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전시

구상조각의 현상 - 한국의 서정성

전시명: 구상조각의 현상 - 한국의 서정성

전시기간: 1997.09.03 - 1997.09.28

전시장소: 모란갤러리

참여작가: 전뢰진, 최종태, 김효숙, 강관욱, 고정수, 홍순모

전시내용:


구상 조각의 현상 - 한국의 서정성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조각가들 가운데 한 작가는 그를 비하하는 의미로 사용된, "19세기 작가" 라는 평을 면전에서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20세기 후반, 늦어도 금세기의 70년대 부터 세계의 수많은 미술가들이 선사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과거의 미술 주제와 방식들을 적극적으로 참고하거나 인용하고 있음을 상기한다면, 그리고 선사시대 동굴의 벽화에서도 우수한 조형성이 표출된 사실을 기억한다면, 한 작가를 이런 식으로 일축하는 것이 얼마나 단안경적單眼鏡的이고 시대착오적인가를 알게 된다.그러나 우리 미술계에서는 유감스럽게도 이런 식의 짧고 좁고 성급하며 당파적인 견해들이 자주 발견된다. 특히 한국의 구상 미술에 관한 견해는, 그것을 폄하하기 위해서든 칭찬하기 위해서든, 객관적이지도, 중립적이지도 않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에 따라 구상 작가들에게는 한편으로는 "비현대적"이라는 식의 표현이,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성”, “민중”과 같은 어휘들이 오용, 남용되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서양 미술의 존재가 인식된 상태에서 미술 활동이 이루어진 것이 1세기도 더 되는 시점에 있다. 우리에게 부여된 여러 과제들에 선행될 것은 가능한 한 국수주의나 사대주의에 의한 편견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작금의 한국 미술을 장르별, 시기별로 그 특수성에 따라 정리하고, 평가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번 전시회는 이러한 시도의 하나로서 근래의 구상 조각가들 가운데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 한 공통적 맥락 안에서 작업을 하는 작가들을 선택하여, 이들을 조명하므로써 한국 미술의 다양성의 일면을 제시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여기에 모아진 조각가들은 전뢰진(1929~), 최종태(1932~), 김효숙(1945~), 강관욱(1945~), 고정수(1947~)와 홍순모(1949~)다. 각 작가들은 독자적인 조형 세계를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상 작업을 하는 그들의 다른 동년배의 조각가들과 구별되는 공통점들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그들은 20, 30여년 이상 구상 조각만을 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불상 조각을 한국조각의 최고의 업적으로 보면서, 각각 정도의 차는 있지만, 그것의 영향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작품에서 서양 조각의 영향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으나, 그것은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한국 불상 조각의 이미지나 기법에 의해 퇴색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의식적으로 한국의 자연과 한국인이 지니고 있는 정감에 상응하는 형태를 개발하려 노력하였다. 이렇게 하여 획득된 독특한 서정성은 이들의 작품을 하나로 모으게 하고 서양 조각과 구별시키는 결정적인 특징이 된다. 그것은 기다림, 인내, 그리움, 비세속적인 사랑, 정적인 성격, 내성內省, 종교성 등과 같은 것들이 따로, 혹은 섞여져 있는 마음 상태로 설명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이들의 작품들을 한 말로 표현해서, 오직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정서는, 아무리 "한국적"이라는 수식어가 진부해졌다 하더라도, 한국인들만이 공유하는 것으로서 한국적 서정성이라 칭할 수 있다.

  위의 작가들 가운데 전뢰진은 앞서 언급한 특징들을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 작가다. 그는 1954년 <소녀상>으로 첫번째 돌조각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일관되게 돌로 작업을 하고 있다. 그의 작품 속에는 견우와 직녀, 선녀, 인어, 절구질하는 토끼와 같은 신화, 설화나 동화 속의 인물과 형상들, 동자나 연꽃과 같은 불교적 도상들과 모자母子, 가족, 남매로 지칭되는 인물들, 그리고 동물이나 식물과 함께 있는 인간들이 등장한다. 작가가 이들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남녀간, 가족간, 자연과 인간 사이의 사랑, 공생共生, 믿음, 평화나 혹은 이것들이 성취된 낙원이다. 전뢰진이 구가하는 "선경仙境", 즉 황금시대는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고 있는 보편적인 이상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조각의 독창적인 점은 이러한 마음 상태가 천진난만하게, 그리고 불교적 이미지들과 연결되어 표현되었다는 사실이다. 나이비테naivité라 표현할 수 있는 그의 미술의 특징은 그의 소재나 주제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등장 인물들의 표정과 작가가 여러 양식들을 관찰한 후에 도달한, 그의 고유한 조형 방식을 통해서도 강화된다.

  전뢰진에게서 자주 등장하는, 앉아서 하프를 타고 있는 '선녀' 는 키클라딕 미술의 하프 타는 인물과 연결시킬 수 있다. 특히 그의 단독 인물상이나 가족상이 입방체였던 돌의 원형이 최소한도로 깨뜨려져 전체적으로 기하학적인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점은 그가 애호하는 작가라고 밝힌 마이욜A. Maillol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아트라이프, 인터뷰, 1989, 10). 그는 1976년 세계 여행 중 인도불상을 직접 볼 수가 있었는데, 이 경험을 통해서 그는 이미 1960년 전후부터 시작되어 그의 작품을 '공예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요소인, 인물 주변을 양식화된 자연 모티브들로 장식하는 방식을 더욱 적극적으로 진전시키게 된 듯하다.그러나 전뢰진의 조각 양식의 원천은 이것들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젊은 시절(1958년) 그의 포부는 “신라시대의 석조조각에서 새로운 현대 조각을 구상해 보는 것이었다(전뢰진 작품집, 1990, 박래경의글에서 재인용). 실제로 그의 조각은 여러 면에서, 특히 통일 이전의 신라 불상조각의 여러 특징들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들에 나타난 정면성, 머리가 큰 몸, 굴곡이 적은 인체, 각이 없이 내려오는 어깨, 둥글려진 입방체 모양의 머리, 짙게 음각(陰刻)되어 코와 연결된 눈썹, 평화로운 미소 등은, 예를 들어, 김원룡이 몹시 사랑스러운 인형같은 4등불신상' 이라 표현한 탑리아미타삼존불塔三尊佛 (6세기 말~7세기 초)의 것과 대단히 흡사하다(김원룡, 한국미술사, 1964, 49쪽). 그러나 그의 조각은 양식화된 형상에 장식적인 요소가 과도하게 들어오고 설명적으로 되므로써 많은 비평가들이 지적하듯이 공예적으로 되기도 한다. 더욱이 그가 '흔들리는 조각' 에 도입한 키네틱적인 요소는 그의 작품을 더욱 그렇게 만든다. 스스로 1984년에 밝힌 바에 따르면, 전뢰진이 신라석불에서 발견한 한국적 특징은 "단순화된 우아한 선과 정적이면서도 깊은 내면적 감동을 일으켜 주는 조화된 볼륨'이다(전뢰진 작품집, 앞 글에서 재인용). 한편 그는 “대자연의 품안으로 들어가 그 속에서 찾은 어떤 순수한 원리를 작품화하고 싶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선미술, 1990, 개인전 도록, 선화랑, 1994, 서성록의 글에서 재인용). 그는 자신이 위처럼 파악한 불상의 형식과 이미지를 그의 자연에 대한 사랑과 결합시켜 표현하였다. 그의 미술의 이러한 두 바탕은 한국의 자연처럼 굴곡이 완만한 볼륨을 지닌 '단순하고 정적인'인간 형상들이 동물과 식물, 나아가서는 구름이나 파도와 같은 자연과 서로 이어져 나오거나 한 덩어리로 결합되어 직접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어 그의 고유한 미술 양식이 되었다. 이를 통해서 전뢰진의 조각에서도, 그가 그의 제자 강관욱의 조각에 대해 썼듯이 “한국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작품의 진수를 느낄 수 있다(강관욱 자생조각, 1996, 31쪽).

  최종태는 30년 이상 사람의 얼굴, 구체적으로는 '소녀'의 얼굴을 만들고 있다. “사람을 오래 만들다 보니 좋은 얼굴을 만들고 싶어진다. 그런데 그 좋은 얼굴이라는 것이 정해진 게 없어서 자꾸만 만들게 된다. 내가 본 중에 가장 좋은 얼굴은 석굴암의 본존상 뒷벽에 있는 보살들'이라는 그의 수필의 한 귀절은 그가 추구하는 미술 세계와 조형상의 출처 모두를 함축적으로 밝혀 준다 (1989, 최종태, 형태를 찾아서, 1990, 21쪽). 몇몇 그의 동년배 작가들처럼 최종태는 일찍부터 의식적으로 서구의 미술을 거부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1967년 무렵 서구적인 것을 전면 거부할 자세로 일을 하리라'고 다짐했다 한다(1983, 앞 책, 44쪽). 그가 한국 불상 가운데 특별히 매료된 작품은 백제의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다. 그의 전신상에서는 백제의 금동불상의 자연스러운 자세와 온화한 분위기, 그리고 그 자신도 밝히고 있는 이집트 미술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이 두 미술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들인 명상적인 분위기와 초시간성은 그의 모든 조각과 소묘, 그리고 파스텔화의 기본적인 특징이 된다.

  최종태는 소녀상을 통해서 자신의 두개의 커다란 정신적 뿌리를 표현하고 있다. 하나는 그의 어린 시절과 그 배경이었던 자연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이다. 그는 "티없이 맑고 꿈으로 가득 찬 고향 산천과 같은 형태를 이루어 보고자” (1974, 앞 책), “승리만만한 절대순수"를 표현하기 위해서 소녀상을 만든다(앞책). 맑고 환한 소녀의 얼굴은 예수의 변용이기도 하고, 슬픈 얼굴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먼발치서 바라보는 막달라 마리아의 슬픔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어려운 세상을 살던 작가 자신의 슬픔(1987, 앞 책, 21, 42쪽 비교)이기도 하다.

  세잔느P. Cézanne와 브랑쿠지C. Brancusi는 같은 소재를 여러 번 반복하면서 찾고자 한 것은 대상의 본질이다. 후자는 '대상을 단순화시켜 가다 보면 그것에 도달하게 된다'고 적고 있다. 최종태 역시 조각으로 뿐만 아니라 소묘로도 "자꾸만 만든 소녀상을 통해서 표현하려 한 "좋은 얼굴'의 본질은 좋은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람이 살아 간다는 것은 순수와 진실에 접근하려는 행위 자체가 아닌가 싶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1976, 앞 책, 60쪽). 최근에 제작된 최종태의 소녀상은, 그가 존경한 스승인 김종영의 "불각의 미나 브랑쿠지 작품에서 보이듯이, 형태가 극단적으로 단순화되고 설명적인 요소가 최소화되었다. 아울러 두께가 1cm가 되도록 가늘어 지므로써 그의 조각은 완전한 측면성에 다가가고 있다. 이 작품들은 그 표현이 극도로 절제되고 단순화되므로써 디자인적 세련미를 보여주는 것은 간과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소녀상들은 기도와 사색에 잠긴 제복을 입은 사제의 모습을 닮고 있다. 그에게 있어 순결의 상징인 소녀의 얼굴들은 그가 자주 인용하는 '너희가 어린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성경 귀절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다.

  최종태에게서도 앞서 언급한 전뢰진에게서 처럼 어린이 세계에의 동경이 보여진다. 그러나 후자의 것이 현실 저편의 천진무구天眞無의 세계인 반면, 전자의 것은 현실 속에서 갈등하면서 추구하는 순수純의 세계다. 전뢰진에게서 "선경仙境", 즉 '낙원'은 잃어버렸던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의 작품에는 슬픔이 없다. 그러나 최종태의 유토피아인 어린 시절, 곧 "어린이성" (작가)은 그가 몹시도 그리워 하는 지나간 시간이자, 파괴되었고 인간이 어른이 되어 가면서 잃어버리는' 것으로 복원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적 감정들이 배어있는 그의 소녀상은 복락원復樂園의 탐색이라 할 수 있다. 소녀상의 정적이고 고요한 분위기와 내성하는 자세 등은 한국인이 산업사회 속에서 살더라도 공감하는 서정성을 보여주고 있다.

  최종태의 조각의 바탕을 이룬 종교적 내성內省은 김효숙과 홍순모에게서는 직접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김효숙이 가장 애호하는 모티브는 여체이지만, 그리스도상이나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부제가 붙은 애원하는 듯한 손, 즉 부분이 그 주체인 인간의 부호처럼 나타나 작가의 종교적 관심을 구체화시키기도 했다. 그의 여체 역시 자주 기도하는 자세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천사의 노래>라는 부제가 붙은 작품 (1993)은 종교적 희열을, 몸을 비틀고 있는 와상들은 서양에서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 이라는 테마를 통해서 표현되는 것과 같은 인간적 갈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모든 작품을 '동그라미' 라는 제목으로 제작한다. 그는 그것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적이 있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둥근 것 속에서 사랑과 용서가 갖는 포용성, 그리고 조화와 영원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기도 같은 것을 연상하게 되었다"(1992년 개인전 도록, 인사말에서 재인용). 여기에서도 그에게 작품이 자신의 종교적 고백이라는 사실이 발견된다. 김효숙의 동그라미연작은 크게 세 가지 양식을 보여 준다. 첫번째는 그에게서 가장 자주 보여지는 것으로서 특히 여체를 곡선적인 볼륨과 둥글둥글한 덩어리로 분할하여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가 이러한 조형 요소들로 인체를 표현한 것은 그가 “동그라미라는 이미지" (작가)에서 앞서 언급한 그의 종교 개념들에 상응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조형적 원천으로 두 개의 미술을 들 수 있다. 그 하나는 헨리 무어H. Moore의 바이탈리즘이다. 국내에서는 50년대 말 이후부터 특히 김정숙이나 윤영자와 같은 여류 조각가들이 영국조각가의 작품을 감각적으로 파악하고 변형시켰는데, 김효숙의 작품도 이와 흡사하다. 한편 그의 여체의 가늘고 길게 늘려진 허리와 팔, 그리고 가볍게 숙인 머리, 하체의 과장 등은 예를 들어방형대좌미륵보살반가사유상方形臺坐彌勒菩薩半跏思惟像과 같은 백제 불상으로 부터 받은 영향인 듯하다. 그는 이 두 양식을 결합하여 김소월의 서정시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여성상인, 인내하고 기다리는듯한 여인의 모습을 만들었다.

  김효숙의 두번째 양식은 앞서 말한 선적인 볼륨이 과장되고 더 왜곡된 것이다. 첫번째 작품들이 다감하고 내성적으로 보인 반면 이 작품들은 표현적이다. 손을 보여주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나 <그리스도상>처럼 형태는 물론 표면에도 작가의 감정이 그대로 전달된 이러한 방식의 작품들은 작가의 종교적 희열이나 고통을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작품들에서는 특히 부르델A. Bourdelle의 작품들이 연상된다. 세번째 방식은 위의 두 방식이 결합된 것으로 팔, 다리가 인체로 분리되지 않았거나, 2명 이상의 인물이 한 덩어리로 표현되었다. 이런 류의 작품들은 무어가 초기에 영향을 받은 멕시코의 인물상들과 유사하며, 그것들이 지닌 원초성을 보여주고 있다. 김효숙의 작품들 가운데 이 그룹 작품의 울퉁불퉁한 표면은 한국의 구릉과도 닮았다. 이러한 모든 외부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김효숙의 작품에서 한국인이 느끼는 토속성이 발견되는 것은 무엇보다 그가 늘 전통을 염두에 두고 작업하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그는 특히 테라코타, 작가의 용어를 빌면, “질구이”를 통해서 '우리 전통의 맥 속에 살아 숨쉬는 소박하고 거친듯하나 너그러운 조형미를 표현할 수 잇기를 바란다'고 쓰고 있다(1993 개인전 도록). 이러한 방식의 전통 이해가 그의 작품을 감상주의적으로 만들기는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해한 한국성을 그의 종교적 신념과 연결시키므로써 독자적인 조각을 만들어 내고 있다.

  강관욱은 직접적으로 종교적 테마를 다루지 않으면서 조각에서 종교적 기능을 찾고 있다. 그는 예술의 목적을 구원이라고 본다 (1981, 강관욱生彫刻,1996, 11쪽). “고통의 강에서 허우적대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고 행복에 지친 안일한 영혼의 고통을 일깨워 주고 싶은 작품을 하고 싶은 그의 첫번째 "구원" 대상은 작가 자신이다(앞 책). 어린 시절에 경험한 그의 부친과 모친의 잇따른 죽음에 의한 '슬픔, 고통, 외로움, 그리움과 같은 정서들은 그의 작품 전체에 반영되어 있다. 그의 미술 작업은 그것으로 부터 자기 자신을 치유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F.Nietzsche는 그리스인의 아폴로적 고전주의와 헬라인의 사실주의를 비교하면서 후자의 예술Kunst을 “치료사Heilerin" 라고 칭했는데, 강관욱의 조각에서 그것의 전형적인 한 예를 볼 수 있다.

  강관욱은 구원-연작 가운데 1985년부터 등장한 늙은 여인 형상을 통해서 자신의 독자적인 조각에 이르고 있다. 주름살이 깊게 패인 이 여인 형상은 70년대 말 부터 1985년 까지의 소복연작과 1989년의 귀향연작에서 나왔던 젊은 어머니상이 진전된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인 그리움과 슬픔을 표현한 후자는 실제의 어머니의 부재를 채웠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늙은 여인들을 통해서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치유한 듯하다. 그의 어머니는 더 이상 개인적인 차원에서 묘사된 것이 아니다. 늙은 여인들은 유교적 전통이 지배한 농경 사회 속의 자기 희생적인 어머니, 혹은 민중의 전형이다. 그는 현실을 역사 의식을 갖고 관찰하여 표현하므로써 쿠르베G.Courbet적인 의미의 사실주의를 실현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예술의 목적을 "구원"으로 보는 작가의 견해는 현실을 개선하려는 사실주의자의 입장이다. 그의 조각은 단순한 소재주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작가가 철저한 묘사를 통해 대상의 진실을 드러내므로써 사실주의적으로 된다. 젊은 여인들이나 그들과 같은 시기에 나온 소녀와 동자상들의 둥글둥글하고 평평한 형태는 그의 스승 전뢰진의 영향이며, 감상주의적 색채가 짙다. 돌 조각가인 그는 과도기적으로 미켈란젤로식의 인체 포즈도 보여 주기도한다. 그러나 그의 '자기 희생적 어머니의 전형' 은 외양의 신즉물주의적 Neue Sachlichkeit 묘사를 통해서 태어난다. 그는 세부 묘사를 통해서 진실을 표현한다고 믿은 19세기 독일 화가, 라이블W. Leibl처럼, “인간의 표피는 생명을 담고 있는 바, 그것을 통해서 사람을 보게 되고, 거기서 삶의 맥박을 찾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앞 책, 임영방의 글에서 재인용, 21쪽). 이에 따라 강조되어 묘사된 늙은 여인들의 피부, 즉 가물어 마른 땅처럼 갈라진 주름, 말라 늘어진 젖가슴과 오랫 동안 힘든 노동을 거친 커다란 손 등은 관객에게 그들의 현실을 환기시킨다. 자신의 지난 시간을 반추하듯이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거나 비스듬히 기울인 이 여인들의 자세는 관객을 자신의 기억 속으로 끌어들이는 듯하다. 이를 통해서 작가는 관객에게 현실을 통시하도록 촉구한다. 고전적인 미 추 개념이나 페미니즘 담론의 저편에 있는 늙은 여인들은 그가 '구원'의 상징으로 기념비적인 형태로 표현하는 손과 마찬가지로 모두 노동을 신성시하는 작가의 청교도적 입장의 표현이자 수공업적인 노동을 하는 조각가 모두의 손이기도 하다.

  임영방은 강관욱이 "우리 민족의 삶의 역사를 서정적으로 표상" 하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앞 책, 19쪽). 바로 이러한 점이 강관욱이 한국 구상 조각사에서 갖는 의미이다. 그의 조각의 바탕은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의 자양분으로 자라는 자생조生彫刻”(앞 책, 11쪽)을 실현하려는 작가의 의지이다. 따라서 그는 식민시대의 한국 역사를 다루기도 하는데, 이것은 오늘의 문제의 알레고리이다. 그러나 초기 작품과 최근의 파도를 소재로 한 작품에서 두드러진 작가의 서정적 취향은 역사를 테마로 할 때 자칫 감상주의적으로 표현하게 만들 우려를 낳는다.

  고정수는 강관욱이나 이 두 조각가들의 스승인 전뢰진과 함께 한국 구상 돌조각의 전통을 만들고 있으며 장인 정신을 지닌 대표적인 조각가다. 종종 브론즈 작업을 하기도 하지만 정자국을 살린 돌조각이 대다수다. 그가 20년 이상 일관되게 다루고 있는 모티브는 여체다. 볼륨감과 양감이 모두 자연스럽게 표현된 여체들은 우람하여 일견에는 나이가 든 여인처럼 보인다. 그러나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와 같은 선사시대 이래 전형적인 풍요의 상징인 여인 처럼 뚱뚱한 몸과는 달리 고정수의 여인들의 얼굴은 모두 앳된 소녀들이다. 이를 통해서 그의 여인 조각은 작가의 여자에 대한 복합적인 시각을 반영하게 된다.

  고정수의 조각은 그 테마와 형식 상 여러 작가들의 작품들과 연결되어 있다. 모델의 연령, 순진한 표정과 포즈는 드가E. Degas와 르노아르A. Renoir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더러는 니오베의 여신>과 같은 그리스 고전기 조각의 포즈를 닮은 것들도 눈에 띈다. 여인들의 풍만한 육체와 재료의 원래 형태를 추측할 수 있을 정도로 돌을 최소한도로 깎아 낸 점은 작가 스스로도 멕시코의 조각가 주니가와 함께 좋아한다고 고백한 마이욜A. Maillol의 작품과 매우 유사하다 (고정수 화집, 1996, 박용숙의 글에서 재인용, 13쪽). 특히 돌조각에 비해 머리가 작은 그의 브론즈 작품에서는 프랑스 조각가의 영향이 더욱 현저하다. 작가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가 표현하려는 것은 “한국적 여인상" 이다. 그에게 이 여인상은 “외부적인 변화에도 끄떡 않고 일하며 출산하는 대지 위에 우뚝 선 모성의 상징적인 여인상, 나아가 대자연의 에너지를 느끼게 하는 건강한 여인상"이다(앞 책, 8쪽). 이에 따라 그의 여인들은 이를 테면 “한국 여인상의 전형인 오척 단구" 식으로 해석되어 왔다. 신항섭은 “키는 작달막하고, 몸통은 옆으로 퍼졌으나 탄력적인 몸매를 과시하고 있는 그의 여체들은 한 눈에 '한국 여인' 임을 알 수 있다"고 쓰고 있다(앞 책, 80쪽).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고정수 조각의 한국성은 모델을 사실적으로 재현한다거나, 많은 비평가들이 주장하듯이, 작가가 국내산 돌을 사용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수더분하고 펑퍼짐한" (작가) 여인에게서 표현된 것은 작가가 자연과 모성애에서 기대하는 너그러움이라고 본다. 이러한 정서는 그의 인체들의 풍만함과 곡선을 통해서 표출되는데, 바로 그들의 몸은 노년기의 한국 지형을 닮고 있다. 그의

여인들은 무엇보다 이러한 곡선미를 통해서 한국인의 눈에 친근하게 보인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고정수의 여인들은 여성에 관한 남성의 이중적 시각을 복합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그들의 발달된 하체는 여성의 생산성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표현방식이다. 여성의 육체성의 강조는 계몽주의 이후 남자를 정신, 여자를 육체로 보는 양성兩性의 이분법적 성격 규정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여체는 그러나 풍요의 상징으로만 묘사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기다림' 이나 '그리움' 과 같은 소극적이고 정적인 정서를 보여 주는 동시에, 소녀의 순수함과 호기심을 보여 준다. 즉 그들은 미완의 무한한 가능성의 상징이자, 그 크기를 알 수 없는 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골똘히 생각에 잠긴 소녀들은 명상적으로 보이기 보다는 그들을 심연을 알 수 없는 신비의 대상으로 보게 한다. 따라서 그의 여인들은 모성애와 에로스 모두를 보여주게 된다. 그의 여인들에게서는 계몽주의 이후의 서구 미술의 여성 묘사에서는 분리되어 나오는 두 타입인, 어머니와 연인이 함께 표현되어 있다.

  홍순모는 인체를 다루는 조각가들 가운데 보기 드물게 주로 남자 형상을 보여준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 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와 같이 설명적인 그의 작품 제목들은 중세 그림 속에 나오는 제명題銘을 닮고 있다. 이러한 신앙고백적 제목들과 함께 등장하는 남자 형상들은 그의 자신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인물 비례상, 골상학상 홍순모의 조각들은 한국 서민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의 입상의 과장된 코, 늘려진 팔과 비율상 짧아진 신체는 묘사된 인물을 어눌하게 보이게 한다. 몸과 한 덩어리로 표현된 양 팔은 인물에게 탈아적 脫我的인 인상을 부여한다. 그의 커리커쳐식으로 표현된 형상들, 특히 희화된 얼굴은 각종 성격의 인간들의 전형 창조를 위해서 만든 도미에H. Daumier의 두상 마켓트들을 연상시킨다.

  홍순모의 인물상은 모두 자기반영적이어서 자각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커리커쳐 방식으로 이들을 통해 범인 LA의 전형을 만들고 있다. 이에 따라 모든 것을 감내하는 듯한 그의 형상들에서는 무기력한 서민의 모습이 연상된다. 그러나 그의 잠언 제목들은 그들을 사회학적인 의미의 민중으로 이해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가 브론즈를 사용하든, 호마이카에 황토나 점토를 섞은재료를 사용하든, 홍순모는 그가 애용하는 잡석이나 수성암이 지니는 원초적인 거친 질감을 최대한으로 표현한다. 특히 돌을 조각할 때 그는 원래의 돌이 지닌 조야한 형태와 표면을 가능한 한 적게 다듬는다. 이렇게 인공적 요소가 절제되므로써 그의 돌조각들은 '자연 오브제 objet naturell 처럼 보이며, 따라서 오랜 기간 동안 풍상을 겪은 불상이나 문,무인상들, 돌하루방, 심지어는 평범한 돌들을 연상시킨다. 그의 조각에서 보이는 기교의 절제와 그에 따른 질박質朴한 멋은 산업화 이전 한국의 서민 미술과 생활에서 보여졌던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서구식으로 표현하면, 아르 부뤼art brut식으로 표현된 인물들이 "수난의 관상', 즉 '압박받은 자'의 전형으로 해석되기도 한다(1996 개인전 도록, 황지우). 그러나 자아성찰적인 홍순모의 작품들에 나타난 이러한 기법 또한 정치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범인凡人의 전형을 창조하기 위한 방식의 하나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 보았듯이 인물 묘사를 중심으로 한 한국의 구상 조각은 부분적으로 정치적으로 해석된 것이라 하더라도 강령적으로 사회 현상을 고발하거나 비판하기 보다는 대부분이 자기 반영적이고, 따라서 사적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이 한국 미술에서 지배적인 기교의 절제 미학과 결합되므로써 한국인이면 공감하게 되는 독특한 서정성이 생겨났다.


김정희 (미술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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