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전시

우리시대의 풍경

전시명: 개관 2주년 기념 우리시대의 풍경

전시기간: 1992.04.05 - 1992.05.31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김산하, 김영덕, 김우한, 박강원, 손장섭, 이청운, 임옥상

전시내용:


우리 시대의 풍경, 그 새로운 정립을 위하여 


최태만(모란미술관 기획실장, 미술평론가)



  화가가 의문을 갖고 작업을 하는 것은 물리적 세계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우리들이 반응하는 것으로서의 자연이다. 화가는 원인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어떤 효과의 매카니즘에 대해 관심을 쏟는다. 그가 문제삼는 것은 하나의 심리학적 문제거리이다. 즉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 하고는 그림자 하나조차도 일치하지 않는데도 그 속에서 설득력있는 이미지를 추출해내는 그런 문제이다.

-E.H.곰브리치, 『예술과 환영』-


풍경화의 역사와 의미


  인간의 눈앞에 생생하게 실재하는 자연의 한 광경을 대상으로 하여 그것을 화폭에 옮겨 그리기 시작한 것은 자연을 미적 대상으로 인식하면서부터 가능해졌다고 할 수 있다. 즉 풍경화가 독립된 장르로 정립되기 이전의 ‘풍경’은 이집트나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의 벽화에서 볼 수 있듯이 단지 영웅적, 신화적, 일화적 주제나 줄거리의 배경으로 삽입되었고, 그 경우 배경으로서의 풍경은 거의 대부분이 양식화된 형태를 띠었던 것이다. 물론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권미술의 경우 오랜 옛날부터 자연을 관조의 대상으로 인식해왔던 결과 육조(六朝)시대에 이미 동양적 자연주의 사상에 바탕을 둔 순수한 감상대상으로서의 산수화를 창출하였고, 구어 시(郭熙)에 이르러 수묵지필(水墨紙筆)을 이용하여 자연의 신비를 산수화로 표현함에 있어서 그 시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정식화한 '삼원법'이 이론적으로 정립되었다.

  그러나 동양권에서 형성된 산수화와 그 역사적 맥락을 달리하는 서구 풍경화의 경우 폼페이에서 출토된 벽화에서 볼 수 있듯이 로마시대에 비로소 그림의 주제에 종속된 배경으로서가 아니라 장식적인 효용이나 감상을 위한 것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풍경화의 경우 여전히 환상과 장식이란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로마시대에 이런 종류의 장식적 회화가 제작될 수 있었던 사회적 배경도 그리스인들과는 달리 현실감각이 뛰어났던 로마인들의 미적취향과 세속적 관심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그리스시대로부터 예술을 자연의 모방(재현)이라고 생각해왔던 서구인들은 그러나 미를 단순히 쾌락적, 감각적인 것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칼로카가티아' 개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선(善)과 동일한 것, 즉 도덕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풍경화를 비롯한 정물화 등의 순수한 감상용의 그림보다 교훈적, 계몽적 그림에 가치를 부여했던 것이다. 더우기 종교가 지배하던 중세시대의 그림이 모두 종교적 교화를 위한 수단으로 제작되었던 만큼, 풍경은 성서나 신화적 내용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서 아주 소극적으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르네상스에 이르러 이차원적 평면에 삼차원적 환영을 부여할 수 있는 원근법, 명암법 등의 표현방법이 개발, 발전됨에 따라 풍경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즉, 평면속에 풍부한 공간감을 불러넣고 색채를 이용해 명암의 효과를 적절히 조절함으로써 생생한 입체감을 재현할 수 있는 방법의 정립은 이전의 그림에서 볼 수 없었던 현실감을 화면속에 부여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화가를 거의 신적(神的) 존재로 보았던 레오나르도의 '만능인으로서의 화가'란 생각은 후대의 화가들의 사회적 지위의 격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그가 정식화한 대기원근법, 선원근법, 색채원근법은 그 자신의 그림속에서도 고양된 형태로 표출되고 있지만, 16세기의 베네치아화파나 17세기의 플랑드르화파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더불어 근대적 의미의 예술가의 전형을 보여주었던 미켈란젤로의 삶과 예술은 이제 화가는 더이상 삽화가로서가 아니라 세계의 창조자로서 존재한다는 이념을 불러 넣었던 것이다.

  로마시대의 벽화 이후, 본격적인 의미의 풍경화는 뒤러 (A.Direr)의 수채화에서 그 흔적을 엿보이다가 1520년경 알트도르프(Altdorfer)가 신화적 줄거리를 배제한 채 풍경 그 자체를 화면에 수용함으로써 탄생하게 된다. 또한 이 시대에 북유럽을 중심으로 유럽에 밀어닥친 종교개혁운동은 종교화의 쇠퇴와 더불어 풍경화, 정물화, 초상인물화 등의 순수회화의 발전을 가속화시켰던 바 알트도르프의 그림에서 볼 수 있던 지지적(地誌的) 풍경화보다 발전된 자연주의적 화풍의 등장을 가져왔던 것이다. 로마 카톨릭교회의 영향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고 상공업의 발달로 일찌기 자본주의적 사회구조를 형성하였던 네델란드 등지에서 자연의 객관적 묘사에 충실했던 반 호이옌(Jan van Goyen)이나 풍경을 극적으로 고양시킨 렘브란트(Rembrandt)와 루이스 달(Jacob van Ruisdael) 등의 뛰어난 풍경화가를 배출하였다는 것은 당대의 시대적, 사회적 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은 신화적 주제와 풍경을 결합하여 이른바 '영웅적 풍경화(Heroische Landschaft)'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푸생(Nicolas Poussin)이나 클로드 로렝 (Claude Lorrain)의 풍경에서나 혹은 이상적이고 영웅적인 경향의 풍경화가 많이 나타나고 있는 이탈리아에 비해 네델란드의 풍경화들이 소박하고 사실적이라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거니와 네델란드 등지의 풍경화가 새롭게 대두한 신흥 부르조아들의 취향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풍경화가 독립된 장르로서 발전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도시풍경을 마치 오늘날의 조감도와도 같이 객관적으로 정확하고 꼼꼼하게 옮겨 그리는 베두떼(Vedute)까지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풍경화의 발전과 분화에도 불구하고 화가들이 눈으로 본 전경을 객관적으로 화면에 재현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아무리 사실적인 풍경화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화가에 의해 선택된 자연의 한 단면에 불과하며 그 선택의 과정에서 화가들의 주관적인 판단과 선입견, 표현의 관습, 재료의 특성에 의해 실재하는 자연은 양식화된 형태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아마 원근법이야말로 이러한 양식화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풍경화의 제작에 임하는 화가들의 태도는 ‘그들이 본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있는 것을 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는 곰브리치(E.H.Gombrich)의 가설은 설득력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양식화의 징후는 프랑스 아카데미즘의 창시자인 르브렁 (Charles Le Brun) 시대에 이르게 되면 현실의 예술적 경향과 배치되는 결과를 낳았던 바 아카데미를 주축으로 한 이상적인 풍경화와 예술적 혁신을 보여주었던 풍경화의 간극은 더욱 심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보수주의적 양식화와 맞선 풍경화의 결정적인 발전은 방돔광장의 나폴레옹 조상(彫像)의 철거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던 쿠르베(Gustave Courbet)가 거의 말년에 그렸던 풍경화나 외광(外光)의 묘사를 시도하였던 콘스타블(John Constable), 그리고 터너(William Terner)의 풍경화에 영향을 받은 인상파 화가들이 나타나면서 이루어졌다.            

자연속에서 느낄 수 있는 순수한 시각적 체험, 즉 빛과 색에 의존한 풍경화의 세계를 개척한 이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서는 물체의 고정된 형상이 빛과 색속에 용해되어 사라지는 경향이 농후했다. 그러나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이들이 외광에서 순수하게 시각적으로 호소하며 다가오는 자연을 표현의 대상으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네(Claude Monet)의 <생 라자르 역>과 야외 무도회를 즐겨 그린 르노아르(Auguste Renoir), 그랑드자뜨에서의 시민들의 휴식을 화폭속에 담은 스라(George Seurat), 햇빛으로 가득찬 파리의 대로(大路)의 인상을 그린 피사로(Camille Pissarro), 그리고 로트렉(Toulouse-Lautrec) 등의 글미에서 볼 수 있듯이 산업화 이후에 새롭게 나타난 현대적 도회의 이미지를 찰나적이고 순간적인 인상으로 표현함으로써 도시적 이미지가 그들 인상주의자들이 추구하던 시각적 진실의 표현에 매우 유효한 소재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인상파 화가들이 비단 자연 속에서만 그들의 회화적 실험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목가적 전원생활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분주한 도시의 새로운 삶의 방식에 매우 적극적으로 반응했다는 점을 밝혀주는 사례인 것이다. 그런데 순간적인 시각적 체험을 화면에 옮겨 그린 인상파 화가들은 그 목적에 있어서는 시각적 인상의 완벽한 재현에 있었다. ㅡ것은 색과 빛의 효과를 좇는 것에 열중한 나머지 형태의 와해를 가져왔던 인상파 화가들에 비해 훨씬 견고한 형상의 세계를 천착하고자 했던 세잔느(Paul Cezanne)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세잔느는 조화있는 화면의 구성을 위하여 '構圖된' 풍경을 그리기를 원치 않았던 것처럼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아카데믹한 소묘방법과 묘사방법을 구사하기를 거부했다. 웅대하면서도 평안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풍경화를 그려내고자 한 그의 뜻은 <생 빅토와르 산>의 풍경에서 빛을 듬뿍받고 있으면서도 명확하고 분명한 형태와 화면의 깊이와 거리감, 공간감이 박동하는 가운데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잔느에 의해 보다 분명해진 '본 것을 진실되게 그린다'는 재현회화의 원리는 20세기에 이르러 거의 소멸하거나 지리멸렬해 지게 된다. 회화의 자율성과 순수한 시각적 본질주의를 추구하는 추상미술에 의해 재현적인 그림의 영향력이 급속히 쇠퇴하는 가운데 풍경화의 위상 역시 현격하게 위축되었던 것이다. 풍경화는 이제 와이어드(Andrew Wyeth)와 같은 사실주의 화풍속에서 향수를 자극하는 자연의 이미지로, 혹은 루소(Henri Rousseau)류의 일요화가들에 의해 신비에 넘치는 몽환의세계, 미지의 풍경에 대한 동경을 자극하는 형태로 그 명맥을 유지하거나 여전히 보수적 복고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아카데미즘 화가들에 의해 다분히 양식화된 진부한 형태를 유지하며 회화의 주변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폴록(Jackson Pollock)이나 로드코(Mark Rothko)와 같은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의 작품이 자연의 이미지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풍경화이기 이전에 추상회화이며, 그것에서 자연의 이미지를 추출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식 역시 자연 속에서 창조의 이미지를 발견하여야 한다는 강박된 심리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시대의 풍경화, 그 복권(復權)을 위하여

  고희동(高羲東)에 의해 서양화기법이 국내에 수입되면서 풍경이 매력적인 주제로 우리나라의 화가들에 의해 즐겨 그려졌었지만, 이미 전통미술에서 진경산수화의 경지를 개척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맥을 유지하지 못했던 것은 큰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기록에 따르면, 이미 고려시대 때 이 녕(李)이 그린 <예성강도>에서 실경을 화폭에 담았던 점을 알 수 있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겸재 정 선(謙齋)이룩한 진경산수화는 한국적 회화세계의 구현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큰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전통이 계승되지 못하고 단절된 가운데 일제시대에 주로 일본에 유학했던 근대화가들에 의해 당시 일본화단에 풍미하고 있던 인상주의 화풍의 풍경화가 국내에 소개되었던 점은 미술언어와 표현의 폭이 매우 협소할 수 밖에 없었음을 반증해주고 있다.

  더욱이 풍경화를 포함한 근대 한국미술의 전개과정이 한 시대의 의식이나 미적 취향, 감수성, 시대적 요청 등과는 관계없이 유미주의로 일관되었다는 점은 한국미술의 발전을 위해서도 반성되고 극복되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서의 풍경을 단지 관조와 장식의 차원으로 그 범위를 위축시켜 현실도피적, 목가적 전원에의 은거(隱居)를 예찬하는 듯한 풍경화의 풍미는 전통회화에 있어서 진경산수의 맥(脈)의 단절만큼이나 심각한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해방과 한국동란의 혼란 이후, 서구 현대미술의 이념과 방법이 국내에 활발하게 소개되면서 보수적 틀 속에 안주해 왔던 풍경화가 점차 미술의 중심으로부터 소외된 결과, 이제 풍경화하면 일요화가들의 사생(寫生)이나 혹은 미술에 입문하는 학생들이 초기에 한번쯤 다루어 보아야 할 과정쯤으로 치부되기에 이른 것이다.

  <우리시대의 풍경>이란 표제로 기획된 이 전시회는 현단계 풍경화가 안고 있는 이러한 문제들을 반성적 필요와 의미에서 고백적으로 포용하면서 90년대 한국미술이 처해 있는 현상황에서 풍경화가 어떤 방식으로 자리매김하여야 하는가를 전망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따라서 이 전시회에서 주제로 설정한 우리시대의 풍경은 보수적 장르개념으로서의 풍경화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우리시대의 미의식을 포괄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영역으로의 확장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풍경을 단지 미적 관조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우리민족의 수난과 고통에 대해 증언하는 것으로서, 나아가 그 역사적 질곡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식을 보여줄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로서 제시하고자 하는 이 일곱 명의 작가들은 그러므로 개별작가들이 지닌 의식과 표현방법의 편차에도 불구하고 넓게는 새로운 역사화의 개념으로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가들에게 이제 풍경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자연대상을 이차원적 평면 속에 삼차원적 환영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으로 재현하는 것, 즉 소재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현실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삶의 현장으로서, 한 작가의 세계관과 예술관이 녹아있는 주제로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터전으로서의 자연과 삶의 현장을 예사롭지 않은 진지한 시각으로 응시하고 그것을 화폭 속에 담아 내고자 하는 이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우리가 그 의미의 깊이를 간파할 수 있을 때 풍경화는 감상적 향수를 자극하는 '과거의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우리자신들과의 소통을 위해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 '현재의 것, 살아있는 것'으로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 전시회에 거는 우리 모두의 기대와 희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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