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전시

조광호: 가상현실의 시대, 미술의 종말과 선(線)의 정신 展

전시명: 조광호: 가상현실의 시대, 미술의 종말과 선(線)의 정신 展

전시기간: 2002.06.08 - 06.31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조광호

전시내용:


가상현실의 시대, 미술의 종말과 선線의 정신


김복영(미술평론가·홍익대 교수)


1.

조광호 신부가 <불의 화두> 이후 새로운 시도로 ‘선(線)’의 문제를 다룬 작품들을 모란미술관 초대전에서 선보인다. 어떤 이유에서 선의 문제를 다룬 신작들이등장하게 되었는지, 우선 그 배경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의 생각은 두 가지로 정리된다. 그 하나는 허구의 세계가 실재 세계를 압도하는 시대에 즈음해서 예술행위가 본연의 실재를 상기시키는 보루여야 하고, 이를 위해 허구를 숭상하고 즐기는 일체의 행위들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그 하나의 대안으로서 '선'의 실체론적 해석을 제시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와 관련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21세기 사이버공간 속에서 우리는 실물보다 더 실물에 가깝게 느껴지는 가상의 이미지가 지배하는 허구의 세계에 탐닉하고 있다. 근대이후 사진이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허구화하는 데 일익을 했다면, 금세기 컴퓨터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더 없이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다. 실재와 허구의 무분별로 인하여 더할 나위없는 '의미의 상실시대' 가 초래되고 있는 것이다." (작업노트)

  그의 언급에 의하면 "오늘의 현대미술은 서서히 가상세계와 현실세계를 무분별하게 탐닉함으로써, 이를테면, 아테네의 음영화가 제욱시스(Zeuxis)가 포도넝쿨이라는 허구를 가지고 한낱 새의 눈을 속였던 부질없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감각의 유희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현실 존재가 갖는 질량과 깊이에 갚음될 수 있는 실재의 탐구여야 한다”는 것이다.

  서구의 경우, 가령,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이 실재의 탐구에 목표를 겨냥해서 이룩했던 '재현'과 19세기 후엽 리얼리즘이 한창 그 세를 얻던 시절에 이루어졌던 사진기(카메라)에 의한 현실 복제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이해한다면, 조 신부의 허구 비판>은 실재에 대한 주체적인 인식을 전제로 하지 않는 이미지의 유희는 단지 하나의 허구의 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여기서 그의 <가상현실의 허구성에 대한 비판>은 <미술의 종말>이라고 하는 극한적인 표현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자문자답의 명제를 내놓는다. 인간 정신의 마지막 보루로 남아 있어야 할 예술의 실존적 구조는 종교적 실존의 구조를 닮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상현실과 실제현실이 범벅이 된 이 시대의 예술은 전통적 의미의 예술로써 그 종말을 고하고 있다고 인식함으로써, 그는 종교적 실제가 예술을 지지해 줄 마지막 보루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허구와 실재를 혼돈하여 수용하는 현대예술을 비판해야 할 이유가 충분할 뿐만 아니라, 그 방향은 변함 없이 실재와 허구를 분별하는 인간의 정신성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상세계의 허구성에 대한 조신부의 비판은 '허구 예찬'을 앞장세운 보드리야르J. Baudillard 학파의 매체에 관한 관념론적 이해의 틀을 부정하고, '실재는 실재로 남아 있어야 마땅하며, 허구는 허구로써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실재와 허구의 경계는 허물어야 할 것이 아니라 분명히 갈라놓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선' 에 대한 실체론적 해석substantial interpretation이 주목을 끈다. 그가 선에 대한 실체론적 해석을 시도하는 데에는 두 가지 절차가 눈에 띈다. 그 하나는 그가 <불의 화두를 제작해 오는 동안 주요 방법으로 도입했던 선 드로잉의 실험에서 확인된 것으로, 선의 가능성을 허구의 이미지와 결부시켜 가상세계를 비판하고자 하는 주요 모티프로 부각시키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선을 방법적 대안으로 고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회화세계의 본질적 핵심으로 부각시키고자 한다는 것이다.

  우선 앞의 경우부터 검토해 보기로 하자. 그는 근자의 어느 날, 물감이 칠해진 화면을 긁어낸 철판 조각을 화면에 놓아 둔 채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철판 조각과 그림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강렬한 긴장을 경험한 바 있다. 이어서 붓으로 선을 그은 후, 붓의 실체를 화면 위에 그대로 부착시켰을 때 일어나는 긴장 역시 이와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하나의 도구로서만 존재하던 사물들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 즉시 그는 철판 조각과 붓을 오브제로 삼아 사진을 찍고 실사출력을 해서 얻은 복제 이미지를 실제의 오브제와 함께 선 드로잉의 연장선상의 지점에다 포치해 보았다. 실물의 일부는 실사 출력된 복제 이미지로 대치해 놓음으로써 그는 우리로 하여금 '허구와 실재의 혼돈'을 응시하게 한다. 지칭하는 '내적그림 (디세뇨 인테르노 disegno intemo)'를 하느님에 의해서 인간의 정신 속에서 이루어지는 관념의 형성물로 이해함으로써, 선에 대한 선(先) 이해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허구를 이해하기 위해, 허구의 실상을 재현해 보인다. 복제의 대상으로 그가 도입한 실물에는 붓, 철판 이외에도 바지, 걸레자루 등이 추가되었다. 그럼으로써 그는 우리 시대가 지닌 정신사의 가장 큰 문제의 하나로 부각되고 있는 '가상세계와 현실세계의 무분별한 착각'을 실감나게 회화로 조형화하여 이를 비판할 소지를 준비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는 비판의 대안으로 내놓고 있는 조형적 실체로써 선을 제시하고 있다. 작가의 육필로 표현된 선은 일체의 가상과 허구 앞에서, 내면의 실재임을 확인한다. <미술의 종말>이라는 명제에 대치해서 사색해 보아야 할 과제가 바로 '선'이라는 것을 그는 분명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선을 자신의 회화세계의 본질적 핵심으로 간주하는 한편, 허구의 비판적 대안으로서 선의 실체론을 제기하고 <선에 대한 명상>을 시작하였다. 선에 대한 그의 생각을 추적하자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역사적 사실들이 확인된다. 그에 의하면, 일찍이 인류의 시작과 함께 선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사실이라는 것이다. 가령, 선사시대 인류의 흔적이 암각화의 선에 잘 나타나고 있음이 그 한 예라 할 수 있다. 이 경우, 선은 사물의 형상을 모사하는 목적이긴 하지만, 이보다는 사물의 생명을 포착하기 위한 목적으로서, 이를테면 주술(呪術)로서의 선이라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었다. 한편 고대 세계에 들면서 주술로서의 선이 사라지고 더 높은 정신 세계를 상징하는 암호로서의 선으로 발전하였다.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부조들은 인간의 영혼불멸을 상징하는 기호로서 선의 역할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여실히 증언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18세기 이후 근대 세계가 시작되면서, 특히 낭만주의 회화에서, 선이 인간의 자유와 이상을 그려내는 데 중심 역할을 하게 되고 선에 의해 인간의 내면 의식이나 인격을 서술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사상 처음으로 선의 포괄적 가치가 용인되었다. 이러한 선례는 이보다 앞서 17세기 이태리의 매너리스트이자(성(聖) 루가 아카데미(Luke Academy)>의 창설자인 쥬카리Federico Zuccari가 선을 하느님의 신성에서 연원하는 것으로 보고, 선에 의한 드로잉을 지칭하는 '내적그림(디세뇨 인테르노 disegno interno)'를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의 정신 속에서 이루어지는 고나념의 형성물로 이해함으로써, 선에 대한 선(先) 이해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로써 선은 단순히 사물의 외관을 그려내는 수단으로 그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세계의 정신성을 포착하는 촉매로 인정되었다. 이를 두고 어윈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는 이렇게 말하였다. '인간의 지성은 신의 관념에 참가함으로써, 마치 신 안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신령한 형상을 갖고 산출될 수 있듯이, 예술가가 형상을 물질적 재료에다 결부시킴으로써 여러 가지 형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래서 하느님의 신성한 능력에 의해 실재를 만드는 것과 예술가가 예술 작품을 만드는 절차의 필연적 일치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는 비판의 대안으로 내놓고 있는 조형적 실체로써 선을 제시하고 있다. 작가의 육필로 표현된 선은 일체의 가상과 허구 앞에서, 내면의 실재임을 확인한다. <미술의 종말>이라는 명제에 대해서 사색해 보아야 할 과제가 바로 '선'이라는 것을 그는 분명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선의 의미를 이해하는 방식은 형상을 재현하는 수단보다는 선 자체를 목적으로 간주하여 형이상학적 실체'로 수용하려는 시각이 역사적으로 엄숙히 존재하게 되었다. 이러한 선(線)에 대한 견해는 동아시아의 경우, 오랜 중국 산수화의 전통으로 자리잡혀 왔으며 또한 서구 근·현대미술의 전통으로 자리매김되는 데 이르렀다.


2

조광호 신부가 이번에 내놓고 있는 <선에 대한 명상> 역시 선에 대한 이러한 정신사적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된다. 그는 근작전에 즈음해서 '인간 정신이 탄생되는 순간 선이 우리의 내면에 탄생되었다'는 전제를 달아놓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회화에서 선의 기능 가운데 우리의 내면운동을 포착하려는 데 관심을 갖고 작업에 매달렸다. 선의 방향, 속도, 힘, 장단, 굵기에 따라 무한한 정신적 표출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선을 통해 명상에 임하고자 하였다. 나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연필을 잡는 순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선을 그어 왔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 비로소 선은 정신세계의 가장 예민한 조형적 요소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보다 추상적인 정신세계의 조형적 표현수단으로서, 선은 정신세계의 마지막 실재라는 것이 어렴풋이 이해되었다." (작가의 근작 노트에서 일부 번안 필자)

  그가 이렇게 선에 대해서 새삼 주목하게 된 것은 지금까지 그려온 작업들이 모두 선의 개념에 집중해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 비롯되었다. 무엇보다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선이 자신의 마음속에 잉태해 있었다는 데 주목하고, 근자의 몇 년간 제작해온 작업들을 재검토하는 가운데, 선이야말로 자신의 내적 세계를 표현하는 '디세뇨 인테르노'의 세계요, 초월자의 신성한 능력으로 실재를 만드는 창조적 열정과 그 뜻에 합당하리라는 믿음에 근거한다고 본다. 이 사실은 이미 그의 작업, <불의 화두를 전후해서 나타나고 있다. <불의 화두를 연작하는 동안에는 숯으로 선을 그으면서 숯을 화면에 콜라주하거나, 붓으로 선을 일필휘지하고선이 끝나는 지점에 붓을 콜라주하는 행위를 반복하였다. 그는 이 때의 심경을 이렇게 말한다. "선이 시작되고 선의 운동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화폭에 실현하고자 하였다. 어쩌면 이 세상 최후까지 마지막 작업을 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선을 그음으로써 작업을 끝낼 수 있으리라. 신의 창조적 모상을 타고난 인간이기에 '모든 이가 예술가' 라는 것은 '모든 이가 선을 그을 수 있다'는 것으로 분명해 진다. 나는 가능한 모든 작업을 통해서 정제된 선을 탐구하는 한편, 무엇이 가장 순수하고 무엇이 마지막으로 우리의 정신세계를 대변해 줄 수 있는지를 선을 통해 모색하고자 한다." <작가노트>

  이번 출품작들에서 그는 채색화, 숯에 의한 그림, 먹선에 의한 그림, 스테인드글래스 등 다양한 재료와 장르를 넘나들면서 선을 중심으로 하는 운필의 표정을 심화하는 데 힘을 쏟았다. 칸딘스키W. Kandinsky나 요셉보이스 J. Beuys처럼 선을 정신적인 것이거나 근원적인 것으로 다루려는 집념을 보여 준다.

  이 가운데서도 먹선과 숯에 의한 갈필, 흘러내림과 긁어내기로 그는 그의 인격과 특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들은 <불의 화두>와 연장선상에 있긴 하지만, 선과 붓, 그리고 숯과 실물, 그리고 실물의 이미지를 통한 각종 오브제의 콜라주가 하나의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 그의 근작들의 특징은 작가의 신체적 질량을 그대로 선의 운동 궤적 Iocus 가운데 내장시키되 방향과 속도, 장단과 굵기를 자유자재로 조절해 낸다는 것이다. 숯으로 제작한 경우는 선의 필세가 임의의 지점에서 시작해서 변방으로 원심 운동하는 동작을 수회 반복하고 중첩시키는 한편, 시작의 초기값으로 추정되는 장소에다 숯의 오브제를 콜라주한 것이 특징이다. 먹과 붓을 사용한 경우는 평필 효과를 연상시키면서 넓은 곡선이 시작되고 끝나는 지점을 골라 오브제를 콜라주하는 한편, 파묵과 갈필의 효과를 혼용한 것이 돋보인다. 그 어느 경우이건 간에, 선의 획과 전체의 흐름은 작가의 내면 심성이 신체적 무게에 실려 화면에 각인되는 순간의 동태를 극대화하려는 데 핵심을 두고 있다. 근작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작품의 후(後景)이 다소 경감되고 단지 최소한의 여운을 남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점은, 종래의 <불의 화두>의 경우 전경과 후경을 똑같이 중시함으로써, 예컨대, 전후의 대선율이 이중주 내지는 카운터포인트를 이루었던데 비하자면, 다소의 변화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변화는 본질적인 것이기보다는 아직은 주변적인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그는 <로고스의 암호〉 이후 <불의 화두를 여과해서 일관되게 시도해 온 필획의 암호적 성질을 표면에 클로즈업시키면서 배면에다 잔잔한 파동과 울림의 그림자를 삽입하는 이중구조를 지속적으로 견지하고 있다. 다른 한편, 채색과 스테인드 그라스 작품들은 이상의 선조적 성격을 살리면서도 색조에 의한 다소 중후한 분위기를 증대시킨 작품들이다. 이 방면의 근작들은 최근의 <얼굴> 연작들에서 시도했던, 어두운 톤을 배경으로 한 밝은 빛의 세계를 연출하려는 의도에 따라 표면 표정을 배면의 그것보다 다소 강화하려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번 근작전은 무엇보다 그의 끊임없는 실험의 왕성한 일면을 다시금 앞질러 보여준다. 이는 지난 2년여에 걸쳐 정진해온 '선에 대한 명상'을 새로운 경향으로 패러다임화하려는 의도를 보여 주는 것임에 틀림없지만, 이를 시작으로 그의 작품 세계가 나아갈 또 다른 이정표를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가톨릭 사제이자 화가로서 그는 벼랑에선 현대미술의 또 다른 문턱에서, 자신이 갈망하는 정신세계를 표출하고자 '선의 해석' 에 접근하고자 했다는 것과, 그럼으로써 자신의 작품세계를 천착하고자 했다는 것은 무엇보다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지금까지 선에 주목하면서, 선을 색면과의 화해를 통해서 표출하던 것을 그 역으로 선에다 일차적 의미를 부여하고 색면의 공간 구조를 크게 다운시키려는 방향으로 선회하고자 하는 것은 그의 작품세계가 금후 걷게될 커다란 변모를 예고하는 것이다. 이를 추진함에 있어 또한 머지않아 획기적인 업적이 이루어지리라 기대된다. 아마 이번 전시가 이미 그 시범적 사례의 하나가 될 것으로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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