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전시

金貞淑

전시명: 한국 현대 조각의 선구자 金貞淑 5주기 회고전

전시기간: 1996.12.06 - 1996.12.30

전시장소: 모란갤러리

참여작가: 김정숙

전시내용:


<飛翔>을 꿈꾸며 날아간 자애롭던 조각가 


이 경 성(미술평론가·前국립현대미술관 관장)


  5년 전에 작고한 조각가 金貞淑에 대해서 여러 사람들이 글을 쓴 바 있다. 그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 1962년 서울 신문회관에서 가진 작품전에 김환기가 썼던 간단한 글이고 다음으로 1971년 역시 신문회관에서 개최한 작품전에 본인이 <김정숙의 작품세계〉라고 쓴 글이 있다. 1978년에는 현대화랑에서 열린 김정숙 조각전에 이일이 <원형태 속의 생명의 율동>이라는 본격적인 평론을 썼고, 1983년 현대화랑 개인전에서도 역시 이일이 <비상의 형태 속의 정감>이라는 글을 쓴 바 있다. 이일은 그 후 1985년 현대화랑 개인전 때도 마찬가지로 날개, 그 영원한 비상〉이라는 평문을 썼다. 1991년 2월 19일 그녀가 별세한 후 92년 5월에 1주기전이 호암갤러리에서 개최되었는데 이때 본인이 <김정숙 회고전에 부쳐>라는 글을 썼고 서양화가 이대원이 <김정숙 회고전에 즈음하여>라고 짤막하게 쓴 글이 있다. 그리고 호암갤러리 큐레이터인 한정욱이 <비상에 이르는 추상에의 도정>이라는 긴 평문을 썼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작가론이나 예술론보다 좀더 부드럽게 그의 인간에 대한 회상과 그의 작품이 남겨 놓은 조각의 발자취를 살펴보고자 한다.


부드러운 감성과 자애로운 품성


  조각가 김정숙이 살아온 시대만 하더라도 사람들이 정에 얽히어 살고 인간적인 정취가 가득 찼던 때였다. 남달리 정이 두텁고 인간적이었던 김정숙은 조각가라기보다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가족과 사회와 어울려 왔다. 나 자신도 조각가 김정숙으로서 그녀를 먼저 알게 된 것이 아니라 1930년대부터 친지로서 사귀어온 남편 김은우(金恩雨)의 부인으로서 알았기 때문에 그녀와의 관계에 있어 서 인간적인 분위기가 더욱 짙었다. 더욱이 김정숙은 만학으로서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즉 일찌감치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그런 후에야 조각가가 되기 위해서 홍익대학교에 입학했던 것이다.

  자신보다 젊은 교수들에게 수업을 받고 딸, 아들과 같은 젊은이들과 어울려서 공부를 했던 그 자체가 남이 갖지 못하는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만학에서 오는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을 잘 참아내고 오히려 누구보다도 열심히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이 만학이라는 사정이 조각가 김정숙을 남보다 진지한 사람으로 만든 원인이기도 했다. 학교에 다닐 때 젊은 동급생들이 '마담 조각가' 라고 별명을 짓고 교수들도 그 별명을 이름처럼 쓰곤 했다. 인간으로서의 김정숙은 이미 아내와 어머니라는 생활의 틀에 박혀있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공부할 때에도 학생이라기보다는 어머니와 같은 분위기를 짙게 풍기곤 했다. 특히 동료 학생들과의 대화에서 인자한 어머니로서의 태도를 지녔다. 원래 부드러운 감성과 자애로운 품성을 갖고 있던 탓도 있지만 특히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사랑이 몸에 배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자애로 가득 차 있었다. 이같은 인간에 대한 사랑은 당연히 자신의 작품 세계에까지도 연장되었다.

  조각가 김정숙의 작품이 여인상과 모자상을 중심으로 하는 애정 표현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도 결국 그녀의 인간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김정숙은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을 사랑하듯이 작품 세계에 있어서도 인간 정애의 표시, 특히 여성으로서 모성애의 표현에 가장 극치를 보여 주었다.


추상화된 날개에 실은 飛翔의 꿈


  김정숙은 사람을 대할 때나 작품을 대할 때나 언제나 한결같았다. 즉 애정 어린 태도로서 대상을 다루었고 표현했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그녀의 몸에 배인 기독교적인 사랑의 실천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녀의 음성은 늘 가라앉아 있었고 좀처럼 높은 옥타브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언제나 상대를 감싸는 것과 같은 자비로운 태도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의 작품은 주로 애정에 넘치는 모자상이나 여인상, 그리고 애무하는 주제가 많았다. 이와 같은 조각가 김정숙이 가졌던 주제상의 일관성은 그녀가 여성이라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조각사상 가장 많이 제작되었던 여인상의 문제와도 통하는 것이다. 여인을 대상으로 한 조각의 역사는 멀리 선사시대 뷜렌도르프의 비너스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고전시대의 비너스, 중세의 마리아상, 본격적으로 조각이 독립된 예술의 한 장르로 확립되는 근세 이르러 수많은 여인상 특히 로댕과 부르델의 여신상을 거쳐서 20세기의 아르프나 브랑쿠지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은 김정숙의 조각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된다. 여인상을 바탕으로 조각의 역사를 고찰해 볼 때 김정숙이 여류 조각가라는 점과 함께 그녀의 작품을 이해하는 근거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특히 조각가 김정숙이 표현에 있어서 추상적인 데에 기울어진 것에는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아르프나 브랑쿠지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한때 김정숙은 브랑쿠지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거의 동일한 작품 세계에 몰두한 적도 있었다. 그녀가 남긴 많은 작품 중에서 걸작으로 뽑히는 작품들의 대부분이 브랑쿠지적인 추상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탐색 끝에 그의 작품 세계는 커다란 변모를 가져오게 된다. 그것은 '비상'을 주제로 한 일련의 작품으로서 날개를 소재로 한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김정숙 조각의 결론처럼 되었지만 모든 조각가가 바라고 있는 예술의 세계이기도 하다. 사실 조각이라는 것은 지구 인력의 지배를 받고 있는 물체를, 그 물체가 돌이건, 나무이건, 금속이건 지구 인력에서 해방시켜 가볍게 하늘로 뜨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늘로 난다는 것은 오랜 꿈이었고 그것이 과학의 힘에 의해서 가능해졌다. 조각가들 역시 마찬가지로 하늘 높이 난다는 것을 최상의 꿈으로 생각했다. 모든 조각가는 무거운 물체를 가볍게 공간 속에 뜨게 함으로써 자신의 작품을 완성시키기를 바랐던 것이다. 가령 루브르 미술관의 <사모트라케의 여신상>은 수십 번이나 무거운 바위에다 날개를 달아줌으로써 가볍게 공간 속에 떠있게 한 것이다.

  김정숙 역시 물체를 지구 인력에서 해방시켜 하늘 높이 뜨게 하는 꿈을 가졌다. 이것의 실현이 곧 만년의 작품의 주제인 <비상>이다. 날개만을 표시했기 때문에 사모트라케의 여인상과는 표현상의 차이점을 갖고 있지만 기능적으로 '난다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두 날개의 추상적인 표현이 보다 강조되었다. '비상'은 평생 자비로운 어머니로서의 애정 어린 여성상을 제작한 그가 하늘 높이 비상하기를 바랬던 정신적인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인간은 땅 위에서 살고 있다. 그러기에 대지는 인간의 어머니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대지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고 싶어한다. 마치 죽어서 영혼이 훨훨 하늘로 날아가듯이. 조각가 김정숙은 자신이 삶의 방법으로 채택한 조각을 통해 이 꿈을 이루었다. 즉 <비상>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하늘 나라에 올라간 것이다.


맺음말

  지금까지 김정숙을 그의 인간, 혹은 조각가로서의 측면에서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것은 교육자로서의 김정숙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자애, 모성애 등을 지닌 사람은 당연히 그의 주변에 모인 사람에게 따뜻한 온정을 베풀고 감화를 준다. 교육자로서의 김정숙이 바로 그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 사제지간이라기보다는 모자지간이라는 느낌을 받는 정감이 김정숙과 그녀의 제자들 사이에서 오고 갔다. 홍익대학교에서 제자들에게 수업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조각 기술의 전달이라는 것보다도 거기에 모인 제자들과 인간적인 관계를 쌓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기에 그의 제자들은 평생동안 그와의 관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김정숙의 5주기에 즈음하여 그의 추모전을 한다기에 그녀와 같은 직장에서 같은 시절을 살았던 한 사람으로서 그녀에 대한 것을 다시 생각하여 본다. 한없이 자애롭던 그녀의 모습을 일부분이나마 제대로 전달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飛翔, 고독을 이겨낸 한 조각가의 영혼


박종배(재미 조각가)


  김정숙 선생님은 고독한 작가였다. 긴 예술의 노정에 처음부터 혼자였다. 만학을 하셨기 때문인지 같은 길에 대하여 얘기할 수 있었던 허심탄회한 지기(知己)가 없었다. 그 당시는 작가들의 사회가 주변환경에 더 민감해 있었고 참여의식에 의존된 작가생활에 비중을 두던 때라 그룹활동이 더 활발했다. 미국에서 현대조각을 연구하고 돌아오신 선생님은 연령적으로 어느 특정된 조각가 그룹에 가담되지 못하고 혼자셨다. 그것은 그가 최초의 한국 현대 여류조각가요 처음으로 외국에서 연구한 여성조각가였기 때문에 겪은 일이기도 하다. 밝은 것을 찾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에는 아직도 고답적인 찌꺼기가 남아 있던 사회였던지라 새로운 조각의 흐름을 갈망하면서도 이를 수용하는 데는 늘 주저하는 습성이 있었다.

  선생님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다. 그러나 선생님의 측근에서 함께 작품을 논하며 지냈던 제자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 말년으로 접어들면서 그에게는 더욱 고적한 생활을 이겨나가야 하는 무거운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의 고독은 그의 작품 주제와 비례한다. 선생님이 행복하다고 여기시던 초기 작품들의 주제는 주로 인물이었다. 반면에 고독한 말년을 맞이하면서 점차 사물로 그 시선을 옮겼다. 

  선생님의 고독은 고고한 그의 천품(天)에서 비롯된다. 그의 제작 태도에서 가다듬어진 완벽주의적 성품이 인간관계에 적용될 때 이는 또한 그를 고독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전 생애를 통해서 견디기 힘겨웠던 고독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신의를 저버렸을 때였다. 선생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이 사랑을 기다리며 수많은 나날을 고독과 함께 사셨다. 선생님의 작품 중 '비상' 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그의 고독을 잘 나타낸다. 마지막까지 이 주제가 선생님의 생활권 안에 있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침잠된 고독으로부터 탈피하고 싶은 무의식 안의 의식적 작품이다. 그러한 고독을 견딜 수 있었거나 이길 수 있었던 것도 그분의 고고한 천성과 함께 작가적 기질에 의존되었던 그의 작품 때문이라고 믿는다. 신의를 저버린 사랑이 고독으로 대체되었지만 그는 고독과 함께 할지언정 그 사랑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기다리셨다. 사랑을 잊으면 고독도 떨쳐버릴 수 있음을 알고 계셨다. 선생님에게는 잊음의 약이 약이 되지 못했다. 제작에의 몰입은 측정할 수 없는 고독의 구멍을 덮는 뚜껑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여러 번 권하여 드렸지만 잃어버린 사랑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고 고백하셨다. 신뢰가 무너졌을 때 그는 한번도 원망하신 적이 없었다. 그의 사랑에 대한 공허를 메꾸기 위해서 선생님은 생을 마칠 때까지 기다림이라는 긴 통로를 걷고 계셨다. 이 기다림은 마치 선생님의 조각이 완성되는 긴 연단과 같은 과정이었다.

  이 같은 긴 밤들을 위해서 선생님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들이 선생님께 위로가 되기를 늘 바랐다. 그분의 사랑은 완벽주의적 자세에서 얻어지는 어떤 작품의 형식이었을까? 모든 바람을 잃고도 제작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던 것도 철저한 작가적 기질 때문이 라고 생각한다. 그의 체질로서는 제작될 작품의 한계에 도저히 도전하지 못하리라고 생각되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선생님의 체력은 여자 중에서도 약하신 편이었다. 선생님은 작품을 제작할 때 체력보다는 정신력과 의지력에 의존하셨다. 체력이 점점 쇠진되어 가시던 말년에도 제작에 집착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분의 의지력에 의한 작가적 욕망 때문이었다. “체력에 의존하여 작품을 만드셨다면 선생님께서는 벌써 쓰러지셨을 것입니다만 선생님의 의지력에 의해서 지금까지 제작해 오시지 않았습니까"라고 말씀드리면 이 말에 수긍하시며 웃으시던 모습을 다시 상기하게 된다. 

  선생님은 남편 김은우 선생님을 너무도 사랑하셨다. 작품의 완성을 위해서 최대의 기법을 적용하셨던 것처럼 그의 영혼 가운데 최선을 다하여 그분을 담고 계셨다. 그러나 그 분에 대한 신뢰가 와해되던 상황에서도 그의 완벽주의적 자세는 좌절되지 않았다.

  서양의 현대조각이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었던 길은 미술교육기관을 통해서였다. 실제로 현대조각의 도입은 바로 대학을 통하여 방법론과 재료의 실험적 모색이 이루어졌다.

  선생님은 현대조각에서 응용되는 다양한 재료를 학교 교육에 처음으로 도입시켰을 뿐 아니라 기법상의 논리를 제작에 적용시킨 교육을 시도하셨다. 말하자면 기법과 재료에 따른 재질이 강조되어 형태의 자율적 변화가 시도된 현대조각을 위해서 그는 새로운 학교 교육의 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선생님이 남기신 공적 중의 하나가 우리 나라에 금속조각을 도입한 선구자의 한 사람이란 점을 상기한다면 쉽게 이해되는 부분이다. 이러한 일들에는 재량(才量)이 좁거나 급변하는 면모에 동참하기를 꺼려하는 교육기관일수록 오히려 저항력을 나타낸다. 그는 동조자보다 저항하는 힘에 몰려야고 뒤따르는 고독과 함께 오직 혼자 버텨야 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셨다. 그때는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까지 하셨다.

  그는 엄격한 미술교육자였다. 그의 엄격성은 학교가 적(籍)만 둔 관념적인 작가양성을 위한 기관이 아니라 각자의 노동력이 동원되어 제작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하는 교육기관임을 인식시키는 데 늘 나타났다. 그의 엄격하고 엄정한 교육자의 기준과 성격은 기질만을 내세우던 작가들로부터 거리감을 갖게 했다. 전 생애를 모교에 담으셨지만 학교는 그를 더욱 고적한 위치에 남겨두었다. 나는 일찍이 선생님으로부터 조각하는 법을 배웠고 조각하는 자세를 배웠으며, 더불어 작가가 가져야 하는 인내도 배웠다. 그가 내게 보여준 제작의 엄격성은 내 작품의 민감성으로 이끌어졌다. 그는 철용접으로 조각하는 기법을 내게 최초로 가르쳐 주셨다. 나는 멀리 떠나 있었지만 선생님은 나를 만날 때마다 조각으로부터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온갖 문제를 제시하셨고 그 해결을 논의하셨다. 돌아가시기 몇 년 전까지도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실까"라고 물어보시던 그분의 질문은 더욱 순수한 것으로 집요되고 있었다.

  한 작가의 작품들은 전 생애와 함께 자신의 생활을 어떻게 담았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선생님의 작품 중 대상물의 주제가 얼마만큼 깊게 그의 생애를 대신하여 말하고 있는가. 선생님의 초기 작품들에 등장하는 주제는 인물을 근간으로 한 것들이다. 엄마와 아기, 연인, 와상, 토르소 등은 인체에 의한 양감의 조각적 수단과 인간관계 모색의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작품에 나타난 주제들은 선생님에게 있어서 인간관계와 함께 애정의 영역이다. 이러한 주제들은 또한 선생님의 생활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은근히 알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인체를 대상으로 표현되었을 때를 지나 자연을 연관시키는 주제와 함께 70년대 중반부터 표현되기 시작한 '비상'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 의미는 선생님의 생활권의 변화이며, 새로운 환경의 변화에 대한 염원이다. '비상' 은 선생님의 말년의 생활 환경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선생님을 오랫동안 묶고 있었던 무서운 고독으로부터 탈피하고 싶었던 염원은 '비상' 과 함께 다시 변화 있는 조형세계로 이끌어가게 했다. '비상'은 시달린 인간관계보다 자연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던 그의 마지막 염원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작품에 대한 집념은 '비상' 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통해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 작품들은 초기의 유기적 공간 개념으로부터 기하학적 면을 강조시킨 더욱 추상적인 공간 개념으로 탈바꿈했다.

  선생님의 조각에 도입된 재료들은 그 폭이 넓다. 용접 조각을 위해 철재와 유기판, 동판, 심지어 유리까지 사용하셨고 춘양목(고궁기둥), 소나무, 은행나무 등의 목재와 대리석을 주요 재료로 삼으셨으며, 테라조 등도 소개하셨다. 그는 이미 청동 주물조각에 사용되는 화공약품에 의한 청동착색법까지 알고 있었다. 다양한 재료의 선택과 사용을 학교 교육으로까지 끌어들인 선생님의 공헌을 우리는 쉽게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선생님의 작품은 재료의 속성을 잘 부합시킨 예다. ‘비상’을 주제로 한 말년 작품들은 대리석의 정결한 성격을 잘 부합시킨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가 이태리의 대리석을 즐겨 사용했던 이유도 작품으로 표현될 이미지가 대리석의 속성과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청동주물작품은 처음부터 청동작품을 위해서 제작된 것이 몇 점 안된다. 직접 조각의 과정을 강조하시던 선생님에게 간접제작과정을 필요로 하는 주물조각은 적합치 않은 방법이었다. 또한 주물 조각은 작품의 마무리가 좋지 않다는 문제점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의 청동 주물작품들은 이미 석재나 목재로 만들어진 작품들이 예리한 선과 최대한 공간을 필요로 할 때 다시 만들어졌다. 선생님이 브론즈 작품의 완성도에 늘 만족하지 못하셨던 것은 주물공장의 기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조각은 대상을 다른 재료에 옮겨 놓는 작업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옮겨 놓는 과정에서 사물의 본질을 찾아내는 수단으로 작가는 일을 할뿐이다. 사실적인 작품이든 추상적인 작품이든 간에 작가의 노력은 사물의 본질에 가장 가깝게 접근하는 데 있다.

  선생님의 작품들은 이러한 과정에서 표현되기 때문에 잡다한 옷을 벗기듯 작가가 의도하는 본질에 쉽게 접감(接感)할 수가 있다. 그 본질은 무엇일까? 그것은 대상의 표제가 함축하고 있는 대로 바로 생명에로의 접근이다. 그가 전 작품을 통해서 유기적이든 기하학적이든 작품의 표현 형식을 초월하여 추구했던 대상의 본질은 생명체의 생태적 모색에 있다. 그의 작품은 어떤 사물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생성되는 생명의 본질에 의한 환희를 체험하게 한다. 그의 작품은 감각에 의하여 다가온다고 보기 쉬우나 엄밀한 공간과 양감의 언어로 다가오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들은 엄격한 조각적 언어 안에서 창작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 적용된 단순성의 의미는 대상의 적격한 내적 표현을 위한 기법상의 방법에 기인된 것을 말한다. 그의 작품이 단순성 안에서 만들어진 이상 그는 남달리 비례에 철저한 문법을 적용시켰다. 이러한 비례에 철저한 엄격성을 내세우지 않는 볼륨을 허용한다면 그는 자신의 작품을 해석하는 데에 단순성의 개념을 적용하는 것을 거절하셨을 것이다. 견고한 재료를 도입하는 직접 조각에서 비례에 철저한 조형어법은 선생님이 말년에 집착한 <비상> 시리즈를 만드신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시켜 준다. 그에게 있어 중량은 양괴의 대소에 있지 않았다. 오직 밸런스와 비례에 의존될 때 희고 커다란 대리석 덩어리는 어느새 '새'가 아닌 '낮음' 의 혼이 되어 가벼이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는 고독을 이겨낸 한 조각가의 영혼이 실려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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