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전시

(오늘의 한국조각 2002) 최의순

전시명: (오늘의 한국조각 2002) 최의순

전시기간: 2002.05.04 - 2002.05.31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최의순

전시내용:


모란미술관 기획사업 - <오늘의 한국 조각과 올해의 작가에 대하여


오늘의 한국조각

  모란미술관은 그 동안 한국 조각에 대한 전문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가선정 및 전시기획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왔다. 이는 한국 미술의 균형있는 발전을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며, 이는 우리가 미술관의 진정한 역할과 기능에 대한 책임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관의 기획사업으로서 '오늘의 한국조각' 은 해마다 새로운 주제를 가지고 한국 조각의 방향성과 당대성을 살펴보기 위하여 년간 기획전을 목표로 1996년 창설되었다. 그 동안의 전시를 살펴보면, 1996년 '한국현대조각의 조형성' (출품작가 : 김찬식. 최의순. 최만린 엄태정, 박석원, 신옥주, 김유선, 류인, 박희선, 원인종), 1997년 '사유의 깊이' (출품작가 : 박종배. 엄태정. 박석원, 최인수, 안규철. 이수홍- 커미셔너 김용대), 1998년 '물질과 작가의 흔적' (출품작가: 심문섭, 최인수. 이기칠,김주현-커미셔너 김정희), 1999년 ‘선線’ (출품작가 : 김세일. 정재철, 서정국, 신옥주 홍승남 - 커미셔너 김정희), 2000년 '새로운 차원을 찾아서' (출품작가: 이용덕, 김수자 최재은. 박상숙, 문주. 정현-커미셔너 이경성), 2001년 '사인의 시각' (출품작가 : 김세중, 김정숙, 백문기. 윤영자 - 켜미셔너 이경성) 등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올해 2002년에는 조각가 최의순을 선정하였다.


올해의 작가 - 최의순

  살아가는 일상의 속도는 우리가 인지하는 세계의 변화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 이러한 속도는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일어나고 있으며, 인터넷의 네트웍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의 글로벌화는 이제 더 이상의 지역문화주의(localism)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예술에 있어서도 이러한 현상은 체감보다 먼저 우리의 시각을 통해 주변을 점령해 나가고 있다. 설치와 행위는 오래 전의 이야기가 되었고, 각 예술 영역의 혼성과 페미니즘, 그리고 젠더(gender)에 대한 인식 담론의 확산이 이미 주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어느 때보다 활발한 예술활동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에 한국 조각의 현대성을 획득해 나간 원로들의 작품세계를 살펴보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조각가 최의순은 한국 현대조각사에 대한 깊은 이해를 중심으로 빛과 공간, 그리고 형태에 대한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표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작품은 작가적 독창성을 획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각이 가진 독자적인 힘을 보여주고 있다. 최의순의 조각에 대한 시각은 오늘날 조각 영역의 확장에서 보여지는 근간의 불안정성에 대해 조각에 대한 확연한 믿음을 심어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최의순은 석고라는 일회적 재료를 사용한다. 한국조각의 전통에서 보면 그것은 조각의 완성재료가 아니다. 완성품을 위한 부차적 재료-거푸집으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는 이 거푸집에 관심을 가진다. 덩어리 즉, 물성으로서의 알맹이가 제거된 거푸집을 말이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 거푸집 속에는 공간이라는 보이지 않는 알맹이로 가득 차 있다. 그에게 있어 이제 거푸집은, 그가 평생을 두고 연구하고 있는 공간을 위한 작품으로서 새롭게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전환은 동양철학적 사유체계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여진다. 空卽是色 色卽是空, '空'과 '', 비어있음과 가득 차있음은 둘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바, 비어있음이란 결국 그 '비어있음'으로 가득 차있음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진흙을 성형하여 그릇을 만들면 그 비어있는 공허에서 유용성을 찾게되고, 집에 문과 창을 뚫게 되면 그 비어있는 공간에서 유용성을 찾게된다. 그러므로 사물의 존재는 유익성이 있고, 無-存在(non-being)는 실용성이 있다”고 노자는 말한다. 우리는 진흙을 이겨 질그릇을 만들 듯, 석고를 이겨 공간을 창조해낸 최의순의 작품에서 無-存在(non-being)의 생동하는 긴장을 볼 수 있다. 공간을 가득 품고 있으면서 한편으로 공간의 자유로운 숨통을 열고 있는 그의 작품은 빛을 끌어들임으로서 더욱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은 쉽게 볼 수 없는 독자한 형form을 형성한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으로 살펴보면, 그 중요한 특질로서 '과 '빛light' 시리즈를 볼 수 있다. 像 시리즈의 작품이 '空間' 자체의 유희에 있다면, 빛light' 시리즈는 '空間-빛light' 의 관계를 유희한다. 위에서 밝힌 것들이 '像'의 공간이었다면, '빛light 의 공간은 모궁(母宮)을 닮아 있다. 이 유희적 작품의 창조는 두 개의 대별적인 제작과정을 필요로 하는데, 첫 번째는 빛을 모으기 위한 공간과 그 공간 속에서 빛을 파장시키는 절대성으로서의 초 평면이다. 이 면은 유리와 유리사이에서 압축되어져 제작된 순수면이다. 이는 신의 천지창조에서 '빛이 있어라'라는 말씀이기 전의 카오스와도 같다. 이 면에 의해 빛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반대편의 구멍으로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빛의 소용돌이는 곧장 분출하는 대지의 지각변동을 가져온다. 빛의 아우라가 마치 포지티브와 네가티브의 특이점을 빠져 나오는 듯 온갖 에너지를 폭발시키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초 평면(순수면으로서)의 배면 - 빛이 빠져나오고 있는 앞면은 거칠게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그 거친 면은 태초성을 간직하고 있는 달의 표면처럼 숱한 분화구와 계곡, 그리고 깊은 침묵을 동반한다. 빛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이는 뒷면과 달리 오히려 앞면은 역광으로 인한 어둠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둥근 구멍은 빛의 생명(아우라)을 잉태한다. 

  게오르기 키페(Gyorgy Kepes)는 말한다. “우리는 온갖 빛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서 산다. 이 혼란의 소용돌이로부터 우리는 시각적 이미지가 부르는 체험 속에서 얻어지는 형상 즉 통일된 실체(unified entities)를 형성한다. 이미지를 지각한다함은 형상화과정(forming process)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은 창조활동이다.”라고. 빛이라는 生을 창조해내는 모궁(母宮)과도 같은 최의순의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이와 같은 이미지 체험을 하게된다. 실제로 작가는 그의 작품의 근간을 이루는 빛과 공간, 그리고 형태에 대한 아이디어를 한강의 노을과 주변의 산등성이 등 살아가는 삶의 곳곳에서 발견한다고 한다. 나무에 바람이 불어와 가지와 잎들이 부딪히며 크고 힘찬 손길로 어루만지는 것처럼 흔들리는 모습에서 ''은 그 바람을 포용하는 큰 나무가 된다. 그래서 그는 '像'과 동일한 선상에서 '큰 바람', '바람과 나무와 빛'과 같은 제목을 붙이기도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의 작품을 보면, 공간구획이 하나에서 둘, 셋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1997년 作 像 (154*28*76)은 하나의 공간으로 길게 펼쳐져 있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 그 오목한 자리는 바람의 손길로 잔잔한 파문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다섯 손가락으로 남긴 이 흔적들은 석고가 굳기까지의 일획이다. 동양화에서 붓이 일획의 도구라면, 그는 다섯 손가락을 사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흔적들은 그의 작품의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일획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너무도 간단하다. 그것은 '한번 그음'이다. 모든 예술적 행위는 '그음', 즉 행위의 원초성으로부터 출발한다. 그 '그음' 이란 일획이며 동시에 미학이다라고 석도의 일획론은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최의순은 단지 10여분이면 굳기 시작하는 석고라는 재료를 통해 자신의 예술적 행위를 완성해 나가고 있다.

  이 작품 외에는 대부분 두 개의 구획공간에 의해 제작되었다. 그러다가 2002년 최근의 작품에선 그 공간이 세 개로 늘어난다. 점점 확산되고 있는 것이데, 이러한 원리는 어디에서 연유하고 있는 것일까? 스탠리(Stanly)에 의하면, 공간구축의 근본원리는 한 체계에서 다른 체계에 접합하고 순응시키되, 서로 대립되는 것도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게 하며, 질서라 불리는 보다 높은 통일을 이루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대립으로서가 아니라 조화이며 보다 높은 통일로서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보면, 점차적으로 내밀화 된 공간으로 변화되면서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엔 하나의 공간이었다가 또 다른 공간과 만나 서로 충돌과 파장을 거듭하며 닫힘과 열림이 중첩된 이중구조공간으로 변한다. 그리고 마침내는 無-存在(non-being)의 긴장이 '無로서 有의 利를 누리는' 存在(being)의 해석으로 나아가게 된다. 마치 저 스스로 살아 공간을 확장하고 있는 현장을 목도하게 된다. 이는 작가의 의지가 초연해진 상황에서 작품과 작가가 상응의 화두를 깨치고 서로 의지함으로 일어서는 연기론(緣起論)적 깨달음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작가는 '空間과 量塊에 대한 考察'이란 석사 논문에서 “彫刻은 '空間'을 어느 위치에서 集成하여 固定시킨 後에는 이것을 발판으로 하여 다음의 새로운 成長을 위한 - 作品活動을 위한 - 끊임없는 追求로서  生命을 이어나가야 하기 때문에 그 個個의 時間이 休息하는 實?가 된다고 본다. 즉, 나 아닌 外的世界의 實在하는 物體로서 놓여지는 나 자신의 生活이며 그 -部分 이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공간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는 그가 밝히고 있듯이 이제 그의 삶이 된 듯 하다. 그의 작품세계는 오로지 그 자신과 작품 안에서 일관되게 확장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작품과 조각에 대한 삶의 자세는 한국조각의 새로운 풍요가 아닐 수 없다.


모란미술관 학예연구사/ 김종길

*이 글에서 노자의 ‘無~存在(non-being)'의 쓰임은 정형민선생님의 글과 동일한 의미에서 쓰여 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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