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이용덕: 존재의 양면에서 Both Sides of Existence
전시기간: 2000.06.10 - 2000.07.09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이용덕
전시내용:
존재의 양면적 구조 드러내기
김영호(미술평론가, 미술사가)
조각예술을 둘러싼 담론을 전통적 형식의 틀에서 찾으려는 대중들에게 이용덕이 이번 개인전에 선보인 작업들은 일종의 당혹감을 느끼게 한다. 일상에서 대수롭지 않게 대하는 비조각적 재료의 선택이나 관객이 참여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표현방식이 무척 낯설기 때문이다. 작가가 독일유학을 떠나기 이전의 작업에 대해 잘 알고있는 대중들도 이번 귀국전의 작품들을 감상하기 위해 새로운 해석의 장비들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재료의 낯설음이나 표현방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신작들은 탐험의 노정을 위한 열정과 진지함으로 가득 채워져 있으며 존재의 탐구를 지향하는 일관성을 고수하고 있다. 또한 작가가 제기하는 종교와 철학적 물음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남긴 가치상실과 해체이론에 따른 인식상의 혼돈을 넘어 새로운 비평원리의 가능성을 함께 제시하고 있다.
이용덕이 이번 개인전을 위해 사용한 주요매체는 야광도료(夜光塗料)와 투광기(投光器)이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합판(合板)이나 의자 등의 기성 오브제를 택하기도 하고 사진 이미지와 비디오 영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표현방식을 넘나들고 있다.
이와 함께 작가는 전시장을 찾은 관객을 작품 속에 적극 끌어드림으로써 프로세스 미술의 개념을 취하기도 한다. 광학적 특성을 이용해 관객의 신체에서 떠낸 그림자는 그의 작업에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며 설치공간 위에 시간성을 개입시킴으로써 다양한 철학적 담론을 생산해 낸다. 이번 개인전에 선보인 여섯 개의 설치작업 중에 아래층 전시장에 위치한 세 개의 작품은 존재의 본성을 탐구하는 작가의 이러한 작품세계를 명쾌하게 반영하고 있다. 작가가 기획한 전시동선을 따라 전시장을 차례로 둘러보면 우리는 작가가 드러내려는 개념과 그 연결고리가 무엇인지를 어렵지 않게 알게 될 것이다.
'마주하기'를 위한 이중장치
전시장 초입의 바닥에 설치한 '나르시스의 호수'는 정방형의 틀에 물을 채운 뒤, 수면과 마주하여 양팔을 벌린 인간의 형상을 낮게 매달아놓은 것이다. 추락해 내려온 인물이 수면과 만나는 순간적 찰나를 포착하 고 있는 이 작업은 속도와 중력이 배제된 상태를 나타내면서 오히려 물위를 부유하는 인체의 미세한 움직임에 관객의 시선을 주목케 한다. 거기에는 균형을 잡기 위한 작가의 수학적 측량과 그 실행에의 의도성이 명백히 감지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긴장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신체와 수면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 사이에 형성된 미세한 만남의 관계가 보는 이의 의식을 자극하고 있다.
두 번째 전시공간에 들어서면 마주하기 만남으로 명명된 작업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것은 MDF 합판 134장을 쌓아놓은 두 개의 구조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사각의 입방체이며 그 표면에는 인간 형상의 실루엣이 빈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입방체 안에서 떠낸 인간 형상의 내용물이다. 구조물의 단면에서 인물의 실루엣을 바라보면 그것은 맞은편에 위치한 두 인물의 실루엣을 포괄하여 다중적 이미지로 보이는데 의외로 세개의 이미지는 서로 다른 모양으로 서 있다. 검정의 공간을 가운데 두고 연결된 두 개의 실루엣은 착시(tromp Toeil) 현상의 차원을 넘어 정신적 혼돈(tromp lesprit)의 상황을 연출한다. 이와 함께 허상적 실루엣의 공간으로부터 빠져나와 독립적으로 제시된 V자형의 볼륨은 부재와 존재 또는 음과 양의 이원적 세계를 가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세 번째 전시공간에 설치된 작품 "마주하기-여정'은 영상작업을 통해 인간존재에 대한 탐구를 시도하려는 것이다. 이 작업 역시 대비적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단위로 제시된 인체의 전신 실루엣이며 다른 하나는 피부를 특수카메라로 접사(接寫)한 뒤 확대된 이미지로 제시한 것이다. 단일시점에서 바라본 전신상의 기호화된 이미지와, 대지의 표피처럼 확대된 피부를 개미가 흩어가듯 관찰한 이동시점의 이미지는 공간에 의한 시간성과 시간에 의한 공간성을 하나의 형식 속에 혼재함으로써 색다른 의미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신체를 떠난 그림자
이용덕이 실행하는 존재의 이중적 표현 방식은 빛과 그림자 그리고 시간을 이용한 개성적 작업을 통해 보다 정신적인 차원으로 전개된다. 아래층 첫 번째 전시공간의 작업 "껍질벗기는 지름 650cm의 야광도료를 칠한 원형벽면을 마련하고 중앙에 투광기를 설치하여 일정한 시간마다 360도회전시키면서 강렬한 빛을 벽면에 비추게한 것이다. 광원을 떠난 광선은 공간내부에 들어선 관객의 그림자를 벽면으로 드리우게 하는데 이때 야광도료의 놀라운 광학적 효과는 몸으로부터 그림자를 분리시키며 관객의 움직임에 관계없이 독립적인 허상을 고정적으로 포획해 머금게 한다. 몇 분의 시간이 지나면서 그림자는 점차 약해지고 소멸되어 시야에서 사라지지만 이 시간을 통해 관객은 자신이 남긴 실루엣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인체를 떠난 또 하나의 자신을 체험하게 된다. 빛과 그림자 그리고 시간 속에 타자화 자아를 인식케 하는 작가의 의도는 벽면을 따라 새겨진 문귀들에 의해 암시되고 있다.
존재의 이중적 구조에 대한 탐구는 아래층 두 번째 전시공간에 설치된 또 하나의 영상작업 마중과 환송"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야광 처리된 벽면에 비추어진 두 개의 화면에는 출생의 현장과 사망의 예식에 참여하는 인물군상이 자리하며, 맞은편에 설치된 영사기에서 나온 빛에 노출된 관객은 자신의 그림자가 어느덧 군상들과 동일한 공간에 편입되는 상황으로 전치된다. 벽면에 고착된 인물군상과 자신의 실루엣은 군중 속에 타자화된 자아의 드러내기에 효과적으로 반응하며, 이때 관객은 생성과 소멸 아니면 존재와 부재의 간극에서 3인칭으로 떠도는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전시공간에 연출된 작품 '부재'는 등신대의 인체 좌상(坐像)과 빈 의자를 설치하고 거기에 관객을 등장시킴으로써 실루엣 작업의 또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테이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은 두 인물은 스파크 라이트에 순간 노출되면서 야광처리된 벽면에 그림자를 남긴다. 다시 실내공간은 어두워지고 인체 조각상은 자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내며 벽에 비추어진 그의 그림자는 역시 뚜렷하다. 그러나 관객이 떠나버린 의자 너머에 투사된 또 하나의 그림자는 주인의 움직임과 무관하게 고정되어 머물고 있다. 본체는 빛이 남긴 그림자 앞에서 유령처럼 배회하고 그림자는 시간을 머금은채 본체를 상기시키며, 시각적 혼돈은 대중을 개념적 차원으로 이끈다.
존재의 양면적 구조에 대한 관심
이상의 작업에서 보듯이 이용덕이 탐험하는 대상은 예외없이 인간이며 그 작업은 철학적 사유의 세계를 향해 열려있다. 작가는 현상과 본질 사이에 놓인 문을 쉴새없이 넘나들며 존재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제기한다. 그러나 그의 탐험은 사변적이면서도 매체라는 구체적 현실에 근거하고 있으며 존재의 실체를 부재의 상황과의 대질을 통해 확인하려 한다. 양극으로 나뉘어진 형상의 실체를 파악하는 방식은 결국 모순의 경계선상에서 존재를 발견하고 이를 수용하려는 자신의 작업태도로부터 온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보면 이용덕에 있어 이러한 존재의 양면적 구조에 대한 관심은 음각(陰)과 양각(陽刻)의 조화로 이루어진 인물상들을 통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존재의 양면적 구조란 모순되는 두 개의 조각적 볼륨을 대립된 상태로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가 1991년의 개인전에서 선보인 작품들의 작업방식은 양각과 음각을 동시에 적용해 하나의 부조 인물상위에 통합시키는 것이었고 이때 인물은 요철의 대비에 따라 제각기 다른 차원의 볼륨이 혼재된 상태를 야기해내었다. 거기에 나타나는 조형적 충돌 현상과 그에 따른 시각적 혼돈은 조각 위에 투사된 하나의 광원에 의해 모순의 볼륨과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면서 발생한 것이다. 작가는 이렇듯 하나의 공간에 충돌되는 두 개의 형상을 융화시킴으로써 조형의 새로운 방식을 산출해 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인체의 표피적 형상에 의존하는 제작방식에의 집착은 점차 작가로 하여금 딜레마에 빠지게 하였고, 여기서 야기된 강박관념은 작가로 하여금 정신적인 차원으로의 모색을 시도하게 된다.
이러한 작가의 자기성찰은 그의 작품을 사변적 영역으로 이끌었다. 빛에 의해 가시화된 이중적 형상의 이미지는 포지티브와 네가티브가 결합된 형이상의 세계와 만나게 되며 이러한 경계에 대한 인식은 존재의 완전함으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작가는 "더하기와 빼기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완전함'으로 인식하고 요철의 두 형식의 볼륨은 완성된 구조를 지닌 것으로 파악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만남은 나아가 음과 양의 경계 위에서 우주의 실체가 파악되는 동양사상으로 편입되며, 모순된 공간이 만나는 접점으로의 지각 이동은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간격을 좁히고 궁극적으로 그것을 극복해 낸다는 점에서 종교적 속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결국 이용덕 작업은 모순의 수용을 통해 주어진 삶의 부조리를 극복하려는 인간 본성의 단면을 지시하게 된다.
부조리의 리얼리티
독일로 건너가 활동하던 1990년대 중반경에 이용덕은 현실을 둘러싼 부조리의 상황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어떤 의미에서 존재의 양면적 구조에 대한 관심이 베를린의 독특한 환경과 접목되면서 보다 적극적인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그가 선택한 대상은 자신이나 주변의 타자들 아니면 사진으로 기록된 과거의 인물들이었으며 인종이나 사회 또는 역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나타내었다. 그 예로서 자신의 두상을 떠낸 하나의 모형틀을 조금씩 변형시키며 다수 복제해 1995년의 두상조각이나, 1차대전이 종결된 직후에 촬영된 독일의 어느 초등학교의 단체사진을 이용한 1996년의 조각 설치작업, 그리고 빈민국의 어린이를 촬영한 어느 잡지의 기록사진을 저부조 형식으로 복제한 작품 등은 부조리의 리얼리티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그중 자신의 두상을 변형시키면서 떠낸 인물들은 다양한 인종들의 특성들을 지시함으로써 지구촌을 사는 인간의 신체적 동질성을 다시 확인시키며 나아가 정신적 융화의 당위성을 추적해 내는 작품으로 주목된다. 이용덕의 이전 작업이 그랬던 것처럼 이들 두상에는 이중으로 설정된 모순의 상황이 함께 자리한다. 타자로서의 나와 나로서의 타자성이 하나의 작품들에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용덕의 작업은 궁극적으로 백과 황 그리고 흑으로 구분되는 피부의 차이에 의해 차별화 되는 인간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넘어서 있다. 거기에는 부조리의 문명을 해체하려는 부정적 시각이 아닌 수용과 화합을 향한 의지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베를린 시립미술관의 초대전에 출품된 33명의 소년입상 설치작업 역시 인간의 운명에 대한 허무와 그 알레고리를 힘있게 드러낸다. 사진으로 기록된 실존인물들은 작가의 석고작업을 통해 3차원의 공간으로 전환되고 사실적으로 묘사된 얼굴에는 기아와 공포 그리고 현실에 대한 두려움과 냉정함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전쟁의 포화속에서 생존한 이들은 청년기에 다시 2차 세계대전의 주역으로 광폭(暴)의 역사에 휩싸이게 되는 운명을 지닌다. 이 작업을 통해 작가가 제시하는 것은 독일의 역사를 넘어 인간존재의 부조리와 그 리얼리티이다. 방법적으로 작가는 시간을 포획한 사진과 그것을 입체물로 재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공간과 시간의 이동현상에 주목하며 그 속에 인각된 역사에 대한 해석의 편차와 간극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의 이동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이르게 이용덕의 최근 작업은 시간과 공간의 이동에 대한 탐색으로 귀결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존재의 이중적 구조나 모순의 충돌 현상 등은 모두가 시공간의 이동에 의해 그 명제가 성립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사용하는 틀을 이용한 캐스팅 작업이나 다큐멘타리 사진 자료를 이용한 조각작업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존재론적 시각에서 보면 사진은 언제나 과거의 시간과 공간 대한 기억이자 기록이다. 롤랑바르트가 선언한 것처럼 "사진의 본질은 죽음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과거의 시공간을 현재로 이동시키고 그 사이에 발생하는 정체성의 간극에 주목함으로써 존재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것이다.
이번 개인전에 출품된 여섯 개의 작품으로 다시 돌아와 보면 시간의 이동은 빛과 그림자의 작용에 의해 가시적으로 나타난다. 투광기에 의해 만들어진 신체의 그림자는 벽에 고착되어 머무는데 그 실루엣은 새로운 현실이면서도 과거의 껍질이며 따라서 존재에 대한 기억을 함께 드러낸다. 작가는 이러한 관계를 증식(增殖)과 이식(移植)"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제시하고 있다. 시공간의 이동과 함께 이식 또는 증식되는 존재의 정체성은 결국 만물의 존재에 대한 파악의 방식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용덕의 작업은 다양한 재료와 제작방식을 사용하고 있지만 하나의 주제를 일관되게 탐구하는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존재의 양면적 구조를 파악하고 그것을 예술의 이름으로 융화하는 일이다. 이용덕이 제시하는 모순의 충돌과 그 수용의 미학은 이 시대를 사는 인간들에게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전시명: 이용덕: 존재의 양면에서 Both Sides of Existence
전시기간: 2000.06.10 - 2000.07.09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이용덕
전시내용:
존재의 양면적 구조 드러내기
김영호(미술평론가, 미술사가)
조각예술을 둘러싼 담론을 전통적 형식의 틀에서 찾으려는 대중들에게 이용덕이 이번 개인전에 선보인 작업들은 일종의 당혹감을 느끼게 한다. 일상에서 대수롭지 않게 대하는 비조각적 재료의 선택이나 관객이 참여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표현방식이 무척 낯설기 때문이다. 작가가 독일유학을 떠나기 이전의 작업에 대해 잘 알고있는 대중들도 이번 귀국전의 작품들을 감상하기 위해 새로운 해석의 장비들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재료의 낯설음이나 표현방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신작들은 탐험의 노정을 위한 열정과 진지함으로 가득 채워져 있으며 존재의 탐구를 지향하는 일관성을 고수하고 있다. 또한 작가가 제기하는 종교와 철학적 물음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남긴 가치상실과 해체이론에 따른 인식상의 혼돈을 넘어 새로운 비평원리의 가능성을 함께 제시하고 있다.
이용덕이 이번 개인전을 위해 사용한 주요매체는 야광도료(夜光塗料)와 투광기(投光器)이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합판(合板)이나 의자 등의 기성 오브제를 택하기도 하고 사진 이미지와 비디오 영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표현방식을 넘나들고 있다.
이와 함께 작가는 전시장을 찾은 관객을 작품 속에 적극 끌어드림으로써 프로세스 미술의 개념을 취하기도 한다. 광학적 특성을 이용해 관객의 신체에서 떠낸 그림자는 그의 작업에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며 설치공간 위에 시간성을 개입시킴으로써 다양한 철학적 담론을 생산해 낸다. 이번 개인전에 선보인 여섯 개의 설치작업 중에 아래층 전시장에 위치한 세 개의 작품은 존재의 본성을 탐구하는 작가의 이러한 작품세계를 명쾌하게 반영하고 있다. 작가가 기획한 전시동선을 따라 전시장을 차례로 둘러보면 우리는 작가가 드러내려는 개념과 그 연결고리가 무엇인지를 어렵지 않게 알게 될 것이다.
'마주하기'를 위한 이중장치
전시장 초입의 바닥에 설치한 '나르시스의 호수'는 정방형의 틀에 물을 채운 뒤, 수면과 마주하여 양팔을 벌린 인간의 형상을 낮게 매달아놓은 것이다. 추락해 내려온 인물이 수면과 만나는 순간적 찰나를 포착하 고 있는 이 작업은 속도와 중력이 배제된 상태를 나타내면서 오히려 물위를 부유하는 인체의 미세한 움직임에 관객의 시선을 주목케 한다. 거기에는 균형을 잡기 위한 작가의 수학적 측량과 그 실행에의 의도성이 명백히 감지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긴장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신체와 수면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 사이에 형성된 미세한 만남의 관계가 보는 이의 의식을 자극하고 있다.
두 번째 전시공간에 들어서면 마주하기 만남으로 명명된 작업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것은 MDF 합판 134장을 쌓아놓은 두 개의 구조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사각의 입방체이며 그 표면에는 인간 형상의 실루엣이 빈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입방체 안에서 떠낸 인간 형상의 내용물이다. 구조물의 단면에서 인물의 실루엣을 바라보면 그것은 맞은편에 위치한 두 인물의 실루엣을 포괄하여 다중적 이미지로 보이는데 의외로 세개의 이미지는 서로 다른 모양으로 서 있다. 검정의 공간을 가운데 두고 연결된 두 개의 실루엣은 착시(tromp Toeil) 현상의 차원을 넘어 정신적 혼돈(tromp lesprit)의 상황을 연출한다. 이와 함께 허상적 실루엣의 공간으로부터 빠져나와 독립적으로 제시된 V자형의 볼륨은 부재와 존재 또는 음과 양의 이원적 세계를 가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세 번째 전시공간에 설치된 작품 "마주하기-여정'은 영상작업을 통해 인간존재에 대한 탐구를 시도하려는 것이다. 이 작업 역시 대비적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단위로 제시된 인체의 전신 실루엣이며 다른 하나는 피부를 특수카메라로 접사(接寫)한 뒤 확대된 이미지로 제시한 것이다. 단일시점에서 바라본 전신상의 기호화된 이미지와, 대지의 표피처럼 확대된 피부를 개미가 흩어가듯 관찰한 이동시점의 이미지는 공간에 의한 시간성과 시간에 의한 공간성을 하나의 형식 속에 혼재함으로써 색다른 의미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신체를 떠난 그림자
이용덕이 실행하는 존재의 이중적 표현 방식은 빛과 그림자 그리고 시간을 이용한 개성적 작업을 통해 보다 정신적인 차원으로 전개된다. 아래층 첫 번째 전시공간의 작업 "껍질벗기는 지름 650cm의 야광도료를 칠한 원형벽면을 마련하고 중앙에 투광기를 설치하여 일정한 시간마다 360도회전시키면서 강렬한 빛을 벽면에 비추게한 것이다. 광원을 떠난 광선은 공간내부에 들어선 관객의 그림자를 벽면으로 드리우게 하는데 이때 야광도료의 놀라운 광학적 효과는 몸으로부터 그림자를 분리시키며 관객의 움직임에 관계없이 독립적인 허상을 고정적으로 포획해 머금게 한다. 몇 분의 시간이 지나면서 그림자는 점차 약해지고 소멸되어 시야에서 사라지지만 이 시간을 통해 관객은 자신이 남긴 실루엣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인체를 떠난 또 하나의 자신을 체험하게 된다. 빛과 그림자 그리고 시간 속에 타자화 자아를 인식케 하는 작가의 의도는 벽면을 따라 새겨진 문귀들에 의해 암시되고 있다.
존재의 이중적 구조에 대한 탐구는 아래층 두 번째 전시공간에 설치된 또 하나의 영상작업 마중과 환송"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야광 처리된 벽면에 비추어진 두 개의 화면에는 출생의 현장과 사망의 예식에 참여하는 인물군상이 자리하며, 맞은편에 설치된 영사기에서 나온 빛에 노출된 관객은 자신의 그림자가 어느덧 군상들과 동일한 공간에 편입되는 상황으로 전치된다. 벽면에 고착된 인물군상과 자신의 실루엣은 군중 속에 타자화된 자아의 드러내기에 효과적으로 반응하며, 이때 관객은 생성과 소멸 아니면 존재와 부재의 간극에서 3인칭으로 떠도는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전시공간에 연출된 작품 '부재'는 등신대의 인체 좌상(坐像)과 빈 의자를 설치하고 거기에 관객을 등장시킴으로써 실루엣 작업의 또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테이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은 두 인물은 스파크 라이트에 순간 노출되면서 야광처리된 벽면에 그림자를 남긴다. 다시 실내공간은 어두워지고 인체 조각상은 자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내며 벽에 비추어진 그의 그림자는 역시 뚜렷하다. 그러나 관객이 떠나버린 의자 너머에 투사된 또 하나의 그림자는 주인의 움직임과 무관하게 고정되어 머물고 있다. 본체는 빛이 남긴 그림자 앞에서 유령처럼 배회하고 그림자는 시간을 머금은채 본체를 상기시키며, 시각적 혼돈은 대중을 개념적 차원으로 이끈다.
존재의 양면적 구조에 대한 관심
이상의 작업에서 보듯이 이용덕이 탐험하는 대상은 예외없이 인간이며 그 작업은 철학적 사유의 세계를 향해 열려있다. 작가는 현상과 본질 사이에 놓인 문을 쉴새없이 넘나들며 존재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제기한다. 그러나 그의 탐험은 사변적이면서도 매체라는 구체적 현실에 근거하고 있으며 존재의 실체를 부재의 상황과의 대질을 통해 확인하려 한다. 양극으로 나뉘어진 형상의 실체를 파악하는 방식은 결국 모순의 경계선상에서 존재를 발견하고 이를 수용하려는 자신의 작업태도로부터 온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보면 이용덕에 있어 이러한 존재의 양면적 구조에 대한 관심은 음각(陰)과 양각(陽刻)의 조화로 이루어진 인물상들을 통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존재의 양면적 구조란 모순되는 두 개의 조각적 볼륨을 대립된 상태로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가 1991년의 개인전에서 선보인 작품들의 작업방식은 양각과 음각을 동시에 적용해 하나의 부조 인물상위에 통합시키는 것이었고 이때 인물은 요철의 대비에 따라 제각기 다른 차원의 볼륨이 혼재된 상태를 야기해내었다. 거기에 나타나는 조형적 충돌 현상과 그에 따른 시각적 혼돈은 조각 위에 투사된 하나의 광원에 의해 모순의 볼륨과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면서 발생한 것이다. 작가는 이렇듯 하나의 공간에 충돌되는 두 개의 형상을 융화시킴으로써 조형의 새로운 방식을 산출해 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인체의 표피적 형상에 의존하는 제작방식에의 집착은 점차 작가로 하여금 딜레마에 빠지게 하였고, 여기서 야기된 강박관념은 작가로 하여금 정신적인 차원으로의 모색을 시도하게 된다.
이러한 작가의 자기성찰은 그의 작품을 사변적 영역으로 이끌었다. 빛에 의해 가시화된 이중적 형상의 이미지는 포지티브와 네가티브가 결합된 형이상의 세계와 만나게 되며 이러한 경계에 대한 인식은 존재의 완전함으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작가는 "더하기와 빼기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완전함'으로 인식하고 요철의 두 형식의 볼륨은 완성된 구조를 지닌 것으로 파악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만남은 나아가 음과 양의 경계 위에서 우주의 실체가 파악되는 동양사상으로 편입되며, 모순된 공간이 만나는 접점으로의 지각 이동은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간격을 좁히고 궁극적으로 그것을 극복해 낸다는 점에서 종교적 속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결국 이용덕 작업은 모순의 수용을 통해 주어진 삶의 부조리를 극복하려는 인간 본성의 단면을 지시하게 된다.
부조리의 리얼리티
독일로 건너가 활동하던 1990년대 중반경에 이용덕은 현실을 둘러싼 부조리의 상황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어떤 의미에서 존재의 양면적 구조에 대한 관심이 베를린의 독특한 환경과 접목되면서 보다 적극적인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그가 선택한 대상은 자신이나 주변의 타자들 아니면 사진으로 기록된 과거의 인물들이었으며 인종이나 사회 또는 역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나타내었다. 그 예로서 자신의 두상을 떠낸 하나의 모형틀을 조금씩 변형시키며 다수 복제해 1995년의 두상조각이나, 1차대전이 종결된 직후에 촬영된 독일의 어느 초등학교의 단체사진을 이용한 1996년의 조각 설치작업, 그리고 빈민국의 어린이를 촬영한 어느 잡지의 기록사진을 저부조 형식으로 복제한 작품 등은 부조리의 리얼리티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그중 자신의 두상을 변형시키면서 떠낸 인물들은 다양한 인종들의 특성들을 지시함으로써 지구촌을 사는 인간의 신체적 동질성을 다시 확인시키며 나아가 정신적 융화의 당위성을 추적해 내는 작품으로 주목된다. 이용덕의 이전 작업이 그랬던 것처럼 이들 두상에는 이중으로 설정된 모순의 상황이 함께 자리한다. 타자로서의 나와 나로서의 타자성이 하나의 작품들에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용덕의 작업은 궁극적으로 백과 황 그리고 흑으로 구분되는 피부의 차이에 의해 차별화 되는 인간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넘어서 있다. 거기에는 부조리의 문명을 해체하려는 부정적 시각이 아닌 수용과 화합을 향한 의지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베를린 시립미술관의 초대전에 출품된 33명의 소년입상 설치작업 역시 인간의 운명에 대한 허무와 그 알레고리를 힘있게 드러낸다. 사진으로 기록된 실존인물들은 작가의 석고작업을 통해 3차원의 공간으로 전환되고 사실적으로 묘사된 얼굴에는 기아와 공포 그리고 현실에 대한 두려움과 냉정함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전쟁의 포화속에서 생존한 이들은 청년기에 다시 2차 세계대전의 주역으로 광폭(暴)의 역사에 휩싸이게 되는 운명을 지닌다. 이 작업을 통해 작가가 제시하는 것은 독일의 역사를 넘어 인간존재의 부조리와 그 리얼리티이다. 방법적으로 작가는 시간을 포획한 사진과 그것을 입체물로 재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공간과 시간의 이동현상에 주목하며 그 속에 인각된 역사에 대한 해석의 편차와 간극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의 이동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이르게 이용덕의 최근 작업은 시간과 공간의 이동에 대한 탐색으로 귀결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존재의 이중적 구조나 모순의 충돌 현상 등은 모두가 시공간의 이동에 의해 그 명제가 성립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사용하는 틀을 이용한 캐스팅 작업이나 다큐멘타리 사진 자료를 이용한 조각작업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존재론적 시각에서 보면 사진은 언제나 과거의 시간과 공간 대한 기억이자 기록이다. 롤랑바르트가 선언한 것처럼 "사진의 본질은 죽음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과거의 시공간을 현재로 이동시키고 그 사이에 발생하는 정체성의 간극에 주목함으로써 존재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것이다.
이번 개인전에 출품된 여섯 개의 작품으로 다시 돌아와 보면 시간의 이동은 빛과 그림자의 작용에 의해 가시적으로 나타난다. 투광기에 의해 만들어진 신체의 그림자는 벽에 고착되어 머무는데 그 실루엣은 새로운 현실이면서도 과거의 껍질이며 따라서 존재에 대한 기억을 함께 드러낸다. 작가는 이러한 관계를 증식(增殖)과 이식(移植)"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제시하고 있다. 시공간의 이동과 함께 이식 또는 증식되는 존재의 정체성은 결국 만물의 존재에 대한 파악의 방식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용덕의 작업은 다양한 재료와 제작방식을 사용하고 있지만 하나의 주제를 일관되게 탐구하는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존재의 양면적 구조를 파악하고 그것을 예술의 이름으로 융화하는 일이다. 이용덕이 제시하는 모순의 충돌과 그 수용의 미학은 이 시대를 사는 인간들에게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