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전시

오늘의 한국조각 '97-사유의 깊이

전시명: 오늘의 한국조각 '97-사유의 깊이

전시기간: 1997.05.07 - 1997.05.31

전시장소: 모란갤러리

참여작가: 박종배, 엄태정, 박석원, 최인수, 안규철, 이수홍

전시내용:


사유의 깊이


  최근 현대미술의 경향은 작품의 내용이 미술적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넘어서 인간의 삶에 대한 근원적인 것에서부터 아주 미세하고 복잡한 상황까지로 확대되고 있다. 장르의 의미는 물론이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과학적이냐 미술적이냐 하는 질문이 아무 의미가 없을 정도로 개방적인 상태이다. 미술사에서 논의되는 매체에 대한 정의도 새로운 확대를 하지 않으면 않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시점에서 한국의 현대 조각도 여러 경향이 혼재하고 있는데이 전시회는 그 중에서도 비교적 자신의 독특한 조형 어법을 지속하고 있는 박종배, 엄태정, 박석원, 최인수, 안규철, 이수홍 등의 6인을 선정하여 "사유라는 Process를 통하여 인간의 내면을 추적해 보는 현상을 보여주고자 한다. 초대작가의 연령은 60대 초반에서부터 40대초반에 이르기까지 약20년의 터울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작업을 관통하는 주된 흐름은 "인간의 사유와 관계되는 것으로서의 구조" 이다. 이러한 관점은 최근의 다원화 현상 때문에 하나의 존재적 개체로서의 인간이 보수적인 예술에 대한 통념만 가지고는 유지될 수 없는 매우 간박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의식하고 있음이며, 오히려 그 혼돈의 와중에서 자기 확신에 대한 근거를 찾아가기 위해 설정된 것이다. 따라서 이 전시회는 매스미디어의 생산과 강한 생식력에 대응하여 삶의 좌표를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강한 의지이며, 판단의 기준조차 모호해 지는 세기말적 상황에서 자기의 고집스러운 사유의 과정과 수동적인 작업 과정이 하나로 만나는 6인의 작업에 주목하고자 했다.

  박종배의 작업은 무엇인가를 밀어내고 또는 서로 견인되는 "하나의 관계 설정"을 느끼게 한다, 그 관계 설정은 매우 유기적인 성격을 가지면서 또한 사색적인 과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그 나타난 작업의 결과는 실존하는 형태 같기도 하고 의식의 저편에 깔려 있는 심층 구조의 외형화같기도 하다,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기도 하며, 의식의 앙금에 가라앉아 있는 것들을 사연이라는 형식에 담아 내기도 하며, 심리적 갈등이나 이성적인 단계를 뛰어넘는 관조의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며, 인간 의식의 겉과 속을 연결시키려 하기도 하며, 편견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속성을 고발하기도 하는 매우 대층적이며 상징적인 Shape을 연출하고 있다. 특히 박종배의 구조로서의 조각들은 조형예술의 특징적인 요소와 결과로 관계지을 수 있지만, 단순한 Mass의 나열이 아닌, 그것의 내부와 표화로서의 관계 설정임을 지적할 수 있으며 이때의 Shape과 구조는 매우 에로틱한 면과 더불어 드라마틱한 느낌을 전달하고 있다. 따라서 박종배의 작업은 사유의 개입이라는 매우 추상적인 언어가 관계와 구조라는 조형적 외형화의 긴장감으로 나타나고 있다.

  엄태정의 작품에는 장소적인 특성이 보인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자연이나 풍경을 의미하기도 하며, 나아가 그 대지로 부터의 소리나 기운을 담아내려는 시도가 돋보인다. 여기서의 장소적 특징이라는 것은 그 Location 안에서의 생활과 적응으로서의 인간적인 응전을 의미하며, 그것을 구체화시키는 과정 중에서 주술적인 사상의 개입을 지적할 수 있으며 이러한 표현의 방법으로서 나열적인 형식과 매체의 혼합이라는 복합성을 띄게 되었다.

  매우 거시적인 자연과 그것의 객관자로서의 인간을 대비시키면서 자연적인 물성과 인위적인 물성의 혼합을 시도하고 있으며 그 혼합의 구성은 처음의 물성을 떠나는 직관적 감수성을 발휘하고 있다. 80년대의 매우 구조적이면서도 미니멀한 작업에서 최근의 작업은 매우 주술적이면서도 나열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평면의 입체화나 입체의 평면화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발상"을 시도하고 있다.

  박석원의 작업들은 쌓는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작업이다. 이때 쌓는다는 것은 쌓고(積) 짜 맞추는 과정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긴장과 이완이라는 상반되는 개념이 공존하고 있다. 긴장과 이완이 새로운 해석으로서의 쌓는다는 작업은 그것의 반복성을 유지시키면서 무심해지려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심 속의 응집력은 물성의 다양한 변주라는 등가물을 탄생시키면서 정방형의 완성을 향하는 하나의 패턴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 패턴은 積 이라는 형태적 상태와 切이라는 과정으로서의 형식이 필요하며 따라서 이 필요는 반복으로서의 목표를 가지게 되었다. 적과 절의 공존, 반복되는 과정을 잇는 응집력 등은 죽음이라는 문제를 상기시키고 있으며 무표정한 돌의 변주속에서 "무표정의 표정' 이라는 매우 이율배반적인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박석원의 작업은 이 과정 중에 형태에 앞서는 구조체로서의 심리적 구조가 있을 수 있으며, 이러한 구조 속에 숨어 있는 심리적 구조의 무심함에 주안점을 둘 수밖에 없다.

  최인수의 작업은 인위적인 無爲性의 매우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 작용은 많은 생각의 사변성을 의미하며 이 간극 사이에 물성이라는 긴 인터벌을 가진 무기체가 개입하기도 한다. 이때의 물성들은 "자리 옮김" 이나 "형태들의 조응" 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면서 시간이라는 절대자를 끌어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 시간이라는 절대자와 물성의 변모라는 두 개의 축은 최인수를 구속하면서 반복적으로 순환되고 있다. 이 순환의 간격과 긴장은 최인수의 심리적 변환과도 관계 지을수 있으며 이 긴장감을 無化시키려고 하면 할수록 최인수의 갈등은 더욱 더 뚜렷하게 나타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보편을 지향하고 있으며, 그 지향 점에 '순환' 이라는 공간적 연장이 차갑게 서 있다.

  자유로워지는 의지와 함께, 사물 속에 감추어진 진실을 규명하려는 최인수의 고뇌와 여정으로서의 기술적 체험은 시간이라는 절대자를 명분으로 하여 자신을 무화 시키려는 구속의 순환을 계속하고 있다.

  안규철의 작업은 "예술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그의 작업은 정보화 사회가 판을 치고 있는 현대 사회 속에서 인간의 사유가 지닌 예리함을 일깨우고 있는 작업이여 은유적이면서도 매우 상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보이는 것과 보이게 하는 것 사이에서, 비교적 정직하게 작가의 위치를 인식하는 상황에 안규철은 자리하고 있으며, 미술이라는 포장된 허위에 대해서 제동을 걸고 있으며, 이 포장 속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미술이라는 작업을 타인의 문제에서 자신의 문제로 회귀시키는 자기 독백적인 형식으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안규철의 작업은 상황 연출이라는 매우 특이한 연극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그 연출의 시도는 상식과 관념을 부셔 버리려는 치밀한 계산이 숨어 있다. 이 치밀함을 위해서 단순한 왜곡이 아닌 체험과 관조라는 필터를 설정하고서 그 필터를 통해서 걸러진 것만이 인정될 수밖에 없다는 단호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 길들여진 미술이 아닌, 개념만으로 쇠뇌 당한 미술이 안닌, "체험과 확인" 이라는 윤리성을 지향하고 있다.

  이수홍의 작업은 두 가지의 입장을 동시에 생각하면서 진행하고 있다. 그것은 삶과 죽음에 관련되는 서로 다른 입장을 의미하며, 단순한 반대의 입장이 아닌 하나로서 공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의미하며, 살아 있음과 그렇지 않음은 물리적인 차이일 뿐 하나의 공간과 의식 속에서 만나고 균형을 찾으려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태어남과 사라짐은 하나의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그것은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구조체로서의 조각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만듬과 선택의 대비를 통해서," 의식의 양면성과 그 내면을 이루는 구조적인 상이함을 통해서 전체를 이루는 현실이 하나임을 증거하고 있으며, 그 평형의 상태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끼고있다. 이 편안함은 움직이는 긴장의 상태를 의미하고 있으며 날마다 새롭게 탄생하려는 몸부림으로서의 긴장 상태인 것이며, 이수홍은 이것의 근원을 자연에서 발견하려 하고 있다. 그것에 대한 증거 과정으로서의 작업이 바로 이수홍의 작품의 결과인 것이다.

  20세기는 매스미디어의 시대로 명명되고 있으며, 과학이라는 기술이 삶이라는 형태로 치환될 수도 있는 상황까지 만들어 놓았다. 더하여 과학이 곧 삶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컴퓨터는 이러한 과정에 촉매역활을 하면서 예술이라는 형식을 새로운 양상으로 합성시키고 있다. 따라서 정보와 예술을 만남을 시도하면서 이 다양한 합성 속에서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계산과 첨단의 영상감을 활용하여 전통적인 예술관에 위기감을 조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이것을 발견하고 이용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발명은 다른 매체와 합성되어 새로운 편리함과 표현 형식의 확대라는 공적을 이룩하고 있지만, 그 예술의 확장으로서 이성적인 논리가 가진 한계선은 새로운 발명과 함께 또하나의 보수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가진 사유라는 흔들림은 인간이 지구상에서 멸망하는 그날까지, 죽은 후에도 살아 움직이는 어떤 메신저가 될 수 있으며, 이때 "살아있음의 증거로서의 사유하는 인간만이 가진 무한한 가능태임을 또한번 증명하게 될 것이다.


김용대 / 호암미술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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