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2024 모란미술관 기획전 《지각의 통로》
전시기간: 2024.5.2. –7.28.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출품작가: 김승영, 박선기, 이창원, 임선이
전시내용: ‘시각의 통로’를 주제로 조각의 고유한 속성인 물질로 구현된 형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으로부터 기획
지각의 통로
최태만/국민대학교 교수·미술평론가
본다는 것과 보여지는 것
여기 한 장의 그림이 있다. 그림 속의 왼쪽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두 개의 형태는 오리의 부리일까, 아니면 토끼의 두 귀일까.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은 지각에 대한 퍼즐의 예로서 이 애매한 그림을 제시했다. 그는 토끼로 보였던 이 그림이 오리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을 ‘국면의 떠오름 현상’ 또는 ‘국면전환’이라 불렀다. 사실 그것을 오리로 보든 토끼로 보든 그림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 눈이 그렇게 느낄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 국면전환은 두 대상이 불러일으킨 경험적 내용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차원의 평면에 그려진 선과 색채에 불과한 그림을 보고 특정한 인물이나 대상 또는 아름답거나 숭고를 불러일으키는 풍경을 떠올린다. 모방 기술을 동원하여 특정한 대상을 닮게 그린 그림을 보면서 그려진 대상과 실재하는 대상을 동일시하는 것은 순진한 착각이거나 착시의 결과일까.
16세기 영국에서 헨리 8세의 궁정화가로 복무했던 홀바인(Hans Holbein)이 그린 <대사들>은 영국이 가톨릭으로부터 떨어져 나갈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의심으로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영국으로 보낸 외교관과 고위 성직자를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가 발전시킨 원근법, 명암법, 해부학을 충실하게 적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플라톤주의적 관념까지 느끼게 만드는 풍부한 상징과 알레고리까지 발견할 수 있는 이 회화에서 가장 이상한 부분은 공중에 부유하듯이 두 주인공의 발 사이를 사선으로 가로지르고 있는 기이한 물체이다. 라캉(Jacques Lacan)은 이 물체의 왜곡된 상(anamorphosis)을 통해 있는 그대로 보는 시선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시선인 ‘응시’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이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는 이 기이한 형태가 무엇인지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채 스쳐 지나는 순간 이것은 해골의 형태로 우리를 응시한다. 바로 이 순간 나는 보는 주체인 동시에 보여지는 대상이 된다. 사실 라캉은 홀바인이 작품 속에 배치, 연출한 온갖 종류의 다양한 소품이 상징하는 바에 대해서는 별반 주목하지 않은 반면 유달리 이 뼈와 같은 기이한 형태에만 집착하며 ‘모든 그림은 응시를 위한 함정’일 뿐이라고 해석했다.
‘본다’는 것과 ‘보여진다’는 문제에 대한 인식론적 고찰은 라캉 이전에도 여러 철학자에 의해 이루어진 바 있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존재와 무』에서 열쇠 구멍을 훔쳐보는 사람의 예를 들어 설명한 바 있으며,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세잔의 작품을 통해 신체에서 일어나는 지각을 논의하며 주체와 대상이 ‘함께-태어난다(co-naissance)’고 주장했다. 메를로 퐁티에게 봄과 보여짐의 문제는 장갑을 낀 손의 피부와 그것과 닿은 장갑의 털과의 관계처럼 상호신체적이다.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지각이란 한마디로-경험주의 전통에서 흔히 ‘요소적(élémentaire)’이라고 간주되거나 오해되는- 감각(sensation)과 더불어 그것에 부과된 어떤 ‘느낌(sentir)’을, 또는 어떤 ‘느낌’과 더불어 그것을 발생시킨 감각을 가리킨다. 즉 지각은, 우리의 감각기관에 수용된 주어진 것,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정서적 내면에 가져온 ‘종합적인(synthétique)’ 어떤 느낌, 양자를 아우르는 표현이다.
라캉은 특히 메를로퐁티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푸코(Michel Paucault) 역시 『말과 사물』의 제1장을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 할애하며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의 관계를 다루었다. 메를로 퐁티가 말한 ‘상호신체성(intercorporéité)’은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로 연결된다. 이 방대한 이론을 소화하기에 나의 능력은 터무니없이 부족하고 이것을 정리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 아니므로 지각이 단지 ‘막연히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선택적으로 통찰하는 행위’라는 아른하임(Rudolf Arnheim)의 게슈탈트심리학을 다리로 삼아 인체에 일어나는 반응과 작용을 바탕으로 지각의 개념과 과정을 요약하고자 한다.
눈과 지각
이 전시의 핵심 개념이자 주제인 ‘지각(知覺, Perception)’은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지각은 인간이나 동물이 눈, 귀, 코, 피부, 혀 등의 감각기관을 동원하여 외부세계로부터 수신한 정보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빛, 형, 색, 소리, 냄새 등의 자극을 감지한 감각기관이 그 정보를 뇌로 전달하면 뇌는 감각정보를 처리하고 해석하여 무엇을 보고 듣는지, 어떤 냄새와 맛을 경험하는지 결정한다. 비록 지각이 감각기관에 반응하는 과정이라 하더라도 그 결과는 개인의 경험, 문화적 배경, 신체적 특성, 감각기관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특히 지각에 비해 더 주관적인 인식이 경험과 기억, 미래에 대한 예측과 같은 시간적 고려에 따라 지각에 의미를 부여하므로 내용은 풍부해진다. 지각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대화하고 의사소통하는 것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심리학, 신경과학, 인지과학, 철학의 중요한 개념이자 연구 대상이며 주제이기도 하다.
이 전시는 인간의 지각 중에서 시지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시지각의 가장 기본적 요소인 빛과 눈에 대해 먼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시각의 직접 대상은 빛, 색채, 그리고 형태이다. 인간의 안구는 각막, 동공, 홍채, 볼록한 렌즈 형태의 수정체 등과 망막, 황반, 시신경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의학에서는 섬유막, 혈관막에 이어 안구의 제일 안쪽에 있는 얇고 투명한 신경막을 ‘망막(Retina)’이라고 정의한다. 안구 안쪽을 2/3 정도 덮고 있는 이 망막은 두 겹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바깥 부분을 색소층 망막, 안쪽을 신경층 망막이라 부른다. 빛이 각막과 수정체를 통해 안구로 들어오면 망막에 상이 맺히는데 망막은 시신경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뇌로 전달하기 위해 전기적 신호로 형태를 바꾸는 역할을 한다. 수정체를 통해 들어오는 외부의 상은 상하좌우가 바뀌어 망막에 상을 맺고 두 개의 눈은 다른 각도에서 사물을 바라보기 때문에 각 눈의 망막상이 불일치하게 되어 물체의 거리를 지각하게 된다. 추상세포는 색상을 구분하여 시신경을 통해 뇌에 색에 해당하는 정보를 보낸다. 그러나 인간의 눈은 가시 세계를 향해 열려 있으므로 눈으로는 망막을 볼 수는 없다.
우리는 가시세계가 우리의 눈으로 보낸 정보를 ‘본다’는 행위를 통해 지각한다. 본다는 과정은 안구의 운동과 수정체의 초점조절 등을 수반한다. 보는 것(감각)은 곧 아는 것(지식)과 연동한다. 망막에 상이 맺히면 시각세포가 흥분하고 대뇌에 연결된 시신경이 그것를 뇌로 전달하기 때문에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뇌로 본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나는 앞에서 화가의 그림을 통해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에 대해 다룬 이론을 간략하게 소개한 바 있다. 여기서 재현은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세계의 구현이 아니라 화가에 의해 선택된 대상이나 세계에 대한 기록이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자연대상을 충실하게 묘사한 풍경화에도 해당한다. 화가가 의문을 갖고 탐구하는 것은 물리적 세계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우리들이 반응하는 것으로서의 자연이다. 화가는 원인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어떤 효과의 메카니즘에 관심을 쏟는다. 그가 문제삼는 것은 하나의 심리적인 문제거리이다. 즉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하고는 그림자 하나조차도 일치하지 않는데도 그 속에서 설득력 있는 이미지를 추출하는 그런 문제이다. 그래서 양식이 중요하다. 사실 서양 중세의 모자이크, 프레스코, 필사본 삽화에 그려진 종교적 주제의 그림에서 주제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제외하면 실재와 하등 관계가 없다. 이런 점은 불교화화도 마찬가지이다. 이 그림들은 모두 화가가 본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바를 그린 것이다. 더욱이 그림이나 조각은 예배의 대상이기 때문에 도상의 규칙을 엄격하게 준수해야만 했다. 북송대의 곽희(郭熙)나 범관(范寬)이 그린 산수화는 중국 회화사의 걸작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특정 지역을 대상으로 그린 것은 분명하지만 사진처럼 옮겨놓은 것은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조선 후기 진경산수를 대표하는 정선(鄭敾)의 <금강전도>는 웅장한 금강산을 평면에 옮겨놓은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것을 실재와 동일한 것으로 보려고 하는 것일까. 창작에서 양식의 전통이 중요한 것처럼 우리의 보는 방식 역시 그렇게 보고자 하는 기대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회화나 조각을 사실로 착각하도록 만드는 심리적인 요인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허블에 이어 제임스웹 천체망원경으로 촬영한 별의 탄생과 소멸을 시각적으로 보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인간의 시각으로 포착할 수 없는 우주의 신비조차 쉽게 접할 수 있고, 초정밀 카메라를 장착한 내시경이 우리의 장기 내부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문제되는 부위를 촬영해 전송한 이미지가 맺힌 모니터를 보는 것도 일상이 되었다. 과학기술이 인간의 눈을 추월한 지 한참 지났는데도 왜 눈과 지각에 대해 이야기하는가. 게다가 추상미술도 과거지사가 된 이 시대에 재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으로 비쳐질 수 있다. 문제는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보는 방식이 지닌 관습이 그렇게 탄력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형태, 구조, 공간의 지각
인간에게는 어떤 형태에서 특정한 대상을 연상하거나 투사하는 능력이 있다. 예컨대 곰브리치는 『예술과 환영』에서 예수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철학자 아폴로니우스가 하늘의 구름을 보고 켄타우로스를 떠올린 예를 들어 눈으로 보는 것과 마음으로 보는 것에 대해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구름이 무엇을 닮았다는 것은 모방의 이중구조를 설명하기 위한 수사일 뿐이다. 즉 모방하기 위해 손과 마음을 다 사용하거나 마음만으로 닮은 꼴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여기서 대상과 닮은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앎(지식)과 기술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에게도 모방술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대상을 지각하는 과정은 모방(투사 혹은 연상)행위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술작품에 표현된 대상을 지각하기 위해 과거의 경험과 지식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과 지식이 없어도 표현을 지각하는 경우를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난제의 해결을 위해 아른하임은 과거의 경험이 없을지라도 대상에 표현된 것을 지각할 수 있다는 점을 형태는 다르지만 질적으로 같다는 의미의 ‘이형동질(isomorphism)’의 개념을 도입하여 설명하였다. 그는 시각예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심리적 신비를 분석하고자 균형(Balance), 형(Shape), 형태(Form), 성장(Growth), 공간(Space), 빛(Light), 색(Color), 운동(Movement), 역학(Dymnamic), 표현(Expression)에 이르는 10가지 기초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사물이나 현상을 지각할 때 떠오르는 형태를 통상 ‘게슈탈트(Gestalt)’라고 하는데 이 개념은 중의성을 지닌 것이므로 단일한 의미로 정의할 수 없다. 게슈탈트는 개별 단위를 나타내는 동시에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의미를 담고 있거나 전체로서의 형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아른하임이 제시한 기초개념 중 균형을 보면 인간은 균형을 추구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조형 요소의 양가적 구조화가 가능해진다고 한다. 즉 인간은 외부세계의 시각 경험을 유기체로서의 자신의 내적 균형 유지에 유리한 방식으로 구조화하여 지각하려 한다. 내면에 무질서와 혼란이 지배적일 때,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인간 정신은 외부세계에 대한 시지각 경험에서라도 질서와 정돈을 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인들이 발견한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는 그리스인들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비례의 하나인 균제(symmetria)를 인체에 적용한 것으로서 아른하임의 기초개념 대부분을 적용하여도 좋을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기초개념은 비단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에도 적용된다. 회화가 이차원적 평면에 그려진 형태와 색채의 구조라고 한다면 조각에서는 재료인 물질과 그것이 놓인 공간이 중요하다. 특정한 대상을 암시하거나 연상시킨다 하더라도 지각을 주제로 한 논의에서 조각이 회화보다 덜 주목받은 것은 재현된 대상이 불러일으키는 환영적 효과보다 물질이 지닌 즉자성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신화 속의 피그말리온은 상아로 자신의 마음속에 그리던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구현해내었으나 그만 그 조각과의 사랑에 빠지는 가련한 인물이다. 그의 간청을 들은 신이 죽은 물질인 상아를 생명체로 육화시켜준다고 하지만 상아는 상아일 뿐이다. 우리는 조각을 통해 살아있는 생명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형태의 배열과 구조, 물질의 고유한 속성, 그리고 물체와 배경(공간)의 상호관계가 부여하는 심미적 효과에 더 끌릴 수도 있다. 덩어리와 물질의 표면을 지각하기 위해 빛이 필요하며, 양감은 중량을 지각하게 만든다. 형태의 지각은 견고함과 역동성에 대한 심미적 경험을 고양시킨다.
창작과 수용에서 시지각이 차지하는 부분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시각예술에서 지각의 중요성은 크지만 ‘보는 방법’에 따라 다양한 시각적 경험을 끌어낼 수 있다. 이 전시에 참가한 네 명의 작가는 ‘아는 만큼 보인다’, 또는 ‘보는 것이 곧 믿는 것이다’라는 전통적인 보는 방법을 위반, 전복, 해체하는 작업에 주력하여 왔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아는 만큼만 본다’는 것으로 축소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보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은 그 믿음을 밑바닥에서부터 해체하는 지적 작업’일 수 있다. 따라서 이 전시는 다르게 보기, 새롭게 보기에의 제안이자 그것을 향해 진입하는 통로이기를 지향한다. 전시를 본다는 것은 작품이 걸어놓은 매력적인 마술의 덫에 사로잡히기 위해 지각의 문지방을 넘어서는 행위이자 그곳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거쳐야 하는 통로를 걸어 나오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 통로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일 수 있다.
전시명: 2024 모란미술관 기획전 《지각의 통로》
전시기간: 2024.5.2. –7.28.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출품작가: 김승영, 박선기, 이창원, 임선이
전시내용: ‘시각의 통로’를 주제로 조각의 고유한 속성인 물질로 구현된 형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으로부터 기획
지각의 통로
최태만/국민대학교 교수·미술평론가
본다는 것과 보여지는 것
여기 한 장의 그림이 있다. 그림 속의 왼쪽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두 개의 형태는 오리의 부리일까, 아니면 토끼의 두 귀일까.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은 지각에 대한 퍼즐의 예로서 이 애매한 그림을 제시했다. 그는 토끼로 보였던 이 그림이 오리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을 ‘국면의 떠오름 현상’ 또는 ‘국면전환’이라 불렀다. 사실 그것을 오리로 보든 토끼로 보든 그림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 눈이 그렇게 느낄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 국면전환은 두 대상이 불러일으킨 경험적 내용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차원의 평면에 그려진 선과 색채에 불과한 그림을 보고 특정한 인물이나 대상 또는 아름답거나 숭고를 불러일으키는 풍경을 떠올린다. 모방 기술을 동원하여 특정한 대상을 닮게 그린 그림을 보면서 그려진 대상과 실재하는 대상을 동일시하는 것은 순진한 착각이거나 착시의 결과일까.
16세기 영국에서 헨리 8세의 궁정화가로 복무했던 홀바인(Hans Holbein)이 그린 <대사들>은 영국이 가톨릭으로부터 떨어져 나갈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의심으로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영국으로 보낸 외교관과 고위 성직자를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가 발전시킨 원근법, 명암법, 해부학을 충실하게 적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플라톤주의적 관념까지 느끼게 만드는 풍부한 상징과 알레고리까지 발견할 수 있는 이 회화에서 가장 이상한 부분은 공중에 부유하듯이 두 주인공의 발 사이를 사선으로 가로지르고 있는 기이한 물체이다. 라캉(Jacques Lacan)은 이 물체의 왜곡된 상(anamorphosis)을 통해 있는 그대로 보는 시선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시선인 ‘응시’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이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는 이 기이한 형태가 무엇인지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채 스쳐 지나는 순간 이것은 해골의 형태로 우리를 응시한다. 바로 이 순간 나는 보는 주체인 동시에 보여지는 대상이 된다. 사실 라캉은 홀바인이 작품 속에 배치, 연출한 온갖 종류의 다양한 소품이 상징하는 바에 대해서는 별반 주목하지 않은 반면 유달리 이 뼈와 같은 기이한 형태에만 집착하며 ‘모든 그림은 응시를 위한 함정’일 뿐이라고 해석했다.
‘본다’는 것과 ‘보여진다’는 문제에 대한 인식론적 고찰은 라캉 이전에도 여러 철학자에 의해 이루어진 바 있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존재와 무』에서 열쇠 구멍을 훔쳐보는 사람의 예를 들어 설명한 바 있으며,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세잔의 작품을 통해 신체에서 일어나는 지각을 논의하며 주체와 대상이 ‘함께-태어난다(co-naissance)’고 주장했다. 메를로 퐁티에게 봄과 보여짐의 문제는 장갑을 낀 손의 피부와 그것과 닿은 장갑의 털과의 관계처럼 상호신체적이다.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지각이란 한마디로-경험주의 전통에서 흔히 ‘요소적(élémentaire)’이라고 간주되거나 오해되는- 감각(sensation)과 더불어 그것에 부과된 어떤 ‘느낌(sentir)’을, 또는 어떤 ‘느낌’과 더불어 그것을 발생시킨 감각을 가리킨다. 즉 지각은, 우리의 감각기관에 수용된 주어진 것,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정서적 내면에 가져온 ‘종합적인(synthétique)’ 어떤 느낌, 양자를 아우르는 표현이다.
라캉은 특히 메를로퐁티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푸코(Michel Paucault) 역시 『말과 사물』의 제1장을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 할애하며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의 관계를 다루었다. 메를로 퐁티가 말한 ‘상호신체성(intercorporéité)’은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로 연결된다. 이 방대한 이론을 소화하기에 나의 능력은 터무니없이 부족하고 이것을 정리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 아니므로 지각이 단지 ‘막연히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선택적으로 통찰하는 행위’라는 아른하임(Rudolf Arnheim)의 게슈탈트심리학을 다리로 삼아 인체에 일어나는 반응과 작용을 바탕으로 지각의 개념과 과정을 요약하고자 한다.
눈과 지각
이 전시의 핵심 개념이자 주제인 ‘지각(知覺, Perception)’은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지각은 인간이나 동물이 눈, 귀, 코, 피부, 혀 등의 감각기관을 동원하여 외부세계로부터 수신한 정보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빛, 형, 색, 소리, 냄새 등의 자극을 감지한 감각기관이 그 정보를 뇌로 전달하면 뇌는 감각정보를 처리하고 해석하여 무엇을 보고 듣는지, 어떤 냄새와 맛을 경험하는지 결정한다. 비록 지각이 감각기관에 반응하는 과정이라 하더라도 그 결과는 개인의 경험, 문화적 배경, 신체적 특성, 감각기관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특히 지각에 비해 더 주관적인 인식이 경험과 기억, 미래에 대한 예측과 같은 시간적 고려에 따라 지각에 의미를 부여하므로 내용은 풍부해진다. 지각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대화하고 의사소통하는 것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심리학, 신경과학, 인지과학, 철학의 중요한 개념이자 연구 대상이며 주제이기도 하다.
이 전시는 인간의 지각 중에서 시지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시지각의 가장 기본적 요소인 빛과 눈에 대해 먼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시각의 직접 대상은 빛, 색채, 그리고 형태이다. 인간의 안구는 각막, 동공, 홍채, 볼록한 렌즈 형태의 수정체 등과 망막, 황반, 시신경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의학에서는 섬유막, 혈관막에 이어 안구의 제일 안쪽에 있는 얇고 투명한 신경막을 ‘망막(Retina)’이라고 정의한다. 안구 안쪽을 2/3 정도 덮고 있는 이 망막은 두 겹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바깥 부분을 색소층 망막, 안쪽을 신경층 망막이라 부른다. 빛이 각막과 수정체를 통해 안구로 들어오면 망막에 상이 맺히는데 망막은 시신경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뇌로 전달하기 위해 전기적 신호로 형태를 바꾸는 역할을 한다. 수정체를 통해 들어오는 외부의 상은 상하좌우가 바뀌어 망막에 상을 맺고 두 개의 눈은 다른 각도에서 사물을 바라보기 때문에 각 눈의 망막상이 불일치하게 되어 물체의 거리를 지각하게 된다. 추상세포는 색상을 구분하여 시신경을 통해 뇌에 색에 해당하는 정보를 보낸다. 그러나 인간의 눈은 가시 세계를 향해 열려 있으므로 눈으로는 망막을 볼 수는 없다.
우리는 가시세계가 우리의 눈으로 보낸 정보를 ‘본다’는 행위를 통해 지각한다. 본다는 과정은 안구의 운동과 수정체의 초점조절 등을 수반한다. 보는 것(감각)은 곧 아는 것(지식)과 연동한다. 망막에 상이 맺히면 시각세포가 흥분하고 대뇌에 연결된 시신경이 그것를 뇌로 전달하기 때문에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뇌로 본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나는 앞에서 화가의 그림을 통해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에 대해 다룬 이론을 간략하게 소개한 바 있다. 여기서 재현은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세계의 구현이 아니라 화가에 의해 선택된 대상이나 세계에 대한 기록이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자연대상을 충실하게 묘사한 풍경화에도 해당한다. 화가가 의문을 갖고 탐구하는 것은 물리적 세계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우리들이 반응하는 것으로서의 자연이다. 화가는 원인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어떤 효과의 메카니즘에 관심을 쏟는다. 그가 문제삼는 것은 하나의 심리적인 문제거리이다. 즉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하고는 그림자 하나조차도 일치하지 않는데도 그 속에서 설득력 있는 이미지를 추출하는 그런 문제이다. 그래서 양식이 중요하다. 사실 서양 중세의 모자이크, 프레스코, 필사본 삽화에 그려진 종교적 주제의 그림에서 주제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제외하면 실재와 하등 관계가 없다. 이런 점은 불교화화도 마찬가지이다. 이 그림들은 모두 화가가 본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바를 그린 것이다. 더욱이 그림이나 조각은 예배의 대상이기 때문에 도상의 규칙을 엄격하게 준수해야만 했다. 북송대의 곽희(郭熙)나 범관(范寬)이 그린 산수화는 중국 회화사의 걸작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특정 지역을 대상으로 그린 것은 분명하지만 사진처럼 옮겨놓은 것은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조선 후기 진경산수를 대표하는 정선(鄭敾)의 <금강전도>는 웅장한 금강산을 평면에 옮겨놓은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것을 실재와 동일한 것으로 보려고 하는 것일까. 창작에서 양식의 전통이 중요한 것처럼 우리의 보는 방식 역시 그렇게 보고자 하는 기대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회화나 조각을 사실로 착각하도록 만드는 심리적인 요인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허블에 이어 제임스웹 천체망원경으로 촬영한 별의 탄생과 소멸을 시각적으로 보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인간의 시각으로 포착할 수 없는 우주의 신비조차 쉽게 접할 수 있고, 초정밀 카메라를 장착한 내시경이 우리의 장기 내부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문제되는 부위를 촬영해 전송한 이미지가 맺힌 모니터를 보는 것도 일상이 되었다. 과학기술이 인간의 눈을 추월한 지 한참 지났는데도 왜 눈과 지각에 대해 이야기하는가. 게다가 추상미술도 과거지사가 된 이 시대에 재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으로 비쳐질 수 있다. 문제는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보는 방식이 지닌 관습이 그렇게 탄력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형태, 구조, 공간의 지각
인간에게는 어떤 형태에서 특정한 대상을 연상하거나 투사하는 능력이 있다. 예컨대 곰브리치는 『예술과 환영』에서 예수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철학자 아폴로니우스가 하늘의 구름을 보고 켄타우로스를 떠올린 예를 들어 눈으로 보는 것과 마음으로 보는 것에 대해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구름이 무엇을 닮았다는 것은 모방의 이중구조를 설명하기 위한 수사일 뿐이다. 즉 모방하기 위해 손과 마음을 다 사용하거나 마음만으로 닮은 꼴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여기서 대상과 닮은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앎(지식)과 기술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에게도 모방술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대상을 지각하는 과정은 모방(투사 혹은 연상)행위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술작품에 표현된 대상을 지각하기 위해 과거의 경험과 지식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과 지식이 없어도 표현을 지각하는 경우를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난제의 해결을 위해 아른하임은 과거의 경험이 없을지라도 대상에 표현된 것을 지각할 수 있다는 점을 형태는 다르지만 질적으로 같다는 의미의 ‘이형동질(isomorphism)’의 개념을 도입하여 설명하였다. 그는 시각예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심리적 신비를 분석하고자 균형(Balance), 형(Shape), 형태(Form), 성장(Growth), 공간(Space), 빛(Light), 색(Color), 운동(Movement), 역학(Dymnamic), 표현(Expression)에 이르는 10가지 기초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사물이나 현상을 지각할 때 떠오르는 형태를 통상 ‘게슈탈트(Gestalt)’라고 하는데 이 개념은 중의성을 지닌 것이므로 단일한 의미로 정의할 수 없다. 게슈탈트는 개별 단위를 나타내는 동시에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의미를 담고 있거나 전체로서의 형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아른하임이 제시한 기초개념 중 균형을 보면 인간은 균형을 추구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조형 요소의 양가적 구조화가 가능해진다고 한다. 즉 인간은 외부세계의 시각 경험을 유기체로서의 자신의 내적 균형 유지에 유리한 방식으로 구조화하여 지각하려 한다. 내면에 무질서와 혼란이 지배적일 때,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인간 정신은 외부세계에 대한 시지각 경험에서라도 질서와 정돈을 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인들이 발견한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는 그리스인들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비례의 하나인 균제(symmetria)를 인체에 적용한 것으로서 아른하임의 기초개념 대부분을 적용하여도 좋을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기초개념은 비단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에도 적용된다. 회화가 이차원적 평면에 그려진 형태와 색채의 구조라고 한다면 조각에서는 재료인 물질과 그것이 놓인 공간이 중요하다. 특정한 대상을 암시하거나 연상시킨다 하더라도 지각을 주제로 한 논의에서 조각이 회화보다 덜 주목받은 것은 재현된 대상이 불러일으키는 환영적 효과보다 물질이 지닌 즉자성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신화 속의 피그말리온은 상아로 자신의 마음속에 그리던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구현해내었으나 그만 그 조각과의 사랑에 빠지는 가련한 인물이다. 그의 간청을 들은 신이 죽은 물질인 상아를 생명체로 육화시켜준다고 하지만 상아는 상아일 뿐이다. 우리는 조각을 통해 살아있는 생명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형태의 배열과 구조, 물질의 고유한 속성, 그리고 물체와 배경(공간)의 상호관계가 부여하는 심미적 효과에 더 끌릴 수도 있다. 덩어리와 물질의 표면을 지각하기 위해 빛이 필요하며, 양감은 중량을 지각하게 만든다. 형태의 지각은 견고함과 역동성에 대한 심미적 경험을 고양시킨다.
창작과 수용에서 시지각이 차지하는 부분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시각예술에서 지각의 중요성은 크지만 ‘보는 방법’에 따라 다양한 시각적 경험을 끌어낼 수 있다. 이 전시에 참가한 네 명의 작가는 ‘아는 만큼 보인다’, 또는 ‘보는 것이 곧 믿는 것이다’라는 전통적인 보는 방법을 위반, 전복, 해체하는 작업에 주력하여 왔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아는 만큼만 본다’는 것으로 축소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보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은 그 믿음을 밑바닥에서부터 해체하는 지적 작업’일 수 있다. 따라서 이 전시는 다르게 보기, 새롭게 보기에의 제안이자 그것을 향해 진입하는 통로이기를 지향한다. 전시를 본다는 것은 작품이 걸어놓은 매력적인 마술의 덫에 사로잡히기 위해 지각의 문지방을 넘어서는 행위이자 그곳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거쳐야 하는 통로를 걸어 나오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 통로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