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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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사용하다

임성훈(미학, 미술비평)

이번 2016년 모란미술관의 마지막 기획전은 특별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예술작품은 예술적 오브제로서 감상의 대상으로 간주되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예술이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는 전시이기 때문이다. 예술을 사용한다는 말이 당혹스럽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술의 역사를 돌아볼 때 이 말이 그리 낯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는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예술이란 용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스어 ‘테크네’techne는 넓은 의미에서 제작과 관련된 기술을 의미하며, 상용적인 도구제작물뿐만 아니라 공예, 조각, 회화 등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리스 당시 예술과 기술이 엄밀히 구분되지 않았다. 중세와 르네상스의 ‘아르스’ars 또한 ‘테크네’에 상응하는 라틴어이고, 그 의미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중세의 ‘아르스’에서는 합목적성과 관련된 유용성/실용성이 강조되었다. 달리 말해, 목적에 적합하게 제작된 대상은 아름다운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중세의 예술ars은 오늘날의 예술art과 달리 감상이 아니라 ‘사용’의 대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르네상스에도 ‘아르스’의 의미는 제작기술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비록 그 의미가 이전에 비한다면 상당할 정도로 달라졌고, 예술가의 위상 또한 높아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예술의 자율성이 완전히 확립되지는 못했다. 이런 점에서 (단순화의 위험이 있긴 하지만 요약해서 말하자면) 그리스에서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예술은 일종의 제작기술로 간주되었을 뿐 독자성을 지닌 예술적 오브제로 감상된 것이 아니라 “사용”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한다면, 미술사학자 스타니스제프스키Mary Anne Staniszewski가 자신의 저서 Believing is Seeing에서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벽화>나 다 빈치의 <모나리자>를 예술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를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의 자율성이 확보된 것은 18세기에 이르러 가능해졌다. 당시의 이론가인 바퇴Charles Batteux의 분류가 잘 보여주듯이 기술은 이제 ‘기계적 기술’과 ‘아름다운 기술’로 구분된다. 실상 18세기 이후 예술은 기계적 기술이 아니라 아름다운 기술로 인식되는데, 이는 예컨대 “fine art”(파인 아트)라는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18세기를 지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예술은 더 이상 ‘사용’의 차원이 아니라 ‘감상’의 차원에서 이해된다. 달리 말해, 예술은 사용이 아니라 향유와 감상의 대상으로 평가되기 시작한다. 19세기의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은 이와 같은 사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19세기말 인상주의에서 1950년대 추상표현주의 및 색면파 회화에 걸쳐 진행된 모더니즘 미술의 근저를 이루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예술을 위한 예술’이다. 모더니즘 미술에서 예술은 일상과는 다른 그 무엇을 표현하는 것으로 상정되었다. 그런데 모더니즘 이후, 그러니까 1960년대 이후의 현대미술에서 다시 ‘사용’의 의미가 부각된다. 예컨대 팝아트가 제시했듯이, 예술과 일상이 엄격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일상으로, 일상이 예술로 상호적으로 관계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근대에 성립된 예술과 기술의 구분이 다시 희미해져 버린 것이다. 동시대 미술은 예술과 일상, 예술과 기술 등과 같은 엄격한 이분법에서 벗어나고 있는 듯 보인다. 오늘날의 예술에서 근본적인 물음, 곧 “모든 것이 다 예술이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던져지는 것은 이런 점에서 볼 때 당연한 것이리라.

이번 전시의 주제 <예술을 사용하다>는 일시적이거나 유행에 따른 담론을 반영한 전시가 아니라, 앞서 간략하게 살펴본 예술의 역할과 그 함의를 생각하게 하는 전시이다. 예술은 본래 감상이 아니라 ‘사용’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예술적 증거는 충분히 존재한다. 다양한 변화와 변용이 있어왔지만, 예술에는 항상 ‘사용’의 의미가 어떤 식으로든 덧붙여져 있다. 그러기에 오늘날 다시 예술에 반영된 ‘사용’의 차원을 생각해 보는 것은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일이기도 하다. 난해하고 값비싼 작품만이 현대미술의 전부는 아니다. 현대미술은 ‘사용’의 관점에서 얼마든지 새로운 자신의 지평을 넓혀갈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일상의 미학을 실천할 수 있다. 물론 “예술을 사용한다”가 예술을 직접적으로 일상에 적용해야 한다는 당위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실상 예술을 사용한다는 것은 일상의 생활세계에서 예술의 언어를 발견하고 이를 다양한 예술적 작업을 통해 실천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사용’의 차원에서 이해되는 예술은 또 다른 방식으로 삶과 세계를 드러낸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네 명의 작가들(오재우, 이리라, 차재영, 필승)은 비록 작업방식이나 태도에서 서로 그 궤들을 달리하고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예술을 사용한다는 말에 내재된 문화적 함의를 충분히 반영한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그러기에 작가들의 작업을 단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차원이 아니라 예술의 사용이라는 실천적인 차원에서 파악할 때, 보다 풍요롭고 흥미로운 미학적 요소들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조형적으로만 본다면 얼핏 실험적이고 설치적인 작품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작업 전체의 양상을 충분히 고려한다면 전시된 작품들이 예술과 사용의 상관적 관계를 조형적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을 사용한다는 것은 예술의 고유한 의미를 약화시키거나 예술의 메타포metaphor를 배제하자는 것이 아니라 예술과 사용, 그 사이에 존재하는 미학적 변용을 드러내는 일이다. 이번 전시는 예술을 단지 향유나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세계에서 미적으로 체험되는 ‘활동’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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