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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전시

김세일 KIM SE-IL

전시명: 김세일 KIM SE-IL

전시기간: 2002.10.02 - 2002.10.11 

전시장소: 모란갤러리

참여작가: 김세일

전시내용:


김세일의 불가촉(不可觸, Untouchable)


1.

  회화는 교묘(교활하고 조각은 당당하다. 회화는 대체로 어떤 속임수(재현의 회화적 장치)를 품고 있지만 조각은 그 자리에 그것이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별 변명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전통적인 동상이든 관객의 모습을 비추는 매끈한 표면을 뽐내는 미니멀 조각이든, 조각을 공부하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들이 항상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선포하는 듯이 보인다. 단지, 전통적인 조각은 그것이 점유하고 있는 공간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의 존재까지도 암시하고 전유하는 반면, 현대조각은 자신의 체적과 표면의 부피만큼의 존재만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 작품의 의미를 표면 즉, 관람자와 작품이 만나는 이른바 '공적인 공간(public space)'에 머무르게 함으로써 보는 이가 시각적으로나 관념적으로 작품의 내부로 침투할 수 없게 한다. 이와 같은 '불투명성(opacity)' 으로 인하여 작가에서 작품, 그리고 관람자로 연결되는 끈은 단절되고 관람자는 작품과 만나는 구체적인 시간 속으로 이끌려지게 되는 것이다."(윤난지, 로잘린 크라우스의 현대조각사의 흐름) 해설 중에서 인용)

  그러한 의미에서 김세일의 이전 목조작업들은 분명 현대(Modernist)조각은 아니다( '현대' 라는 말을 가치평가용어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즉, 현대조각이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스스로 묻고 그 물음 자체가 의미가 되어버리는 '생각하는 생각' 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면 항상 이야기 (narrative)를 담고 있는 김세일의 나무 조각들은 상징과 믿음의 차원에서 존재가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생각나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저 철사를 꼬고 두드리는 재미에 여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작업했다는 이번 작품들도 그 도(道) 닦는 듯한 행위 자체의 결과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작업이 점점 형용사(形容詞)적인 데서 동사(動詞)적이 된다는 김세일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철사를 꼬아 놓은 그 작품들이 그 꼬인 만큼의 생각들을 불러일으킨다. 그 생각(형용)들은 뒤샹의 변기에서조차도 오줌 누는 소년의 동상을 연상하는 나의 버릇에서 비롯되는 것뿐일까(자세히 보면 변기에 뚫린 구멍이 사내아이의 성기처럼 생겼다).


2.

  몇몇 평론가들이 금욕적이고 수더분하다고 말한 김세일의 나무 조각들에서 나는 오히려 난폭함을 느낀다. 비록 작업과정은 금욕적일지 몰라도, 나무를 날카롭게 파내고 거칠게 채색하고 드로잉하는 과정에서 인체는 난도질당한 후 비틀리게 재배치되며 얼굴은 토속적(primitive)으로 보이게끔 그려진다. 그리하여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이 3차원으로 걸어 나온 듯 하다(장승같은 그의 목조들이 난폭하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서양미술의 눈으로 토속적인 것을 바라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특히, 잘려진 팔 하나가 입에 들어가 있고 다른 팔은 그것을 붙잡고 있는 수인(囚人))이라는 작품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인물의 생김새가 왠지 작가 자신을 닮은 듯도 하고, 팔은 내 것인지 남의 것인지도 모르겠고, 입에 손을 집어넣는 건지 아니면 빼내려고 하는 건지 그도 저도 아니면 감자바위를 먹이는 것 같기도 하다. 김세일은 그 작품이 내밀한 무엇을 침범 당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수인)이라는 나무조각이야말로 그의 작품이 급격하게 변하게 된 이유의 한 단서를 제공해 주는 것은 아닐까.

  덩어리(mass)를 잘 다루는 조각가인 김세일은 오랫동안 깎아 오던 전통적이고 자연적인 재료인 나무를 팽개치고 갑자기, 탈바꿈한 매미껍데기 같은 스카치 테이프 인체를 보여 주다가 이번에는 [불가촉(不可觸, untouchable))이라는 제목의 꼬인 철사의 구조물들을 선보인다. 그의 말대로 목조에서 형태와 싸우는 피곤함 때문일지도, 재료와 형식에 대한 실험정신의 소산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역사나 전설 속의 소재를 다룰 때 일반적으로 야기되는 난점들 -과거에 이르는 직접적인 매개물을 발견할 수 없다든가 서양문화의 주도 속에서 우리 문화를 어떻게 위치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거리감각이 마비되어 동등한 가치를 말할만한 관점과 기준을 세우기 곤란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김세일 작업의 급격한 듯한 변화과정은 일련의 시퀀스를 이루고 있다. 즉,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고 원치도 않는 팔의 침입에 상처 입었을 (수인)의 입속 점막, 점막처럼 얇고 약한 스카치 테이프, 스카치테이프처럼 엿보기 쉽고 들키지 않으려면 재빨리 비워서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가장해야 하는 내밀한 어떤 것들, 그리하여 내밀한 어떤 것들은 손때가 타면 안 되는 법이다. 즉 불가촉(No Touch)!


3.

  먼저, 어떤 사물의 표면에서부터 철사를 꼬아나가기 시작해서 결국에는 그것들이 형성한 망(網)이 사물을 감싸게 되는 작품들이 있다. 이것들은 김세일이 이번 전시를 준비하기 시작한 초기에 주로 만들어진 만큼 그가 생각하는 '불가촉' 이라는 개념을 문자 그대로 드러낸다. 즉 관객은 철조망처럼 얽힌 구조물 때문에 사물과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철망 안에 들어있는 새, 숟가락, 원숭이, 불상, 포옹하는 남녀, 말 등의 인형이나 모형들은ㅡ아마도 작가가 보존하고 싶어하는 것들을 각각 상징하고 있을 텐데 - 그것들의 피부에서 철망이 자라나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가시가 촘촘히 박힌 고슴도치족(族)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인형이나 모형의 키치적 모양새로 말미암아 주제의 심각함(?)과 모순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게 된다. 철망의 구조물 안에 놓인 사물들이 작가의 손을 직접 거친 조각예술품이던가 아니면 자연물이라고 상상해 보면 그 아이러니는 자명해진다. 만약 금고 속에 소중하게 모셔놓은 보물들이 싸구려 모조품임을 발견하게 된다면? 한순간에 상징적 가치는 날아간다. 소중하고 내밀한 것들은 이미 화석이 되어 껍데기밖에 남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것일까? 어쩌면 진지한 주제를 다루는 자신의 과도한 진지함에 머쓱해서 의도적으로 슬쩍 말하기 또는 딴청부리기의 전술을 사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세일이 몽골여행 중에 인상 깊었던 풍경 -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배경으로 초원을 달려가는 말떼를 염두에 두고 만든 작품에 이르러 이전의 육면체 구조가 해체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제는 철사를 꼬고 두드리는 행위 자체에 매료된 듯한 작품들을  만들어 나간다.

  안치해 놓던 사물은 사라지고 처음부터 어떤 구조를 예정하지 않은 채, 마치 공간에 수묵화나 드로잉을 하듯이, 작가의 손길은 그저 철사 묶음이 자라나는 대로 따라간다. 이렇게 성장하는 작품들은 스스로 자연이 되어 때로는 분재, 때로는 허파, 때로는 나무뿌리의 형상을 취한다. 그것들은 이전에 만든 작품들과는 달리 존재에 대한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지는 않은 반면에 존재 자체를 지시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 존재가 되려고 하는 것 같다. 

  다발로 꼬아진 그 검은 철사들은 내게 머리털을 연상시킨다. 스님이나 군인들이 머리를 깎고 포르노 사진에서 음모를 노출시키지 않는 걸 보면 머리털을 포함한 사람의 털은 욕망과 관계가 있음에 분명하다. 목욕탕의 수채 구멍에 뭉쳐있는 머리카락이 더욱 불쾌하게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분명치 않은 어떤 욕망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은 아닌지. 만약에 그렇다면 그 불분명한 욕망으로 인하여 작품의 존재감이 한층 강화되고 있을 것이다. 욕망이 없으면 존재가 될 수 없으니까. 그리고 그것들이 김세일의 억압된 머리카락이 신체 밖으로 육화(肉化)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하면 비약이 좀 심하겠지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색상의 철사를 한꺼번에 꼬아 만든 작품들도 있는데, 작가가 그것들을 전시할지는 모르겠다. 다양한 색채 때문인지 재료와의 즐김이 더욱 강조된 듯한 그 작품들은 보기에 즐거워서 좋다. 부디 전시장에서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4.

  예술가가 작품을 통하여 외부에 있는 세계와 존재의 의미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더라도 결국 그 질문은 항상 작가 자신에게로 회귀한다. 김세일이 예전에 비하여 많이 서술하지 않으려 하는 것도 스스로 던진 질문이 자신의 내부에서 더욱 큰 소리로 메아리친다고 생각해서일지도 모른다. 그러했기 때문에 타인(역사와 전설 그리고 현실에 있음직한 인물들)을 다룬 목조에서 표피만 있는 스카치 테이프 조각을 통하여 그물 구조물 깊은 곳에서 사물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일종의 수축과 후퇴의 작업행보를 보여 왔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아마도 작업하는 모든 이들은 자신이 밖에다 대고 외쳤던, 그리고 안에서 더욱 크게 반향하게 되는 질문들이 물질(재료)과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는 동안 물질이 당당한 존재가 됨으로써 해소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면서 작업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인 것 같다.

  그 기대가 막연한 이유는, 사실상, 나 자신조차도 나로부터 불가촉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내가 전적으로 공감하는 글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들이 확정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존재라면,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 속으로 '되들어 감'으로써, 나선의 중심을 향해감으로써 우리들 자신에 더 가까이 있게 된다고 결코 확신할 수 없다. 흔히, 바로, 존재의 중심에서 존재는 방황하는 것이다. 때로 자신의 밖에 있으면서 존재는 확고함을 경험하기도 한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에서 인용)


공성훈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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