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개관 1주년 기념 한국 형상조각의 모색과 전망 전
전시기간: 1991.04.28 - 1991.06.30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김병화, 김주호, 김창세, 김홍곤, 도학회, 류 인, 박희선, 배형경, 백윤기, 심정수, 유향숙, 이연수, 이원경, 이종빈, 임영선, 장대일, 최병민,
허위영, 홍순모
전시내용:
한국 형상조각의 모색과 전망
(최태만,기획실장)
[1] 형상조각의 이론과 역사
조각을 포함한 모든 조형예술에 있어서 형상(形象)의 역사는 그 기원 있어서 실재하는 대상과 비슷하게 닮은 것, 즉 재현(再現)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알타미라나 라스코의 동굴벽화가 생존의 수단으로서 먹이의 포획을 위해 그것에 가장 사실적인 정보(지식)에 바탕하여 그 대상을 묘사한 것이듯이 이집트인들은 사자(死者)의 부활을 위해 미이라를 만들고 관 뚜껑에 죽은 자의 생전의 모습을 조각하였다.
그러나 미술에 있어서 재현의 문제가 단순히 실재하는 대상의 외형만을 모방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이스 시대의 재현회화에 있어서 하나의 전설로 내려오던 제욱시스(Zeuxis) 예술의 이상주의적 성격을 당대의 논객이었던 듀리스(Duris)란 사람은 그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뛰어난 미모를 조합하여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창조해낸 것이라고 해석한 바 있으며1), 또한 자기 마음에 그리는 이상적인 여성의 형상을 만들어내려고 하다가 자기가 만든 형상과의 사랑에 빠져버리는 피그말리온의 신화는 미술가의 목적이 단지 하나의 "닮은 초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실물에 필적할 만한 것을 창조해 내려는 것에 있었다는 점을 환기시켜 주고 있다.2) 이런 점을 고려해볼 때, 재현적인 미술이 가진 마술(魔術)의 힘, 즉 환영(illusion)의 마력이 미술의 창작에 있어서 얼마나 비밀스러운 희망과 두려움을 제공해 주었던가 하는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재현미술에 있어서 완벽한 모방이란 언제나 한계를 지니기 마련이다. 이러한 한계를 곰브리치 (E.H.Gombrich)는 매체의 본성에서 야기된 것과 미술제작의 심리학적 과정에 의해 야기될 수 있는 두 가지의 경우에서 찾고자 했다.3)
재현이란 모사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또한 특정한 대상과 똑같을 필요도 없다. 자연계의 모방, 즉 재현작업에 충실하려고 하는 미술가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의 광경을 적절히 옮겨놓고 싶어하기 이전에 자기나름대로의 사물을 창조해내기를 원한다.4) 즉 미술가의 세계는 환각의 세계, 사람의 눈을 속이는 거울의 세계인 것이다.
미술가들이 특정 대상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러한 속임수에 대한 플라톤의 격렬한 비난5)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모방이나 재현, 즉 미메시스(mimesis)는 그리이스인들에게 미적 표현의 규범으로 작용했으며, 궁극적으로는 미와 선의 합일상태인 <칼로카가티아>를 지향했던 것이다."6)
앞에서도 말했거니와 미술에 있어서 재현의 문제는 심리학에서 말하고 있는 심적 장치 (mental-set)7) —기대의 수위 즉,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행사하여 다른 것 보다는 바로 이것을 보거나 듣도록 예비시키는 마음의 자세나 기대를 총괄하는 말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으며, 우리는 재현된 회화나 조각을 볼 때 관습적으로 우리의 기억과 지식, 우리 자신이 각자 소유하고 있는 도식과 선입견을 동원하여 어떤 대상을 그 작품 속에 투사(投射)시킴으로써 그것이 어떤 종류의 내용을 암시하고 있는가를 인지한다. 재현미술에 있어서 형상의 마술적 힘은 바로 이러한 심적 장치와 투사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다.
인간의 외양을 입체적•삼차원적으로 모방하는 조각의 특질 때문에 우리는 조각하면 너무도 쉽게, 그리고 단순하게 아름답고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여체를 연상하거나 세종로에 우뚝 서 있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조각은 으레껏 모델을 보며 소조(彫)한 후 그것을 청동으로 주물을 떠내거나 석고, 합성수지로 주조하지 않으면 흙으로 빚은 것을 그대로 건조시켜 가마에 구워낸 것이란 선입견 속에 안주하도록 만든다.
물론 전통적으로 조각은 흙이나 돌, 나무, 금속 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어떤 대상을 실물과 유사하게' 다듬거나 깎아내는가 하면 조소함으로써 그 대상이 가진 외면적인 특성을 효과적으로 구현하였다. 앞서 말한 바 있듯이 재현에 의한 유사성의 획득은 조각의 발생 근거이자 이유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각은 비단 눈에 보이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만들어내는 것에 국한된 것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관념 속에서 그린 이상적인 형상을 창조해내기도 했다. 조각의 원천은 고대 원시사회의 주술적 목적으로 제작된 형상 속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 막대기에 흠을 내거나 돌멩이나 바위 위에 흔적을 남긴 것에서 조각의 근원을 추론해 볼 수도 있다. 한때 오랫동안 조각은 건축물의 부속 장식물로 존재했었다. 그리이스 · 로마 시대에 본격적인 조각 작품이 전설적인 조각가들에 의해 많이 제작되었다는 것은 그 시대의 요구나 취향이 어떤 것이었던가를 반영해 주는 물적 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리이스 · 로마시대는 물론 조각예술이 번성하였던 르네상스 시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각은 건축물의 열주(列柱)나 광장의 기념적인 조상(彫像)으로 존재했었다. 조각이 독립된 미술 표현의 한 장르로 정착한 역사는 그렇게 길지가 않다.
조각의 건축으로부터의 분리는 조각작품이 미술관이나 화랑속에 전시되면서 가능해질 수 있었다. 그것은 조각이 사회적 · 공리적 기능의 수행으로부터 독립하여 심미적 목적으로 제작되고 유통되는 역사적 전환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조각작품이 전시공간 속에 안치됨으로써 조각은 표현의 자율성을 획득했다.
조각은 삼차원의 예술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촉각예술이란 생각이 보편화된 것도 이 시점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로서의 조각의 특질은 공간 속에 삼차원의 물건 (오브제)을 창조하는 것이다8) 라는 정의는 명백한 진실이다. 그래서 조각의 제특성을 논할 때 공간, 양감, 동세, 질감 등이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는 것이다.
조각이 표현의 자율성을 획득하면서 이제 조각은 단지 대상을 유사하게 옮기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심미적이고 무목적적이며 형식적인 단계로까지 나아가게 되었지만 그 대신에 과거의 조각이 지녔던 좋은 기능은 점차 상실해 갔다. 그것은 다름아닌 대중과의 소통의 단절을 의미한다.
조각에 있어서 자율성의 확보는 조각예술에 대한 새로운 신화를 생산하였다. 즉, 재료에 대한 숭배, 기술적 완결성이 내용을 대체해 버린 지점이 조각 예술의 새로운 지평으로 용인되면서 잃어버린 내용을 재료 자체에서 찾으려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조각의 의미가 재료의 선택과 그것을 다룰 수 있는 기술에 의해 규정되고 조건 지워지는 것처럼 단정해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조각과 공예의 분명한 한계선을 규정해 놓고 있지만 실제로 그 경계가 모호해질 경우가 많다. 과거로 올라갈수록 공예와 조각의 경계는 분명하지 않으며 때에 따라서는 이 두 장르가 서로 뒤섞여 있기도 했다. 과거의 훌륭한 조각가의 작업실은 또한 뛰어난 공예가들의 공방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어떤 조각품에 대해 공예적이라거나 공예작품과 같다고 말한다는 것은 그 조각품을 헐뜯기 위해 온갖 악평을 서슴없이 늘어놓는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조각의 경우 공예적이다 못해 무의미한 재료의 소모, 기술의 낭비에 전념한 전형적인 예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것은 실용성에 바탕하고 있으면서도 '물건'이 주는 독특한 아름다움과 조각적 맛과 의미를 지닌 공예품을 볼 때 느낄 수 있는 감흥마저 주지 못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조각을 독특한 표현의 한 차원으로 만들었으며 마치 조각이 항구적인 장르인 것처럼 정착되게 만들었는가. 제도가 그렇게 만들었다. 제도, 특히 제도 중의 제도인 미술학교와 미술관이 그러한 분리를 부추키고 조각이 영속적인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가르쳤다. 그러나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이 조각 역시 역사적 산물이며 당대의 사회적 요구와 필요, 취미와 가치에 의해 생산된 것임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현대조각은 현대사회의 삶과 생활, 관습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혁명 이후에 가속화된 산업화는 조각의 새로운 재료의 개발과 확산을 자극했으며, 기술문명의 발달은 기계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개념의 조각을 가능하게 했다. 마치 르네상스 시대에 해부학의 발달이 인체조각의 발달을 견인해 내었듯이 과학문명의 발달은 미래주의, 구성주의 조각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동력에 의해 스스로 움직이는 로보트와 같은 조각까지 만들어낼 수 있도록 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조각은 전통적인 관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답보를 반복하고 있는데 미술학교와 미술관이 그 답보를 오히려 조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그러한 제도들은 조각에 대한 제한된 미학적 범주를 정통적인 규범으로 제시하고 그것을 장려하고 걸러내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 조각의 신화를 더욱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기념 조각의 권위를 떠받쳐 주는 높다란 좌대는 미술관 속에 안치될 거룩한 물건'을 받쳐 주는 상석(床石)인 받침대로 바뀌었다. 그럴지언정 그 '거룩한 물건'은 권위적인 기념조각이나 종교적인 성상(聖像)이 지녔던 마력에 버금가는 권위를 획득하고 있다. 그것은 예술이란 이름으로 모셔지고 경배되고 있지만 사회적 의식을 통합하는 매개체로서의 내용을 전달하는 소통매체로서의 기능을 점차 상실해 가고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2] 현대조각의 딜레마
현대조각의 특징은 순수조형에의 탐구이다. 그것은 조각예술 발전의 역사과정속에서 형성된 전통과 관습의 거부를 통해 이루어졌다. 현대조각의 출발에 있어서 그 단초를 로뎅에서 찾을 수 있는 바 그는 물리적 재료를 단지 숙련된 기술과 개성으로 주어진 대상을 효과적으로 재현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재료 자체가 의미를 지닌 매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조각작품이 재현적인 것으로부터 추상적이고 구성적인 것으로 변화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를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현대조각은 인상적인 재현이나 주어진 대상에 대한 정확한 묘사를 창조적이기보다는 고답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실험적이고 추상적인 형태의 아름다움을 중요시하며 나아가 재료 자체가 환기하는 정서적 쾌감에 더 비중을 두고자 하는 조각가들에 의해 이끌어졌던 것이다.
페프스너, 아르프, 가보 등의 구조적, 구성주의적 조각과 피카소-뒤샹의 기성품, 브랑쿠지, 아르키코, 타틀린 등의 조각은 조각예술의 이념의 변화를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페프스너가 구성적 조각을 통해 힘에 넘치는 구조를 보여준 반면에 브랑쿠지, 아르프 등의 절대적 구성주의 조각은 데이비드 스미스(David Smith)의 추상적 · 미니멀리즘과도 연결되고 있다. 재현과 모방으로부터 구성과 구조, 추상적인 입방체나 유기적 형식으로의 전환은 헨리 무어와 같은 절충적 형식을 낳으면서 모더니즘 조각의 최후의 단계인 '최소한의 구조(A·B·C Structure)'로까지 발전하여 매체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제시하고자 하는 지경에 도달하였다. 쥬드(Donald Judd)나 솔 레윗 (Sol Lewitt), 안드레 (Karl Andre)의 이른바 미니멀 조각은 물리적 대상(object) 자체의 가시성만을 제시함으로써 조각에 대한 의미의 부여와 추론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재현으로부터 형식으로, 나아가 물건자체가 가진 성질의 제시에 이르는 과정을 '예술에 대한 사랑'의 개념의 변천으로 보고 있는 아래의 도식은 서구 조각사의 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9)
마르셀 뒤샹의 <변기>가 칼 안드레의 <융탄자/덮개 >10)나 도날드 쥬드의 기계적이고 몰개성한 입방체의 제시로까지 발전한 것을 막연히 서구미술사의 '진보의 도식'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니멀리즘의 물자체에 대한 거의 광적인 집착은 상대적으로 조각의 빈곤과 결핍을 초래했던 것이다.
현대조각의 이러한 막다른 지점에 대한 불안과 아카데미즘과 절충주의 조각의 상업주의에 분노한 조각가들은 이제 그들이 다루고자 하는 재료를 자연이란 무한한 공간 속에서 찾고자 했다. 이른바 '대지예술'로 불려지는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조각영역의 확장'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서구 문화도식의 빈곤성을 오히려 드러내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대지예술이 풍경과 건축의 중성지대에서 논리적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그의 주장은 조각영역의 확장이라기보다는 조각 개념의 해체에 가깝다.11)
그 해체 또한 문화적 당위성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는 해체 자체를 위한 해체이며 출구가 없는 미망의 땅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 헛된 노력에 불과한 것이다.
서구 현대조각이 대지예술에서 바야흐로 진퇴양난에 처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최근의 포스트 모더니즘 조각을 통해 엿볼 수 있다. 포스트 모던한 조각은 현대조각의 위기를 깨닫고 갑자기 과거로 선회하여 미술사 속의 각종 자료를 참조하는가 하면 그것을 번안 · 복합하며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부심하고 있는 것이다.
[3] 한국조각의 비평적 시각
서구 현대조각의 질곡은 곧바로 서구사회가 안고 있는 문화적 위기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새로움에 대한 부단한 요구와 문화적 우월의식의 신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갈등을 심화시키는 가운데 그들은 점차 자신들의 고갈과 빈곤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현대조각의 빈곤은 한국에서 예외일 수 없으며 오히려 더욱 심화되었다고 지적할 수 있는데 그 이유를 먼저 한국조각이 지닌 언어와 표현의 좁은 세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현대조각이 전통조각(대체로 불상조각에 국한된 것이지만)과의 연계선을 상실하고, 그나마 제한된 표현의 영역에 안주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우리는 현대조각의 여명기인 일제 식민통치시대의 불행했던 상황을 빌어 그 책임을 회피할 때가 많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도 최초의 근대적인 조각가였던 김복진(金復鎭)은 일본을 통해 근대조각을 습득했고, 그것을 뛰어넘기에는 개인적 역량에서나, 시대적 상황에서나 무리였음에 틀림없다.12) 김복진 이후 김종영, 윤승욱, 김경승, 윤승중, 윤효중, 권진규 등의 조각가에 의해 근대조각으로부터 현대조각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확보되었다고 할지라도 근대성에 대한 뚜렷한 자각과 사회적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현대성을 구현할 수 있는 조각을 기대하기는 힘든 것이다.13)
어쨌든, 한국 현대조각의 역사를 김복진으로까지 소급한다고 하더라도 그 시간은 대략 60여년 남짓밖에 되지 않으며, 그나마 고답적이고 진부한 상투적 인체조각을 통해 모호한 휴머니즘이나 감상주의를 자극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조각이 태동기로부터 빈곤의 운명을 상속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70년대의 미니멀리즘 이후 8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조각은 분명히 변화의 조짐을 보여 주었다.
과거의 조각에 있어 형태나 재료 사용이 안으로 응축되고 자기충족적이며 작품 자체의 완결성을 지향했던 반면에 80년대 들어 등장하기 시작한 조각의 새로운 기류는 훨씬 개방적이며 연극적 • 연출적일 뿐만 아니라 회화적인 특성까지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70년대의 미니멀 조각에 이르기까지 한국조각은 대부분 소재주의, 재료에 대한 물신숭배적 집착, 완벽하리만치 정교한 기술에 의한 완결성의 추구 등이 중요한 특징을 이루고 있었다. 예컨대 순수기하학주의라 할 수 있는 대부분의 미니멀 조각은 재료를 거의 극단적으로 곱게 다듬어 놓음으로 해서 마치 공장에서 기계로 찍어낸 제품처럼 몰개성한 특징을 보여 주었는데 이러한 작품이 마치 상표 (trade-mark)처럼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던 경우가 그렇다. 혹은 구태의연한 인체조각에 마치 생명력을 불러넣기라도 하듯 무의미한 동세를 가하거나 묘한 인간애를 불러 일으키는 군상(群像)-그 대표적인 예가 모자상(母子像)이다-을 통해 감상적인 휴머니즘을 강변하는가 하면 재료 자체의 특성인 표면의 질감이나 무늬, 조각가의 작업 흔적을 최대한 배제하려는 배려가 두드러진 물질에 대한 주목 등을 통해 조각에 심각한 철학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위장하려 했던 것이다. 빈곤을 감추고 싶어한 결과 도식적 방법의 반복에 호소하면서도 철학의 안개를 덮어 씌운 것이 오히려 조각예술의 올바른 전개를 가로막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왜곡된 양상은 조각에 대한 개념을 정체적인 관습의 법칙 속에 가두어 버린 한계도 지니고 있었다. 그 한계의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재료의 개발에 별로 주목하지 않고 전통적인 재료를 끊임없이 사용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미술관은 동일하거나 유사한 재료가 유사한 형태와 형식으로 열병해 있는 물건들의 종점이 되어버린 것이다.
80년대 조각은 과거의 조각이 지닌 한계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것 또한 분명하게 단정할 수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외면적으로 80년대 조각이 과거의 그것에 비해 훨씬 다양해진 것은 사실이다. 조각에 대한 개념이 변화하고 다양한 조각이 발표될 수 있었던 것은 과거의 조각의 빈곤성에 대한 반작용이 큰 구실을 했겠지만 무엇보다 미술대학의 확충에 따른 조각인구의 증가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80년대란 한 시대가 과거와 완전히 단절된 불연속의 시간속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조각과 비교해 볼 때 다음과 같은 변화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70년대의 미니멀리즘 조각에 이르기까지 한국조각은 대체로 단일한 재료에 의한 완결을 추구했던 반면 후배세대인 80년대 조각가들은 이질적인 재료의 결합에도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둘째, 과거 조각의 형태. 형상이 통일성 · 단일성을 유지한 전통적 • 규범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 반면에 80년대 조각은 연극적이며 연출적인 상황 속에 작품을 설치하는가 하면 설치 자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간주하려 하고 있다.
셋째, 조각에 있어서 메시지의 전달이란 문제가 새롭게 대두되었다.
넷째, 주제의 폭이 다양한 면으로 확산되었다.
다섯째, 전통적인 물건에 대한 주목이 두드러지고 있다.
80년대 조각의 양상에 대한 이러한 도식적인 정리가 그것의 흐름을 정당하게 기술하는데 장애가 될 지도 모르지만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것을 더 크게 내용적인 측면과 형식적인 측면으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은 잠정적인 특징을 추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내용적인 맥락에서 볼 때, 앞세대가 작품에 내용을 담는 것을 거부하거나 최소한의 형태 속에 동양사상이나 한국적 정서라는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인 내용을 담고자 했다면, 후세대는 내용을 오히려 강화하고자 했던 측면이 두드러진다. 그속에는 사회적 주제의식으로부터 개인의 실존적 고뇌와 자의식의 반영, 토속적인 민간신앙에의 회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문화에 대한 고발, 문명비판, 과거의 전통에 대한 향수등이 서로 중첩되거나 강렬하게 드러나고 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통일적인 구조와 형태적인 일목요연함보다는 해체적이란 점이 두드러진다. 그래서 과거의 조각이 무겁고 규범적이며 조각의 관습에 충실한 것이라고 한다면 80년대의 조각은 가벼운 것이고, 복합적이며 내용에서든 형식에서든 복잡한 양식과 주제가 혼재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보다 세분해 볼 때 다음과 같은 분류가 가능할 것이다.
①사회적 이념을 강렬하게 반영하고 있는 조각 민족 민중미술 진영의 조각가의 작품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80년대 한국미술의 전개에 두드러진 역할을 담당한 <현실과 발언>에서 활동했던 심정수 · 이태호와 최근의 <조소패 흙〉등 주로 <민족미술협의회>를 통해 활동하고 있는 조각가들의 작품을 들 수 있다.
② 인간의 실존상황, 심리적 고백, 현대사회에서의 인간소외 등을 통해 인간성 회복을 열망하는 조각-홍순모 · 임영선 · 류인 · 배형경 · 김광진 • 황현수 • 김영원 · 도학회 · 최병민 • 허위영 등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인간에 대한 해석, 인간을 주제의 중심으로 놓고자 하는 입장은 80년대 한국조각의 흐름에 있어서 가장 많이 다루어지고 또 그런만큼 관념적인 한계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홍순모의 웅크린 인간들의 군상은 표현주의적 조각의 비극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으나 그것보다 더 나아가 현실에 주눅이 든 소시민의 왜소한 삶을 묘사해 줌으로써 오히려 현실성을 획득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인간성 회복이란 문제는 많은 작품의 주제로 사용되고 있는 만큼 모호한 것임에 분명하다. 이 주제는 때로는 사회의식과 만나며 신선하고 진보적인 미래에의 전망을 제시해 주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이 인간이 처한 한계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좌절하고 마는 인간을 과장스럽게 표현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③ 포스트 모더니즘적 조각
80년대 한국조각의 주종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이 범주에 편입할 수 있는 조각가는 숫적으로나 발표한 작품의 양으로나 엄청난 규모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개념이 마치 불가사리처럼 사용되어서 무엇이든 먹어치울 수 있는 왕성한 식욕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많은 조각가들이 이 범주에 편입시키는 것을 꺼리거나 주저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에서 볼 수 있는 탈장르 개념에 따라 <메타복스>나 <난지도>의 몇몇 작가를 이 분류 속에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신화적• 고고학적 •원시미술적 · 문명사적 주제를 다루고 있는 조각가들 (신현중•윤영석 · 김관수 · 윤근병 · 박상숙 「그의 작품은 포스트 큐비즘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 도흥록 · 원인종)을 포함하여 전통적인 조각의 형식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나름대로 내용을 추구하고 있는 작품 역시 이 분류항 속
에 넣을 수 있다.
80년대 조각의 현 단계를 논할 때 두드러진 특징을 들라면 전통적인 장르 개념의 해체를 꼽을 수 있다. 이제 회화니 조각이니 하는 개념은 입체와 평면, 설치 등의 개념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작품받침대로부터의 해방, 전시공간 자체를 작업의 공간으로 설정하고 그 속에 의미를 담고자 하는 설치예술의 확산, 다양한 재료의 활용 및 결합 등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조각작품이 모더니즘 조각에서 볼 수 있던 특징들로부터 크게 벗어나거나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장르의 확산과 해체가 조각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고 할지라도 그것 또한 변화하는 시대를 반영하는 필연성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 과거의 한국적 모더니즘 조각이 보여 주었던 갑갑함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내적 요청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민족 민중미술론과 모더니즘의 극복을 위한 대응논리로 제안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서구적 사고와 발상, 그 사회의 요청에 부응한 문화적 뿌리 찾기에 불과하다는 점은 분명히 인식되어야 한다.
④ 한국적 원초성에 대한 직역(譯) 혹은 그것의 형상화로서의 조각-80년대 한국조각의 흐름에 있어서 '한국성 찾기'는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 것이 사실이다. 특히 불교적 형상의 번안, 민속 조각에 대한 주목 등은 조각 예술의 표현의 영역을 넓히고 풍부한 문화적 전통 속에서 양식적 정체성(identity)을 찾고자 하는 생각들을 자극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장승• 솟대 • 문인석 · 불상 • 동자상 등의 전통적인 '물건'들이 문화사적 맥락에서 인용되기도 했다. 황지선 · 박상희 · 최옥영 · 한진섭 • 김창세 등은 한국적 형상의 원형(原形)과 감수성을 찾고자 했던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또한 형식적으로 추상조각의 정통성을 완전하게 탈각한 것은 아니지만 조각의 관습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한국적 원초성을 찾고자 하는 전항섭, 압축과 긴장이란 방법을 통해 조각작품의 언어를 내적으로 응축시키면서도 구상적 형상과 추상적 조형의 적절한 활용에 역사의식을 불어 놓고자 하는 박희선 등의 작품도 이러한 문제의식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특히 분명하고 다소 도전적인 전시명칭 아래 동일한 주제의식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조각가들이 매년 새롭게 모이고 있는 <한국성 -그 변용과 가늠전>과 같은 전시회나 기왕에 해체되었지만 '분단'이란 민감한 주제를 내걸고 전시회를 개최한 바 있는 <마루전> 등의 활동은 기억할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적 원조성에 대한 검토가 자칫 전통적인 물건의 복제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거나 단순히 소재주의나 작위적 기안적 차원에 머물러 버린다면 그것은 새로운 물신숭배 (fetishism)를 조장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이러한 한계의 징후는 전통적인 민속조각이나 종교적 • 민간신앙적 물건들이 본래 가졌던 장소를 떠나 미술관 속에서 설치될 때 그것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유산에 대한 문화적 접근은 내용과 형식의 편협함을 면치 못하고 있는 우리 조각예술의 빈곤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지속적으로 시도되어야 할 것이다.
[4] 왜 형상조각인가?
이상의 논지에서 볼 때 80년대 이후 한국조각의 언어가 확장되고 표현의 세계가 다양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것은 곧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러나, 조각의 역사를 들추어보면 그속에는 내용과 형식이 중층적이고 다양했던 시대가 분명히 있었으며, 또 그런 시대의 조각이 힘을 지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힘을 지탱시켜 주었던 것이 '형상'이었으며 그 형상은 인간에 대한 탐구로부터 출발하고 있음을 환기해 둘 필요가 있다. 비록 단일한 재료를 사용하여 어떤 구체적 형상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고 할지라도 조각에도 회화처럼 어떤 연극적인 요소가 충분히 설정할 수 있으며, 그림과는 다른 조각적 긴장을 유도해냄과 더불어 풍부한 내용을 담지할 수 있다.
조각은 물질을 숭배하고 그것에서 심리적 위안을 받으려는 것에서 힘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폭넓은 소통의 세계를 펼쳐보일 수 있는 지점에서 비로소 그 진정한 힘을 분출한다. 원시 고대문명이나 중세의 도상(icon) 미술, 르네상스뿐만 아니라 우리의 중세문화, 근세의 민중문화 속에는 풍부한 형상의 세계가 대중적 소통이란 사회적 맥락 속에 존재했었다. 이러한 형상세계가 지닌 소통의 힘에 대한 주목으로서 이 전시회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물론 구체적인 대상을 드러내는 재현의 세계가 조각예술의 유일한 모범답안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 전시회가 한국 형상조각의 전체상을 보여준다거나 그 대표성을 부여받고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며, 일여년에 걸친 준비와 계획의 수정·보완기간 동안 유사한 성격의 전시회가 마치 소문처럼 무성했다가 사라지는 것도 목격했다.
이 전시회에 출품하고 있는 작가들 - 연령별로 보면 30대 초반의 신진작가로부터 자신의 형상세계를 일정정도 구축하고 있는 중견작가에 이르기까지, 작업의 성향별로 분류하자면 역사적 주제의 환기, 형상의 자성에 대한 탐구, 초현실주의적 어법의 활용, 사회의식의 표출, 종교적 내면세계의 성찰로부터 전통적이고 교과서적인 조각에 이르기까지 그 표현의 편차는 더욱 크고 다양하다.
이렇게 각자의 형상세계를 꾸려가고 있는 조각가들을 연결할 수 있는 최소한의 매개고리로써 필자는 아래와 같은 원칙을 설정한 바 있다.
첫째, 분명한 내용과 주제의식
둘째, 주제를 구현해 낼 수 있는 개별적 역량(재료에 대한 연구와 기술적 숙련)
셋째, 소통의 지향
그리고 마지막으로 야외조각 제작의뢰를 수용할 수 있는가.
설정된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그 결과의 승패를 떠나 값진 것임에 분명하며, 비록 이 전시회가 출품작가 개개인이 애초에 품었던 의욕과 열정, 기대에 미치지 않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미완성의 지도를 이제 막 그리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행보의 시발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부분적으로는 이 전시회가 한국의 형상조각, 그것도 주로 젊은 조각가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형상세계의 한 단면에 대한 등고선과 위도 / 경도를 그었다는 의미에서 보다 세밀한 교통로와 보다 분명한 독도법의 개발이란 숙제를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1) L. 벤투리, 미술비평사, 김기주 역, 문예출판사, p.55.
2) E.H. 곰브리치, 예술과 환영, 차미례 역, 열화당, p.115.
3) 앞의 책, p.116.
4) 앞의 책, p.139.
5) 플라톤은 화가와 목수를 비교하며 목수가 현상의 본질인 '이데아'를 모방하여 어떤 대상을 만들어내는 반면, 화가는 그 이데아의 모방을 그림으로 다시 모방하는 존재이므로 철학자가 통치하는 '이상국가'로부터 화가를 추방하고 있다. (플라톤, 국가론 참조)
6) A.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고대 • 중세편, 백낙청외 역, 창작과비평사, p.83, 100.
7) E.H. 곰브리치, 앞의 책, pp.402~403.
8) Herbert Read, The Art of Sculpture, Princeton Univ.Press, p.46.
9) Carla Gottlieb, Beyond Modern Art, Dutton Press, p.32.
10) 칼 안드레는 <37조각의 작업>이란 제목아래 1970년 구겐하임미술관에 정방형의 알루미늄, 동판, 가죽, 마그네슘, 철판조각을 마치 서양장기판(혹은 융탄자처럼 단순반복적으로 설치한 바 있다.(C. Gottlieb, Beyond Modern Art 참조) 또한 그의 벽돌조각을 설치해 놓은 작품이 영국의 테이트갤러리에 의해 소장되자 세간의 격론을 야기하기도 했다. (Suzi Gablik, Has Modermism Failed? 참조)
11) 로잘린드 크라우스, 조각영역의 확장, 현대미술비평 30선 수록, 중앙일보, 참조.
12) 박용숙, 한국 현대조각의 역사와 그 문제점, 예술의 전당 미술관 개관기념전 도록, pp.6∼7.
13) 앞의 글에서 박용숙은 서양사의 문맥에서 볼 때 현대적인 것은 근대적인 체험의 반성이나 수정에서 얻어지기 때문에 근대적인 체험이 없는 곳에 현대적인 실험이 성공한다는 것은 하나의 기적일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서구에 있어서 근대성의 구현은 계몽주의의 합리성, 산업혁명에 의한 산업화와 프랑스 대혁명에 의해 획득된 시민정신 등에 의해 가능했으나, 이러한 것을 우리 문화에 도식적으로 대입시킬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근대화의 기회를 일제 식민통치에 의해 박탈당한 가운데 봉건 왕조체제로 부터 식민지배, 해방과 분단 등의 격변을 겪는 과정에서 근대적 체험의 기회마저 갖지 못한 채 해방 이후 서둘러 현대화의 박차를 가한 나머지 역사발전의 정상적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의 논리는 수긍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시명: 개관 1주년 기념 한국 형상조각의 모색과 전망 전
전시기간: 1991.04.28 - 1991.06.30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김병화, 김주호, 김창세, 김홍곤, 도학회, 류 인, 박희선, 배형경, 백윤기, 심정수, 유향숙, 이연수, 이원경, 이종빈, 임영선, 장대일, 최병민,
허위영, 홍순모
전시내용:
한국 형상조각의 모색과 전망
(최태만,기획실장)
[1] 형상조각의 이론과 역사
조각을 포함한 모든 조형예술에 있어서 형상(形象)의 역사는 그 기원 있어서 실재하는 대상과 비슷하게 닮은 것, 즉 재현(再現)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알타미라나 라스코의 동굴벽화가 생존의 수단으로서 먹이의 포획을 위해 그것에 가장 사실적인 정보(지식)에 바탕하여 그 대상을 묘사한 것이듯이 이집트인들은 사자(死者)의 부활을 위해 미이라를 만들고 관 뚜껑에 죽은 자의 생전의 모습을 조각하였다.
그러나 미술에 있어서 재현의 문제가 단순히 실재하는 대상의 외형만을 모방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이스 시대의 재현회화에 있어서 하나의 전설로 내려오던 제욱시스(Zeuxis) 예술의 이상주의적 성격을 당대의 논객이었던 듀리스(Duris)란 사람은 그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뛰어난 미모를 조합하여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창조해낸 것이라고 해석한 바 있으며1), 또한 자기 마음에 그리는 이상적인 여성의 형상을 만들어내려고 하다가 자기가 만든 형상과의 사랑에 빠져버리는 피그말리온의 신화는 미술가의 목적이 단지 하나의 "닮은 초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실물에 필적할 만한 것을 창조해 내려는 것에 있었다는 점을 환기시켜 주고 있다.2) 이런 점을 고려해볼 때, 재현적인 미술이 가진 마술(魔術)의 힘, 즉 환영(illusion)의 마력이 미술의 창작에 있어서 얼마나 비밀스러운 희망과 두려움을 제공해 주었던가 하는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재현미술에 있어서 완벽한 모방이란 언제나 한계를 지니기 마련이다. 이러한 한계를 곰브리치 (E.H.Gombrich)는 매체의 본성에서 야기된 것과 미술제작의 심리학적 과정에 의해 야기될 수 있는 두 가지의 경우에서 찾고자 했다.3)
재현이란 모사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또한 특정한 대상과 똑같을 필요도 없다. 자연계의 모방, 즉 재현작업에 충실하려고 하는 미술가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의 광경을 적절히 옮겨놓고 싶어하기 이전에 자기나름대로의 사물을 창조해내기를 원한다.4) 즉 미술가의 세계는 환각의 세계, 사람의 눈을 속이는 거울의 세계인 것이다.
미술가들이 특정 대상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러한 속임수에 대한 플라톤의 격렬한 비난5)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모방이나 재현, 즉 미메시스(mimesis)는 그리이스인들에게 미적 표현의 규범으로 작용했으며, 궁극적으로는 미와 선의 합일상태인 <칼로카가티아>를 지향했던 것이다."6)
앞에서도 말했거니와 미술에 있어서 재현의 문제는 심리학에서 말하고 있는 심적 장치 (mental-set)7) —기대의 수위 즉,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행사하여 다른 것 보다는 바로 이것을 보거나 듣도록 예비시키는 마음의 자세나 기대를 총괄하는 말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으며, 우리는 재현된 회화나 조각을 볼 때 관습적으로 우리의 기억과 지식, 우리 자신이 각자 소유하고 있는 도식과 선입견을 동원하여 어떤 대상을 그 작품 속에 투사(投射)시킴으로써 그것이 어떤 종류의 내용을 암시하고 있는가를 인지한다. 재현미술에 있어서 형상의 마술적 힘은 바로 이러한 심적 장치와 투사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다.
인간의 외양을 입체적•삼차원적으로 모방하는 조각의 특질 때문에 우리는 조각하면 너무도 쉽게, 그리고 단순하게 아름답고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여체를 연상하거나 세종로에 우뚝 서 있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조각은 으레껏 모델을 보며 소조(彫)한 후 그것을 청동으로 주물을 떠내거나 석고, 합성수지로 주조하지 않으면 흙으로 빚은 것을 그대로 건조시켜 가마에 구워낸 것이란 선입견 속에 안주하도록 만든다.
물론 전통적으로 조각은 흙이나 돌, 나무, 금속 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어떤 대상을 실물과 유사하게' 다듬거나 깎아내는가 하면 조소함으로써 그 대상이 가진 외면적인 특성을 효과적으로 구현하였다. 앞서 말한 바 있듯이 재현에 의한 유사성의 획득은 조각의 발생 근거이자 이유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각은 비단 눈에 보이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만들어내는 것에 국한된 것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관념 속에서 그린 이상적인 형상을 창조해내기도 했다. 조각의 원천은 고대 원시사회의 주술적 목적으로 제작된 형상 속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 막대기에 흠을 내거나 돌멩이나 바위 위에 흔적을 남긴 것에서 조각의 근원을 추론해 볼 수도 있다. 한때 오랫동안 조각은 건축물의 부속 장식물로 존재했었다. 그리이스 · 로마 시대에 본격적인 조각 작품이 전설적인 조각가들에 의해 많이 제작되었다는 것은 그 시대의 요구나 취향이 어떤 것이었던가를 반영해 주는 물적 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리이스 · 로마시대는 물론 조각예술이 번성하였던 르네상스 시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각은 건축물의 열주(列柱)나 광장의 기념적인 조상(彫像)으로 존재했었다. 조각이 독립된 미술 표현의 한 장르로 정착한 역사는 그렇게 길지가 않다.
조각의 건축으로부터의 분리는 조각작품이 미술관이나 화랑속에 전시되면서 가능해질 수 있었다. 그것은 조각이 사회적 · 공리적 기능의 수행으로부터 독립하여 심미적 목적으로 제작되고 유통되는 역사적 전환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조각작품이 전시공간 속에 안치됨으로써 조각은 표현의 자율성을 획득했다.
조각은 삼차원의 예술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촉각예술이란 생각이 보편화된 것도 이 시점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로서의 조각의 특질은 공간 속에 삼차원의 물건 (오브제)을 창조하는 것이다8) 라는 정의는 명백한 진실이다. 그래서 조각의 제특성을 논할 때 공간, 양감, 동세, 질감 등이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는 것이다.
조각이 표현의 자율성을 획득하면서 이제 조각은 단지 대상을 유사하게 옮기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심미적이고 무목적적이며 형식적인 단계로까지 나아가게 되었지만 그 대신에 과거의 조각이 지녔던 좋은 기능은 점차 상실해 갔다. 그것은 다름아닌 대중과의 소통의 단절을 의미한다.
조각에 있어서 자율성의 확보는 조각예술에 대한 새로운 신화를 생산하였다. 즉, 재료에 대한 숭배, 기술적 완결성이 내용을 대체해 버린 지점이 조각 예술의 새로운 지평으로 용인되면서 잃어버린 내용을 재료 자체에서 찾으려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조각의 의미가 재료의 선택과 그것을 다룰 수 있는 기술에 의해 규정되고 조건 지워지는 것처럼 단정해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조각과 공예의 분명한 한계선을 규정해 놓고 있지만 실제로 그 경계가 모호해질 경우가 많다. 과거로 올라갈수록 공예와 조각의 경계는 분명하지 않으며 때에 따라서는 이 두 장르가 서로 뒤섞여 있기도 했다. 과거의 훌륭한 조각가의 작업실은 또한 뛰어난 공예가들의 공방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어떤 조각품에 대해 공예적이라거나 공예작품과 같다고 말한다는 것은 그 조각품을 헐뜯기 위해 온갖 악평을 서슴없이 늘어놓는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조각의 경우 공예적이다 못해 무의미한 재료의 소모, 기술의 낭비에 전념한 전형적인 예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것은 실용성에 바탕하고 있으면서도 '물건'이 주는 독특한 아름다움과 조각적 맛과 의미를 지닌 공예품을 볼 때 느낄 수 있는 감흥마저 주지 못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조각을 독특한 표현의 한 차원으로 만들었으며 마치 조각이 항구적인 장르인 것처럼 정착되게 만들었는가. 제도가 그렇게 만들었다. 제도, 특히 제도 중의 제도인 미술학교와 미술관이 그러한 분리를 부추키고 조각이 영속적인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가르쳤다. 그러나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이 조각 역시 역사적 산물이며 당대의 사회적 요구와 필요, 취미와 가치에 의해 생산된 것임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현대조각은 현대사회의 삶과 생활, 관습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혁명 이후에 가속화된 산업화는 조각의 새로운 재료의 개발과 확산을 자극했으며, 기술문명의 발달은 기계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개념의 조각을 가능하게 했다. 마치 르네상스 시대에 해부학의 발달이 인체조각의 발달을 견인해 내었듯이 과학문명의 발달은 미래주의, 구성주의 조각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동력에 의해 스스로 움직이는 로보트와 같은 조각까지 만들어낼 수 있도록 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조각은 전통적인 관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답보를 반복하고 있는데 미술학교와 미술관이 그 답보를 오히려 조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그러한 제도들은 조각에 대한 제한된 미학적 범주를 정통적인 규범으로 제시하고 그것을 장려하고 걸러내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 조각의 신화를 더욱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기념 조각의 권위를 떠받쳐 주는 높다란 좌대는 미술관 속에 안치될 거룩한 물건'을 받쳐 주는 상석(床石)인 받침대로 바뀌었다. 그럴지언정 그 '거룩한 물건'은 권위적인 기념조각이나 종교적인 성상(聖像)이 지녔던 마력에 버금가는 권위를 획득하고 있다. 그것은 예술이란 이름으로 모셔지고 경배되고 있지만 사회적 의식을 통합하는 매개체로서의 내용을 전달하는 소통매체로서의 기능을 점차 상실해 가고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2] 현대조각의 딜레마
현대조각의 특징은 순수조형에의 탐구이다. 그것은 조각예술 발전의 역사과정속에서 형성된 전통과 관습의 거부를 통해 이루어졌다. 현대조각의 출발에 있어서 그 단초를 로뎅에서 찾을 수 있는 바 그는 물리적 재료를 단지 숙련된 기술과 개성으로 주어진 대상을 효과적으로 재현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재료 자체가 의미를 지닌 매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조각작품이 재현적인 것으로부터 추상적이고 구성적인 것으로 변화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를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현대조각은 인상적인 재현이나 주어진 대상에 대한 정확한 묘사를 창조적이기보다는 고답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실험적이고 추상적인 형태의 아름다움을 중요시하며 나아가 재료 자체가 환기하는 정서적 쾌감에 더 비중을 두고자 하는 조각가들에 의해 이끌어졌던 것이다.
페프스너, 아르프, 가보 등의 구조적, 구성주의적 조각과 피카소-뒤샹의 기성품, 브랑쿠지, 아르키코, 타틀린 등의 조각은 조각예술의 이념의 변화를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페프스너가 구성적 조각을 통해 힘에 넘치는 구조를 보여준 반면에 브랑쿠지, 아르프 등의 절대적 구성주의 조각은 데이비드 스미스(David Smith)의 추상적 · 미니멀리즘과도 연결되고 있다. 재현과 모방으로부터 구성과 구조, 추상적인 입방체나 유기적 형식으로의 전환은 헨리 무어와 같은 절충적 형식을 낳으면서 모더니즘 조각의 최후의 단계인 '최소한의 구조(A·B·C Structure)'로까지 발전하여 매체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제시하고자 하는 지경에 도달하였다. 쥬드(Donald Judd)나 솔 레윗 (Sol Lewitt), 안드레 (Karl Andre)의 이른바 미니멀 조각은 물리적 대상(object) 자체의 가시성만을 제시함으로써 조각에 대한 의미의 부여와 추론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재현으로부터 형식으로, 나아가 물건자체가 가진 성질의 제시에 이르는 과정을 '예술에 대한 사랑'의 개념의 변천으로 보고 있는 아래의 도식은 서구 조각사의 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9)
마르셀 뒤샹의 <변기>가 칼 안드레의 <융탄자/덮개 >10)나 도날드 쥬드의 기계적이고 몰개성한 입방체의 제시로까지 발전한 것을 막연히 서구미술사의 '진보의 도식'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니멀리즘의 물자체에 대한 거의 광적인 집착은 상대적으로 조각의 빈곤과 결핍을 초래했던 것이다.
현대조각의 이러한 막다른 지점에 대한 불안과 아카데미즘과 절충주의 조각의 상업주의에 분노한 조각가들은 이제 그들이 다루고자 하는 재료를 자연이란 무한한 공간 속에서 찾고자 했다. 이른바 '대지예술'로 불려지는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조각영역의 확장'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서구 문화도식의 빈곤성을 오히려 드러내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대지예술이 풍경과 건축의 중성지대에서 논리적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그의 주장은 조각영역의 확장이라기보다는 조각 개념의 해체에 가깝다.11)
그 해체 또한 문화적 당위성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는 해체 자체를 위한 해체이며 출구가 없는 미망의 땅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 헛된 노력에 불과한 것이다.
서구 현대조각이 대지예술에서 바야흐로 진퇴양난에 처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최근의 포스트 모더니즘 조각을 통해 엿볼 수 있다. 포스트 모던한 조각은 현대조각의 위기를 깨닫고 갑자기 과거로 선회하여 미술사 속의 각종 자료를 참조하는가 하면 그것을 번안 · 복합하며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부심하고 있는 것이다.
[3] 한국조각의 비평적 시각
서구 현대조각의 질곡은 곧바로 서구사회가 안고 있는 문화적 위기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새로움에 대한 부단한 요구와 문화적 우월의식의 신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갈등을 심화시키는 가운데 그들은 점차 자신들의 고갈과 빈곤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현대조각의 빈곤은 한국에서 예외일 수 없으며 오히려 더욱 심화되었다고 지적할 수 있는데 그 이유를 먼저 한국조각이 지닌 언어와 표현의 좁은 세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현대조각이 전통조각(대체로 불상조각에 국한된 것이지만)과의 연계선을 상실하고, 그나마 제한된 표현의 영역에 안주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우리는 현대조각의 여명기인 일제 식민통치시대의 불행했던 상황을 빌어 그 책임을 회피할 때가 많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도 최초의 근대적인 조각가였던 김복진(金復鎭)은 일본을 통해 근대조각을 습득했고, 그것을 뛰어넘기에는 개인적 역량에서나, 시대적 상황에서나 무리였음에 틀림없다.12) 김복진 이후 김종영, 윤승욱, 김경승, 윤승중, 윤효중, 권진규 등의 조각가에 의해 근대조각으로부터 현대조각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확보되었다고 할지라도 근대성에 대한 뚜렷한 자각과 사회적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현대성을 구현할 수 있는 조각을 기대하기는 힘든 것이다.13)
어쨌든, 한국 현대조각의 역사를 김복진으로까지 소급한다고 하더라도 그 시간은 대략 60여년 남짓밖에 되지 않으며, 그나마 고답적이고 진부한 상투적 인체조각을 통해 모호한 휴머니즘이나 감상주의를 자극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조각이 태동기로부터 빈곤의 운명을 상속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70년대의 미니멀리즘 이후 8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조각은 분명히 변화의 조짐을 보여 주었다.
과거의 조각에 있어 형태나 재료 사용이 안으로 응축되고 자기충족적이며 작품 자체의 완결성을 지향했던 반면에 80년대 들어 등장하기 시작한 조각의 새로운 기류는 훨씬 개방적이며 연극적 • 연출적일 뿐만 아니라 회화적인 특성까지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70년대의 미니멀 조각에 이르기까지 한국조각은 대부분 소재주의, 재료에 대한 물신숭배적 집착, 완벽하리만치 정교한 기술에 의한 완결성의 추구 등이 중요한 특징을 이루고 있었다. 예컨대 순수기하학주의라 할 수 있는 대부분의 미니멀 조각은 재료를 거의 극단적으로 곱게 다듬어 놓음으로 해서 마치 공장에서 기계로 찍어낸 제품처럼 몰개성한 특징을 보여 주었는데 이러한 작품이 마치 상표 (trade-mark)처럼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던 경우가 그렇다. 혹은 구태의연한 인체조각에 마치 생명력을 불러넣기라도 하듯 무의미한 동세를 가하거나 묘한 인간애를 불러 일으키는 군상(群像)-그 대표적인 예가 모자상(母子像)이다-을 통해 감상적인 휴머니즘을 강변하는가 하면 재료 자체의 특성인 표면의 질감이나 무늬, 조각가의 작업 흔적을 최대한 배제하려는 배려가 두드러진 물질에 대한 주목 등을 통해 조각에 심각한 철학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위장하려 했던 것이다. 빈곤을 감추고 싶어한 결과 도식적 방법의 반복에 호소하면서도 철학의 안개를 덮어 씌운 것이 오히려 조각예술의 올바른 전개를 가로막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왜곡된 양상은 조각에 대한 개념을 정체적인 관습의 법칙 속에 가두어 버린 한계도 지니고 있었다. 그 한계의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재료의 개발에 별로 주목하지 않고 전통적인 재료를 끊임없이 사용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미술관은 동일하거나 유사한 재료가 유사한 형태와 형식으로 열병해 있는 물건들의 종점이 되어버린 것이다.
80년대 조각은 과거의 조각이 지닌 한계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것 또한 분명하게 단정할 수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외면적으로 80년대 조각이 과거의 그것에 비해 훨씬 다양해진 것은 사실이다. 조각에 대한 개념이 변화하고 다양한 조각이 발표될 수 있었던 것은 과거의 조각의 빈곤성에 대한 반작용이 큰 구실을 했겠지만 무엇보다 미술대학의 확충에 따른 조각인구의 증가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80년대란 한 시대가 과거와 완전히 단절된 불연속의 시간속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조각과 비교해 볼 때 다음과 같은 변화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70년대의 미니멀리즘 조각에 이르기까지 한국조각은 대체로 단일한 재료에 의한 완결을 추구했던 반면 후배세대인 80년대 조각가들은 이질적인 재료의 결합에도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둘째, 과거 조각의 형태. 형상이 통일성 · 단일성을 유지한 전통적 • 규범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 반면에 80년대 조각은 연극적이며 연출적인 상황 속에 작품을 설치하는가 하면 설치 자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간주하려 하고 있다.
셋째, 조각에 있어서 메시지의 전달이란 문제가 새롭게 대두되었다.
넷째, 주제의 폭이 다양한 면으로 확산되었다.
다섯째, 전통적인 물건에 대한 주목이 두드러지고 있다.
80년대 조각의 양상에 대한 이러한 도식적인 정리가 그것의 흐름을 정당하게 기술하는데 장애가 될 지도 모르지만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것을 더 크게 내용적인 측면과 형식적인 측면으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은 잠정적인 특징을 추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내용적인 맥락에서 볼 때, 앞세대가 작품에 내용을 담는 것을 거부하거나 최소한의 형태 속에 동양사상이나 한국적 정서라는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인 내용을 담고자 했다면, 후세대는 내용을 오히려 강화하고자 했던 측면이 두드러진다. 그속에는 사회적 주제의식으로부터 개인의 실존적 고뇌와 자의식의 반영, 토속적인 민간신앙에의 회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문화에 대한 고발, 문명비판, 과거의 전통에 대한 향수등이 서로 중첩되거나 강렬하게 드러나고 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통일적인 구조와 형태적인 일목요연함보다는 해체적이란 점이 두드러진다. 그래서 과거의 조각이 무겁고 규범적이며 조각의 관습에 충실한 것이라고 한다면 80년대의 조각은 가벼운 것이고, 복합적이며 내용에서든 형식에서든 복잡한 양식과 주제가 혼재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보다 세분해 볼 때 다음과 같은 분류가 가능할 것이다.
①사회적 이념을 강렬하게 반영하고 있는 조각 민족 민중미술 진영의 조각가의 작품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80년대 한국미술의 전개에 두드러진 역할을 담당한 <현실과 발언>에서 활동했던 심정수 · 이태호와 최근의 <조소패 흙〉등 주로 <민족미술협의회>를 통해 활동하고 있는 조각가들의 작품을 들 수 있다.
② 인간의 실존상황, 심리적 고백, 현대사회에서의 인간소외 등을 통해 인간성 회복을 열망하는 조각-홍순모 · 임영선 · 류인 · 배형경 · 김광진 • 황현수 • 김영원 · 도학회 · 최병민 • 허위영 등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인간에 대한 해석, 인간을 주제의 중심으로 놓고자 하는 입장은 80년대 한국조각의 흐름에 있어서 가장 많이 다루어지고 또 그런만큼 관념적인 한계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홍순모의 웅크린 인간들의 군상은 표현주의적 조각의 비극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으나 그것보다 더 나아가 현실에 주눅이 든 소시민의 왜소한 삶을 묘사해 줌으로써 오히려 현실성을 획득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인간성 회복이란 문제는 많은 작품의 주제로 사용되고 있는 만큼 모호한 것임에 분명하다. 이 주제는 때로는 사회의식과 만나며 신선하고 진보적인 미래에의 전망을 제시해 주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이 인간이 처한 한계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좌절하고 마는 인간을 과장스럽게 표현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③ 포스트 모더니즘적 조각
80년대 한국조각의 주종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이 범주에 편입할 수 있는 조각가는 숫적으로나 발표한 작품의 양으로나 엄청난 규모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개념이 마치 불가사리처럼 사용되어서 무엇이든 먹어치울 수 있는 왕성한 식욕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많은 조각가들이 이 범주에 편입시키는 것을 꺼리거나 주저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에서 볼 수 있는 탈장르 개념에 따라 <메타복스>나 <난지도>의 몇몇 작가를 이 분류 속에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신화적• 고고학적 •원시미술적 · 문명사적 주제를 다루고 있는 조각가들 (신현중•윤영석 · 김관수 · 윤근병 · 박상숙 「그의 작품은 포스트 큐비즘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 도흥록 · 원인종)을 포함하여 전통적인 조각의 형식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나름대로 내용을 추구하고 있는 작품 역시 이 분류항 속
에 넣을 수 있다.
80년대 조각의 현 단계를 논할 때 두드러진 특징을 들라면 전통적인 장르 개념의 해체를 꼽을 수 있다. 이제 회화니 조각이니 하는 개념은 입체와 평면, 설치 등의 개념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작품받침대로부터의 해방, 전시공간 자체를 작업의 공간으로 설정하고 그 속에 의미를 담고자 하는 설치예술의 확산, 다양한 재료의 활용 및 결합 등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조각작품이 모더니즘 조각에서 볼 수 있던 특징들로부터 크게 벗어나거나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장르의 확산과 해체가 조각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고 할지라도 그것 또한 변화하는 시대를 반영하는 필연성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 과거의 한국적 모더니즘 조각이 보여 주었던 갑갑함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내적 요청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민족 민중미술론과 모더니즘의 극복을 위한 대응논리로 제안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서구적 사고와 발상, 그 사회의 요청에 부응한 문화적 뿌리 찾기에 불과하다는 점은 분명히 인식되어야 한다.
④ 한국적 원초성에 대한 직역(譯) 혹은 그것의 형상화로서의 조각-80년대 한국조각의 흐름에 있어서 '한국성 찾기'는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 것이 사실이다. 특히 불교적 형상의 번안, 민속 조각에 대한 주목 등은 조각 예술의 표현의 영역을 넓히고 풍부한 문화적 전통 속에서 양식적 정체성(identity)을 찾고자 하는 생각들을 자극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장승• 솟대 • 문인석 · 불상 • 동자상 등의 전통적인 '물건'들이 문화사적 맥락에서 인용되기도 했다. 황지선 · 박상희 · 최옥영 · 한진섭 • 김창세 등은 한국적 형상의 원형(原形)과 감수성을 찾고자 했던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또한 형식적으로 추상조각의 정통성을 완전하게 탈각한 것은 아니지만 조각의 관습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한국적 원초성을 찾고자 하는 전항섭, 압축과 긴장이란 방법을 통해 조각작품의 언어를 내적으로 응축시키면서도 구상적 형상과 추상적 조형의 적절한 활용에 역사의식을 불어 놓고자 하는 박희선 등의 작품도 이러한 문제의식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특히 분명하고 다소 도전적인 전시명칭 아래 동일한 주제의식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조각가들이 매년 새롭게 모이고 있는 <한국성 -그 변용과 가늠전>과 같은 전시회나 기왕에 해체되었지만 '분단'이란 민감한 주제를 내걸고 전시회를 개최한 바 있는 <마루전> 등의 활동은 기억할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적 원조성에 대한 검토가 자칫 전통적인 물건의 복제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거나 단순히 소재주의나 작위적 기안적 차원에 머물러 버린다면 그것은 새로운 물신숭배 (fetishism)를 조장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이러한 한계의 징후는 전통적인 민속조각이나 종교적 • 민간신앙적 물건들이 본래 가졌던 장소를 떠나 미술관 속에서 설치될 때 그것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유산에 대한 문화적 접근은 내용과 형식의 편협함을 면치 못하고 있는 우리 조각예술의 빈곤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지속적으로 시도되어야 할 것이다.
[4] 왜 형상조각인가?
이상의 논지에서 볼 때 80년대 이후 한국조각의 언어가 확장되고 표현의 세계가 다양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것은 곧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러나, 조각의 역사를 들추어보면 그속에는 내용과 형식이 중층적이고 다양했던 시대가 분명히 있었으며, 또 그런 시대의 조각이 힘을 지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힘을 지탱시켜 주었던 것이 '형상'이었으며 그 형상은 인간에 대한 탐구로부터 출발하고 있음을 환기해 둘 필요가 있다. 비록 단일한 재료를 사용하여 어떤 구체적 형상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고 할지라도 조각에도 회화처럼 어떤 연극적인 요소가 충분히 설정할 수 있으며, 그림과는 다른 조각적 긴장을 유도해냄과 더불어 풍부한 내용을 담지할 수 있다.
조각은 물질을 숭배하고 그것에서 심리적 위안을 받으려는 것에서 힘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폭넓은 소통의 세계를 펼쳐보일 수 있는 지점에서 비로소 그 진정한 힘을 분출한다. 원시 고대문명이나 중세의 도상(icon) 미술, 르네상스뿐만 아니라 우리의 중세문화, 근세의 민중문화 속에는 풍부한 형상의 세계가 대중적 소통이란 사회적 맥락 속에 존재했었다. 이러한 형상세계가 지닌 소통의 힘에 대한 주목으로서 이 전시회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물론 구체적인 대상을 드러내는 재현의 세계가 조각예술의 유일한 모범답안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 전시회가 한국 형상조각의 전체상을 보여준다거나 그 대표성을 부여받고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며, 일여년에 걸친 준비와 계획의 수정·보완기간 동안 유사한 성격의 전시회가 마치 소문처럼 무성했다가 사라지는 것도 목격했다.
이 전시회에 출품하고 있는 작가들 - 연령별로 보면 30대 초반의 신진작가로부터 자신의 형상세계를 일정정도 구축하고 있는 중견작가에 이르기까지, 작업의 성향별로 분류하자면 역사적 주제의 환기, 형상의 자성에 대한 탐구, 초현실주의적 어법의 활용, 사회의식의 표출, 종교적 내면세계의 성찰로부터 전통적이고 교과서적인 조각에 이르기까지 그 표현의 편차는 더욱 크고 다양하다.
이렇게 각자의 형상세계를 꾸려가고 있는 조각가들을 연결할 수 있는 최소한의 매개고리로써 필자는 아래와 같은 원칙을 설정한 바 있다.
첫째, 분명한 내용과 주제의식
둘째, 주제를 구현해 낼 수 있는 개별적 역량(재료에 대한 연구와 기술적 숙련)
셋째, 소통의 지향
그리고 마지막으로 야외조각 제작의뢰를 수용할 수 있는가.
설정된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그 결과의 승패를 떠나 값진 것임에 분명하며, 비록 이 전시회가 출품작가 개개인이 애초에 품었던 의욕과 열정, 기대에 미치지 않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미완성의 지도를 이제 막 그리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행보의 시발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부분적으로는 이 전시회가 한국의 형상조각, 그것도 주로 젊은 조각가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형상세계의 한 단면에 대한 등고선과 위도 / 경도를 그었다는 의미에서 보다 세밀한 교통로와 보다 분명한 독도법의 개발이란 숙제를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1) L. 벤투리, 미술비평사, 김기주 역, 문예출판사, p.55.
2) E.H. 곰브리치, 예술과 환영, 차미례 역, 열화당, p.115.
3) 앞의 책, p.116.
4) 앞의 책, p.139.
5) 플라톤은 화가와 목수를 비교하며 목수가 현상의 본질인 '이데아'를 모방하여 어떤 대상을 만들어내는 반면, 화가는 그 이데아의 모방을 그림으로 다시 모방하는 존재이므로 철학자가 통치하는 '이상국가'로부터 화가를 추방하고 있다. (플라톤, 국가론 참조)
6) A.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고대 • 중세편, 백낙청외 역, 창작과비평사, p.83, 100.
7) E.H. 곰브리치, 앞의 책, pp.402~403.
8) Herbert Read, The Art of Sculpture, Princeton Univ.Press, p.46.
9) Carla Gottlieb, Beyond Modern Art, Dutton Press, p.32.
10) 칼 안드레는 <37조각의 작업>이란 제목아래 1970년 구겐하임미술관에 정방형의 알루미늄, 동판, 가죽, 마그네슘, 철판조각을 마치 서양장기판(혹은 융탄자처럼 단순반복적으로 설치한 바 있다.(C. Gottlieb, Beyond Modern Art 참조) 또한 그의 벽돌조각을 설치해 놓은 작품이 영국의 테이트갤러리에 의해 소장되자 세간의 격론을 야기하기도 했다. (Suzi Gablik, Has Modermism Failed? 참조)
11) 로잘린드 크라우스, 조각영역의 확장, 현대미술비평 30선 수록, 중앙일보, 참조.
12) 박용숙, 한국 현대조각의 역사와 그 문제점, 예술의 전당 미술관 개관기념전 도록, pp.6∼7.
13) 앞의 글에서 박용숙은 서양사의 문맥에서 볼 때 현대적인 것은 근대적인 체험의 반성이나 수정에서 얻어지기 때문에 근대적인 체험이 없는 곳에 현대적인 실험이 성공한다는 것은 하나의 기적일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서구에 있어서 근대성의 구현은 계몽주의의 합리성, 산업혁명에 의한 산업화와 프랑스 대혁명에 의해 획득된 시민정신 등에 의해 가능했으나, 이러한 것을 우리 문화에 도식적으로 대입시킬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근대화의 기회를 일제 식민통치에 의해 박탈당한 가운데 봉건 왕조체제로 부터 식민지배, 해방과 분단 등의 격변을 겪는 과정에서 근대적 체험의 기회마저 갖지 못한 채 해방 이후 서둘러 현대화의 박차를 가한 나머지 역사발전의 정상적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의 논리는 수긍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