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四人의 視覺
전시기간: 2001.05.03 - 2001.05.31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김세중, 김정숙, 백문기, 윤영자
전시내용:
四人의 視覺
이경성 李慶成 (미술평론가)
한국조각의 현대적 상황
한국의 근대조각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1920년 김복진이 동경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서양식 조각을 연구한데서 비롯한다. 그래서 김복진의 작품은 어디까지나 그가 공부한대로 사실적인 수법을 띈 아카데믹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조각을 비로소 근대적인 안목으로 바라보고 창조하였다는데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한국의 생활주변에는 삼국시대 이래 역대의 뛰어난 석조조각이 얼마든지 있기에 조각적인 환경은 풍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각을 하나의 예술로써 바라보는 시각은 없었던 것이다. 그것도 유럽적인 미학의 바탕에 서서 조형으로써 조각을 인식하기에는 거리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현실과 이상을 하나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예술로써 출발시킨 이가 선각자 김복진이다. 더구나 재료의 다양성을 인식하고 흙과 석고, 나무, 돌, 금속 등 온갖 소재를 조형의 수단으로써 택하였다는 사실도 이 무렵에 일어난 하나의 획기적인 사실이었다. 김복진은 이와 같이 한국의 조각을 출발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존재이다. 좀처럼 미술의 대접을 받지 못하였던 조각미술이 김복진의 서양식 조각의 연구 및 도입으로 정당하게 인식되고 시작한 것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는 토월미술연구회(土月美術硏究會) 및 고려미술원(高麗美術院), 청년학관미술과(YMCA靑年學館美術科) 등에서 서양식 조각을 교수하여 이 방면의 계몽과 개발에 기여했다. 그러나 당시의 풍조로는 서화협회같은 민족미술의 개발을 위해 결성된 미술운동 속에서도 조각은 아직 발판을 정립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문석오, 김종영, 윤승욱, 김경승, 윤효중, 전봉래, 양희문, 장기남, 안규웅, 구본웅, 홍성덕, 박순성, 김두일, 이국전, 김정수, 유경렬, 안찬주 등과 같이 서양 조각을 공부한 사람이 나오게 되었다. 동경에서 조각을 공부한 그들의 활동무대는 주로 동경의 제국미전(帝國美展), 이하 제전(展)-후의 문부성미술전람회(文部省美術展覽會), 이하문전(展))과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이하 선전(鮮展)이었다.
문전에 김복진이 여인상을 출품한 적이 있었고, 기타 4, 5인의 조각가가 출품하여 초기에 활동을 보였다. 결국 이 시기의 조각은 말이 조각이지 대부분 소조(塑造)이고, 혹간 목조가 섞인 정도였다. 말하자면 김복진이 이때 들여온 서양식 조각이란 ‘소조(塑造)'였던 것이다. 그러나 점토를 빚어서 석고로 완성시키는 소조(塑造)는 당시의 조각계를 매료시키는 새로운 수법이었다. 작품경향은 대부분 그들이 공부한 동경미술학교의 관학적인 아카데미즘이 지배적이었고, 개인적으로는 당시 일본의 조각가 아사쿠라 후미오(朝倉文夫), 도바리 고강(戶張孤雁), 후지 야쓰히로(藤五浩祐), 그리고 1935년 이후 시미스 다까시(淸水) 등의 영향이 보인다. 주제는 대부분 습작정도의 것으로 얼굴이나 흉상 같은 소품이었다. 초기에 활약한 김복진이 도중에 사상문제로 옥중에 갇히자 동경에서는 문전을 무대로 한 조규봉 등이, 그리고 서울에서는 선전을 무대로 한 김경승, 윤승욱, 윤효중 등이 활동하였다.
나는 이와 같이 1940년대 말 동경에서 조각을 수업한 사람들을 한국조각의 근대적 과정에서 여명기를 장식한 조각가라고 본다. 그들에 대한 연구는 이전에도 해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번에 모란미술관에서 기획한 '四人의 '그들에게서 사사 받은 해방 제1세대에서 우선 김세중, 김정숙, 백문기, 윤영자의 네 사람을 압축하여본다. 물론 해방 제1세대에는 그들 이외에도 김영중, 김영학, 전뢰진, 김찬식, 전상범, 강태성, 민복진, 송영수, 최종태, 성낙인, 유한원, 장기인, 박철준 등이 있다.
1945년 해방직후 서울대학교 예술대학이 창설되고 미술학부에 윤승욱과 김종영이 교수로써 조각을 가르치자 젊은 조각가가 모여들고 이때부터 한국의 근대조각이 새로운 방법과 각성된 의식을 갖고 새 출발하게 되었다. 이때에 서울대학교에 모인 사람은 백문기, 성낙인, 유한원, 장기인, 김세중, 김영학, 박철준 등이었다. 그 후 이화여자대학교의 미술대학과 홍익대학교의 조각과가 생기고, 홍익대학의 조각과 에는 윤효중, 김경승 등이 교수로써, 김정숙, 윤영자, 김영중, 최기원, 김찬식 등이 학생으로써 모였다. 이와 같이 서울대학과 홍익대학, 이화여자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한 학생들의 활동무대는 국전조각부와 각 미대전, 미협전, 그리고 때때로 개최되는 조각 개인전이었다. 그러나 1951년 이후에는 동상건립과 모뉴멘트 제작의 기풍이 일어나서 조각가의 사회참여가 시작되었다.
1960년대 유럽에서 새로운 조각사조가 들어오고, 또한 새로운 재료, 즉 철제 등이 도입됨에 따라 구상적 양식에 머물던 조각도 추상적인 세계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 무렵에 조각계의 동향으로 주목할만한 것은 1946년 해방직후에 창설된 조선조각가협회가 있으나 그것 자체는 별로 활동이 없었다. 더구나 이것마저도 미술계가 좌우익으로 분열되는 바람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따라서 이 시기에 조각계로써 의미를 갖는 것은 1949년에 창설된 국전조각부였다. 국전의 조각부는 다른 미술도 그러했지만 갈피를 잃고 우왕좌왕하던 한국의 미술가들에게 갈 길을 지시하고 설자리를 마련해주었다. 1949년 창설된 국전의 조각부는 그때까지 산발적으로 그림에 붙어서 존재하던 조각을 그림과 대등한 위치에서는 예술로써 확립시켰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 시기는 근대조각에서 현대조각으로 옮겨진 과도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무렵의 조각계를 이끌어간 것은 일제시대에 동경미술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한 김경승, 윤효중, 김종영 등의 중견작가 이고 신인으로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사람은 김세중, 김정숙, 백문기, 윤영자, 강태성, 최의순, 최만린, 김영중, 김영학, 김식, 민복진, 배영식, 송영수, 최기원, 이승택, 전뢰진, 전상범, 최종태 등이었다.
1953년은 한국동란 때문에 부산으로 남하했던 정부가 전국의 소강을 타서 서울로 환도했던 해로써 이것을 계기로 하여 한국의 현대조각은 본격적인 정착을 서둘렀던 것이다. 정부환도 이후의 조각계는 국전 및 미협전에 조각부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나 1958년 이후에는 조선일보주체의 현대작가초대전의 조각부가 전위를 내걸고 아카데믹한 조각에 도전하였다. 이 무렵의 조각활동은 앞에서 여러번 언급했듯이, 주로 전람회 위주였는데 그것도 국전, 대한미협전, 한국미협전, 각 미술대학 및 현대작가초대전 등이었다. 한국의 근대조각이 현대로 접어들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황폐해진 국토재건의 틈바구니에서 일어난 건축의 붐과 더불어 국가적인 정책이 뒷받침이 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조각이 새로 건설된 건물내외에 설치되었고 국토재건이라는 커다란 슬로건 밑에 전국적으로 환경조각이 만들어졌다. 그와 더불어 이순신 장군상, 세종대왕상 등 많은 기념 모뉴멘트가 전국 방방곡곡에 세워졌다. 이러한 기운 속에서 조각가는 할 일이 많아졌고, 그들의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동시에 국민의 소득이 향상되어 생활수준도 향상되고, 각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도 조각을 설치하는 기풍이 생겼다. 이러한 크고 작은 조각 붐이 결국은 한국의 현대조각을 단시일 내에 현대 속으로 끌어들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金世中
조각가 김세중의 작품에는 공간을 비약하는 힘찬 모뉴멘탈한 운동감이 있다. 거기에서 작용하는 것은 남성적인 힘의 상태가 작품 전체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조각가를 보면 두 가지 아름다움에 속해있다. 하나는 부드러운 아름다움, 다시 말하면 우미(美)라는 여성적인 아름다움이다. 또 하나는 씩씩한 남성적인 아름다움, 다시 말해서 장미(美)의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게 보면 조각가 김세중은 우미(優美)보다는 장미(壯美)의 세계에 속하는 조각가라고 할 수있다. 자기 작품을 감성적인 아름다움에 빠지지 않게 하고 장미(美)적인 힘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조각가 김세중의 세계이다. 이 두 가지 아름다움 즉, 우미)와 장미(美)는 아름다움의 양극으로써 우리는 흔히 하나를 우미(優美)라 표현하고 또 하나를 장미(美)라고 표현한다. 우미(優美)라는 것은 여성적인 아름다움이 대표적으로써 정에 빠져서 그것에서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장미(美)는 남성적인 로써 美에 빠지지 않고 그것을 벗어나서 또 다른 방향으로 달음박질하는 힘의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보면 모든 조각가는 이 두 가지 유형에 분류된다. 조각가 김세중을 모뉴멘탈한 장미(美)의 작가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평생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이라는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조각가가 되고 그것을 중심으로 작가로써 살아온 그에게 있어서 자기의 본질적인 체질인 모뉴멘탈한 성격은 분에 넘치는 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그는 그러한 아카데믹한 틀에서 벗어나서 가끔 외도를 하고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러한 좋은 예가 그의 생애 마지막을 장식한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다. 이것이야말로 남성적인 김세중이 가장 자기의 본질을 잘 나타내고 실력을 충분히 활약할 수 있는 본격적인 무대였던 것이다. 스케일이 큰 기획과 방대한 양의 일을 단시일 내에 그것도 만평 가까운 커다란 미술관 건물을 지으면서 현대미술을 갑자기 세계 속으로 전개시킨 그의 남성적인 행동력은 다른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그만의 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조각가로써의 김세중은 그 이전에 이미 전국토를 대상으로 많은 동상조각과 모뉴멘트를 창조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미적 감수성을 충분히표현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조각가 김세중에 있어서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첫째, 품격의 문제이고, 둘째, 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추궁이다.
첫째, 품격에 대한 것은 모든 그의 작품이 제작 이전에 격을 갖추고있고, 그 격을 어떻게 아름다움에 연결시키느냐 하는데 고심한다. 이러한 미의 격조는 조각가 김세중의 체질에서 오는 것으로써 다른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특질이다.
두 번째, 미에 대한 본질을 추궁한다는 것은 물론 모든 예술가가 다 그러한 입장에 서있는 것이지만 특히 조각가 김세중은 작품에 임할 때구상단계에서부터 완성단계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인 투시도를 생각하고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입장에서 바라다보면서 자기 자신을 형성하는 것이다. 아깝게도 1986년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그는 그가 이세상에서 할 일을 산더미처럼 남겨놓고 저 세상으로 갔다. 장수를 누린 장거리 선수도 아니고 반짝거리며 천재적인 빛을 발한 단거리 선수도 아닌 중거리 선수인 그는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라는 역사적인 일에 눌리어서 본의아니게 조각가로써의 생애를 마쳤던 것이다. 모든 것이 운명이라고 하면 그것으로써 납득이 가지만 김세중의 경우는 좀더 시간을 갖고 이 세상에 할 일이 남았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모든 사람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남이 일생을 두고도 하지 못한 일을 58년이라는 생애 속에서 마쳤고, 나름대로 이 세상에 책임을 다한 조각가 김세중은 해방 제1세대의 조각가로써의 그 발자취를 충분히 남겨놓았다고 할 수 있다.
金貞淑
조각가 김정숙의 작품이 여인상과 모자 상을 중심으로 하는 애정표현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결국 그녀의 인간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김정숙은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을 사랑하듯이 작품세계에 있어서도 인간 친애의 표시, 특히 여성으로써 모성애의 표현에 가장 극치를 보여 주었다. 김정숙은 사람을 대할 때나 작품을 대할 때나 언제나 한결같았다. 즉 애정 어린 태도로써 대상을 다루었고 표현했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그녀의 몸에 배인 기독교적인 사랑의 실천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녀의 음성은 늘 가라앉아 있었고 좀처럼 높은 옥타브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언제나 상대를 감싸는 것과 같은 자비로운 태도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의 작품은 주로 애정에 넘치는 모자 상이나 여인상, 그리고 애무하는 주제가 많았다. 이와 같이 조각가 김정숙이 가졌던 주제상의 일관성은 그녀가 여성이라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조각사상 가장 많이 제작되었던 여인상의 문제와도 통하는 것이다. 여인을 대상으로 한 조각의 역사는 멀리 선사시대 뵐렌도르프의 비너스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고전시대의 비너스, 중세의 마리아상, 본격적으로 조각이 독립된 예술의 한 장르로 확립되는 근세에 이르러 수많은여인상 특히 로댕과 부르델의 여인상을 거쳐서 20세기의 아르프나 브랑쿠지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은 김정숙의 조각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된다. 여인상을 바탕으로 조각의 역사를 고찰해볼 때 김정숙이 여류 조각가라는 점과 함께 그녀의 작품을 이해하는 근거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특히 조각가 김정숙이 표현에 있어서 추상적인 데에 기울어진 것에는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아르프나 브랑쿠지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한때 김정숙은 브랑쿠지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거의 동일한 작품세계에 몰두한 적도 있었다. 그녀가 남긴 많은 작품 중에서 걸작으로 뽑히는 작품들의 대부분이 브랑쿠지적인 추상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탐색 끝에 그의 작품세계는 커다란 변모를 가져오게 된다. 그것은 '비상(飛翔)'을 주제로 한 일련의 작품으로써 날개를 소재로 한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김정숙 조각의 결론처럼 되었지만 모든 조각가가 바라고 있는 예술의 세계이기도 하다. 사실 조각이라는 것은 지구 인력의 지배를 받고있는 물체를 그 물체가 돌이건, 나무이건, 금속이건 지구 인력에서 해방시켜 가볍게 하늘로 뜨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늘로 난다는 것은 오랜 꿈이었고 그것이 과학의 힘에 의해서 가능해졌다. 조각가들 역시 마찬가지로 하늘 높이 난다는 것을 최상의 꿈으로 생각했다.
모든 조각가는 무거운 물체를 가볍게 공간 속에 뜨게 함으로써 자신의 작품을 완성시키기를 바랐던 것이다. 가령 루브르 미술관의 '사모트라케의 여인상'은 수십 톤의 무거운 바위에다 날개를 달아줌으로써 가볍게 공간 속에 떠있게 한 것이다. 김정숙 역시 물체를 지구 인력에서 해방시켜 하늘 높이 뜨게 하는 꿈을 가졌다. 이것의 실현이 곧 만년의 작품의 주제인 '비상(飛)'이다. 날개만을 표시했기 때문에 사모트라케의 여인상과는 표현상의 차이점을 갖고 있지만 기능적으로 '난다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추상적인 표현이 보다 강조되었다. '비상'은 평생 자비로운 어머니로써의 애정 어린 여성상을 제작한 그가 하늘 높이 비상하기를 바랬던 정신적인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인간은 땅 위에서 살고 있다. 그러기에 대지는 인간의 어머니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대지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고 싶어한다. 마치 죽어서 영혼이 훨훨 하늘로 날아가듯이, 조각가 김정숙은 자신이 삶의 방법으로 채택한 조각을 통해 이 꿈을 이루었다. 즉 '비상(飛)'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하늘 나라에 올라간 것이다.
白文基
조각가 백문기는 조각가 이전에 미술교수로써 출발하였다. 그는 서울예고와 이화여자대학 등에서 후진을 양성하며 자기 자신도 조각가로써 성장하였다. 그러기에 조각가 백문기 시각에는 우아한 감각과 미에 대한 탐닉이 앞선다. 그에게 있어서 대상이란 무엇이든지 애정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써 그것을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성시킨다. 다시 말하면 조각가 백문기의 시각은 철두철미하게 리얼리즘이다. 그에게 있어서 리얼리즘이란 존재의 의미를 본질적으로 찾아 들어가서 존재감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눈에 비치는 그대로를 존중하고 그것을 아름답게 재생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체질적인 리얼리스트인 백문기의 조각작품에는 눈앞에 전개되는 리얼리티가 문제일 따름이다. 어떤 존재가 생기기 이전의 문제라던가 그 존재가 생긴 후의 문제 같은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2차적인 것이 된다. 그것은 이 아름다운 세계를 인간이 갖고있는 감각과 감성으로 해석하고 거기에서 일어나는 미적인 작용을 있는 그대로 찾아내고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철두철미한 리얼리스트인 조각가 백문기는 자기 작품을 제작하는데 있어서 두 가지 법칙에 따른다. 즉 하나는 볼륨의 문제이고 또 하나는 비례(proportion)의 문제이다.
첫 번째인 볼륨의 문제는 조각예술의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써 볼륨을 떠나서 조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각을 어느 의미로는 양의 예술이라고 하는 것도 여기서 오는 이야기이다. 가령 그가 가장 많이 다루고있는 인체에 있어서 볼륨이란 인체를 구성하는 외양적인 요소로써 보는 사람의 시각을 긴장시킨다. 알맞은 살 붙임에서 시작되는 그의 이와 같은 볼륨의 창조는 그가 가장 많이 제작한 동상조각에서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흙으로 빚은 볼륨의 표현은 적당한 모델링이 되어서 보는 사람에게 쾌감을 준다. 모자라지도 않고 남지도 않는 그러한 알맞은 볼륨의 표현이야말로 백문기 작품의 가장 핵심인 것이다.
또 하나 그가 즐겨서 사용하고, 어느 의미에서는 그의 작품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비례 문제이다. 이것 역시 인체조각 다시 말하면 초상조각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방법으로써 사람을 5등신으로 나누어서 표현할 때와 6등신으로 나누어서 표현할 때, 그는 사지와 동체와 머리를 그가 계산해낸 아름다운 비례로써 형성한다. 따라서 동상조각가인 백문기에 있어서 대상이된 인물의 상황보다도 그가 만들고자하는 작품의 미적인 고려가 더욱더 중요한 문제로 등장한다. 비례는 그리스조각의 가장 근본적인 아름다움으로 표현되지만 또한 모든 인간을 표현할 때 가장 중요한 표현수단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작품인 사람의 인체 자체가 벌써부터 정확한 비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물론이다. 따라서 조각가 백문기가 어느 사람의 동상을 만들 때 거기에는 그 사람이 가지고있는 체격과 같은 선천적인 요소도 중요하지만 그가 만들고자하는 또 하나의 인간에 자의적으로 비례를 주어서 아름다운 예술을 형성하는 것이다. 평생 아름다운 인체를 찾아서 신의 작업에 뒤쫓은 조각가 백문기의 시각에는 공간을 넘어서 멀리 퍼져가는 인간의 감성과도 같은 시적인 세계가 있다.
尹英子
조각가로써의 윤영자 편력을 보면 이른바 좁은 의미의 조각가와 모뉴멘트 제작자로써의 윤영자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비단 윤영자의 경우뿐만 아니라 모든 조각가의 작품을 두 가지로 나눈다면 즉, 조각과 기념 구조물로 구분된다. 윤영자의 작가적인 생애를 돌이켜봐도 이 두 가지 기능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지금도 그 현상은 계속되는 것이다.
조형하면 인간이 형태를 창조하는 것이고 거기에는 규모가 큰 것이 모뉴멘트이고, 규모가 작은 것이 조각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등신대 이하의 인체조각이나 작품들은 이른바 좁은 의미의 조각이 되고 등신대 이상의 보다 큰 규모의 모뉴멘트는 기념 구조물이 된다. 따라서 한 작가가 만든 것이라 하더라도 규모가 작은 조각에 쏟는 예술적 가치와 보다 큰 규모의 기념 구조물에 쏟는 경우는 작가의 능력과 이루어진 예술적인 성과가 다르다. 조각가 윤영자의 경우만 보더라도 초기의 소조물 조각의 작품에 뛰어난 역량을 보였던 바. 후기부터는 대규모의 모뉴멘트를 만들고 나서부터는 디자이너로써의 직능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윤영자의 조각주제는 주로 여인상과 모자상이 주류를 이룬다. 이것은 근대이후의 모든 조각가가 즐겨 쓰던 주제로써 애정을 표시하고자 하는 가장 적합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여인상과 모자상은 세계 조각사에서 불굴의 주제로써 거의 모든 조각가들이 다루는 것이었다. 여인상은 생활주변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존재, 신의 피조물이 여인이었기에 그 여인상을 조각함으로써 아울러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했던 것이다.
그러한 여인상과 모자상도 우선 재료에 따라서 표현의 효과가 다르다. 윤영자는 초기에 석고상으로서 그것을 표현했다. 그리고 나서 돌로 교체되고, 그 돌이 다시 금속으로 변형되면서 같은 주제이건만 표현의 효과가 달라졌다. 윤영자의 경우 어느 것이 가장 자신다운 것이냐 하는 것은 단적으로 이야기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돌은 돌대로, 금속은 금속대로의 맛이 있기 때문에 비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여인상과 모자상의 주제에서 차이점은 그 구성이 입체일 경우와와상일 경우가 있다. 수평으로 누워있는 여인상과 아기를 안은 채 서있는 여인상은 수직으로 공간에 직립하고 있다. 그것은 지구의 인력을 송두리째 긍정하면서 굳건히 서있는 것이다. 그러나와상일 경우에는 수평으로 운동을 머금고 공간의 어느 일점을 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대표적인 예가 1978년의 '사랑' (브론즈)과 1987년의 '사랑' (대리석)등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조각가 윤영자의 작품은 구상과 추상의 중간지대에 서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추상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구상적인 요소가 많고, 구상이라 보기에는 너무나 추상적인 요소가 많은 그의 작품이다.
사실 구상적인 인체를 볼 때 그것을 형성하고있는 모든 공간적 요소인 볼륨이나 선이나 운동감 같은 것은 그 자체가 추상적인 요소로서 정리된다. 자연의 생명체인 인간의 육체는 따라서 구상인 동시에 추상적인 존재이다.
조각가 윤영자는 그러한 비밀을 감지하고 나름대로 자기의 데포메이션(deformation)으로서 표현하고 있다. 조각가 윤영자는 제작생활 43년의 긴 세월을 거쳐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성장하고 변모하여 이제는 인생의 원숙기에 접어든 진정한 예술가가 되었다.
맺는말
1996년도이래 매년 연간 기획전으로 치러지는 모란미술관의 <오늘의 한국조각> 2001년도 전시인 四人의 視覺 展은 결국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해방 제1세대의 조각가중에서 경향별로 가까운 네 사람을 택하여 전시하게 되었다. 그 네 사람이라 함은 김세중, 김정숙, 백문기, 윤영자이다. 이들 중 김정숙과 윤영자는 여성 조각가로써 여성특유의 섬세하고 우미(優美)한 감정을 작품에 표출하여서 여성 조각가다운 특이를 여지없이 나타내고 있다. 백문기와 김세중은 남성 조각가로써 남성이 가지고있는 모뉴멘탈한 작품을 나타내서 남성의 기질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김정숙과 윤영자가 비록 개인적인 감각의 차이는 있어도 두 사람 모두 해방 제1세대에 속하는 여성 조각가로써 당시 우리 나라가 받아들인 브랑쿠지와 아르프등의 흐름 속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애정의 표시를 작품에 나타내고자 하였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 모두 사실이 아닌 구상의 테두리에서 대상을 바라보고 조각에 친밀한 애정을 불어넣었다. 모녀상이나 여인상 등에서 느낄 수 있는 풍부한 애정표현은 이 작가들의 풍부한 감성의 표현이었다. 그것도 사실적인 방법이 아니라 구상적인 방법으로 군데군데 주관적으로 처리한 것이 눈에 띈다. 한편, 남성작가인 백문기와 김세중은 남성다운 기질로써 스케일이 큰 모뉴멘탈한 효과를 자기 작품에 나타내고 있다. 다만 김세중이 구상적인 수법으
로 군데군데 주관적인 처리를 한 것에 비해, 백문기는 어디까지나 철두철미하게 시각적인 사실을 표현했다. 김세중이 국토 여기저기에 세운 모뉴멘트는 동상조각에서 그의 인간적인 스케일을 표현한데 비해서, 백문기는 대상으로 접어들면서 철두철미하게 개성을 표출한 초상조각의 진수에 육박했던 것이다.
그들이 비교적 많은 작품을 제작하고 자기의 실력을 과시할 수 있었던 것도 앞에서 이야기하였듯이 1950년대 이후 전쟁으로 황폐화된 국토를 재건하는 기풍 속에서 더구나 모뉴멘탈한 기념근조물이나 동상조각을 세우는 풍토 속에서 일거리가 얼마든지 있었다는 것도 그들에게는 그들의 예술을 발현시키는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이상과 같이 해방 제1세대에 속하는 네 사람의 조각가 김세중, 김정숙, 백문기, 윤영자는 때마침 일어나고 있는 역사적인 기운 속에서 조각가로써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에 봉착한 것이다. 물론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은 한국의 조각계가 근대에서 현대로 옮겨지는 전환기에 있었기때문에 그들에게는 근대적인 요소와 현대적인 요소가 교차되고있는 것이다. 그러한 역사적인 분기점에 서서 마음껏 작품을 한 이들 해방 제1세대의 작가들은 그 이전에 근대 조각의 선각자 김복진에 비해서 퍽이나 행운에 찬 조각가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들이 근대와 현대의 가로놓여있기 때문에 오늘에 시점으로 보면 역사의 갈림길에서 우왕좌왕하면서 시간과 예술을 낭비한 것도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 '4인의 시각'은 그들뿐만이 아니라 그와 더불어 있는 많은 해방 제1세대 작가들 그리고 그 후에 지속되는 젊은 조각가들 속에 끼여들게 된다.
전시명: 四人의 視覺
전시기간: 2001.05.03 - 2001.05.31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김세중, 김정숙, 백문기, 윤영자
전시내용:
四人의 視覺
이경성 李慶成 (미술평론가)
한국조각의 현대적 상황
한국의 근대조각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1920년 김복진이 동경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서양식 조각을 연구한데서 비롯한다. 그래서 김복진의 작품은 어디까지나 그가 공부한대로 사실적인 수법을 띈 아카데믹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조각을 비로소 근대적인 안목으로 바라보고 창조하였다는데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한국의 생활주변에는 삼국시대 이래 역대의 뛰어난 석조조각이 얼마든지 있기에 조각적인 환경은 풍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각을 하나의 예술로써 바라보는 시각은 없었던 것이다. 그것도 유럽적인 미학의 바탕에 서서 조형으로써 조각을 인식하기에는 거리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현실과 이상을 하나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예술로써 출발시킨 이가 선각자 김복진이다. 더구나 재료의 다양성을 인식하고 흙과 석고, 나무, 돌, 금속 등 온갖 소재를 조형의 수단으로써 택하였다는 사실도 이 무렵에 일어난 하나의 획기적인 사실이었다. 김복진은 이와 같이 한국의 조각을 출발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존재이다. 좀처럼 미술의 대접을 받지 못하였던 조각미술이 김복진의 서양식 조각의 연구 및 도입으로 정당하게 인식되고 시작한 것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는 토월미술연구회(土月美術硏究會) 및 고려미술원(高麗美術院), 청년학관미술과(YMCA靑年學館美術科) 등에서 서양식 조각을 교수하여 이 방면의 계몽과 개발에 기여했다. 그러나 당시의 풍조로는 서화협회같은 민족미술의 개발을 위해 결성된 미술운동 속에서도 조각은 아직 발판을 정립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문석오, 김종영, 윤승욱, 김경승, 윤효중, 전봉래, 양희문, 장기남, 안규웅, 구본웅, 홍성덕, 박순성, 김두일, 이국전, 김정수, 유경렬, 안찬주 등과 같이 서양 조각을 공부한 사람이 나오게 되었다. 동경에서 조각을 공부한 그들의 활동무대는 주로 동경의 제국미전(帝國美展), 이하 제전(展)-후의 문부성미술전람회(文部省美術展覽會), 이하문전(展))과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이하 선전(鮮展)이었다.
문전에 김복진이 여인상을 출품한 적이 있었고, 기타 4, 5인의 조각가가 출품하여 초기에 활동을 보였다. 결국 이 시기의 조각은 말이 조각이지 대부분 소조(塑造)이고, 혹간 목조가 섞인 정도였다. 말하자면 김복진이 이때 들여온 서양식 조각이란 ‘소조(塑造)'였던 것이다. 그러나 점토를 빚어서 석고로 완성시키는 소조(塑造)는 당시의 조각계를 매료시키는 새로운 수법이었다. 작품경향은 대부분 그들이 공부한 동경미술학교의 관학적인 아카데미즘이 지배적이었고, 개인적으로는 당시 일본의 조각가 아사쿠라 후미오(朝倉文夫), 도바리 고강(戶張孤雁), 후지 야쓰히로(藤五浩祐), 그리고 1935년 이후 시미스 다까시(淸水) 등의 영향이 보인다. 주제는 대부분 습작정도의 것으로 얼굴이나 흉상 같은 소품이었다. 초기에 활약한 김복진이 도중에 사상문제로 옥중에 갇히자 동경에서는 문전을 무대로 한 조규봉 등이, 그리고 서울에서는 선전을 무대로 한 김경승, 윤승욱, 윤효중 등이 활동하였다.
나는 이와 같이 1940년대 말 동경에서 조각을 수업한 사람들을 한국조각의 근대적 과정에서 여명기를 장식한 조각가라고 본다. 그들에 대한 연구는 이전에도 해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번에 모란미술관에서 기획한 '四人의 '그들에게서 사사 받은 해방 제1세대에서 우선 김세중, 김정숙, 백문기, 윤영자의 네 사람을 압축하여본다. 물론 해방 제1세대에는 그들 이외에도 김영중, 김영학, 전뢰진, 김찬식, 전상범, 강태성, 민복진, 송영수, 최종태, 성낙인, 유한원, 장기인, 박철준 등이 있다.
1945년 해방직후 서울대학교 예술대학이 창설되고 미술학부에 윤승욱과 김종영이 교수로써 조각을 가르치자 젊은 조각가가 모여들고 이때부터 한국의 근대조각이 새로운 방법과 각성된 의식을 갖고 새 출발하게 되었다. 이때에 서울대학교에 모인 사람은 백문기, 성낙인, 유한원, 장기인, 김세중, 김영학, 박철준 등이었다. 그 후 이화여자대학교의 미술대학과 홍익대학교의 조각과가 생기고, 홍익대학의 조각과 에는 윤효중, 김경승 등이 교수로써, 김정숙, 윤영자, 김영중, 최기원, 김찬식 등이 학생으로써 모였다. 이와 같이 서울대학과 홍익대학, 이화여자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한 학생들의 활동무대는 국전조각부와 각 미대전, 미협전, 그리고 때때로 개최되는 조각 개인전이었다. 그러나 1951년 이후에는 동상건립과 모뉴멘트 제작의 기풍이 일어나서 조각가의 사회참여가 시작되었다.
1960년대 유럽에서 새로운 조각사조가 들어오고, 또한 새로운 재료, 즉 철제 등이 도입됨에 따라 구상적 양식에 머물던 조각도 추상적인 세계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 무렵에 조각계의 동향으로 주목할만한 것은 1946년 해방직후에 창설된 조선조각가협회가 있으나 그것 자체는 별로 활동이 없었다. 더구나 이것마저도 미술계가 좌우익으로 분열되는 바람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따라서 이 시기에 조각계로써 의미를 갖는 것은 1949년에 창설된 국전조각부였다. 국전의 조각부는 다른 미술도 그러했지만 갈피를 잃고 우왕좌왕하던 한국의 미술가들에게 갈 길을 지시하고 설자리를 마련해주었다. 1949년 창설된 국전의 조각부는 그때까지 산발적으로 그림에 붙어서 존재하던 조각을 그림과 대등한 위치에서는 예술로써 확립시켰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 시기는 근대조각에서 현대조각으로 옮겨진 과도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무렵의 조각계를 이끌어간 것은 일제시대에 동경미술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한 김경승, 윤효중, 김종영 등의 중견작가 이고 신인으로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사람은 김세중, 김정숙, 백문기, 윤영자, 강태성, 최의순, 최만린, 김영중, 김영학, 김식, 민복진, 배영식, 송영수, 최기원, 이승택, 전뢰진, 전상범, 최종태 등이었다.
1953년은 한국동란 때문에 부산으로 남하했던 정부가 전국의 소강을 타서 서울로 환도했던 해로써 이것을 계기로 하여 한국의 현대조각은 본격적인 정착을 서둘렀던 것이다. 정부환도 이후의 조각계는 국전 및 미협전에 조각부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나 1958년 이후에는 조선일보주체의 현대작가초대전의 조각부가 전위를 내걸고 아카데믹한 조각에 도전하였다. 이 무렵의 조각활동은 앞에서 여러번 언급했듯이, 주로 전람회 위주였는데 그것도 국전, 대한미협전, 한국미협전, 각 미술대학 및 현대작가초대전 등이었다. 한국의 근대조각이 현대로 접어들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황폐해진 국토재건의 틈바구니에서 일어난 건축의 붐과 더불어 국가적인 정책이 뒷받침이 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조각이 새로 건설된 건물내외에 설치되었고 국토재건이라는 커다란 슬로건 밑에 전국적으로 환경조각이 만들어졌다. 그와 더불어 이순신 장군상, 세종대왕상 등 많은 기념 모뉴멘트가 전국 방방곡곡에 세워졌다. 이러한 기운 속에서 조각가는 할 일이 많아졌고, 그들의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동시에 국민의 소득이 향상되어 생활수준도 향상되고, 각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도 조각을 설치하는 기풍이 생겼다. 이러한 크고 작은 조각 붐이 결국은 한국의 현대조각을 단시일 내에 현대 속으로 끌어들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金世中
조각가 김세중의 작품에는 공간을 비약하는 힘찬 모뉴멘탈한 운동감이 있다. 거기에서 작용하는 것은 남성적인 힘의 상태가 작품 전체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조각가를 보면 두 가지 아름다움에 속해있다. 하나는 부드러운 아름다움, 다시 말하면 우미(美)라는 여성적인 아름다움이다. 또 하나는 씩씩한 남성적인 아름다움, 다시 말해서 장미(美)의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게 보면 조각가 김세중은 우미(優美)보다는 장미(壯美)의 세계에 속하는 조각가라고 할 수있다. 자기 작품을 감성적인 아름다움에 빠지지 않게 하고 장미(美)적인 힘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조각가 김세중의 세계이다. 이 두 가지 아름다움 즉, 우미)와 장미(美)는 아름다움의 양극으로써 우리는 흔히 하나를 우미(優美)라 표현하고 또 하나를 장미(美)라고 표현한다. 우미(優美)라는 것은 여성적인 아름다움이 대표적으로써 정에 빠져서 그것에서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장미(美)는 남성적인 로써 美에 빠지지 않고 그것을 벗어나서 또 다른 방향으로 달음박질하는 힘의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보면 모든 조각가는 이 두 가지 유형에 분류된다. 조각가 김세중을 모뉴멘탈한 장미(美)의 작가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평생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이라는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조각가가 되고 그것을 중심으로 작가로써 살아온 그에게 있어서 자기의 본질적인 체질인 모뉴멘탈한 성격은 분에 넘치는 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그는 그러한 아카데믹한 틀에서 벗어나서 가끔 외도를 하고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러한 좋은 예가 그의 생애 마지막을 장식한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다. 이것이야말로 남성적인 김세중이 가장 자기의 본질을 잘 나타내고 실력을 충분히 활약할 수 있는 본격적인 무대였던 것이다. 스케일이 큰 기획과 방대한 양의 일을 단시일 내에 그것도 만평 가까운 커다란 미술관 건물을 지으면서 현대미술을 갑자기 세계 속으로 전개시킨 그의 남성적인 행동력은 다른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그만의 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조각가로써의 김세중은 그 이전에 이미 전국토를 대상으로 많은 동상조각과 모뉴멘트를 창조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미적 감수성을 충분히표현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조각가 김세중에 있어서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첫째, 품격의 문제이고, 둘째, 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추궁이다.
첫째, 품격에 대한 것은 모든 그의 작품이 제작 이전에 격을 갖추고있고, 그 격을 어떻게 아름다움에 연결시키느냐 하는데 고심한다. 이러한 미의 격조는 조각가 김세중의 체질에서 오는 것으로써 다른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특질이다.
두 번째, 미에 대한 본질을 추궁한다는 것은 물론 모든 예술가가 다 그러한 입장에 서있는 것이지만 특히 조각가 김세중은 작품에 임할 때구상단계에서부터 완성단계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인 투시도를 생각하고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입장에서 바라다보면서 자기 자신을 형성하는 것이다. 아깝게도 1986년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그는 그가 이세상에서 할 일을 산더미처럼 남겨놓고 저 세상으로 갔다. 장수를 누린 장거리 선수도 아니고 반짝거리며 천재적인 빛을 발한 단거리 선수도 아닌 중거리 선수인 그는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라는 역사적인 일에 눌리어서 본의아니게 조각가로써의 생애를 마쳤던 것이다. 모든 것이 운명이라고 하면 그것으로써 납득이 가지만 김세중의 경우는 좀더 시간을 갖고 이 세상에 할 일이 남았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모든 사람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남이 일생을 두고도 하지 못한 일을 58년이라는 생애 속에서 마쳤고, 나름대로 이 세상에 책임을 다한 조각가 김세중은 해방 제1세대의 조각가로써의 그 발자취를 충분히 남겨놓았다고 할 수 있다.
金貞淑
조각가 김정숙의 작품이 여인상과 모자 상을 중심으로 하는 애정표현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결국 그녀의 인간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김정숙은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을 사랑하듯이 작품세계에 있어서도 인간 친애의 표시, 특히 여성으로써 모성애의 표현에 가장 극치를 보여 주었다. 김정숙은 사람을 대할 때나 작품을 대할 때나 언제나 한결같았다. 즉 애정 어린 태도로써 대상을 다루었고 표현했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그녀의 몸에 배인 기독교적인 사랑의 실천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녀의 음성은 늘 가라앉아 있었고 좀처럼 높은 옥타브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언제나 상대를 감싸는 것과 같은 자비로운 태도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의 작품은 주로 애정에 넘치는 모자 상이나 여인상, 그리고 애무하는 주제가 많았다. 이와 같이 조각가 김정숙이 가졌던 주제상의 일관성은 그녀가 여성이라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조각사상 가장 많이 제작되었던 여인상의 문제와도 통하는 것이다. 여인을 대상으로 한 조각의 역사는 멀리 선사시대 뵐렌도르프의 비너스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고전시대의 비너스, 중세의 마리아상, 본격적으로 조각이 독립된 예술의 한 장르로 확립되는 근세에 이르러 수많은여인상 특히 로댕과 부르델의 여인상을 거쳐서 20세기의 아르프나 브랑쿠지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은 김정숙의 조각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된다. 여인상을 바탕으로 조각의 역사를 고찰해볼 때 김정숙이 여류 조각가라는 점과 함께 그녀의 작품을 이해하는 근거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특히 조각가 김정숙이 표현에 있어서 추상적인 데에 기울어진 것에는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아르프나 브랑쿠지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한때 김정숙은 브랑쿠지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거의 동일한 작품세계에 몰두한 적도 있었다. 그녀가 남긴 많은 작품 중에서 걸작으로 뽑히는 작품들의 대부분이 브랑쿠지적인 추상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탐색 끝에 그의 작품세계는 커다란 변모를 가져오게 된다. 그것은 '비상(飛翔)'을 주제로 한 일련의 작품으로써 날개를 소재로 한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김정숙 조각의 결론처럼 되었지만 모든 조각가가 바라고 있는 예술의 세계이기도 하다. 사실 조각이라는 것은 지구 인력의 지배를 받고있는 물체를 그 물체가 돌이건, 나무이건, 금속이건 지구 인력에서 해방시켜 가볍게 하늘로 뜨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늘로 난다는 것은 오랜 꿈이었고 그것이 과학의 힘에 의해서 가능해졌다. 조각가들 역시 마찬가지로 하늘 높이 난다는 것을 최상의 꿈으로 생각했다.
모든 조각가는 무거운 물체를 가볍게 공간 속에 뜨게 함으로써 자신의 작품을 완성시키기를 바랐던 것이다. 가령 루브르 미술관의 '사모트라케의 여인상'은 수십 톤의 무거운 바위에다 날개를 달아줌으로써 가볍게 공간 속에 떠있게 한 것이다. 김정숙 역시 물체를 지구 인력에서 해방시켜 하늘 높이 뜨게 하는 꿈을 가졌다. 이것의 실현이 곧 만년의 작품의 주제인 '비상(飛)'이다. 날개만을 표시했기 때문에 사모트라케의 여인상과는 표현상의 차이점을 갖고 있지만 기능적으로 '난다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추상적인 표현이 보다 강조되었다. '비상'은 평생 자비로운 어머니로써의 애정 어린 여성상을 제작한 그가 하늘 높이 비상하기를 바랬던 정신적인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인간은 땅 위에서 살고 있다. 그러기에 대지는 인간의 어머니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대지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고 싶어한다. 마치 죽어서 영혼이 훨훨 하늘로 날아가듯이, 조각가 김정숙은 자신이 삶의 방법으로 채택한 조각을 통해 이 꿈을 이루었다. 즉 '비상(飛)'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하늘 나라에 올라간 것이다.
白文基
조각가 백문기는 조각가 이전에 미술교수로써 출발하였다. 그는 서울예고와 이화여자대학 등에서 후진을 양성하며 자기 자신도 조각가로써 성장하였다. 그러기에 조각가 백문기 시각에는 우아한 감각과 미에 대한 탐닉이 앞선다. 그에게 있어서 대상이란 무엇이든지 애정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써 그것을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성시킨다. 다시 말하면 조각가 백문기의 시각은 철두철미하게 리얼리즘이다. 그에게 있어서 리얼리즘이란 존재의 의미를 본질적으로 찾아 들어가서 존재감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눈에 비치는 그대로를 존중하고 그것을 아름답게 재생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체질적인 리얼리스트인 백문기의 조각작품에는 눈앞에 전개되는 리얼리티가 문제일 따름이다. 어떤 존재가 생기기 이전의 문제라던가 그 존재가 생긴 후의 문제 같은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2차적인 것이 된다. 그것은 이 아름다운 세계를 인간이 갖고있는 감각과 감성으로 해석하고 거기에서 일어나는 미적인 작용을 있는 그대로 찾아내고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철두철미한 리얼리스트인 조각가 백문기는 자기 작품을 제작하는데 있어서 두 가지 법칙에 따른다. 즉 하나는 볼륨의 문제이고 또 하나는 비례(proportion)의 문제이다.
첫 번째인 볼륨의 문제는 조각예술의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써 볼륨을 떠나서 조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각을 어느 의미로는 양의 예술이라고 하는 것도 여기서 오는 이야기이다. 가령 그가 가장 많이 다루고있는 인체에 있어서 볼륨이란 인체를 구성하는 외양적인 요소로써 보는 사람의 시각을 긴장시킨다. 알맞은 살 붙임에서 시작되는 그의 이와 같은 볼륨의 창조는 그가 가장 많이 제작한 동상조각에서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흙으로 빚은 볼륨의 표현은 적당한 모델링이 되어서 보는 사람에게 쾌감을 준다. 모자라지도 않고 남지도 않는 그러한 알맞은 볼륨의 표현이야말로 백문기 작품의 가장 핵심인 것이다.
또 하나 그가 즐겨서 사용하고, 어느 의미에서는 그의 작품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비례 문제이다. 이것 역시 인체조각 다시 말하면 초상조각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방법으로써 사람을 5등신으로 나누어서 표현할 때와 6등신으로 나누어서 표현할 때, 그는 사지와 동체와 머리를 그가 계산해낸 아름다운 비례로써 형성한다. 따라서 동상조각가인 백문기에 있어서 대상이된 인물의 상황보다도 그가 만들고자하는 작품의 미적인 고려가 더욱더 중요한 문제로 등장한다. 비례는 그리스조각의 가장 근본적인 아름다움으로 표현되지만 또한 모든 인간을 표현할 때 가장 중요한 표현수단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작품인 사람의 인체 자체가 벌써부터 정확한 비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물론이다. 따라서 조각가 백문기가 어느 사람의 동상을 만들 때 거기에는 그 사람이 가지고있는 체격과 같은 선천적인 요소도 중요하지만 그가 만들고자하는 또 하나의 인간에 자의적으로 비례를 주어서 아름다운 예술을 형성하는 것이다. 평생 아름다운 인체를 찾아서 신의 작업에 뒤쫓은 조각가 백문기의 시각에는 공간을 넘어서 멀리 퍼져가는 인간의 감성과도 같은 시적인 세계가 있다.
尹英子
조각가로써의 윤영자 편력을 보면 이른바 좁은 의미의 조각가와 모뉴멘트 제작자로써의 윤영자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비단 윤영자의 경우뿐만 아니라 모든 조각가의 작품을 두 가지로 나눈다면 즉, 조각과 기념 구조물로 구분된다. 윤영자의 작가적인 생애를 돌이켜봐도 이 두 가지 기능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지금도 그 현상은 계속되는 것이다.
조형하면 인간이 형태를 창조하는 것이고 거기에는 규모가 큰 것이 모뉴멘트이고, 규모가 작은 것이 조각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등신대 이하의 인체조각이나 작품들은 이른바 좁은 의미의 조각이 되고 등신대 이상의 보다 큰 규모의 모뉴멘트는 기념 구조물이 된다. 따라서 한 작가가 만든 것이라 하더라도 규모가 작은 조각에 쏟는 예술적 가치와 보다 큰 규모의 기념 구조물에 쏟는 경우는 작가의 능력과 이루어진 예술적인 성과가 다르다. 조각가 윤영자의 경우만 보더라도 초기의 소조물 조각의 작품에 뛰어난 역량을 보였던 바. 후기부터는 대규모의 모뉴멘트를 만들고 나서부터는 디자이너로써의 직능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윤영자의 조각주제는 주로 여인상과 모자상이 주류를 이룬다. 이것은 근대이후의 모든 조각가가 즐겨 쓰던 주제로써 애정을 표시하고자 하는 가장 적합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여인상과 모자상은 세계 조각사에서 불굴의 주제로써 거의 모든 조각가들이 다루는 것이었다. 여인상은 생활주변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존재, 신의 피조물이 여인이었기에 그 여인상을 조각함으로써 아울러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했던 것이다.
그러한 여인상과 모자상도 우선 재료에 따라서 표현의 효과가 다르다. 윤영자는 초기에 석고상으로서 그것을 표현했다. 그리고 나서 돌로 교체되고, 그 돌이 다시 금속으로 변형되면서 같은 주제이건만 표현의 효과가 달라졌다. 윤영자의 경우 어느 것이 가장 자신다운 것이냐 하는 것은 단적으로 이야기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돌은 돌대로, 금속은 금속대로의 맛이 있기 때문에 비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여인상과 모자상의 주제에서 차이점은 그 구성이 입체일 경우와와상일 경우가 있다. 수평으로 누워있는 여인상과 아기를 안은 채 서있는 여인상은 수직으로 공간에 직립하고 있다. 그것은 지구의 인력을 송두리째 긍정하면서 굳건히 서있는 것이다. 그러나와상일 경우에는 수평으로 운동을 머금고 공간의 어느 일점을 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대표적인 예가 1978년의 '사랑' (브론즈)과 1987년의 '사랑' (대리석)등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조각가 윤영자의 작품은 구상과 추상의 중간지대에 서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추상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구상적인 요소가 많고, 구상이라 보기에는 너무나 추상적인 요소가 많은 그의 작품이다.
사실 구상적인 인체를 볼 때 그것을 형성하고있는 모든 공간적 요소인 볼륨이나 선이나 운동감 같은 것은 그 자체가 추상적인 요소로서 정리된다. 자연의 생명체인 인간의 육체는 따라서 구상인 동시에 추상적인 존재이다.
조각가 윤영자는 그러한 비밀을 감지하고 나름대로 자기의 데포메이션(deformation)으로서 표현하고 있다. 조각가 윤영자는 제작생활 43년의 긴 세월을 거쳐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성장하고 변모하여 이제는 인생의 원숙기에 접어든 진정한 예술가가 되었다.
맺는말
1996년도이래 매년 연간 기획전으로 치러지는 모란미술관의 <오늘의 한국조각> 2001년도 전시인 四人의 視覺 展은 결국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해방 제1세대의 조각가중에서 경향별로 가까운 네 사람을 택하여 전시하게 되었다. 그 네 사람이라 함은 김세중, 김정숙, 백문기, 윤영자이다. 이들 중 김정숙과 윤영자는 여성 조각가로써 여성특유의 섬세하고 우미(優美)한 감정을 작품에 표출하여서 여성 조각가다운 특이를 여지없이 나타내고 있다. 백문기와 김세중은 남성 조각가로써 남성이 가지고있는 모뉴멘탈한 작품을 나타내서 남성의 기질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김정숙과 윤영자가 비록 개인적인 감각의 차이는 있어도 두 사람 모두 해방 제1세대에 속하는 여성 조각가로써 당시 우리 나라가 받아들인 브랑쿠지와 아르프등의 흐름 속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애정의 표시를 작품에 나타내고자 하였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 모두 사실이 아닌 구상의 테두리에서 대상을 바라보고 조각에 친밀한 애정을 불어넣었다. 모녀상이나 여인상 등에서 느낄 수 있는 풍부한 애정표현은 이 작가들의 풍부한 감성의 표현이었다. 그것도 사실적인 방법이 아니라 구상적인 방법으로 군데군데 주관적으로 처리한 것이 눈에 띈다. 한편, 남성작가인 백문기와 김세중은 남성다운 기질로써 스케일이 큰 모뉴멘탈한 효과를 자기 작품에 나타내고 있다. 다만 김세중이 구상적인 수법으
로 군데군데 주관적인 처리를 한 것에 비해, 백문기는 어디까지나 철두철미하게 시각적인 사실을 표현했다. 김세중이 국토 여기저기에 세운 모뉴멘트는 동상조각에서 그의 인간적인 스케일을 표현한데 비해서, 백문기는 대상으로 접어들면서 철두철미하게 개성을 표출한 초상조각의 진수에 육박했던 것이다.
그들이 비교적 많은 작품을 제작하고 자기의 실력을 과시할 수 있었던 것도 앞에서 이야기하였듯이 1950년대 이후 전쟁으로 황폐화된 국토를 재건하는 기풍 속에서 더구나 모뉴멘탈한 기념근조물이나 동상조각을 세우는 풍토 속에서 일거리가 얼마든지 있었다는 것도 그들에게는 그들의 예술을 발현시키는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이상과 같이 해방 제1세대에 속하는 네 사람의 조각가 김세중, 김정숙, 백문기, 윤영자는 때마침 일어나고 있는 역사적인 기운 속에서 조각가로써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에 봉착한 것이다. 물론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은 한국의 조각계가 근대에서 현대로 옮겨지는 전환기에 있었기때문에 그들에게는 근대적인 요소와 현대적인 요소가 교차되고있는 것이다. 그러한 역사적인 분기점에 서서 마음껏 작품을 한 이들 해방 제1세대의 작가들은 그 이전에 근대 조각의 선각자 김복진에 비해서 퍽이나 행운에 찬 조각가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들이 근대와 현대의 가로놓여있기 때문에 오늘에 시점으로 보면 역사의 갈림길에서 우왕좌왕하면서 시간과 예술을 낭비한 것도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 '4인의 시각'은 그들뿐만이 아니라 그와 더불어 있는 많은 해방 제1세대 작가들 그리고 그 후에 지속되는 젊은 조각가들 속에 끼여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