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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전시

최인수: 장소가 되다

전시명: 최인수: 장소가 되다 Choi Insu: Becoming a Place

전시기간: 2018.04.28 - 2018.06.17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최인수

전시내용:

조각을 묻다, 장소가 되다

임성훈 (미학, 미술비평)


1. 프롤로그: 조각을 묻다

  최인수는 지난 50년간 조각의 길을 걸어오면서 예술의 존재방식을 부단히 사유하며, 그 사유의 매듭을 조형적으로 모색해 온 조각가이다. 특히 80년대 이후 지금까지 그가 조각의 여정에서 동행한 것은 규정된 답이 아니라 물음이었다. 그의 조각을 보라. 실로 물음으로 이루어진 구원의 논리가 곳곳에 단단히 자리를 잡고 있다. 묻는다는 것, 그것은 최인수의 조각이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향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전시 또한 조각의 길에서 함께 한 그 물음으로 촉발된 과정의 미학이 드러나 있을 뿐, 자기 완결적인 조형성이 제시되는 회고전이 아니다. 최인수의 조각적 여정에 남겨진 흔적들은 과정에서 빛나는 삶의 곁들이다.


  조각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존재한다. 최인수의 조각은 과정으로 이어진 조형적 매듭이다. 매듭을 맺는다는 것은 종결이 아니라 묶고 풀어가는 성찰적 행위이다. 그의 조각은 자연을 닮아 있다. 재현적 형상으로서의 닮음이 아니라 그저 자연을 향해 서 있는 순전한 마음에서 이루어진 닮음이다. 물론 조각은 자연적 대상이 아니라 인공적 대상이다. 그러기에 조각에 인위적인 요소가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 사실은 그에게 조각을 한다는 행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다시 던지게 한다. 조각은 가능한가? 이 물음은 조각이 불가능하기에 가능하다는 역설적 사유로 이어진다. 이 짧은 글에서 최인수의 조각미학을 서술하기란 정말 난처한 일이다. 물음, 과정 그리고 사유의 떨림이 섬세하고도 미묘하게 반영된 그의 조각은 실상 표명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가 말했듯이, 예술작품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가능한 것이고 또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이해하면 할수록 또한 그 만큼이나 모르게 되는 것으로 귀결된다. 조각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조각의 정신과 형식 사이에 무엇이 관계하고 있는가? 전통성과 현대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변용되는 지금 여기의 조각미학이 어떻게 가능한가? 물음에서 촉발된 그 모든 심상들이 어우러지는 조각의 장소는 어디에 있는가? 그의 조각은 오롯이 물음으로 존재한다.


  이 서툰 글에서 최인수 조각의 존재방식을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의 조각에 대한 언명과 언표는 부질없는 노릇처럼 느껴진다. 의미는 표명되자 말자 이내 그 의미는 사라진다.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작품과 진리의 연관성을 논한 바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예술작품은 진리를 드러낸다. 진리, 곧 알레테이아 aletheia 는 숨겨진 것이 드러남을 뜻한다. 예술은 한 사물에 은폐되어 있던 것을 나타내 보인다. 그러나 그것 또한 잠시일 뿐, 숨겨진 것은 드러나자마자 다시 그 모습을 감춘다. 예술은 이렇듯 드러나고 사라짐의 과정이 반복되는 곳에서 존재한다. 이 글은 최인수 조각을 구구절절이 밝히고 설명하는 논설이 아니다. (도대체 그런 논설이 가능할 수 있을까!) 다만, 그의 조각이 초대한 그 자리, 그 장소에서 무심히 서 있다가 떠오르는 단상들을 미학적 관점에서 고찰해보려는 하나의 시도일 따름이다.


II. 새로운 감성학 - 촉각의 미학

  오감을 대표하는 감각은 시각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문화의 흐름 속에서 시각은 유독 우월적인 위상을 지닌 감각이기 때문이다. 오감 중에서 시각은 감각의 정보처리에서 80퍼센트 이상을 담당하기에 시각이 중시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각중심주의가 갖는 문제는 적지 않다. 시각이 '보이는 것'에만 그치고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과 관계하지 않을 때, 시각은 삶의 표면에만 머물 뿐 삶의 심층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시각과 진리의 관계는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시각은 진리에 대한 메타포로 자주 사용된다.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표현이 그한 예이다. 다른 한편으로 시각은 진리를 방해하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시각에 사로잡혀 참된 것을 오히려 볼 수 없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각은 비물질적이고 간접적인 감각이다. 그러기에 다른 어떤 감각보다도 조작되기 쉽다.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위해 시각이 동원되는 예를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시각이 빚어내는 것은 형식이다. 그런데 이 형식이 삶의 형식이 아니라 규정된 형태가 될 때, 문제가 발생한다. 형식은 어떤 의미에서 볼 때 감각의 층위들을 여실히 무너트리는 인위적 틀이다. 최인수의 작업은 이러한 시각과 시각중심주의에서 비롯된 형태의 인위성을 반성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최인수는 8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조각의 시각적 형식이나 형태를 구하는 작업을 하지 않았다. 그는 조각의 근원이 시각적 형태가 아니라 촉각적 감응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조각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져지는 것이다. 조각적 행위는 갓 태어난 아기가 이 세상을 손으로 만짐으로서 만나는 것과는 같다. 그의 조각에서 흙은 중요한 재료이다. 흙은 보여지고 인식되기 이전에 만져지는 것이다. 그 아득한 태초의 그 때에 만짐, 곧 촉각이 있었다. 흙은 단지 표현을 위한 도구적이거나 수단적 재료가 아니다. 흙은 조각의 현존성을 드러내는 원초적 자연의 산물이다. 그의 조각에서 원초성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일 터이다. 흙으로 만지고 브론즈로 주조한 <시간이 태어나다>, <조각가의 은신처>, <시인의 오두막〉 등은 조각에서 촉각이 무엇인지를 자연스레 느끼게 하는 작품들이다. 촉각은 시각에 선행한다. (물론 이 선행은 단지 시간적 의미에서의 선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시각에서 촉각으로의 전회는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조각을 조각이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최인수는 이 물음을 부단히 던져 온 조각가이다. 그는 조각에 내재한 고유한 언어는 다른 언어로 번역될 수 없다는 것을 직관한다. 다른 장르의 예술과 공유할 수 없는 조각의 특유성은 무엇인가? 그는 그 특유성을 촉각에서 감지한다. 촉각은 인간의 오감 중에서도 가장 근원적이고 친밀한 감각이다. “피부로 느낀다”는 표현이 이를 잘 말해준다. 촉각에는 인위적으로 형성된 중심이 없다. 방향이나 경계도 없고, 특정한 영역도 갖지 않는다. 실상 조각은 촉각으로 존재한다. 18세기 독일 문예 비평가이자 미학자, 철학자인 헤르더는 자신의 저서 『조각』에서 시각에 치중한 예술관을 비판하면서, 조각을 조각이게 하는 것은 바로 촉각이라고 강조한다. 헤르더 이후, 촉각의 미학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를 보여준 대표적인 이론가는 바로 벤야민이다. 그의 유명한 글, 곧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벤야민은 촉각은 시각적 이미지와 분리될 수 없는 중요성을 지닌 감각임을 밝히고 있다. 촉각이 배제된 시각적 이미지는 그 본래의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실상 본다는 것은 촉각이 수반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촉각은 친밀하면서도 근원적인 감각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예술사와 미학사에서 소홀히 취급되었다. 최인수는 시각 중심의 조각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조각을 조각이게 하는 것을 촉각에서 찾는다.

  조각에서 촉각은 단지 오감 중 하나의 감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촉각은 자연과의 직접적이고 근원적인 만남을 통해 주체와 객체 사이의 이분법을 해체한다. 그의 조각을 보라. 시각이 촉각으로 변용되는 순간들이 현시되고 있지 않은가! 형식으로서의 형태를 재현하고자 하는 어떠한 시도도 엿보이지 않는다. 조각이 하나의 촉각적 느낌으로 지금 여기에 현존하고 있을 뿐이다. 재현의 양식은 뒤로 물러가고, 대신 그곳에 촉각으로서의 조각이 우리 앞에 서 있다. 조각을 경험한다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만지는 것이다. 최인수의 조형적 작업에서 촉각이 그토록 강조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촉각의 조형미학은 규칙과 규범이 아니라 놀이에서 보다 확연하게 드러난다.


III. 놀이로서의 조각

  실상 최인수의 조각은 난해하다. 그는 조각을 어떤 원리에 따라 규정하고, 형식을 추구하는 조각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조각을 현대미술의 어떠한 운동이나 사조의 범주에 귀속시켜 이해하려는 노력은 결국 실패하고 만다. 순전히 형식적 측면만을 고려한다면, 그의 조각에 대한 다양한 해석 또한 가능하다. 혹자는 그의 조각을 개념적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추상조각의 원형을 제시한다고 이해하기도 하고, 때로는 미니멀 조각이라고 파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해석적 시도에 불과할 뿐, 그의 조각이 드러내는 미학적 긴장을 오롯이 드러내지는 못한다. 그의 조각은 표면적인 시각적 형태에서 파악될 수가 없다. 조각의 근저에서 작동하는 가장 자유로운 공감의 놀이가 표상되지 않는다면, 그의 조각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놀이는 최인수의 조각에서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그에게 작업은 놀이이다. 그의 조각적 놀이는 실러가 강조했던 놀이 개념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실러는『인간의 미적 교육을 위한 편지』에서 감각충동과 형식충동을 매개하는 예술로서의 놀이충동을 말한다. 감각과 형식, 달리 말해 감성과 이성은 상호 대립적으로 보이지만 지속적으로 관계해야 한다. 감성 그 자체의 실현을 위해서라도 이성이 필요한 법이고, 또한 이성 그 자체의 실현을 위해서라도 감성이 요청된다. 감성과 이성을 넘나드는 놀이에서 아름다움이 발현된다. 놀이는 조형적으로 응축된 상상력의 힘이다.

  최인수의 작업에서 흙덩어리는 형태를 위한 질료가 아니라 놀이로서 현존하는 예술적 응축물이다. 흙덩어리는 굴러가면서 흔적의 미학이 된다, 세상은 흔적으로 고스란히 남은 놀이터이다. 형태로서의 형식은 놀이에서 비로소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다. 놀이에서 인과성은 자신의 논리를 잃어버린다. 놀이에서 기대되는 것은 우연도 아니고 필연도 아니다. 흙덩어리를 굴리는 것으로서의 놀이는 에토스와 파토스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놀이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최고 예술의 상태를 어린아이의 놀이에 비유한다. 새로운 가치의 창조는 어린아이의 놀이에서만 가능하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거룩한 긍정이다." 예술은 놀이이고, 놀이는 예술이다. 최인수의 흙 굴리기는 어린아이의 놀이와도 같다. 그러기에 그의 조각에서는 초월적인 숭고가 아니라 소박하고 순전한 자유로운 놀이로서의 숭고가 환기된다.

  흙 굴리기의 놀이는 논리로 정식화될 수 없고,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예술적 몸짓이다. 최인수의 조형적 놀이는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적인 방법론으로 파악될 수 없는 몸의 놀이, 촉각의 놀이이다. 이런 점에서 형태로서의 형식이라는 관점에서 그의 조각을 해석하는 것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흙이 덩어리가 되고, 굴러가면서 이루어낸 매스는 조형적 어법의 매스를 부단히 넘어선다. 〈먼 곳으로부터 오는 소리〉, 〈길〉, 〈들고 나고〉 등의 작품에 마주 서 있어 보라.흙덩어리그 덩어리가 석고이든 주물된 철이든―가 굴러가면서 만들어내는 것은 형태가 아니라는 것을 직관할 수 있을 터이다. 형태가 없는 형태, 달리 말해 체험될 수 없는 것을 체험하는 느낌만이 오롯이 남는다. 흙에는 논리와 규범에 따른 이분법이 없다. 흙은 심지어 이미지나 언어로도 표명될 수 없다. 흙은 인과성을갖지 않는다. 흙은 느낌일 뿐이다. 최인수는 자신의 작업 노트에서 말한다, “나는 흙덩어리를 굴렸다. 그러나 그 이유는 모른다”라고.


IV. 지향적 대상으로서의 조각

  놀이로서의 조각에서 드러나듯이, 최인수는 현상과 본질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 온 조각가이다. 그의 조각이 여실이 증명하고 있듯이, 대상은 주체와 분리되지 않고, 주체 또한 대상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그의 조형미학은 후설의 초기 현상학과 그대로 맞닿아 있다. (후설의 초기 현상학은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현상과 본질을 이분법적으로 파악해 온 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현상은 본질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현상학에서 “현상"은 주체와 관계없이 성립되는 객관화된 세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체의 의식에서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세상과 대상을 순수하게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파악에서 선입견이 늘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상에 대한 순수한 의식을 갖는 것은 불가능한가? 이와 관련, 후설은 “에포케Epoche"를 말한다, 에포케는 당연하고 자명하다고 믿는 것에 대한 판단중지를 의미하는 개념이다. 달리 말해, 에포케는 선입견을 걷어내는 일종의 현상학적 장치인 셈이다.

  우리는 에포케로 인해 순수 의식을 만날 수 있다. 후설은 이러한 과정을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에포케를 수행한 이후에도 세계 [대상]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달리 말해,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이루어진 순수의식은 여전히 세계 [대상]와 관계한다. 그러니까 세계 [대상]은 단순히 객관이나 주관으로 규정될 수 없고, 언제나 상관물로 파악된다. 여기서 난해한 "지향성" 개념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후설에 따르면, 의식은 지향적이다. 곧 의식이란 “무엇에 관한 의식"이다. 나[주관/주체]는 세계 [대상] "상관성"을 이룬다. 그러기에 지향적 체험의 현상학은 고립되거나 단지 심리학적 의식이 아니라 상관성의 차원에서 파악된다.

  최인수는 자신의 작업에서 이러한 지향적 대상으로서의 조각을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조각가이다. 그에게 조각은 단지 사물로서 있는 대상도 아니며, 그렇다고 순전히 정신적 의식의 투영인 것도 아니다. 조각은 대상과 의식의 상관성에서 지향된 대상이다. 실로 모든 예술작품은 지향적 대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를 철저히 인식하면서 작업하는 작가는 그리 흔치 않다. 또한 덧붙여 생각해 보면, 최인수의 조각을 특징짓는 미학적 요소인 촉각과 놀이는 이러한 지향적 상관성에 대한 조형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V. 반성적 조각

  지향적 대상으로서의 조각은 규정적 판단이 아니라 반성적 판단의 지평에서 파악된다. 널리 알려졌듯이,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미와 예술에 관한 판단이 “규정적 판단력이 아니라 "반성적 판단력"에 따른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규정적 판단력은 규칙과 원리를 내세워 개별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에 인위적이고 강압적으로 포함시키는 것인 반면, 반성적 판단력은 규정적 보편성을 앞세우지 않고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을 찾아가고 만들어가고 열어가는 것이다. 논리적 보편성과 달리 미와 예술의 보편성은 이러한 반성적 판단력에 기초한 열린 보편성이다. 최인수의 조각에서 규정적 판단력으로서의 닫힌 보편성은 추구되지 않는다. 그의 조각에서는 규정적 원리가 아니라 반성적 원리가 발견된다. 흙덩어리가 구르고 멈춘 자리에 조각이 있고, 장소가 된다. 여기에서 규정성은 사라지고 반성성만 남는다. 이런 점에서 그의 조각에서 말해질 수 있는 보편성이란 반성적 보편성, 달리 말해 '보편성 없는 보편성'이다. 이러한 예술의 열린 보편성의 고유성은 칸트가 말하는 "상상력과 지성 사이의 자유로운 놀이"에서 확인된다. 전시장에 놓인 최인수의 조각들은 장소가 되어가면서 예술의 주관성과 보편성 사이의 조형적 놀이터를 제공한다.

  최인수의 작업 노트를 읽어 본 이라면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조각에 대한 그의 반성적 사유는 변증법적이다. 그는 조각을 단순히 인식론적 사유의 영역으로 넘겨버리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 어떠한 논리적 인식으로 대체할 수 없는 예술의 메타포를 그는 늘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식에 철저하면서 함부로조각에 인식을 덧붙이지 않는다. 그럴 때 자칫 잘못하면 인식은 간단히 조각을 덮어버리는 포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조각의 감각만을 내세우는 것만은 아니다. 예술이 정신활동의 산물임을 생각한다면, 예술에서 정신은 언제나 수반된다. 마치 바둑에서 철저히 정석을 배운 후 그 정석을 버리듯이, 그는 작업에서 불러냈던 그 모든 감각들과 인식들에 대한 사유를 홀연히 내려놓는다. 그 모든 조형적 사유가 반성되고 침잠된 그 자리에 흙덩이가 놓이고, 조각이 있고, 공간이 된다. 그의 설치조각 <태고의 바람>은 이에 대한 뚜렷한 증거이다.

  최인수의 조각은 역설적으로 전통적이다. 왜냐하면 그의 조각은 전통적인 조각에서 강조된 비례, 균형, 균제, 척도, 질서, 조화 등에 대한 근본적이고 반성적인 사유의 과정 속에서 산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근원적인 것을 찾기 위해 근원적인 것에서 떠나고, 다시 근원적인 것으로 돌아가 반성한다. 이러한 반성적 사유에 따른 것이기에 그의 조각은 어떤 특정한 개념이나 운동 또는 사조로 파악될 수 없다. 그의 조각적 반성은 결국 삶 그리고 자연으로 이어진다. 조각은 삶이어야 하고, 또한 자연이어야 한다. 그가 작품에 붙인 모든 제목들을 보라. 그 제목들은 바로 이러한 삶과 자연에 대한 반성적 사유에서 비롯된 것일 터이다.


VI. 조각, 자연, 공감

  이번 전시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나무 작품들이다. 왜 최인수는 이번 전시에서 나무 작업을 선보이고자 했을까? 작가의 집 주변 길가에는 그리 크지 않은 느티나무가 줄지어 서있다. 어느 날 작가는 몇 그루의 느티나무가 베여지고 버려진 채 길옆에 놓여 있는 것을 목격한다. 아직 덜자라서 그런지 조금만 힘을 쓰면 두 손으로 거뜬히 들어 올릴 수 있는 크기의 죽은 느티나무가 작가에게 손짓을 한 모양이다. 작가가 나무를 선택했다기보다는 나무가 작가를 불렀다고나 할까? 최인수 조각은 근저에 늘 자연이 있다. 그러기에 나무가 부르는 소리를 그는 즉각적으로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작업장에 옮겨진 나무는 그에게 조각과 자연의 관계를 다시금 반성하게끔 한다.

  그리 크진 않지만 단단한 느티나무로 작업하기란 의외로 그리 간단하지 않다. 나무를 다루려다 보니 손이 경직되기도 하고 부어오르기도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인수 작가는 나무를 조형적으로 지배하려는 시도를 멈추게 된다. 작가를 찾아 온 나무는 작가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나무와 작가와의 대화가 시작된다. 몇 달에 걸친 대화는 언어로 기록되지 않고 공감으로 축적된다.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나무를 조형적으로 다루는데 치중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나무와 공감했던 조형적 반응들을 자연성에 따라 나무에 남겨 놓았을 뿐이다. 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나무가 이끄는 대로 홈을 파는 작업은 나무를 조형적으로 규정하는 일이 아니라 공감을 쌓는 일이다. 자연, 사물 그리고 작품이 분리되지 않는 그 곳에서 조각은 공감을 불러오는 장소가 된다. 어쩌면 그는 그곳에서 나무 작업을 한 게 아니라 나무와의 공감에서 비롯된 히에로파니 hierophany 적 체험을 했을 지도 모른다.


VII. 음악적 드로잉

  조각가에게 특히 드로잉은 조각적 조형성을 위한 밑그림이나 스케치가 아니다. 드로잉은 그 자체로 작품으로서의 존재방식을 갖는다. 최인수의 드로잉 작품들, 예컨대 <나오다가 숨다가>, <천천히〉, 〈씨앗은 자란다 느리고 빠르게>, <바람의 얼굴〉 등은 보는 이의 감성을 순간적으로 툭 치고 건드리는 감각적 조형성을 드러낸다. 수만 가지 말보다 한마디의 말이 더 효과적으로 심상에 각인될 수 있듯이, 그의 드로잉은 치명적인 조형적 직관성을 갖는다. 형태로서의 형식미는 절제되고 사라진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단 하나의 느낌이 조형적 긴장 속에서 단독자로 남는다. 실로 그의 드로잉은 단단하고 명징한 모나드 Monad이다. 그의 드로잉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까지 이야기해 왔던 그 모든 것들이 응축되었다가 퍼져나간다. 이러한 그의 드로잉에는 싱코페이션 syncopation이 있기에 조형적 긴장감은 더욱 강화된다. 최인수의 드로잉은 음악적이다. 드로잉에서 나오는 조형적 음색을 들어보라. 음색은 박자, 화성, 리듬, 멜로디 등과 같은 음악의 형식에 선행하는 소리의 색깔이자 원초적인 감각적 느낌이다. 그의 흙덩어리 굴리기는 이러한 음색에 비견될 수 있다. 드로잉 연작들을 연결해서 보다보면 이중주나 또는 사중주, 심지어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음악적 드로잉은 분석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분석에 따른 설명이 아니라 음색을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드로잉은 관람자에게 저마다의 다른 음색으로 들려진다. 그러기에 그의 드로잉은 기의와 만나지 않는 기표로만 남는다. 드로잉은 그의 작업세계의 모나드이며, 이성과 감성을 놀이의 세계로 인도하는 예술적 지표index이다.


VIII. 에필로그 : 조각, 장소가 되다

  최인수의 조각은 완전성의 미학이 아니라 결핍에 대한 존재론적 사유에 근거한다. 결핍은 채워지지 않은, 그러니까 비워진 상태나 상황을 의미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인간의 욕망을 반영하는 근원적인 개념이 바로 결핍이기 때문이다. 결핍으로서의 조각은 재현될 수 없다. 단지 조각은 드러나는 그 자리에서 현존할 뿐이다. 조각의 장소는 결핍된 곳이기에 중심성이나 특정한 영역 또는 범위를 갖지 않는다. 결핍은 조각의 상상력이다. 결핍에서 물음이 던져진다. 흙을 만지고 굴린다. 주체와 객체의 분리가 사라진 그곳에 조각이 있다. 조각은 마침내 장소가 된다. 조각은 이미 오랜 전부터 장소였다. 그곳은 혹시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꿈꾸었던 '노래하고 춤추는 소크라테스'를 만나는 장소이지 않았을까? 이 조각의 장소에서 이성과 감성은 모순이 아니라 대화가 되고 공감이 된다. 이성이 감성에게, 감성이 이성에게 몸짓하고 말을 건네는 장소인 것이다.

  다시 그의 나무 작업을 돌아보자. 베어지고 버려진 나무들은 작가의 작업실에서, 그리고 전시장에서 조각의 장소가 된다. 물리적 장소를 넘어 공감의 장소로 변용된다. 그러기에 <장소가 되다>는 단순히 “장소 - 특정성"의 개념으로 파악될 수 없다. 작업, 재료, 느낌 등이 바람처럼 모였다가 흩어지는 곳, 그곳에 조각이 있고 장소가 된다. 조각은 장소이다. 그러나 완성이 아니라 결핍으로 존재하는 미완성의 장소이다. 조각의 장소에서 환기되는 것은 미술사학자 간트너가 강조했던 “선형상"일지 모른다. 완성된 작업의 결과물이 예술작품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조각의 장소에서 완성이 아니라 오히려 미완성 non finito 으로서의 조각, 그러니까 선형상으로서의 조각을 마주한다. 최인수는 선형상으로서의 조각을 상기하는 작업을 부단히 하는 듯 보인다. 조각의 장소에서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언제나 불러오기 때문이다. 조각의 장소에서 조각, 사유, 느낌은 분리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장소를 모든 것이 통합되고 합치되는 조화의 장소로만 간단히 이해해서는 안 될 터이다. 조각의 장소에는 다층적인 삶의 곁들이 있다. 최인수의 조각은 결국 이러한 결들에 대한 조형적 상응물이다. 그러기에 조각의 장소는 물리적인 장소로 포착될 수도 없고, 관념적인 장소로 개념화될 수도 없다. 흙덩어리를 굴리고, 놀이를 하고, 주체와 객체가 상호적으로 관계하고, 인위적 규정성이 아니라 반성적 사유가 촉발되고, 조각과 자연이 만나 공감을 이루고, 조형적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곳, 이 아름다운 조각의 장소는 인간과 삶에 대한 예술적 감응感應의 장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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