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전시

2002 몽골현대미술전

전시명: 2002 몽골현대미술전: 유목민의 서사시 EPIC OF NOMADS

전시기간: 2002.10.12 - 2002.11.10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Sh.Chimeddorj, P.Tsegmid, Ts.Enkhgargal, Ts.Munkhijin, M.Erdenebayar, J.Munkhtsetseg, Ts.Enkhjin, Ch.Kurelbaatar, Se.Sarantsatsralt, Lk.Bumandorj, Sa.Enkhtuman, Su.Badral, G.sereeter, Sh.Lhagvatseren, To.Enkhtaivan, Ts.Tsegmed, Ts.Amgalan, L.Ganhkuyag

전시내용: 


하늘 · 바람 · 들판 · 말, 그리고 유목민의 후예들


최태만(미술평론가, 국립서울산업대 교수)


정보사회, 유목적 삶의 양식과 닮은…

  1981년, 백남준은 비디오에 대한 연구는 말(馬)에 대한 연구와 함께 시작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일본의 몽골 역사의 전문가인 이와무라가 기원전 1000년경부터 인류가 말을 길들이기 시작했다고 발표한 학설을 주목한 그는 기원전 1000년경 인류가 갑자기 진보한 이유를 인류가 말을 '발명' 한 것에서 찾고자 했다. 즉, 말은 전쟁과 수송의 기본사항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통신도 변화시켰다는 것이다.1)

  13세기 초엽에 일어난 몽골제국이 빠른 시간 안에 비단길중간선(線)의 하나인 초원로(Steppe Road)를 장악하고 서쪽의 정복지역에 오고타이, 차카타이, 킵차크, 일 등 네 개의 칸(汗)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도 유목민족 특유의 기동력을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변방을 괴롭히던 흉노(奴)를 격퇴하기 위해 장건(張春)을 서역에 파견했던 전한(前漢)의 무제(武帝)가 꿈에도 그리던 말을 갖기 위해 다시 한번 충성스러운 장건을 서쪽으로 파견했던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당시 우수한 종마를 확보한다는 것은 곧 전력보강과 직결되므로 중국의 황제가 그것을 탐냈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어쨌든 남러시아 일대에서 일어난 이란계 유목민족이었던 스키타이에 의해 개척된 초원로는 기원 전 4세기말 몽골고원에서 흥기한 흉노와 돌궐(突厥), 위구르인들을 거쳐 13세기 초 마침내 몽골에 의해 동서를 직접 연결하는 교역, 군사, 문화의 교통로가 되었다. 몽골의 카라코룸(和)으로부터 알타이산맥을 넘어 카스피해 북부에 있던 킵차크 칸국의 수도 사라이 (Sarai)를 중계지로 키에프, 안티오키아, 베네치아, 콘스탄티노플 등의 도시들로 연결되었던 이 길을 따라 카르피니(Plano Carpini), 뤼브뤽(William of Rubruck), 마르코 폴로(Marco Polo) 등이 몽골제국으로 들어갔다. 로마제국이래 동서를 걸친 거대제국에 의해 건설된 '팍스 몽골리카' (Pax Mongolica)는 페르시아, 아랍, 그리스, 서유럽의 상인들로 하여금 몽골의 보호 아래 교역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2)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의하면, 몽골제국의 왕으로부터 받은 여행용 금패(金牌)나 은패(銀牌)만 소지하면 어디에서든 음식과 말, 안내자 등을 보급 받아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고 한다. 즉, 몽골제국은 이 초원로를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해 완벽한 역전제(驛專制)를 실시하였던 것이다.3) 이러한 역참(驛站) 제도는 첨단정보산업에 의해 국가의 경쟁력이 좌우되는 현대사회와 유사한 점이 많다. 다만 하드웨어가 과거의 말 대신 인공위성이나 광통신망을 기반으로 하는 전자도로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백남준의 주장은 설득력을 지닌다.

  1222년경, 동쪽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기마병들이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이고 도시를 초토화시키는 것을 목격한 서구의 기독교인들은 이슬람교도보다 더 무시무시한 이들에 대해 회교의 침략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동방에 국가를 건설한 것으로 전해지는 전설적인 성인인 요한(Prester John)이 보낸 군대로 착각하였으며, 심지어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조차 이들을 기독교를 수호할 군대로 믿었다. 그러나 서구의 기독교인들은 곧 이들이 동방의 유목민임을 알게 되었으며, 1237년부터 1242년 사이 서유럽 전역이 몽골군에 의해 피로 물들었다.4) 비록 몽골군은 잔혹했으나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함으로써 육상, 해상방면의 교통로를 발달시켜 동·서간 경제, 문화교류를 촉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이슬람교 등의 동방전파를 비롯하여 지리학, 천문학, 역학, 수학, 지도제작법 등의 발전을 이끌어내 궁극적으로 신항로 발견을 촉진했다. 이러한 역사적 의미에 따라 미국의 《워싱턴포스트》는 1995년 송년특집호에서 인터넷보다 칠백 년이나 앞서 국제통신망을 건설했다는 점을 인정하여 지난 천년간 가장 위대한 인물로 징기스칸을 선정하기도 했다.5)

  지구를 하나의 촌락으로 규정한 것은 미국의 미디어 학자인 맥루한(Marshall MacLuhan)이었으나,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지리적, 심리적 거리는 더욱 단축되었으며 그 속도는 놀라운 가속도를 보이며 빨라지고 있다. 전통적인 지식과 정보소통 도구였던 붓, 펜, 종이, 타자기, 유선전화, 자동차 등이 정주문화에 적합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컴퓨터, 팩시밀리, 휴대전화, 개인용단말기(PDA) 등은 유목과 유사한 새로운 삶의 양식을 만들어내었다. 당장 나부터 가볍지만 놀라운 성능을 지닌 노트북과 휴대전화, 휴대용단말기로 무장한 채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다. 이러한 유동성(mobility)의 증대는 인류가 다시금 유목적 삶의 양식 속으로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인류의 문명이 유목으로부터 농경사회를 거쳐 산업사회로 진입하면서 진보를 거듭해왔고 그것을 이끌어간 것은 합리주의였다. 그러나, 데카르트이래 서구의 근대적 사유체계를 지배해왔던 이성중심주의는 후기산업사회로 진입하면서 철학 내부로부터의 비판에 직면하였다. 철학에서는 물론 사회문화담론의 맥락에서 유목주의(Nomadism)를 주창함으로써 한국 지식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들뢰즈(Gilles Deleuze)는 정주의 삶(polis)과 유목의 삶(nomos)의 대비를 장기와 바둑의 예를 들어 설명한 바 있다. 들뢰즈가 말하고 있는 유목론의 핵심이 바로 '욕망'이거니와 미개사회로부터 군주제 사회로 로의 전환, 다시 군주제 사회로부터 자본주의 사회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가 욕망의 달성을 경험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주목하면서도 자본주의가 욕망을 진정으로 해방시킨 것은 아니라고 했다. 즉, 자본주의는 자본의 논리에 따라 다시 욕망을 식민화 즉, 들뢰즈의 언어를 빌자면 재속령화(reterritorialisation)' 하였으므로 이러한 자본주의적 식민화에 저항하는 끝없는 ‘탈주’, ‘탈속령화(deterritorialisation)'의 실천을 유목주의에서 찾고자 한 것이다.7) 물론 들뢰즈는 몽골의 전통적인 유목적 삶이 아니라 인류사 속에 나타난 다양한 유목민들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시한 '유목론' 이 후기산업사회, 정보사회로 진입한 현대적 삶의 양식을 밝히는 유용성을 지니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팍스 몽골리카 또는 솔롱고스의 환상

  과연 우리에게 몽골은 무엇인가?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혈통, 언어, 풍습에 있어서 계통적으로나 계열적으로 몽골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배워왔다. 1924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했던 몽골이 개방과 개혁이란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혁에 따라 1989년 말 개방노선을 선택한 후인 1990년 한국은 마침내 몽골과 공식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 이듬해, 몽골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철폐와 새 헌법 제정을 선포했다. 몽골과의 수교가 이루어지자마자 대평원에 대한 낭만적인 향수와 함께 그 동안 전설처럼 까마득하기만 하던 몽골문화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될 수 있었다. 가난한 농민출신이었으나 '홍건적의 난' 중에 뛰어난 지도력과 냉혹한 피의 숙청을 단행하며 중국대륙에 북방민족이 세운 원(元)을 대신하여 한족(漢族)이 통치하는 명(明)을 건국했던 주원장(朱元璋)에 의해 고비사막 너머의 황폐한 초원으로 쫓겨난 이후 다시 만주족이 세운 청(淸)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우리 역사로부터도 멀어진 몽골에 대한 관심이 수교와 함께 '막연한 환상' 과 뒤섞여 한국인의 인종적, 문화적 정체성의 뿌리를 몽골로부터 찾고자 하는 '감성적 동일시' 현상조차 나타났다. 그동안 우리는 얼굴생김새, 몽골반점과 같은 신체적 특징에서뿐만 아니라 언어학에서도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하며, 오보와 서낭당과 같은 민속에서 볼 수 있는 샤머니즘의 유사성 등을 준거로 몽골로부터 기층문화의 원형을 찾고자 했다.

  미술사에서도 한국의 청동기문화를 내몽골 요(遼寧) 지방의 청동기문화권에 속했던 사람들이 한반도로 남하하여 선주민들과의 혼혈을 통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8) 특히 울주군 두동면과 언양면에서 발견된 바위그림(岩刻畫)들은 한국의 선사문화가 몽골과 관련이 깊다는 학설을 더욱 유력하게 만들었다. 시베리아, 베링해협, 몽골과 흑룡강 유역에서 비슷한 유형의 바위그림이 발견되었으므로 그 양식비교를 통해 이러한 바위그림의 전파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지난 2001년 한국방송공사(KBS)는 장장 삼 개월에 걸쳐 몽골리안루트' 란 대형 기획특집을 방영한 바 있다. 이 프로그램에 의하자면 지금으로부터 약 2~3만년전, 중앙아시아에 살던 인류의 조상들이 얼어붙은 베링해협을 건너 아메리카로 이주했다고 한다.9) 그렇다면 징기스칸과 그 후계자들이 세계를 제패하고 유라시아를 장악하기 훨씬 이전에 '팍스 몽골리카'는 이미 존재했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그들의 조상은 떠나온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않았을 뿐이다. 그 이산(離散)의 과정을 거치며 몽골초원의 어떤 부족이 한반도까지 진출했을지도 모르지만, 문화의 전이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변형의 가능성과 자연이나 환경의 조건에 따라 서로 다른 지역에서 유사한 문화가 출현할 수 있음을 고려해볼 때 '정서적 동질성' 에 의존하여 문화의 시원(始原)을 찾는데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너무나 먼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문화의 원형을 찾는 일도 중요하겠으나, 고려 말기인 13, 14세기에 몽골에 의해 강요된 문화전이 또한 배제할 수는 없다. 거란족에 시달리던 고려는 7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입을 받고 결국 원의 사위나라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강화도에서 항전하던 고종이 몽골의 강요를 견디지 못하고 왕자를 볼모로 보내었고, 고종의 뒤를 이은 원종은 원의 요구에 따라 원의 수도인 대도(大都)에 가서 쿠빌라이칸을 알현했다. 세자로서 원에서 인질생활을 했던 충렬왕으로부터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고려말의 왕들이 모두 몽골제국의 공주와 결혼했던 까닭에 고려왕실의 혼혈화가 불가피했다. 한때, 원의 세력이 약화된 국제정세를 이용하여몽골에 의해 빼앗긴 자주성을 회복하고자 한 공민왕의 어머니와 왕비도 모두 몽골여성이었다. 복식, 두발, 풍습, 사회제도에 이르기까지 원에 의한 강한 간섭을 받았던 만큼 고려말기의 강제된 몽골풍과 고려양식의 문화가 낳은 혼융현상(amalgamation)도 아직 한반도에 남아있는 문화의 유사성을 밝히는 주요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몽골군의 침입으로 국토가 유린되고, 엄청난 인적 피해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으나, 서방문화와의 교류에 힘쓴 원의 영향으로 천문, 역법(曆法), 의학, 수학 등이 한국에 전래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조선의 건국 이후 한국과 몽골의 문화접촉은 거의 단절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청의 지배를 받던 몽골이 중국에 일어난 신해혁명을 틈타 독립투쟁을 전개하였으나, 러시아와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두 개의 몽골로의 분리가 고착되고, 러시아혁명으로 쫓겨난 운게른 스테른베르그(Ungern-Sternberg) 남작과 같은 광기에 사로잡힌 군벌의 지배를 받는 동안, 조선은 국권을 상실하고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아야만 했다. 불교의 지도자를 통치자로 옹립한 과도기를 거치며 몽골은 마침내 1924년 11월 사회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한국은 한국대로 식민지배와 해방, 한국전쟁과 남북분단 등의 현대사의 질곡을 거치며 남한은 전후의 극단적인 빈곤을 극복하고 동아시아의 성공한 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했다. 이런 국제정세 속에서 한국이 몽골과 접촉할 수 있었던 것은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과 같은 스포츠 정도에 불과했으므로 한국인들에게 몽골인들은 여전히 '초원의 이방인'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회주의 진영의 해체와 개방은 한국인들의 무의식 속에 깊이 각인된 '문화의 원형' 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고, 한국의 자본주의는 몽골인들에게 부(富)를 약속하는 '엘도라도'와 같은 것으로 비쳐졌다. 몽골인들은 한국에 대해서 '무지개'란 뜻을 지닌 '솔롱고스'라고 부른다고 한다. 사실 나로서는 이 말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잘 모른다. 실제로 몽골인들이 한국을 그렇게 부르는지도 확인하지 못했으나 아마도 한국은 몽골인들에게 무지개가 아니라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의 땅'으로서의 이미지가 더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팍스 몽골리카'란 영광의 역사를 지닌 몽골인들에게 한국이 솔롱고스의 환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약속된 땅' 은 아니라 하더라도 오랜 세월동안 우리의 심층무의식 속에 누적되어온 '동질성에 동의'가 앞으로 한국과 몽골의 선린우호를 다지는 비물질적 자산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몽골은 분명 각기 다른 사회구조, 역사와 문화를 지니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같음'에 정서적으로 얽매이기보다 '다름'을 인식할 때 서로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몽골현대미술의 경향

  내가 몽골을 방문했을 때, 몽골의 많은 작가들로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았으나 그 중에서도 몽골현대미술에 대한 미술평론가 울란치멕(Uranchimeg Tsultemin)의 친절한 소개는 이 글을 쓰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녀가 분류한 몽골현대미술의 경향들을 참고로 내가 다시금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회주의 시대에 학습한 리얼리즘에 충실한 작품을 들 수 있다. 특히 사회주의 체제에서 활동했던 원로작가들의 작품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충실한 작품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1930년대 많은 러시아 작가들이 울란바타르에서 전시를 개최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미술교육자들이 야간학교를 개설하여 몽골의 예술가 지망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10) 1950년대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많은 작가들이 러시아에서 교육을 받고 귀국하여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이념과 방법에 부응하는 작업을 했으며 이들은 몽골의 새로운 사회를 표현한 첫 세대였다. 개방 이후 몽골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사라졌으나 기본적으로 리얼리즘의 방법에 입각하고 있으면서, 신고전주의의 양식에 더 가까운 작품과 객관적 묘사에 충실한 자연주의의 태도를 보이는 작품은 여전히 창작되고 있다.

  두 번째, 전통의 수용과 재해석을 들 수 있다. 상당수의 작가들이 이 범주에 속하는데 유목민에게서 나타나는 샤머니즘의 전통으로부터 많은 몽골인들이 믿고 있는 티베트불교에서 볼 수 있는 종교적 도상과 구성방식을 수용하거나 민속예술로부터 착안한 작품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실크로드를 따라 전파된 불교를 받아들인 몽골은 16세기에 라마불교(Lamaism)를 국교로 정한 알탄 칸(Altan Khaan)이 1577년 티베트의 법왕으로부터 '달라이라마'란 칭호를 받았다. 오랜 기간에 걸쳐 종교지도자가 통치한 몽골에 티베트 불교미술의 영향을 받은 불교미술이 융성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비록 사회주의체제에서 많은 사찰은 파괴되고 불교문화재들이 훼손되었다고 할지라도 유목민족의 풍습으로부터 발원한 민속적 소재로부터 불교미술 풍부한 전통을 이어받은 작가들이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개척하고 있다. 티베트에서 발전한 '탕가'의 도상을 수용하여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불교회화의 전통이 최근 부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몽골의 전통회화인 주락(Jurag)의 재료와 기법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자 한 작품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유목문화가 낳은 전통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많은 작가들이 비록 다소 절충적이긴 하나 전통의 재해석에 매진하고 있음도 주목된다.

  셋째, 서구 현대미술의 부분적 수용을 통한 표현영역의 확장을 시도하고 있는 작업경향을 들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급격한 수용보다 완만한 자기화의 과정이 두드러지고 있어서 관점에 따라 절충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리얼리즘에 대응하여 표현의 폭을 넓히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1968년 몽골미술가협회(Union of Mongolian Artists) 소속의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개최된 전시에서 비구상회화가 대중에게 소개되자마자 전시장은 공산당의 요구에 따라 폐쇄되었고 이 단체의 지도자들이 당에 호출되어 '자본주의 미술'을 전시하게 된 경위에 대해 해명해야 했다고 한다.11) 그러나 유럽의 낡은 양식인 리얼리즘으로부터 벗어나 표현의 폭을 넓히고자 하는 움직임은 꾸준히 나타났고, 1990년대부터 독자적인 자기세계를 추구하고자 하는 작가들에 의해 현대적 감성에 부응하는 다양한 작품들이 나타날 수 있었다.

  넷째, 전위예술단체의 출현에 따라 전통적인 장르인 회화, 조각, 공예 등으로부터 벗어난 설치와 같은 방법의 확산을 시도하고 있는 경향을 들 수 있다. 몽골에서 몇 안 되는 미술평론가 중 한 사람인 소소르(Ochir Sosor)에 따르자면 몽골현대미술이 그동안 사회주의 체제가 요구하는 바에 따라 미술이 이념적 무기로서 봉사해왔는데 1990년 이후에야 전반적인 민주화 흐름에 따라 비로소 미술의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개념을 발견할 수 있는 계기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12)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녹색의 말(Green Horse)', '공간(Space)’, ‘4월(April)'과 같은 전위적 성격을 띤 현대미술단체가 나타났으며, '푸른 태양(Blue Sun)'으로 이름을 바꾼 '녹색의 말'은 한때 미술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1998년 10월에 울란바타르에서 '반대(Opposite)'란 이름으로 회화와 설치 두 부분으로 구성된 전시가 개최되었으나, 전문가들의 긍정적 반응에도 불구하고 대중들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는 몽골의 대중들이 아직 이런 경향의 미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알려준다.13)

  그러나 2000년의 광주비엔날레에서 몽골의 유목적 전통에 바탕을 둔 세르테르 다우크도르츠의 〈길〉이란 작품이 한국의 관객들에게 관심을 끌었던 이유는 그 작품이 서구의 설치미술을 수용한 것이긴 하지만 몽골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학적 미술의 보수주의에 대한 거부와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서구 현대미술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이들의 활동이 앞으로 몽골 현대미술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전망된다.


초원의 후계자들

  몽골이 초원 속으로 숨어버린 은둔자의 땅이 아니듯이 몽골현대미술 또한 신비에 싸인 유목문화의 유산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몽골현대미술 속에서 가장 많이 발견할 수 있는 도상으로 단연 말과 징기스칸을 꼽을 수 있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몽골이 자랑할 수 있는 자연이다. 전세계가 산업화를 생존의 절대적 조건인 양 앞다퉈 자연을 파괴할 때 몽골의 초원과 사막, 호수와 산림은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며 조용하게 살아가는 유목민들에 의해 착취당하지 않았다. 사실 유목인의 땅은 인간에게 척박한 환경임에 분명하다. 이 땅의 거주민들은 농업이 발달할 수 없는 이러한 조건 때문에 물과 가축에게 먹일 풀을 찾아 이동해야 한다. 그래서 들뢰즈는 '유목민은 매끈한 공간 속에서 자신을 분배하고 이 공간을 차지하고 거주하며 보존한다'고 했다.14)

  넓게 펼쳐진 초원에 거주하기 때문에 몽골인들의 평균시력은 아주 높다고 한다. 먼 거리의 지형이나 사물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그 능력은 공간을 시각적인 것뿐만 아니라 음향적, 촉각적인 것을 동원해 지각하는 능력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내가 몽골에서 본 작품들은 대체로 이러한 공감각적인 공간표현에 뛰어난 작가들에 의해 제작된 것이었다. 울란바타르에 불과 며칠밖에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치명적 한계임에 분명하지만 몽골작가 중에서 치메도르츠(Chimeddorj Shagdarjav)가 이러한 분석에 가장 합당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의 화면은 누적적이라기보다 병렬적이다. 공간을 펼쳐놓는 것은 적어도 이탈리아 르네상스 이후로 서구회화에서 기피되었다. 심지어 입체주의조차 세잔의 영향을 받아 공간을 누적적으로 구성한다. 펼쳐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산만하거나 설명적이지 않고 '세계를 열어 보일 수 있는' 이유를 나는 그의 유전인자 속에 잠재한 유목적 시선에서 찾고 싶다. 화면 속의 자연은 광활하지만 산맥과 같은 골이 없다. 이 펼쳐진 공간을 부분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대상들은 과거 유목민들이 대지 위에 새겨놓은 중계점(mediating point)이다. 이 중계점은 이 대상으로부터 저 대상으로의 시선의 이동을 매개하며 원근법적 통일성과 일목요연함에 익숙한 우리로 하여금 시선의 확장을 유도한다. 유목의 전통에서 나올 수 있는 이러한 감각은 유목민의 일상이나 풍습을 재현해 놓은 작품보다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치메도르츠의 이러한 펼쳐진 공간과 대비되는 작가로 후렐바타르(Khurelbaatar Choidon)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의 레핀미술학교에서 정통적인 리얼리즘의 방법을 학습한 그의 작품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탁월한 재현능력이다. 이러한 재현은 회화 속에 서사성을 부여함으로써 작품을 '보는 것'으로부터 '읽는 것' 즉, 해석으로 유도한다. 그런 점에서 후렐바타르의 작품은 정주민의 시각에서 유목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 유목과 정주란 표현은 당연히 위계나 서열 또는 작품의 우열과 무관하다. 다만 표현방법만 다를 뿐이다.

  나의 몽골현대미술 학습과정에서 발견한 특이한 작가인 사롱사츠랄트(Sarantsatsralt Sed-Od)는 가장 도시적인 작가라고 할 수 있다. 화면 위에서 생동하는 그녀의 열정, 폭발하는 에너지, 감정을 숨기지 않고 화폭 위에 직접적으로 표현한 작품을 통해 회화 내부에서 회화를 뒤흔드는 저항과 반역의 의지를 느낀다. 기성의 전통과 관습에 대한 도전, 아름다움에 대한 반성, 성(gender)의 구분에 대한 의심,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적(sexual) 욕망을 감추려하지 않는 그녀의 작품은 차분하고 관조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이 많은 몽골 현대미술 속에서 돌출된 예외처럼 보이기조차 한다. 드넓은 초원, 야트막하게 펼쳐진 구릉 위의 눈이 시린 푸른 하늘, 밤하늘에 빛나는 별, 이러한 것들은 울란바타르를 벗어나자마자 만날 수 있는 몽골의 자연이다.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양떼나 말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목가적 분위기가 분명 몽골의 자연에 대한 정직한 표현은 아닐 것이다. 농경에 불리한 황무지, 목축에 적합한 땅을 찾아 언제든지 떠날 수 있도록 자연환경에 맞춰 제작된 게르, 급격한 기후차이를 이겨내기 위해 몇 겹 껴입어야 하는 옷은 도시의 정주민들이 막연하게 생각하는 전원의 이미지와 사뭇 다른 현실인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으로서 내가 가진 인상과 상관없이 많은 몽골작가들이 그들의 대지를 낙원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자연이 제공하는 풍요에 대한 감사와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고자 하는 소박하고 겸손한 태도를 많은 풍경화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적인 작품보다 역동적인 작품이 많다는 점도 많다는 사실을 놓칠 수 없다. 특이 역사를 주제로 한 작품에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는 징기스칸의 초상이나 몽골군대의 전투장면 등에서 몽골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초원을 달리는 말의 속도감이나 말을 짐승이 아닌 가족이거나 친구 혹은 자연과 동일시한 작품을 보면 유목민의 후예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신념과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지속되어야 할 프로젝트

  사회주의 체제 아래 1942년에 정부조직으로 창설되었으나, 1990년 이후 비정부조직으로 전환해 현재 몽골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단체인 몽골미술가협회에 소속된 작가는 2000년 현재 240여명에 이른다. 여기에 각 미술대학에서 양성한 예비작가들이 몽골 현대미술을 풍요롭게 만들 자원임에는 분명하지만 자본주의로의 전환 이후 미술시장에서 작가로 생존하여야 하는 문제 앞에 봉착해 있다. 열악한 미술시장 못지 않게 미술관이나 문화센터와 같은 전시공간의 부족도 몽골 작가들이 활동하는데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여기에 미술사학자나 미술평론가의 양성이란 문제도 안고 있는 만큼 개방 이후의 활력에도 불구하고 몽골 현대미술이 풀어야 할 숙제는 산적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남양주시와 몽골의 울란바타르시가 공동으로 주최하고 아름다운 자연경관 속에 위치한 모란미술관이 주관하 는 전시인 '유목민의 서사시'는 몽골 현대미술이 당면하고 잇는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몽골미술의 현재를 압축한 수준 높은 전시라고 평가하고 싶다. 그 동안 민간차원에서 소규모 전시를 통해 몽골현대미술이 한국에 소개된 바 있으나 이처럼 다양한 경향을 아우른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역시 이 전시는 몽골 현대미술의 한 단면에 불과할 따름이다. 따라서 이번 몽골현대미술을 보다 풍부하게 이해하기 위해 이 프로젝트는 지속되어야 할 것이며, 문화교류의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한국 현대미술도 몽골에 소개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1) 백남준, 「동양 전통 내에서의 첨단기술 / 첨단예술, <백남준 · 비디오때 · 비디오땅》, 국립현대미술관 편저, 도서출판(주)에이피인터내셔널, 1993, 51-53쪽.

2) Baabar, History of Mongolia, trans. by D. Suhjargalmaa, S. Burenbayar, H. Hulan and N. Tuya, The White Horse Press, Cambridge, UK., 1999, P.34.

3) 정수일, 『씰크로드학』, 창작과비평사, 2002, 44쪽.

4) Baabar, 앞의 책, p.1.

5) “The era of his way,” The Washington Post, December 21, 1995.

6)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 자본주의와 분열증』,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1, 675쪽.

7) 이정우, 왜 들뢰즈인가」, 《emerge》(1999.10), 중앙일보새천년(주), 16-26쪽.

8) 김원룡 ·안휘준, 『신판 한국미술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6, 21쪽.

9) 이러한 가설은 이미 19세기부터 제기된 바 있는데, 고고학, 인류학적 조사에 따라 현재의 몽골고원에 살던 사람들이 북아시아는 물론 중앙아시아의 서쪽으로 이주하면서 이 지역에 석기문화가 일어났고, 일부는 아메리카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Baabar, 앞의 책, pp.4-5. 참고)

10) Yuko Yamaki, The Development of Modern Mogolian Art, Modern Painting of Mongolia: Its Origin up to Today, Exhibition Catalogue, The Sankei Shimbun, 2002, p.163.

11) Tsultem Uranchmeg, Art of Mongolian Nomads, 앞의 책, p.160.

12) Ochir Sosor, Fine Art in Mongolia, Today, The 1st Fukuoka Triennale 1999, Exhibition Catalogue, Fukuoka Asian Art Museum, 1999, P.79.

13) Sosor, 앞의 글, p.81.

14)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앞의 책, 731 쪽                





몽골의 현대미술


Ts.울란치멕(미술평론가, 미술사가)


1. 대담한 출발

  1968년은 몽골근대미술의 역사에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1968년 7월 20일 젊은 작가들의 첫 번째 전시회가 몽골작가협회의 전시회장에서 열렸다. 이 전시는 몽골미술 역사에 새로운 페이지를 장식했지만 동시에 반감을 사기도 하였다. 전시회는 “자본주의의 미술'이라는 비난 아래 몽골정부의 강요로 즉시 문을 닫아야만 했다. 또한 참여작가들과 작가합회 회장 모두 공산당의 엄중한 처벌로 고통받았다. 동부 유럽국가에서 공부한, 특히 체코에서 공부했던 젊은 작가들은 몽골에 거주하면서 사회주의 포스터와 사회주의 지도자들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공산당에 그들의 충성심을 보여야만 했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이 사건은 작가들의 일대기동안 기억되었으며, 종종 그들의 예술적 경력에 방해가 되기도 하였다.

  1968년의 전시회는 주제와 표현양식의 자유로운 접근의 측면에서, 실로 도전적인, G. Sosai, P. Baldandorj, O.Tsevegjav와 같은 작가들의 비구상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비록 사실적인 묘사이긴 했지만 그 당시 사회주의 국가에 만연해 있던 획일적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따르지 않은 다른 회화들과 조각들도 전시되었다. 이 전시회는 비공식적으로 몽골현대미술의 출발로 간주될 수 있다. 오늘날 변화의 다양한 국면을 겪고 있는 몽골현대미술은 양식의 다양성과 자기표현의 방식에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몽골의 20세기 미술은 일련의 사건들로 가득차 있다. 세기 초에 몽골 Urga는 여전히 아시아에서 불교가 번영하는 중심지였다. 모든 작가들은 수도사였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재능을 신(神)을 묘사하는데 바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의 삶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회적 변화의 반영으로서 미술, 특히 회화에서는 새로운 경향들이 나타났다. 1911은 Qing Manchuria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날이다. 1921년에 몽골은 사회주의의 노선에서 러시아를 따르는 중대한 결정을 하였다. 정부와 사회구조의 급격한 변화는 새로운 장르의 출현을 수반하며 미술에도 즉각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변화가 수도사들이 세속적인 묘사로 향하게 하는 이유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도시와 수도원은 서로 다른 차이가 있긴 하나 건축적인 측면에서 복합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 몽골인들은 그래서인지 이러한 복합적인 것을 좋아한다. 하나의 캔버스위에 광범위한 구도로 다양한 장면들을 이야기하듯 묘사하는 것은 20세기 초 몽골회화의 또 다른 세속적인 방식이 되었다.

  리얼리즘의 첫 번째는 혁명을 보급시키기 위한 포스터의 형식으로 등장하였다. 1930년대는 불교수도원들과 수많은, 그리고 화려한 아플리케와 함께 수 놓여진 Tangkas, 불교 조각 그리고 불상들이 크게 훼손되었다. 또한 거의 750개의 수도원들이 신앙에 대한 사회주의의 편협의 결과로 파괴되었다. 만약 우리가 각각의 수도원들이 최소한 몇 개의 작품들만을 가지고 있었고 만약 수십개의 사원이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수많은 불교미술품들을 가지고 있는 모든 절이 그렇게 폐지되었어야 했을까? 파괴된 양은 단지 수적으로만 계산될 수 없는 것이다.

  1930년대는 파괴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Urga를 Ulaanbaatar라 새 이름을 붙인 도시로 새로운 사고방식과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인도할 러시아 선교사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또한 미술에 대한 유럽의 사상들을 들여왔다. 중심부로서 소련은 모스크바와 함께 앞으로 다가올 수십년동안 몽골을 세상과 연결해 주는 창문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에 가르침을 받았거나 독학한 작가들의 수는 놀랄만하다. 그들은 해부도를 그리는 방법, 1차적 원근법을 사용하는 방법, 오일로 캔버스 위에 작업하는 방식을 배웠으며, 나라 안에서 '직업적인 작가들' 이 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작가로서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 모스크바나 세인트 피터스버그로 보내졌다. 몽골불교미술에서 유럽양식으로의 빠른 변화는 매우 짧은 시기에 이루어졌고 194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첫 전시회, 미술협회, 미술학교, 극장, 도서관들이 설립되었다. 새로운 사회주의 정부는 미술의 출현을 받아들이도록 결정된 정책에 완전히 따랐다. 이러한 빠른 변화는 아마도 유목민들이 그들의 고유 전통을 보존하는 동시에 빨리 습득하여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그들만의 전반적인 특징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2.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통한 투쟁

  정부와 공산당의 시각적 선전용으로 쓰이던 것을 의미하는 소위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은 공식적으로 인정되어 모든 사회주의 연합국에서 단일 이데올로기 정권시기에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강요되었고, 모든 작가들은 그에 따라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적인 양식에서 예술성이나 정교한 묘사라는 면에서 아주 세련되었음을 증명하는 많은 몽골의 대표작들이 그 시기에 생성된 것을 알 수 있다. N. Tsultem 의 "초원의 겔(Gers in Steppe)", "구름들의 앙상(Ensemble of Clouds)”, G. Odon의 "일이 끝난 후에(After the Work)" G. Tserendondog 와 Yo. Ulziikhutag의 풍경화들은 그 시기에 제작된 화려한 작품들 중의 일부이다. 정권의 요구와 상관없이 작가들은 우주에 대한 특이한 묘사, 강한 색채, 인위적인 형태들을 자유롭게 보여주는 작품들을 계속해서 제작했다. 사회주의의 최전성기인 1970년대조차도 일부작가들은 비록 거의 전시가 되지는 않았지만 독특한 개별적인 양식의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후에 “현대 미술"이라고 불리는 미술의 씨앗들을 키우고 있었다.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은 1980년에 이미 몽골미술에서 영향력을 잃었다.

  1980년대의 Ts. Enkhjin, Do. Bold, R. Duinkhorjav, S. Tugs-Oyun과 같은 작가들이 몽골 현대 미술을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80년 가을에 Ts. Enkhjin의 개인전은 몽골작가협회의 전시회장에서 열렸다. 근대 유럽미술에서 영향을 받은 사상들과 이전과는 다른 형식을 가진 작품들을 보고 감상하는 것은 그전까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사상들을 가지고 있던 관객과 작가들 모두에게 중요한 첫걸음이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여전히 정부의 방침이었을 때 막을 올린 그 전시는 몽골미술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Enkhjin의 회화들은 전통적인 사실주의와는 아주 다른 양식을 보여준다. 그의 회화들은 '현대적' 이었다. 몇 년이 지난 후, 그 당시에는 젊은 작가들이었던 많은 작가들은 이 전시를 통해 표현과 묘사의 새로운 방식을 배웠다고 그 때를 회상한다. Do. Bold는 몽골현대미술의 형성에 있어서 또 다른 주요 역할을 담당한 뛰어난 인물이다. 1980년대 말, 그는 구상과 비구상적 형태들의 혼합을 특징으로, 추상화의 명확하고 의식적인 적용을 보여주는, 그의 고유한 스타일을 원숙하게 만들었다. 사실적인 작가들의 출현은 몽골현대미술에 있어서 의미 있는 단계였다. 인쇄술과 같은 기교를 따르면서도 그들은 또한 오일로 광범위하게 작업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사실주의적 묘사의 관행을 무시하고 대단히 자유롭고 기발한 구상을 창조해냈다. D.Amgalan의 작품들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장식적인데 S. Tugs-Oyun의 작품들은 생생하게 밝은 색채들과 열정적인 붓터치를 보여준다.

  이제까지 몽골의 작가들은 이전보다 더 강한 새로운 묘사에 대한 그들만의 예술적 추구를 해나가도록 자극받았다. 새로움에 대한 추구에 있어서 많은 작가들은 몽골미술의 근원으로 돌아갔고, 그들의 새로운 구상을 위해 과거의 미술에서 찾은 주제들을 사용하였다.


3. 몽골의 현대미술

  몽골에서 민주주의적 변화는 몽골현대미술에 새로운 혁신을 가져왔던 1990년에 시작되었다. 정치적 변화의 선구자로서 “Green Horse' 라고 불리던 새로운 미술협회는 1989년 이론적인 리얼리즘 미술에 반대하는 한 집단의 작가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Green Horse" 협회는 서양미술의 표현기법과 현대사상을 유입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그들은 1990년대 초기에 몽골 안팎에서 네덜란드와 독일 작가들과 함께 많은 전시회와 합동 기획전시회를 가졌다. 설치, 비사실적인 미술, 아상블라주, 기성작품을 통한 개념적 미술은 이러한 작가들의 작품의 주요 범주이다. 협회는 개념적 미술을 연습하려는 같은 목적을 가진 "Green Horse" 라는 이름을 가진 첫 번째 사립 미술 학교를 설립하였다. 협회의 주요 창시자들인 O. Dalkh-Ochir, G. Erdenebileg, B. Gansukh은 여전히 현대 서구 미술의 개념 안에서 작업하는 주요 작가들이다. “Green Art' 협회에 뒤이어 몽골현대미술에 서구의 영향을 가져다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비슷한 목적을 가진"Sita Art","Association of New Art","Sky와 같은 다른 단체들이 생겨났다.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 공식적인 양식으로서의 생명이 다하자, 한동안 비구상 회화는 작가들 사이에서 유행이 되었다. 묘사의 자유와 개방성, 절대성은 몽골의 작가들이 시험해 봄직한 양식의 무한한 가능성들을 가져왔다.

  민주주의 변화의 결과로서 몽골 작가들은 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라도 전시를 하고 그들의 작품을 판매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몽골 국내외에서 자주 전시회를 갖는 작가들의 작품에서 사람들은 서구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색채의 출현과 새로운 묘미를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작품들의 주제와 표현양식은 근대 양식을 통한 징기스칸의 삶과 용모을 보여주는 역사적 회화에서부터 단순한 풍경화와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몽골현대미술에는 현재 네가지의 주요 경향이 있다. Mongol Zurag이라는 회화의 전통양식과 과학적인 묘사, 근대미술, 설치, 아상블라주, 퍼포먼스등을 포함하는 현대미술이 그것이다.

  비록 새로운 상황이, 다양해진 양식 · 새로운 기교와 함께 몽골미술을 풍요롭게 해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상황은 또한 새 자본주의 시장에서 작가의 생존이라는 이슈를 가지고 왔다. 다수의 몽골작가들이 홀로 예술에 헌신하며 열정적으로 일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모순처럼 보일수도 있다. 창조적 활동, 위조품에 대한 의견, 감정, 미술상, 큐레이터, 미술경영은 미술에 더 높은 평가와 폭넓은 갈채를 건네며 몽골의 현대미술에서 그들의 제자리를 찾아간다. 몽골의 모든 작가는 전업작가이며 아마추어 작가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작가들이 작업을 위해 선택한 것이 무엇이든지 그들의 작품들은 그들의 내부 세계에 의해 정의되고 있으며, 그들의 독특한 양식과 기교로 그것들을 작품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미술의 모더니즘을 향한 경향은 이론적인 묘사나 전통적인 스타일보다 아주 우세해 보인다. 비록 내가 1999년 한국에서 열린 광주 비엔날레 국제 현대미술부분에서 수상하여 확실한 성과를 보여준 S.Dagvadorj를 기쁜 마음으로 언급한다 하더라도, 몽골에서의 개념 미술은 여전히 매우 초보적인 단계이다.

  몽골현대미술에 대해 묘사한 적 있는 한 미국 화상은 '오늘날의 몽골미술은 20세기초에 있었음에 틀림없는 파리에서의 미술현장처럼 생생하다' 라고 촌평했다. 나는 그것이 몽골인들이 가지고 있는 유목민의 영혼이라고 생각하며 또한 그것은 도전적이며 독자적인 구현을 쉼 없이 추구함에 있어 항상 앞으로 전진하고 투쟁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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