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전 시 명 : 2016 모란미술관 기획 <돌 조각의 방법>展
▌전시기간 : 2016.8.19~9.30
▌전시장소 : 모란미술관
▌참여작가 : 김성복, 오채현
▌후 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돌 조각의 방법 展 

In the manner of Korean Stone Sculpture

조은정(미술평론가)
Cho, Eunjung(Artcritic)

인류가 사용한 가장 오래된 물질 중 하나인 돌은 단단한 성질과 시간의 집약에 의한 결과물이라는 형성 과정을 통해 영구성을 상징한다. 그리하여 돌은 강력한 시각적 존재성과 영구성으로 인해 무형의 힘을 형태로 드러내어 영원화 하는 방법에 동원되었다. 거석문화나 금석문金石文이 그러한 범주에 속하며 돌조각 또한 그러한 이유로 제작되어 왔다. 돌의 ‘강함’은 권력의 상징이 되기도 했으며 그것이 형태를 띠고 있을 때 더욱 강력한 힘을 가졌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가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에 세워졌을 때, 그것은 공화국을 세운 시민들의 승리의 상징이었다. 40년 동안이나 완성되지 못한 ‘악마의 돌’을 지배한 결과였을뿐더러,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위원회가 추진한 교회의 장식으로서가 아닌 위대한 시민들의 집합소인 공공장소에 위치했던 것이다. 작품이란 그것을 주문하고 제작한 주체와 함께 장소에 의해서도 역사적 의미가 다르게 작동한다. 석조미륵불상이 사찰 경내에 서면 불교의 예배대상이 되고, 야산에 솟아있으면 민간의 기복대상이 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조각사에서 ‘돌’은 한국 조각의 정체성을 의미해왔다. “중국은 소조塑彫의 나라, 일본은 목조木彫의 나라, 한국은 석조石彫의 나라”로 지칭된 것처럼 풍토와 재료선택의 용이성에 의해 국가구성원의 민족성마저 언급되어왔다. 하지만 한국 조각의 정체성을 논의하는 일은 글로벌리즘에 위배되는 것으로 간주되곤 한다. 근대의 탈각되어 마땅할 할 대상인 민족주의의 모습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탈민족주의가 EU공동체의 변화하는 정치적 성격으로 인해 허구였음이 입증되었다. 그리하여 돌조각은 전통의 상징으로서, 돌을 선택한다는 것만으로도 전통을 해석하는 것이 그리 곤궁한 일은 아닌 것이 되었다. 특히 대리석이 아닌 “지천에 널린”으로 수사되는 화강암을 선택하였을 때 그것은 정당화된다.

한국조각사에서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은 불상조성의 주체가 일반 서민계급까지 확대되었을 때, 조각 수법이 ‘조잡한’ 조각들이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민중에게 퍼진 신앙은 기복적인 면이 강해서 조잡한 혹은 소박한 돌조각으로 수사修辭되며 기복을 담은 대중의 욕망을 상징하게 되었다. 이들은 입체로서의 완벽한 조형감보다는 한눈에 형상이 파악되는 방식을 추구함으로써 결국 전면성을 띠게 되고 회화적 평면성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민화民畵와 상통하는 표현방식에 이르렀다.

〈돌의 방법전〉은 이러한 돌을 다루는 방법의 전통에 의거하여 한국 현대조각에서 돌조각이 의미하고 소통되는 방식, 즉 상징체계에 대한 고찰이다. 조각에서의 재료를 다루는 기법이 작가 양식인 점에 기반하여 한국 현대조각에서 돌조각의 정체성에 접근하고자 한다.

상징과 리좀 체계로의 진입

현대 ‘한국의 돌조각’이라는 명칭은 전통을 상기시키고 화강암을 재료로 하였다면 그것은 한국적인 표현의 범주에서 파악되기 마련이다. 게다가 호랑이를 소재로 하였을 때, 그것은 해학諧謔과 민초民草의 삶을 드러내는 친근한 민화의 위치와 대칭적인 자리에 선다. 호랑이라는 주제만으로도 민족적 무의식의 의미망 아래 우리 공동체 내면에 위치한 무의식과 연계되어 그것의 사회적 위치는 당연시 된다. 김성복, 오채현 두 작가는 동시대의 조각가로서 돌을 매재로 하여 주제와 기법에서 유사성과 상이성을 보유하였다. 풍자諷刺와 해학의 상징으로서 호랑이를 소재로 한 두 작가를 만나는 것은 우리 시대 리좀과의 조우이다.

자연의 형상을 드러내거나 동물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들의 작품은 형태적으로 모사模寫와 재현再現으로 인지되곤 한다. 전통적인 의미의 ‘재현’은 진리의 재현, 실재의 재현이기에 이들의 작품은 재현과 모사라는 영역 넘어 상대지점에 위치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결국 열려진 구조로서 리좀의 영역에 이른다. 리좀은 모든 차원들 안에서 연결 접속될 수 있고, 끝없이 변형될 수 있다. 리좀의 선線은 유연하며, 의지나 모든 우연적 뒤틀림에 열려 있으며, 유기적 배치와 닫힌 구성물들의 엄정하고 형식적인 모델에 대립된다.

호랑이 혹은 아미타불이라는 형태를 도상의 의미를 떠나 하나의 전통적인 의미의 ‘재현’에 둘 때, 이 두 작가의 이미지들은 리좀의 상징이 된다. 무의식 혹은 전통이라는 하나의 체계 안에서 이들의 작품을 논한다면 전통을 규정하는 오래된 권력의 모습에 다름아닐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지적한 것처럼 “정신분석은 무의식을 나무 구조에, 위계적 그래프에, 요약해서 설명하는 기억에, 남근이나 남근-나무 같은 중심 기관에 복속시킨다. 정신분석은 무의식이라는 독재적 개념 위에 자신의 고유한 독재 권력을 정초하고 있는 것”일 때문이다. 따라서 호랑이 혹은 아미타불 등의 도상이 전통으로만 읽혀질 때 그것은 예술의 한 죽음의 형태, 소재주의에 머물게 된다. “리좀이 차단되어 나무처럼 되면 모든 것은 끝장이고 이제 욕망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생기지 않는다. 욕망이 움직이고 생산하는 것은 언제나 리좀을 통해서니까. 욕망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면 반드시 내적인 추락들이 생겨, 욕망을 좌절시키고 죽음으로 몰고 간다. 하지만 리좀은 외부적이고 생산적인 발아를 통해 욕망에게 작동한다.”는 논의에 따라 분석될 때 이들 작가가 제작한 호랑이가 조선시대 어느 화면에서 나왔을법한 모습으로 수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지금 여전히 작동하는 원리를 파악할 수 있다.

말을 넘어선 의미들

선가禪家에서는 언어, 말이란 끊임없이 얽히는 것이므로 그 존재를 ‘갈등’에 위치시킨다. 언외언言外言, 언어를 초월하는 선불교의 입장은 얽힘의 언어를 초월하고자 하는 것이다. 선禪에서 일컬어지는 논리적 분석이란 갈등을 야기시킬 뿐이므로 삶, 일상생활에서의 깨달음을 추구한다. 육조 혜능선사가 일군 나무꾼 삶과 오도송悟道頌에 얽힌 일화는 이러한 선불교의 구조를 가시화한다.

마치 선문답처럼 현대미술에서는 전통적인 진리를 드러내는 순간 재현의 논리를 상실한다. 재현이 동일성이나 유사성에 기반한 외형의 것이 되어버렸을 때, 이른바 유일한 중심, 단일한 소실점을 가진 관점, 잘못된 깊이만을 가짐으로써 모든 것을 매개하지만 어떠한 것도 동원하거나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통일성의 원리 아래 진리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심을 향하고 뿌리에서 발원된 나무 구조를 벗어나는 방법은 일탈, 역설, 무의미, 가로지르기, 무위, 탈주 등이다. 서양에서 비극이나 아이러니는 새로운 가치인 익살과 유머로 대치되었는데 의미와 무의미의 공외연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익살, 유머, 해학과 같은 요소들은 표면들과 안감들, 유목적 특이점들의 기법이며, 언제나 자리를 옮기는 우발점의 기법으로 명시된다. 그것은 언제나 순수 사건의 ‘할-줄-앎(savoir-fair)’이다. 모든 지시작용, 기호작용, 현시 작용은 유보되고 모든 깊이와 높이는 소멸된다.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현자는 표면에서 순수사건들을 찾는다고 말했다. 이 익살의 모험, 표면을 위한 심층과 상층의 이중적 파기는 선禪과 같은 맥락을 유지한다.

불입문자不立文字는 언어를 넘어선 지점이며 사건들의 계열화에 역설과 무의미를 도입함으로써 새로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여는 리좀의 방식이다. 경전經典이 아닌 일화逸話가 중요한 선문답禪問答은 익살이나 해학의 형태를 지닌다. 들뢰즈에 따르면 풍자와 같은 방식은 원본과 복사품만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생성의 세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다. ‘존재’가 아닌 ‘생성’을 사유함으로써 ‘거대한 부정’이 아니라 ‘위대한 긍정’의 윤리학, ‘부정적 변증법’의 무거운 아이러니가 아니라 가벼운 유머, 생산과 접속의 논리학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풍자나 해학은 또한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숭배와 경건함의 내용을 담고 있다. 웃음의 여유와 숭배의 경건함이 공유되는 풍자와 해학의 세계는 우리 삶에 깊숙이 관여되어 있다. 서구의 세계관에서 나무와 같은 체계 안에서 경시되던 유머나 가벼움, 풍자와 해학은 생의 미덕으로 간주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민화나 미륵불 같은 조형 세계는 이미 우리 내부에 풍자와 해학이 삶의 원소임을 천명하고 있다. 결국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존재는 이미 도주에 성공하였다는 말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우스갯소리 안에 당연화하여 온 진리임을 알 수 있다. 유목이나 탈주는 단지 주어진 기존법칙, 공통감각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의 감각을 배우는 것이고 그것을 일러 우리는 익살과 해학이라 명명한다. 그리고 이는 한국미술사의 면면한 전통 중 하나이다.

결합하고 해체하는 것들에 대하여

호랑이는 벽사辟邪, 능陵 석물로서 수호의 기능을 수행하는 존재로 인지되어 왔다. 수호의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무섭거나 다소 근엄해보이던 호랑이는 ‘까치호랑이’에 이르러서는 맹수의 무서움이 제거된 친근한 모습이다. 심지어 다소 멍청해 보이기조차 하는 호랑이는 호환虎患이 많던 시대,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발현이다. 의미를 해체하고 기능을 멈춰버리는 이러한 호랑이의 해학적 형태는 현대사회에서 중심을 해체하는 리좀의 구성과 닮아 있다. 그것은 과학과 물신의 사회에서 해학과 유쾌함으로 무장함으로써 ‘웃음의 여유와 숭배의 경건함’을 공유한 상징으로 받아들여진다. 익살과 해학이라는 역설의 감각은 전통이자 나무와 같이 증식하는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앞뒤가 바뀔 수 있고, 무한성장할 수 있다. 중심을 해체하고 증식시키는 방식은 입구와 출구가 여러 곳을 향할 수 있다.

김성복과 오채현의 조각은 이러한 중심을 벗어난 증식, 중심을 해체하는 유머와 숭배의 경건함을 논하게 한다. 그들의 호랑이는 형태에서의 원본과 변용 그리고 제작방식의 의미 체계 안에서 다양한 해석과 이해의 장을 열어젖힌다.

오채현의 호랑이는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벌려진 반달 같은 입이 먼저 시선을 잡는다. 가로로 길게 튀어나온 눈과 코, 이마에 선명한 왕王자 등 단순하지만 친숙하여 귀엽기까지 한 얼굴 전면을 보여준다. 전반적으로 입방체를 상상하게 하는 편편한 돌에 음각陰刻 선을 그어 호랑이의 털 문양을 표현하고 있는 그의 작품은 전체적으로 괴량감이 넘친다. 커다란 돌을 잘라내어 대강 그린 호랑이를 거친 손으로 잘라낸 옛 석수의 감각처럼 소박함을 가장한다. 그것은 감각에 의해 완성된 시뮬라크르이다. 대개 전통을 고수하고 민화에서 온 도상으로 확신하는 이 호랑이들의 원형을 찾아내어 대조하는 것은 쉽지는 않다. 언뜻 해태상의 특징을 담은 오채현의 호랑이는 돌의 거친 표면을 자신의 작가적 표현양식으로 삼고 있어 세월을 조각에 담는다. 그리하여 시공을 넘어선 전통의 위치에 이 현대작가의 작품이 위치한다.

아미타불, 미륵불 같은 불교조각상은 현대 한국의 불교조각이 그러한 것처럼 그 또한 전통의 특정 양식을 차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편안하고 친근감 넘치는 미소가 가득한 아기부처의 얼굴은 작가가 태어나고 자란 경주 석불상을 상기시킨다. 북제주北齊周 양식에서부터 신라불상으로 확립된 귀엽고 포동포동한 얼굴의 불상은 부드럽고 친근한 불교의 모습이며, 그것은 인간의 감성에 기반한 현대불교의 얼굴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핸드폰을 든 손, 늑대, 먹이를 찾는 해오라기, 담배를 물고 커피를 든 남성, 출산하는 여성 등 일상의 모든 것들이 마치 사찰 법당의 장엄구들처럼 조각되어 벽면에 부착된다. 일상이라 불리우는 이 하찮은 풍경들을 기록하고 남기는 것은 가장 낡지 않을 것, 그것은 바로 그 하찮은 일상의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성복의 호랑이는 능묘석수陵墓石獸라는 전통 석수石手의 손에 의해 조성된 도상에 근거한 듯이 보인다. 그는 전통 장인에 의해 형성된 양감과 얼굴의 호랑이를 재현해낸다. 몽실몽실한 몸체는 울근불근한 근육이 지나가는 듯하고 부리부리한 두 눈에 좌우로 뾰족한 송곳니가 드러난 입의 표현은 그러한 심증을 굳히게 한다. 그의 호랑이는 물론 완벽한 능묘 석수의 재현은 아니다. 재현이란 욕망의 형상화로서 이데올로기적이기 때문이다. 그가 선택한 것은 능묘석수의 이미지일 뿐이다.

그의 석수로서 호랑이는 벽사의 의미를 떠나 욕망과 결합한다. 이른바 감투라 지칭되는 紗帽를 쓴 호랑이가 등장한다. 도깨비방망이라는 언어는 형상화하여 호랑이와 결합한다. 꼬리에 도깨비 방망이를 단 호랑이는 2층, 3층이 되어 이중 삼중의 욕망이 결합하고 두 개, 세 개의 꼬리가 달려 극대화를 향해 달린다. 그렇다면 그의 호랑이는 기복祈福일까? 그는 이러한 호랑이를 일러 〈신화〉라 이름 지었다. 롤랑 바르트는 “어떤 사물에 점점 이야기를 붙여서 눈사람처럼 확대되어 가는 상황”을 신화라고 하였다. 그의 호랑이는 이제 현대인의 멈추지 않는 욕망에 대한 경고로서 자리 잡는다. 예술이란 우리 삶의 반추를 도모하는 것이라는 전제에서는.

굳게 발을 내딛는 인간이 형상화한 〈바람이 불어도 가야 한다〉는 분명 그의 작품세계가 현대인의 삶에 대한 성찰임을 드러낸다. 무거운 산을 두 팔에 들어 옮겨야 할 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원 안에 갇혀있을 때조차 굳건히 한 발을 내딛는 모습은 가만히 앉아 사유할 수 없는 현대인의 삶을 은유한다는 점에서 반가사유상의 상대 지점에 위치한다. 그 현대적 형태가 사실은 도상의 반복이며 오래된 것임을 때때로 단청이 입혀진 형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통으로만 해석되고, 키치적 감각으로 소비되던 호랑이 조각을 현대미술의 담론 안에서 재해석하고 그 장을 확장시키는 것은 전통을 현대미술의 영역으로 확정시키는 전략이다. 인간 형상과 부처의 형상이 시공을 초월하고 도상을 은근히 넘어서 드러나는 경계를 넘는 형태들은 일견 친근함으로 인지된다. 돌의 형태를 거스르지 않고 그 안에서 형상을 끄집어낸다는 아주 오래된 신화적 예술의 단계를 이들의 작품을 설명하는 도구로 삼기도 한다. 장인적 노고와 익숙한 형태를 특성으로 한다면 이들의 작품은 그저 그런 것이다. 여느 작가들의 많은 작품들이 그러한 특성을 담보하고 있으므로.

이들 작품의 위치는 세계화와 글로벌리즘에 잠식된 현대미술의 정체성을 전통에 둠으로써 균열될 수밖에 없는 현대성과 동시대성을 극복하는 시도에 있다. 그리고 전통이라는 위대한 나무의 뿌리에서 발원하여 가지로 올라 통일된 세계를 보이는 것이 아닌 곳에 있다. 이들의 전략은 리좀의 구조이다. 익숙한 벽사의 호랑이에 전통의 해학을 넘어서 욕망을 결합하고, 단청 장엄莊嚴을 통해 사람 자체, 그 육체가 사원寺院임을 그 안에 정신의 부처가 모셔져 있음을 일러준다. 현대인의 감성을 가진 몸을 가진 부처와 담론 안에서 해석되는 돌로 만든 조각들, 그 가장 원초적이며 즉각적인 형태야말로 리좀이며 사방으로 자라나는 가능성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호랑이를 이름 짓기 혹은 호랑이 되기야말로 서양식 권력지權力智에서 벗어나 선가적 사유의 장을 펼쳐 무한증식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호쾌한 장場이다.

가장 원초적인 조각의 자료인 돌을 재료로 한 조각은 오늘날 자연을 소환하는 한 장치이다. 작가의 노동을 담보로 하여 형성된 형태와 질감은 표면의 균일성을 통해 새로운 감각의 주름을 작동시킬 것이다. 오래된 것으로서의 돌조각, 전통조각의 영역에 있던 호랑이와 불교적 도상의 조각들은 현대미술의 원형으로서 재해석되고 소통의 단초로 작동한다.