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전 시 명 : 2017 모란미술관 기획 <그를 아로새기다> 박희선 20주기 추모전

▌전시기간 : 2017.09.23 ~ 11.26 /오프닝 행사 10.14(토요일) 4pm

< 2018.01.21 일요일까지 전시가 연장되었습니다.>

▌전시장소 :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 故박희선, 최종태, 윤영석, 김세일, 정연희, 조병섭, 전항섭, 정광호, 임영선

 

 

박희선 20주기 추모전, <그를 아로새기다>

임성훈(미학/미술비평, Ph. D.)

2017년 가을의 한 가운데서 모란미술관이 박희선 20주기 추모전 <그를 아로새기다>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조각의 가능성과 현실성을 치열하게 고민했던 박희선 작가의 조형의지를 다시 기억하고 회상해 보자는 의도에서 기획되었다.

또한 이번 전시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박희선 작가와 모란미술관의 인연 때문이기도 하다. 박희선은 모란미술관의 학예실장으로서 모란미술관이 조각전문 미술관으로 자리 잡는데 여러 방면으로 기여하였다. 오늘의 모란미술관에서 박희선은 지워질 수 없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남아 있다. (⋅⋅⋅중략)

<그를 아로새기다>에서는 특별히 박희선 작가와 그 젊은 날의 조각적 열정을 공유했던 선후배 작가들의 작품이 함께 하고 있다, 이는 박희선 작가의 삶과 그의 예술의지가 지금을 살아가고 작업하는 작가들에게 여전히 소중한 기억임을 반영한다. 조각가 박희선은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20년 전 우리 곁을 떠났다. 그러나 지금 이 전시장에서 다시 그가 마저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기에 이번 전시는 어쩌면 박희선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장이기도 하다. 이 모란미술관의 가을 뜰에서 현실, 꿈 그리고 조각을 사랑했던 박희선, “깨어있는 꿈”을 향해 서 있었던 조각가 박희선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박희선, 두 개의 날개로 날고 싶어 했던 조각가

최태만(미술평론가)

한반도의 분단문제를 천착한 조각가

1991년 박희선과 나는 함께 유럽여행을 했다. 약 한 달에 이르는 긴 기간 동안 우리는 파리에서 출발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덴마크 코펜하겐을 거쳐 프로그네르(Frogner)공원에 있는 비겔란트(Gustav Vigeland)의 조각을 보기위해 노르웨이의 오슬로까지 갔다. 태어나서 늙을 때까지 인간의 삶을 인체조각으로 표현한 비겔란트조각공원과 미술관으로 꾸며놓은 작업실을 돌아본 후 그와 나는 평생 성실하게 작업에 헌신했던 비겔란트에게 감탄과 존경의 마음을 가지면서도 지나치게 인위적이고 계획적인 조각공원에 대해서는 다 같이 비판적인 생각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비겔란트의 제안을 받아 평생 작업에만 매진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그가 죽은 후 작업실을 미술관으로 조성한 오슬로시의 문화행정에 대해서 박희선이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은 분명했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부터 그는 독일 표현주의 조각가 바를라흐(Ernst Barlach)와 램브루크(Wilhelm Rehmbruck)의 작품을 보기 위해 함부르크로 가고 싶어 했다. 독일 고딕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주로 목조를 통해 인간의 삶과 죽음, 절망과 불안, 전쟁의 비참함을 표현한 바를라흐에 대한 박희선의 애정은 대단하여 함께 여행을 가기 전에도 여러 차례 그의 작품에 대해 들려주곤 했다. 극작가이기도 했던 바를라흐는 케테 콜비츠(Käthe Kolwitz)와 함께 독일의 대표적인 표현주의 조각가이자 판화가였지만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작품 또한 일부만 도판으로 볼 수 있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보고자 하는 박희선의 열망은 대단했다. 특히 두 손으로 꽉 쥔 칼을 어깨에 걸친 채 앞을 향해 달려 나가는 <복수하는 사람>의 역동적인 동세와 단단한 형체는 훗날 박희선이 의암(毅庵) 류인석(柳麟錫) 선생의 기념 조각을 위해 제작한 테라코타 마케트에도 영향을 미쳤다.

함부르크에 도착하여 마침 그곳 대학에서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던 김정희 선생을 만나 항구가 보이는 식당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미술대학 입학동기인 두 분이 1980년 5월 ‘서울의 봄’ 기간 동안 학교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대화를 나눌 때 귀동냥으로 들었던 기억도 난다. 함부르크를 떠나 베를린으로 갔을 때 우리는 의논할 것도 없이 바로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갔다. 베를린장벽이 있던 장소에 사람들이 모여 촛불과 꽃을 놓고 장벽을 넘다 희생당한 사람들을 추도하고 있었다. 마침 해가 진 후였기 때문에 어둠 속에 하늘거리는 촛불이 더욱 숙연한 분위기를 자아냈었다. 독일이 다시 통일된 지 일 년 후였기 때문인지 늦은 시간까지 추모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오던 길에 근처에 있는 조용한 술집에 앉아 그와 나는 독일통일에 대해, 한국의 분단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박희선은 집중적으로 한반도 연작을 제작했다. 특히 1993년부터 그는 네 자루의 도끼가 생명의 씨알을 찍고 있는 섬뜩한 형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의 일주기를 맞아 모란갤러리에서 개최된 유작전 도록에 들어갈 글을 쓰면서 나는 이 작품들과 그보다 훨씬 어린 나이인 31세에 요절한 김범열의 작품에 대해서 짧게 언급한 바 있다. 내가 토갤러리에서 근무하던 1989년 최종태 선생과 극작가 한운사(韓雲史) 선생의 주선으로 김범열의 유작전을 진행한 바 있다. 칼로 칼을 내리쳐 한쪽 칼이 두 토막 나는 김범열의 작품은 유신체제 하의 암울한 상황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박희선의 작품에서도 날선 도끼는 분단이란 상황에 대한 작가의 분노를 표상한다. 네 개의 도끼는 한반도를 둘러싼 네 강국, 즉 미국과 일본, 중국과 소련을 상징한다. 물론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 소련은 이미 해체된 후였지만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 분단의 고착에 소련이 미친 영향은 컸다. 네 자루의 도끼로부터 침탈당하고 있는 혹은 이 도끼들에 의해 위태로운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의 두 개의 씨알은 1988년과 1993년에 각각 비슷한 형태로 제작한 <입맞춤-통일>에서 볼 수 있듯이 남북한을 상징한다.

박희선은 1982년에 결성된 마루조각회에서 활동할 때부터 이미 분단을 주제로 한 작품을 발표했었지만 우의적이고 암시적인 형태를 통해 분단을 표현했다. 특히 그가 군에서 복무 중이던 1984년 마루조각회는 주제를 분단으로 정해 회원전을 열기도 했다. 당시 그가 출품한 작품은 상하로 사다리꼴을 한 추상적인 형태가 가운데의 마치 입을 딱 벌리고 있는 듯한 구체와 결합된 것이었다. 1980년대 초기의 작품부터 나타나고 있는 이 입을 벌려 뭔가 요청하거나 외치는 듯한 형태는 그 후 그의 작품에 마치 하나의 전형처럼 계속 나타났다. 한복을 입은 여성이 두 팔을 수평으로 쭉 뻗고 하늘을 향해 부르짖고 있는 형상의 작품에서도, 동토(凍土)의 땅 속에서 생명의 움을 틔우는 <민들레-남과 북>의 씨알에서도 네 개의 도끼가 육신을 찍고 있는 형태에서도 이 씨알은 하늘을 향해 절규하고 있다. 베를린장벽 앞에서 그는 분명 한국의 분단과 통일에 대해 다시 한번 숙고하였을 것이며 한반도의 슬픈 역사와 분단은 극복해야 할 과제이자 그가 멈출 수 없는 중요한 주제였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토록 분단과 통일에 대해 심각하고 진지하게 천착했을까. 분단과 통일은 우리가 거부하거나 외면할 수 없는 생존의 문제와도 직결되기 때문에 많은 미술가들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표현해온 주제이기도 하다. 박희선에게 분단과 통일문제는 그가 태어나고 성장한 춘천이란 도시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훈련을 위해 도시의 거리로 나온 탱크나 병사들을 보며 성장했다. 지금은 옮겼지만 춘천역 앞에는 미군기지까지 있었다. 이 기지에서 매일같이 뜨고 내리는 헬기와 무장한 군인들을 통해 그는 분단의 위기를 체험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전통과 역사에의 관심

박희선은 한반도의 분단을 주제로 한 작품과 함께 산의 형상을 한 인체조각도 많이 제작했다. 대체로 두 팔을 옆으로 뻗고 있거나 위로 가지런히 모아 무언가 기원하는 듯한 이 형상들은 대부분 정면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치마 부위가 상체를 떠받치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에게 발견할 수 있는 산의 형상은 그의 집이자 작업실에서 보이는 삼악산으로부터 모티브를 얻고 있다.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삼악산은 의병장 류인석 유적지와 함께 그가 사랑한 고향 춘천을 작품 속에 표현함에 있어서 의연하면서 육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가 춘천에서 매일같이 목격한 훈련장면을 통해 분단의 문제를 고민했다면 춘천의 산하를 통해 그것을 이겨내고 우뚝 설 수 있는 의지를 발견하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재료기법에 있어서 박희선은 다른 어떤 재료보다 목조에 집중했다. 그는 단단하고 결이 고운 춘양목을 좋아했다. 대부분의 목조는 소나무를 재료로 한 것으로서 더러 접착제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못을 사용하지 않고 한국의 전통건축의 가구(架構)에서 특징적인 ‘짜맞추기’로 형태를 결합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1996년에 제작한 <합(合)>이란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작품에서 건축적인 특징이 나타나기도 한다. 한국의 전통에 대한 그의 관심은 1988년에 결성된 ‘한국성 –그 변용과 가늠’이란 단체에 대한 그의 특별한 애정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작품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치마저고리는 이러한 그의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1996년에는 전통 민예품인 매통(벼의 껍질을 벗기는데 쓰는 기구)과 자물쇠에서 착안한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으며,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삼족오(三足烏)’나 ‘달두꺼비’와 같은 신화적인 대상을 통해 고대사를 현대조각으로 복원하기도 했다.

박희선의 작품은 1980년대 후반의 <무죄>, <자유>, <권력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추상적인 개념을 의인화한 것도 있고, 동학농민전쟁을 주제로 한 <우금치-씨알>이나, <산-사람-외침(운주여!>, 무용가 이애주의 바람맞이 춤을 모티브로 한 <바람맞이>, <이 교수의 살풀이>에서 볼 수 있듯이 구체적인 사건이나 역사적 장소, 인물을 다룬 것도 있으나 언제나 ‘지금, 여기의 ’ 한국이란 공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의 역사관은 <민들레-남과 북>이나 <부활>에서 볼 소 있는 것처럼 자학적인 역사부정이나 비극적 역사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낙관으로 귀결되었다. 마치 중심에서 발원한 빛의 에너지가 사방으로 확산되듯 기하학적인 형태로 표현한 <한반도-빛> 역시 긍정의 정신에 기초하고 있다. 장방형의 나무판 내부를 정사각형으로 잘라내 그 속에 회오리처럼 돌며 태극처럼 하나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합-상생> 역시 통일의 열망과 염원을 표현한 것이다.

 

분단을 넘어서

“최 선생, 뭐해?” 내가 모란미술관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춘천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가 미술관을 들를 때마다 버릇처럼 이렇게 묻곤 했다. 그 말은 실제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라기보다 거의 인사치레에 가까웠다. 그와 나는 어둑해지는 시간에 미술관 야외조각공원을 함께 거닐었고 미술관 건물 주변에 설치된 그의 작품 앞에서 앞으로 무슨 작품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누었다. 그럴 때면 언제나 야트막한 높이로 설치된 <아침>이란 작품을 쓰다듬으며 아침과도 같은 희망을 표현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다 내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근무하면서 우리의 만남도 뜸해졌지만 그는 개인전을 준비할 때마다 나를 춘천으로 호출했다. 그 시기, 1993년부터 1997년 사이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 제작되었다.

“새가 한 개의 날개로 날 수 있겠어.” 언젠가 대화중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분단과 통일을 주제로 한 그의 작업이 관념적이라거나 지나치게 낙천적이어서 현실을 낭만적으로 보고 있다는 일부의 지적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는 취지로 불쑥 했던 말이라고 기억한다. 그가 말하고자 했던 두 개의 날개는 남과 북, 좌익과 우익을 아우르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의 작품에서 남과 북은 대립이 아니라 상생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을 그는 입맞춤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에 두드러진 좌우대칭과 균형 또한 이러한 생각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 입을 딱 벌리고 있는 형태는 절규라기보다 남북의 화합을 바라는 외침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는 민중미술 진영에서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에 대해 우호적이었고 1994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민중미술15년’ 전에 도끼로 구성된 한반도를 출품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에서 기금마련을 위한 전시를 할 때 기꺼이 작품을 기증하기도 했다.

그는 일관되게 분단을 넘어서 통일을 이룬 한반도를 염원했다. 비록 도끼에 의해 침탈당하고 있는 살벌한 형태라고 할지라도 그는 통일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토갤러리에서 일할 때 기획했던 ‘목조 5인전’ 도록에 쓴 작가노트에서 그는 ‘북에 있는 형제들과의 뜨거운 입맞춤을 생각해 본다’라고 썼다. 그것은 그가 줄곧 꿈꿔왔던 미래였다. 그러나 절망을 넘어선 희망을 찾고 있을 때 그는 스러졌다. 그가 40세란 젊은 나이로 요절한 이듬해 금강산이 열렸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후에는 육로를 통한 금강산관광도 시작되었다. 2007년에도 한 차례 더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지만 남북 분단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두 개의 날개로 날고 싶어 했던 그의 꿈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지만 언젠가 통일이 된다면 그가 작품을 통해 표현했던 상생의 정신도 새롭게 주목받지 않을까. 그가 이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되었지만 두 개의 날개를 움직이며 통일된 조국의 산하를 나는 그의 비상의 꿈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