린이를 제물로 바쳐 비로소 신비로운 범종의 소리를 창조해내었다는 '에밀레종' 이야기나 무영탑(無影塔)과 석공 아사달에 얽힌 애틋한 사랑이야기는 예술작품의 창작과정에 얽힌 신비적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극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예술가의 일거리는 별을 보며 점괘를 뽑아내거나 우주의 운행질서를 예견하는 점성술사나 무로부터 전혀 새로운 금속류를 발명해내는 연금술사 혹은 더 나아가 광기에 사로잡힌 주술사의 행위에 비유되기도 하는 것이다.
신화의 轉化, 새로운 신화의 시대와 신비주의
그러나 예술의 분화가 이루어지면서 과거에는 용맹한 사냥군이자 영매력을 지닌 마술사이거나 솜씨좋은 장인이었던 사람이 이제는 대문자 A로 시작하는 예술가(Artist)로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면서, 즉 서구의 경우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게 되면 이제 예술가는 더이상 염력을 동원하여 자연의 질서를 조정하거나 자연의 재앙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주문을 외고 우상을 숭배하는 마술사 혹은 기술과 기교만을 제공하는 장인으로서가 아니라 소우주의 창조자로서 존경받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인들이 믿었던 우주 (cosmos)의 ‘창조자(Demiurgos)'의 반열로 올라서게 되는데 그 대표적 존재가 바로 미켈란젤로인 것이다. 이 거장의 출현은 이제 새로운 신화의 탄생을 촉발시켰던 바 오늘날 우리가 사회적 통념으로 용인하고 있는 예술가는 곧 천재라는 등식을 그의 생애와 예술이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이러한 등식과 필연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서명(署名)의 카리스마는 천재신화를 강화하고 예술작품의 가치를 보증하는 척도로 작용하였다. 중세시대의 종교지상주의와 비교할 때, 신의 문제보다 인본주의의 탐구에 더 몰두했던 르네상스 시대, 즉 이성과 과학이 존중되었던 이 시기에 근대적 예술가의 전형을 보여주었던 미켈란젤로의 천재신화가 후대에 나타나는 낭만주의적 예술가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도래가 신비적 세계관에 입각한 신화시대의 붕괴 혹은 신비주의에 기초한 예술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던 것은 아니다. 현실을 신비라는 안개로 감싸버리는 경향을 신비화라고 정의한다면 인간의 역사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었을 때, 이 신비화의 흐름은 항상 새롭게 대두되었다. 매너리즘의 거장 엘 그레코에게서 볼 수 있는 카톨릭적 신비주의와 윌리엄 블레이크에게서 두드러진 신비주의, 독일 표현주의의 선배인 뵈클린의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몽환적 신비의 세계 등은 세계관의 동요가 현저하게 일어나고 사회의 소외현상이 격심하게 야기되며, 세기말적 우수와 고뇌가 만연할 때, 경험과 지적 인식활동에 기초한 예술보다 영감, 신비주의, 종말론적 위기의식 등에 뿌리를 둔 신비주의의 부각이 두드러진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사례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화와 신비주의의 묘한 일치점과 변별점을 인식할 수 있는데 그 일치점은 당연히 이 두 개념이 비현실적인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이지만, 차별성을 거론하자면 신화의 경우 단지 소재의 일부로서 형식적 맥락으로 사용될 수 있는 반면 신비주의의 경우 사회적, 정신적 분위기에 더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고대 고전주의 미술을 비롯하여 이른바 후기 현대주의 미술에서 공공연하게 드러나고 있는 신화적 내용은 대개 신화의 몰역사성에 기초한 영원성이란 주제를 형식적 맥락에서 단지 '인용'하거나 '차용'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초월적 세계관을 드러내기 위한 언표행위로 활용되어 현실의 신비화를 강화시키는 경우 고전주의 등에서 볼 수 있는 유미주의, 이상미의 구현을 위한 장치로서의 신화의 차용이란 맥락은 사회적 활동으로부터의 도피, 현실에의 참여란 요청과의 거리두기, 방관자적 관조나 책임회피, 세계를 인식하고 파악하며 개혁하려는 의지보다 파편화와 사물화의 도구와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게 된다는 점을 간과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특히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현실의 신비화가 세계의 불가해성, 행위의 인과에 대한 책임의 회피, 백일몽으로의 잠입 혹은 불가지론 속으로의 도피를 조장하는 경우 그것은 결국 허구를 허구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착종된 허구를 더욱 강화하는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화-그 담론이 주는 재미의 세계
신화나 우화, 전설에의 집착이 현실의 신비화와 물신숭배를 조장하여 결국에는 의식의 사물화와 파편화를 가져온다면 그것은 현실의 진상과 진실의 은폐란 또 하나의 문제만을 노출하는 결과를 낳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속에 내재되어 있는 담론의 세계는 새로운 물건에 대한 게걸스러운 집착이 만연하는 이 물신숭배의 시대를 우화적으로 드러내고 비판하는 긍정적인 측면도 지니고 있음을 나는 주목하고 있다. 나아가 그것이 소통지향적 특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나는 상당한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이 전시회를 지켜보고 있다. 결국 신화의 부재는 곧 인간의 부재를 의미하기 때문에.
신화와 설화, 우화를 주제로 삼고 있는 이 전시회가 그러므로 요설(妖說)로 가득 찬 마술의 세계가 아니라 대화의 궁핍이 만연된 우리 조각을 재미있고 의미심장한 이야기의 세계로 인도해 주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