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이춘만: 언어와 인체
전시기간: 2002.06.08 - 2002.06.31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이춘만
전시내용:
미를 극복하는 힘 - 이춘만의 작품세계
이경성 / 미술평론가
조각가 이춘만과의 첫 번째 만남은 1984년 12월 공간미술관에서 개최된 '이춘만 세라믹 조각전' 에서였다. 그때 나는 도록에 '붕괴된 자아의식의 미적표현' 이라는 글을 통해 현대조각이 현대인의 붕괴된 자아의식과 분열된 이념을 충실하게 나타내기 때문에 전통조각에서 볼 수 있는 조화와 균형 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미의 법칙을 쫓아서 실험하고 있다는 요지로 다양한 재료와 기술의 개발에 따라 변모하여가는 조각가 이춘만의 실험적인 작품에 대하여 시사한 바 있다.
두 번째 만남은 1988년 6월 15일 샘터화랑에서 개최된 제4회 이춘만 조각전 '생각하는 사람들' 에서였다. 이때에도 전시제목과 같은 '생각하는 사람들' 이라는 제목으로 도전하는 시각구조의 밑바탕에 깔린 재료의 친밀감과 대상을 향한 관찰력, 조형적 표현력을 더욱 빛나게 하는 그의 끊임없는 시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글을 쓴 바 있다.
“언뜻 보기에는 돌 같으면서 돌이 지니지 않은 독특한 흙의 맛을 갖고 있는 것은 흙을 소재로 하여 소성했기 때문이다. 어느 의미에서는 돌이 갖고 있지 않은 따사로움을 브론즈나 석조 작품은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일종의 강인한 표면구조가 시각에 도전한다. 그렇게 도전하는 시각구조의 밑바닥에는 흙이라는 광물질이 갖고 있는 친근감이 느껴진다. 돌이기에는 너무나 부드럽고 흙이기에는 너무나 따뜻한 이 창조된 물질은 이춘만 작품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국립현대미술관의 관장으로 있던 나는 당시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 '생각하는 사람들' 시리즈 중 한 작품을 구입하게 되면서 이춘만의 작품과의 참다운 대면을 하게 되었다. 이후 나는 국립현대미술관 아카데미 출입문을 지나다닐 때마다 정면 잔디밭에 배치된 자그마한 작품 '생각하는 사람' 을 만나게 되면서 무언의 대화를 하게 되었고 이춘만의 작품에 대해 정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2000 -봄, 마석에 있는 모란미술관 정원에 세워진 작품이 그의 작품과의 세 번째 대면이었다. 그로부터 모란미술관에 갈 때마다 야외조각장에 세워진 그의 스케일이 크고 힘찬 거작을 볼 수 있었고 또한 이춘만과 모란미술관 관장 이연수를 비롯하여 미학자 조요한, 시인 김남조, 카톨릭 신부 조광호 등과 함께 '5·6·8 회를 만들어 그와 더욱 자주 만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작년에는 카톨릭 신자인 이춘만이 직접 돌산에 들어가서 몇 달이 걸려 제작하였던 대작들을 절두산성지에 세워놓은 것을 보고 이 조각가의 진면목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절두산 성당에 세워져 있는 14처를 비롯하여 작년에 세워진 대작 등에서 느낄 수 있는 이춘만 작품의 표현적 특성을 손과 얼굴에 있다. 양손은 의식적으로 정면을 향하여 들고 있고 얼굴도 몸체와는 관계없이 정면을 바라보게 한다. 일찍이 고대 조각가들은 손과 얼굴을 정면에 나열시키는 이른바 '정면의 법칙' 을 하나의 표현수단으로 사용하였다. 고대조각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회화에서도 나타나는 이 '정면의 법칙'은 이 무렵의 미술을 지배하고 있는 특징적인 표현법이다.
조각가 이춘만이 자신의 작품을 보다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손과 얼굴을 정면의 법칙에 종속시킨 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지 간에 그의 작품의 특징인 동시에 조각가 이춘만이 작품을 통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던 것이다. 이춘만의 작품의 특징은 볼륨과 각진 표현의 미로 인간의 심성에 뛰어드는, 여자의 작품이라고 보기 어려운 스케일의 큰 장미의 세계를 실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부적인 표현은 생략하고 형태의 창조에 충실한 그의 단순 명쾌한 표현력은 이 조각이 여리고 섬세한 여인의 손을 통해 완성되었다고 믿기 어렵게 한다. 이러한 장미의 효과는 형태의 창조뿐만 아니라 이를 다루는 그의 솜씨에서도 엿볼 수 있다. 말하자면 미완의 아름다움이 그의 작품에서는 의식적으로 의도된 것이다. 여기저기 돌에 찍어낸 흔적은 정리되지 않은 채 볼륨을 완성하고 생략된 세부적인 묘사는 오히려 상상을 통해 보다 많은 것을 보게 해 준다.
모란미술관의 전시를 앞두고 그의 근작을 보기 위해 수유리에 있는 그의 아뜰리에를 찾은 것은 겨우내 앙상했던 나무들에 새싹이 돋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지하실에 마련된 그의 아뜰리에는 과거에 제작된 작품들로 주위가 온퉁채워져있었고 가운데에는 아직 흙이 마르지 않은 최근작 일곱점이 서 있었다. 그는 점토가 마르지 않도록 싸 둔 헝겁들을 하나하나 풀면서 작품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그의 돌작품을 많이 보아온 나는 흙으로 빚은 작품들을 보고 이전에는 느끼지 못한 새로운 감회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여전히 각진 표현이나 스케일이 큰 도구는 그의 작품의 본질을 고스란히 고수하고 있었으나 이전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도식화된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장미의 세계에 육박했던 그의 작품이 각진 볼륨의 세계에서 도식화된 구조로 변모하는 것은 확실히 그에 있어서는 새로운 경향이었다. 이러한 조형적 표현은 아폴로적인 서구의 조각에서 보다는 디오니소스적인 동구 및 아시아의 조각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도상학적 대상을 다른 각도에서 나열적으로 표현시키는 것은 메소포타미아나 페르시아 같은 근동지방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수법이기도 하다.
조각가 이춘만은 이러한 도식적인 표현에 흥미를 느끼고 자신의 작품세계를 끌고 갈 의향이 크다. 그는 의도적으로 이러한 계통의 작품에서부터 새로운 창조로 변모시킬 계획이며 앞으로 당분간 이러한 도식화된 작품에 주력하여 발표하겠다고도 설명하였다.
예술은 창조이고 창조는 인간능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므로 하나의 장소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이를 바탕으로 또 다른 시점으로 이동하는 것은 또한 바람직한 예술가의 모습이다. 그렇기에 이춘만의 작품의 변화는 한 작가의 작품의 경향이 변모하고 발전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그 의미가 크다. 왜냐하면 예술은 늘 달라지는 것을 쫓아서 창조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결국 조각가 이춘만의 작품세계는 아름다움을 찾아서 우미의 세계에 도달하였고 또 이를 극복하여 장미의 세계에 이른 힘의 상태인 것이다.
전시명: 이춘만: 언어와 인체
전시기간: 2002.06.08 - 2002.06.31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이춘만
전시내용:
미를 극복하는 힘 - 이춘만의 작품세계
이경성 / 미술평론가
조각가 이춘만과의 첫 번째 만남은 1984년 12월 공간미술관에서 개최된 '이춘만 세라믹 조각전' 에서였다. 그때 나는 도록에 '붕괴된 자아의식의 미적표현' 이라는 글을 통해 현대조각이 현대인의 붕괴된 자아의식과 분열된 이념을 충실하게 나타내기 때문에 전통조각에서 볼 수 있는 조화와 균형 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미의 법칙을 쫓아서 실험하고 있다는 요지로 다양한 재료와 기술의 개발에 따라 변모하여가는 조각가 이춘만의 실험적인 작품에 대하여 시사한 바 있다.
두 번째 만남은 1988년 6월 15일 샘터화랑에서 개최된 제4회 이춘만 조각전 '생각하는 사람들' 에서였다. 이때에도 전시제목과 같은 '생각하는 사람들' 이라는 제목으로 도전하는 시각구조의 밑바탕에 깔린 재료의 친밀감과 대상을 향한 관찰력, 조형적 표현력을 더욱 빛나게 하는 그의 끊임없는 시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글을 쓴 바 있다.
“언뜻 보기에는 돌 같으면서 돌이 지니지 않은 독특한 흙의 맛을 갖고 있는 것은 흙을 소재로 하여 소성했기 때문이다. 어느 의미에서는 돌이 갖고 있지 않은 따사로움을 브론즈나 석조 작품은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일종의 강인한 표면구조가 시각에 도전한다. 그렇게 도전하는 시각구조의 밑바닥에는 흙이라는 광물질이 갖고 있는 친근감이 느껴진다. 돌이기에는 너무나 부드럽고 흙이기에는 너무나 따뜻한 이 창조된 물질은 이춘만 작품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국립현대미술관의 관장으로 있던 나는 당시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 '생각하는 사람들' 시리즈 중 한 작품을 구입하게 되면서 이춘만의 작품과의 참다운 대면을 하게 되었다. 이후 나는 국립현대미술관 아카데미 출입문을 지나다닐 때마다 정면 잔디밭에 배치된 자그마한 작품 '생각하는 사람' 을 만나게 되면서 무언의 대화를 하게 되었고 이춘만의 작품에 대해 정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2000 -봄, 마석에 있는 모란미술관 정원에 세워진 작품이 그의 작품과의 세 번째 대면이었다. 그로부터 모란미술관에 갈 때마다 야외조각장에 세워진 그의 스케일이 크고 힘찬 거작을 볼 수 있었고 또한 이춘만과 모란미술관 관장 이연수를 비롯하여 미학자 조요한, 시인 김남조, 카톨릭 신부 조광호 등과 함께 '5·6·8 회를 만들어 그와 더욱 자주 만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작년에는 카톨릭 신자인 이춘만이 직접 돌산에 들어가서 몇 달이 걸려 제작하였던 대작들을 절두산성지에 세워놓은 것을 보고 이 조각가의 진면목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절두산 성당에 세워져 있는 14처를 비롯하여 작년에 세워진 대작 등에서 느낄 수 있는 이춘만 작품의 표현적 특성을 손과 얼굴에 있다. 양손은 의식적으로 정면을 향하여 들고 있고 얼굴도 몸체와는 관계없이 정면을 바라보게 한다. 일찍이 고대 조각가들은 손과 얼굴을 정면에 나열시키는 이른바 '정면의 법칙' 을 하나의 표현수단으로 사용하였다. 고대조각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회화에서도 나타나는 이 '정면의 법칙'은 이 무렵의 미술을 지배하고 있는 특징적인 표현법이다.
조각가 이춘만이 자신의 작품을 보다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손과 얼굴을 정면의 법칙에 종속시킨 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지 간에 그의 작품의 특징인 동시에 조각가 이춘만이 작품을 통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던 것이다. 이춘만의 작품의 특징은 볼륨과 각진 표현의 미로 인간의 심성에 뛰어드는, 여자의 작품이라고 보기 어려운 스케일의 큰 장미의 세계를 실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부적인 표현은 생략하고 형태의 창조에 충실한 그의 단순 명쾌한 표현력은 이 조각이 여리고 섬세한 여인의 손을 통해 완성되었다고 믿기 어렵게 한다. 이러한 장미의 효과는 형태의 창조뿐만 아니라 이를 다루는 그의 솜씨에서도 엿볼 수 있다. 말하자면 미완의 아름다움이 그의 작품에서는 의식적으로 의도된 것이다. 여기저기 돌에 찍어낸 흔적은 정리되지 않은 채 볼륨을 완성하고 생략된 세부적인 묘사는 오히려 상상을 통해 보다 많은 것을 보게 해 준다.
모란미술관의 전시를 앞두고 그의 근작을 보기 위해 수유리에 있는 그의 아뜰리에를 찾은 것은 겨우내 앙상했던 나무들에 새싹이 돋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지하실에 마련된 그의 아뜰리에는 과거에 제작된 작품들로 주위가 온퉁채워져있었고 가운데에는 아직 흙이 마르지 않은 최근작 일곱점이 서 있었다. 그는 점토가 마르지 않도록 싸 둔 헝겁들을 하나하나 풀면서 작품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그의 돌작품을 많이 보아온 나는 흙으로 빚은 작품들을 보고 이전에는 느끼지 못한 새로운 감회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여전히 각진 표현이나 스케일이 큰 도구는 그의 작품의 본질을 고스란히 고수하고 있었으나 이전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도식화된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장미의 세계에 육박했던 그의 작품이 각진 볼륨의 세계에서 도식화된 구조로 변모하는 것은 확실히 그에 있어서는 새로운 경향이었다. 이러한 조형적 표현은 아폴로적인 서구의 조각에서 보다는 디오니소스적인 동구 및 아시아의 조각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도상학적 대상을 다른 각도에서 나열적으로 표현시키는 것은 메소포타미아나 페르시아 같은 근동지방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수법이기도 하다.
조각가 이춘만은 이러한 도식적인 표현에 흥미를 느끼고 자신의 작품세계를 끌고 갈 의향이 크다. 그는 의도적으로 이러한 계통의 작품에서부터 새로운 창조로 변모시킬 계획이며 앞으로 당분간 이러한 도식화된 작품에 주력하여 발표하겠다고도 설명하였다.
예술은 창조이고 창조는 인간능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므로 하나의 장소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이를 바탕으로 또 다른 시점으로 이동하는 것은 또한 바람직한 예술가의 모습이다. 그렇기에 이춘만의 작품의 변화는 한 작가의 작품의 경향이 변모하고 발전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그 의미가 크다. 왜냐하면 예술은 늘 달라지는 것을 쫓아서 창조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결국 조각가 이춘만의 작품세계는 아름다움을 찾아서 우미의 세계에 도달하였고 또 이를 극복하여 장미의 세계에 이른 힘의 상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