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전시

또 다른 흐름 전

전시명: 또 다른 흐름 전 Another Flow in Korea

전시기간: 1999.10.20 - 1999.11.10 / 1999.11.13 - 1999.12.26

전시장소: 모란갤러리 /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국대호, 김수진, 김용철, 김태곤, 박지아, 안성희, 이진아, 전용석, 조헬렌, 홍봉석

전시내용:


신세대 작가들의 또 다른 흐름


사막을 지나며


  지나간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 사이의 한국은 세계 열강들의 어지러운 각축장이었다. 우리 민족은 제국주의 열강의 세력 다툼 속에서 희생양이 되었다. 가난한 민족이 변화의 큰 격류에 고단하고 허약한 몸을 맡기기에는 그 흐름이 매우 거칠었으며 거슬러 오르거나 가로지르기에도 마땅한 통로를 찾지 못하였다. 고난과 역경은 비단 우리만의 특수한 사정은 아니었다. 한 세기의 시작에서 많은 약소 국가와 민족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고 희생되어야 했다. 그 동안 시간은 결코 약자들의 편은 아니었다. 또한 역사의 진보라는 관념의 육중함에 깔려 인류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 동안 수백만의 생명도 무기력하게 사라져 버렸다. 비대해진 이데올로기 아래 휴머니티는 모래사장의 사금만큼이나 귀해졌고 그 위를 20세기가 질주했다.

  그리고 다시 1999년 세기말이다. 새로운 천년이 임박했다.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자본주의로 통합되고 이른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를 모토로 무한 경쟁 속으로 이끌려 가고 있는 지금 밀레니움은 재앙의 얼굴로 우리에게 먼저 다가왔다. 헐리웃은 첨단 과학 기술을 빌려 역설적으로 하이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인류 미래의 암울한 이미지들을 거침없이 토해 내고 있다. 밀레니움 버그, Y2K, 암울한 종말론 등이 먹물처럼 쏟아지고 이어서 낙후된 경제 금융 체제에서 비롯되었다는 유동성 외환 위기, 이른바 IMF의 경제 관리 체제가 들이닥쳤다. 경제적 위기는 수많은 생활인들의 안정된 삶을 뒤흔들어 놓아 사회적 위기를 초래하였고, 이것은 다시 인간 존엄을 파괴하는 정신의 황폐화로 이어졌다.

  하지만 진정한 예술가는 고통 속에서 단련되고 위대해진다는 금언이 무색하게도, 자기 정체성에 대한 가치 상실을 우리 시대의 일상의 모습으로 이야기하지만 막상 그것에 대한 걱정의 소리는 들어보기가 힘들다. 우리의 문화는 심지어 비판과 저항의 역동인 정신조차 상업화하여 매몰시키거나 순간적인 여흥의 일부로 흡수해 버린다. 창조성은 이미 예술의 무게 중심이 아니고 미술은 더 이상 인간 의식의 정점에 서지 못한다는 말들이 거침없이 오간다. 요란한 구호와 소동의 끝자락에서 오는 나른한 쾌감에 자족하여 우리의 미술은 이제 의식의 변화를 이끌 힘을 상실했다. 그러나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낙관만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우려한다.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비판적인 창조의 힘을 미술 고유의 언어로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이제 이 황량하고 삭막한 사막을 건너며 새로운 희망을 찾고자 한다.


출구를 향한 지도 그리기


  국대호의 작업은 우선 눈에 띄는 원색적인 색채와 함께 미니멀 회화에서 물체의 속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취하는 형식인 화폭의 반복과 나열의 배치가 그의 작업을 모더니즘 회화의 연속적인 선상에 놓고 보게끔 한다. 그는 작품을 배치할 때 우리의 옛 여인네들의 조각보를 연상시키는, 그가 Patchwork라 부르는 원색면의 사각형들을 보색으로 대비하여 연결시키거나 일정한 간격과 질서를 부여하여 공간에 재배열한다. 그러나 유채색의 면은 농도가 다르게 채색되고, 붓자국과 색의 농담에 따라 생기는 표면의 질감은 붓질이라는 행위의 흔적이나 작가의 개성보다는 색조의 풍부함과 물성을 먼저 인지케 하고 있다. 그의 다폭화(Polyptyque)는 도상을 배제하고 있으며 건축에 쓰이는 벽돌처럼 공간의 구축을 위한 재료의 속성을 지니게 된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수직과 수평의 선들이 색면의 구성에 건축적 조합의 안정감을 부여하고, 원색의 병치는 색채의 상징성을 서로 상쇄시키고 오브제로서의 물성을 강화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색면들이 실제 공간의 일부로 놓여질 때 미적 효과와 함께 상호 보완적인 작업으로 마무리된다. 

  이에 비해 안성희는 공간 요소의 대표로 평면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것은 벽에 의지하여 걸리는 전통적인 회화의 면이 아닌 일상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 조형 요소로 자체의 독립성을 유지한다. 따라서 그녀의 평면은 캔버스에 한정되어있지 않고 생활 환경 주변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꽃이나 풀과 같은 것들로 채워진다. 그녀는 그림을 가두는 의미로써의 유무형의 캔버스 자체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원래 실제 공간에 위치한 평면으로 꽃과 풀들이 옮겨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기하학적 공간은 문화적 생활을 누리기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된 것이다. 이것과 대비하여 그녀는 생명력 넘치는 자연을 의미하는 꽃과 풀들을 그리고 있다. 그녀의 명상적인 꽃그림은 뚜렷한 이미지가 배제됨으로써 언어로 쉽게 환원할 수 없는 모호함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사물을 통해 언어를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 시적인 감흥을 느끼게 한다.

  김용철은 몸에 바르는 바셀린을 매우 세심하게 쌓아올린다. 원래 불에 데인 상처와 같은 곳에 발라 치유적 기능을 하는 이것은 그의 작업에서 마치 요셉 보이스의 지방 덩어리와 닮은 지점에 위치한다. 이 질료를 다루는 데에는 무척이나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작업에 소요되는 절대 시간은 순간적인 기의 투여가 필요하기 때문에 소요되는 정신적 에너지의 양에 비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아 보인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이 약품 덩어리는 주변 공간에 개념적이고 미묘한 밀도를 부여하여 관객의 시선을 조용하지만 집요하게 장악한다. 그의 작업은 물리적 행위를 통해 공간에 깊은 흔적을 남기지 않더라도 보는 이들의 정서에 촉촉하게 스며들고 있다.

  일상이 작업 속으로 당당하게 들어오는 조헬렌의 작업에서는 거창한 사회적 발언보다는 그저 담담한 일상이 예술적 행위와 만난다. 개인의 일상과 개성이 어떻게 예술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가는 매우 미묘한 문제이다. 하지만 역으로 그것이 그녀에게 사회적 발언의 장을 제공한다. 그녀는 평범하지만 꾸준한 노동인 뜨개질로 여성 신체의 특징과 생식 기관을 떠올리게 하는 생태적 형상들을 꾸준히 짜고, 형태적 연관성과 직접적인 행위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성의 문제를 제기하여 일상의 문제에 대응시킨다. 이 둘은 일상과 예술 사이의 엄격한 관계를 교란하며 예술의 가치를 삶의 속으로 수용하고 있다.

  박지아는 그녀가 이미 익숙하게 다루는 매체인 비디오 설치 작업을 통해 여성으로써 내재되어 있던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다. 그녀는 동아시아라는 지역성과 함께 문화적 맥락의 정체성과 관련된 여성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문화적 코드를 선택하고 이것들을 낱줄과 씨줄처럼 능란하게 조합하여 강도 높은 사회적 발언을 한다. 중성적이지만 보다 여성에 가까운 이미지의 인형들이 카메라의 공격적인 앵글에 클로즈업되고 집단으로 등장한다. 이 작가의 강렬한 시각은 자신이 속한 사회 집단 개성의 폭력성으로 인해 개인의 개별성이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드러나지 못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박지아의 작업은 여성의 감수성이 예술을 통한 사회의 반영에서 더욱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생태 환경에서 개발을 위한 공사 등을 이유로 파헤쳐져서 전시 공간으로 옮겨진 홍봉석의 나무 뿌리는 위치의 전치에 대한 문제를 언급한다. 장소의 상호 교환은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 사이에서 격렬한 사회적 관계가 맺어지게 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낯설음의 미적 가치는 나무 뿌리의 곁에 발린 종이의 창백함 때 문에 더욱 극적으로 보인다. 이 종이는 상처를 복원하여 사물을 다시 온전케 하는 보호막처럼 느껴진다.

  김태곤의 작업은 예술의 영역이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는 가운데 조각의 전통적 관심이었던 공간의 문제를 새롭게 환기시켜 주었다. 공간은 위치에 대한 좌표가 매겨져야만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인터넷을 통해서 접하게 되는 가상 공간의 예를 들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매우 질긴 실을 선택하여 실제 공간에 직접 설치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팽팽하게 당겨진 수직선과 수평선, 그리고 사선이 촘촘히 교차하면서 허공 속에서 의자와 같은 사물을 재현하지만, 실제 사물의 그것과는 다른 공간의 밀도 차이로 환원시켜 시각화 한다. 그 재현된 사물은 실제 공간에서 가상 현실의 새로운 리얼리티를 경험케 하고 새롭게 확장되어 가는 조각 영역의 공간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참가한 작가 중 가장 신예인 이진아는 자신의 몸을 그대로 떠내고, 그것을 마치 거대한 누에고치, 혹은 알과 같은 형태로 감싸고 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내외부 공간이 비틀려져 음각과 양각의 표면이 하나의 공간 내에 공존하고 있다. 작가의 신체가 빠져 나온 빈 공간은 소라 껍질의 나선형 구조에 닮게 형상화 되었고 다시 이질적인 재료로 항아리의 형태에 가깝게 겹겹이 감싸서 내적인 언어들을 이미지화 한다.

  김수진의 철가루로 두툼하게 뒤덮여 있는 신문은 정보를 얻기 위해 텍스트에 의존하는 것을 유머러스하게 비튼다. 작가가 임의로 선택하여 배열한 날짜 지난 신문들이 관객의 손에 의해 철가루가 제거되고, 관객들은 내용이 뒤죽박죽 뒤섞인 신문 헤드라인과 기사들을 읽는다. 관객과의 소통을 위한 방법으로 이 상호작용 과정에 참여한 관객은 선택적 지식을 임의의 맥락으로 관련지어 새롭게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 작가가 의도하는 대로 기존 사회 체계에 대한 가치의 혼란을 겪게 된다. 거대한 힘을 틀어쥐고 정보 제공과 소통을 임의로 조절하는 언론과 미디어의 폭력성에 대한 은근한 비유이다. 하지만 이러한 메타 예술적인 작업은 작가의 표현 의도에 충실하기 위해서 물질들을 기능화, 도구화하고 있으므로 전통적인 조각가들이 재료를 마주 대하는 태도와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전용석은 주관적인 해석을 요구하는 풍경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상가나 시장, 그리고 그가 생물로 이해하고 있는 증권 거래소 등 그의 그림 소재들을 쫓다 보면 그의 그림이 지극히 사회 정치적인 맥락의 산물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재현'으로서의 풍경이 아니라 주관 속에 스며드는 일상임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풍경은 색이 바래진 천연색 사진처럼 윤곽이 흐리고 저채도의 색으로 입혀져 작가가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결코 곱지만은 않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이번에 일상의 풍경 속에 고야의 서로 싸우는 두 사내들의 그림을 삽입한 작업을 선보였다. 이 그림은 맹목적인 증오로 가득한 폭력에 대한 알레고리로 이미 여러 작가들에 의해 인용된 적이 있다. 그리고 증권 거래소 풍경의 일부를 따온 또 하나의 작업과 연결할 수 있게 해주는 비판적 고리로 작용하고 있다.


새로운 예감


  실재와 가상이 이루는 경계가 급격히 허물어지고 가시적 통로가 다각도로 실현되면서부터 시간은 지극히 개인적인 속도를 갖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개개인이 경험하는 시간의 속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예전에는 도저히 하나로 결합할 수 없으리라 여겼었던 것들이 합쳐지고 있다. 신화와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리라고 간주했던 것들이 첨단 기술에 힘입어 눈앞에 현존하게 되는 충격을 겪으며 이전의 문화적 교환 차원에서 물질계 사이에, 그리고 생물계 사이에서 조합이 아닌 혼성의 사물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렇게 급변하는 오늘날 일부 작가들은 작가의 정신의 흔적들이 아주 표피적으로 다루어지며 겸손한 체하며 작품에서 지워지기 일쑤이다. 지적 성장을 위한 노력은 소홀히 하고 자신들의 작업은 현학적 장신구로 치장하여 적절히 포장하는 것에 그치고 있지는 않은지, 본질적인 작업에 대한 관심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한 적당히 감각적인 이슈를 찾아 떠돌아다니고 있지는 않은지 이들에게 묻고 싶다. 작가는 자신의 위치에 대해 끊임없이 되물어야 할 것이다. 내가 지금 싸우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 정신인가, 아니면 생활 속의 삶의 전장인가. 그것을 판단하고 결정하여 적당히 표백된 사이비 예술과,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모든 것들과 맞서야 한다. 따라서 국내에서 작업을 하는 이들에게는 작가로서의 재능과 용기, 자질 외에도 강인한 무엇인가가 필요한 것 같다. 

  이 전시에 출품한 열 명의 작가들은 20대에서 30대 초반의 나이이다. 쉽지 않은 지적 주제에 대한 작업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비교적 명쾌하고 담담하다. 주어진 환경에 대한 유연한 대응이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중 하나이다. 삶의 방식과 우리의 환경은 하나의 줄기에서 나오는 가지이다. 패러다임은 이미 변했다. 다만 그것이 어떤 구조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지 않았을 뿐이다. 무엇도 새삼스레 새로울 것이 없는 세상에서 “Something New”를 찾는다는 것이 무의미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작가들의 사회와 인간에 대한 애정과 비판적 사고야말로 이들을 눈 여겨 볼 만하게 한다.


최흥철

모란 미술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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